585화. 되찾는 걸로는 부족하지. (5)
“……이년이?”
원강의 얼굴에 노기가 차올랐다.
쉽지 않은 상황에 처하긴 했으나 어쨌든 그는 녹림칠십이채의 채주다.
비록 저 광우도 고홍만큼 유명하지는 않다 해도, 무자염라(無慈閻邏) 원강(袁江)이라고 하면 그가 있던 오대산 일대에서는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칠 만큼 악명이 자자했다.
그런데 그의 앞을 이 어린것이 가로막는다고?
“네년 따윌 상대할 시간 없다. 비켜라!”
“안 돼.”
“……뭐?”
유이설이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로님은 너 따윌 상대할 만큼 한가하시지 않아.”
나직하고 고저 없는 목소리에 원강의 얼굴이 삽시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 주제도 모르는!”
더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열은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수적 우위로만 전열을 유지하는 데엔 분명 한계가 있었다.
원강은 지체 없이 노호성을 내지르며 유이설에게 달려들었다.
콰아아아아아아!
골패로 녹림의 채주 자리를 따진 않았단 걸 증명하듯 그의 도에 어마어마한 경기가 실리기 시작했다.
톱처럼 날이 삐죽삐죽 서 있는 거치도에 광포한 경기까지 실리니 눈으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설 만큼 공포스러웠다.
하지만 그 전면에 선 유이설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파앗!
거치도가 그녀가 있었던 자리를 가르고 지나갔다. 휘둘러지는 풍압만으로도 바닥이 뒤집히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하나 아무리 강한 공격도 상대에게 닿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는 법. 유이설은 그저 두 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만으로 상대의 도격을 완벽하게 피해 냈다.
“흐읍!”
물론 원강도 일격으로 끝날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가 쉽사리 방심할 만큼 멍청한 산적이었다면, 적웅채의 채주 자리까지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콰아아아아아아아!
거친 도기의 폭풍이 유이설의 전신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기세로 몰아쳤다. 하지만 유이설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도를 정확하게 응시했다.
이런 광경을 눈앞에서 본다면 우선 겁을 집어먹어야 마땅할 텐데, 그녀의 마음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겨우 이 정도로 평정을 잃기에는 그녀가 겪어 온 것이 지나치게 많았다.
탓.
바닥을 박찬 유이설은 흙먼지로 뿌연 도기의 폭풍 사이로 곧장 뛰어들었다.
그리고.
카앙! 카앙! 캉!
연이은 세 번의 검격이 불규칙적으로 휘몰아치는 도기 사이로 틈을 만들어 냈다.
스륵.
흡사 신기루나 환상처럼 그 틈으로 파고든 유이설은 검을 똑바로 뻗어 원강의 목을 노리고 쇄도했다.
‘헉!’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란 원강이 기겁하여 몸을 뒤집었다.
쿠웅!
얼마나 놀랐는지 제대로 착지도 하지 못해 엉덩이가 순간적으로 바닥에 닿았다 떨어졌다.
“…….”
이마에서 절로 식은땀을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걸 뚫고 들어왔다고?’
이건 가능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가 무적의 고수라 지금까지 패배한 적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도가 무력화 된 적이야 지금까지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그를 이겼던 그 어떤 놈도 이 과격하게 휘몰아치는 도기의 폭풍 안으로 뛰어들진 않았다. 생각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그런데 그걸 그의 반도 채 살지 않은 것 같은 어린 검수가 저질렀다.
‘겁이라는 게 없나?’
하긴 그가 어찌 알겠는가?
지금 자신이 상대하는 이가 마교의 주교가 내뿜는 마기를 정면에서 갈랐고, 주교의 팔다리를 반쯤 죽어 가는 몸으로도 잡고 늘어졌던 인물이란 것을.
식은땀을 흘려 대는 원강을 향해 유이설이 재차 검을 겨누었다. 그리고 여전히 표정이랄 게 없는 얼굴로 생각했다.
‘달라.’
확실히 모든 면에서 부족했다.
마교도들은 실력은 이자보다 부족할지 모르지만, 제 목숨을 버려서라도 상대의 몸에 상처 하나라도 더 내고 죽겠다는 독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마교의 주교는 유이설조차 영혼이 떨릴 만큼의 공포를 선사했다. 실로 악의 종주 같은 이였다.
