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4화. 되찾는 걸로는 부족하지. (4)
적웅채와 맞서 싸우는 화산의 제자들. 그 뒷모습을 지켜보는 현상의 얼굴에 묘한 감회가 어렸다.
‘항상 이런 광경을 꿈꿔 왔었지.’
빛나는 매화검을 들고 악적들을 물리치는 모습. 화산의 이름으로 협의를 지키고, 사문의 명성을 떨치는 모습.
꿈에서도 바라 마지않던 모습이 바로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물론 꿈꾸던 것과 아주 조금은 다른 형태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사형.”
“안다.”
현영의 목소리에 현상이 단호한 얼굴로 답했다.
‘주책을 부렸군.’
지금은 감회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챙!
현상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그의 주위를 지키던 운자 배들도 일제히 검을 뽑았다.
“가자꾸나. 늙은 손이라 해도 한 손 거드는 데는 무리가 없겠지.”
“아이들 앞에서 검을 휘두르려니 이거 좀 난처합니다.”
말로는 앓는 소리를 했지만 운자 배들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저 아이들 중 몇몇은 이미 그들을 뛰어넘었다. 아니, 오늘 저들이 펼쳐 내는 검세를 보고 있자니, 생각보다도 더 많은 이들이 이미 그들보다 더 강해졌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부끄러울