그런 이들을 상대해 온 유이설에게 원강의 도가 두려움을 안겨 준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사람은 경험으로써 성장한다.
유이설은 그 말을 지금 이 순간 뼈저리게 실감했다. 만약 주교를 상대해 보지 못했다면, 동일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지금처럼 평정을 유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겪는다.’
그 경험들이 그녀의 검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 게 분명했다.
“……대체 어떻게 이리 강한가 했더니, 화산 놈들은 하나같이 겁 대가리를 상실한 모양이지.”
원강이 입꼬리를 뒤틀며 이죽거렸다. 유이설은 그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말이 많아.”
“……이 개 같은 년이!”
노호성은 원강이 내질렀지만, 움직인 건 유이설이었다. 그녀의 몸이 엿가락 같은 잔상을 남기며 원강의 전면으로 파고들었다.
“흐아아압!”
이에 원강의 도가 그녀의 허리를 일도양단할 기세로 거세게 휘둘러졌다.
하나.
카강.
허리 옆으로 비스듬히 검을 세운 유이설은 도가 날아든 순간 맞받아쳐 아래로 흘려 냈다. 그리고 곧장 몸을 가볍게 빙글 돌리며 도를 타고 넘었다.
‘뭐, 뭣?’
신기에 가까운 체술이었다. 놀란 원강이 두 눈을 부릅뜬 순간, 그녀의 검이 환상처럼 흔들리며 수십 개의 검영을 만들었다. 곧 원강의 전신이 뒤덮였다.
중병을 쓰는 그가 코앞에서 피어난 검영들을 동시에 막아 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는 결국 도를 들어 몸의 중심을 막으며, 뒤로 몸을 날렸다.
서걱! 서걱! 서걱!
급소는 어떻게든 막았지만, 두꺼운 그의 팔뚝이며 아름드리나무 같은 허벅지는 곳곳이 길게 갈라지며 피를 흩뿌렸다.
“끄으윽!”
신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도면에 검이 부딪쳐 오는 소리가 귀를 섬뜩하게 파고들었다.
‘어떻게…….’
검의 날카로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속도?
그런 건 부차적인 문제다.
정말로 그를 경악하게 만든 것은, 그녀의 검이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급소를 노리고 날아든단 점이었다.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의지는 전혀 보이지 않는, 오로지 상대를 죽이기 위한 검.
물론 정파라 해서 살검을 휘두르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아직 솜털이 보송한 애송이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살검을 날린다는 사실 자체가 원강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세상은 화산을 잘못 알고 있다!’
이런 괴물들이 화산 안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가 알았더라면 진즉에 무슨 수라도 썼을 것이다.
“크아아아앗!”
거리를 벌린 원강은 두 눈에 핏발을 세우고 도를 들어 올렸다.
상대가 파고들 틈을 주지 않고 힘으로 승부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건 크나큰 오판이었다. 화산의 검수를 상대하는 이는 결코 그들에게 거리를 주어서는 안 된다.
파르르.
유이설의 검 끝이 기다렸다는 듯 부드럽게 떨렸다. 이윽고 붉디붉은 매화가 줄기줄기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원강은 혼이 빨려 나가는 사람처럼 입을 벌렸다.
매화는 흡사 살아 있는 것처럼 하늘하늘 허공을 유영했다. 그 틈에도 끊임없이 불어난 꽃잎은 유이설의 전신을 뒤덮는다 싶더니 이내 원강의 시야를 가득 메워 버렸다.
환상이다. 그래, 이건 환상이다.
하지만 실체와 구분할 수 없는 환상은 존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서선 원강은 악에 받쳐 도를 움켜잡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괴성을 내지르며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거센 풍압이 날아드는 매화를 죽어라 밀어 내었다. 하지만 아무리 밀어 내고 찢어발겨도 섬뜩하게 아름다운 꽃들이 계속해서 피어났다.
매화의 숲에서, 그는 광인처럼 도를 휘둘러 댔다. 부수고 부숴도 끝을 모르고 날아드는 꽃잎을 상대로.
‘이, 이럴 리가 없다!’
그는 녹림의 채주다. 녹림왕에 올랐어야 할 몸이다.
정파의 이름 높은 고수도 아닌, 한낱 화산파의 어린 여검수의 손에 패할 리 없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은 절대 벌어져선 안 된다!
“죽어어어어어엇!”
경기를 하며 발악처럼 허공을 가르던 그의 도는 조급함에 쫓겨 일순 날카로움을 잃었다.
그리고.
파아아아앗!
날카롭게 벼려진 유이설의 감각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흩날리는 매화 속에서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솟아오른 유이설의 검이 원강의 목을 향해 빠르게 쇄도했다.
“큭!”
원강은 자세가 흐트러진 와중에도 도를 들어 막아 냈다. 아니, 막아 보려 했다.
빙글.
하지만 빛살처럼 날아들던 유이설의 검은 그 도를 가볍게 타넘고 배는 더 빠른 속도로 원강의 목을 파고들었다.
서걱!
“…….”
원강은 두 눈을 한껏 부릅떴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부릅떠도 그는 유이설의 자취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그의 목을 베어 내고, 죽어 가는 몸을 스쳐 지나간 뒤였다.
고개를 돌려 그녀의 뒷모습을 확인하기엔 그에게 남은 삶이 너무도 짧았다.
‘그 빠른 검에…… 변화를…….’
푸우우웃!
반쯤 베인 그의 목이 벌어지며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시야가 점차 흐릿해지고 몸에서 힘이 급격히 빠졌다.
‘검귀…….’
자신의 겪고 있는 상황이 무엇인지 이해한 원강이 생에 마지막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털썩.
거대한 몸이 쓰러졌다.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땅에 아무렇게나 자라난 풀 사이로 스며들었다.
“채, 채주!”
“채주우우우우우우!”
원강이 목숨을 잃는 광경을 지켜본 산적들이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 비명은 채주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비명이 아니라 마지막 비빌 언덕이 사라진 이들의 공포가 어린 비명이었다.
파앗.
검에 묻은 피를 무심히 털어 낸 유이설이 싸늘하게 산적들을 노려보았다.
“…….”
정적이 맴돌았다. 유이설을 바라보는 산적들의 얼굴은 공포로 하얗게 질렸다.
오대산에서는 왕과도 같던 무자염라 원강이 바로 저 검수의 손에 제대로 반항조차 해 보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 압도적인 차이는 그들의 마지막 남은 한 줄기 의욕마저 꺾어 버리기에 충분했다.
“전투는 대가리부터.”
청명의 지론을 깔끔하게 수행한 유이설이 백천에게 시선을 주었다.
백천이 씨익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적의 채주를 쓰러뜨렸다!”
그리고 새하얗게 질린 산적들을 검 끝으로 겨누었다.
“항복하지 않는 이들을 주살하여 대가를 치르게 해라!”
“예!”
끝도 없이 사기가 오른 화산의 제자들이 너나없이 기세를 높이며 공격했다.
“히이이익!”
“이 개 같은 놈들! 내가 원귀가 되어서라도……. 끄윽…….”
아직 반항할 의지와 여력이 남은 몇몇마저 무력하게 쓰러지니 공포는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하, 항복! 항복하겠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무기를 버려라, 이 미친놈들아! 빨리 무기를 버려!”
한 식경도 지나지 않았을 만큼 짧은 전투였지만, 쓰러진 산적의 수는 백을 족히 넘었다. 이대로 전투를 계속한다 해도 그 결과는 눈에 보듯 빤했다.
기세에서 밀리고, 우두머리마저 잃은 이들에게 남은 거라고는 죽음이나 항복뿐이었다. 이런저런 계산을 할 머리가 되지 않는 이들이라 해도 제 목숨 귀한 것만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산적들이 일제히 무기를 내던지고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화산의 승리였다.
만인방 무력대나 대별채 야차당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과는 결이 다른 성과였다.
온전한 힘을 갖춘 하나의 세력을 화산의 이름으로 완벽히 이겨 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전투의 성과와 승리에 대한 자부심이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장로님.”
“음!”
주먹을 쥐었다 펴며 흥분된 가슴을 애써 가라앉히던 현상이 목청을 높였다.
“이 전투는 우리 화산의 승리다! 적의 무공을 폐하고 포박하라!”
“예!”
이견의 여지없는 깔끔한 완승이자 대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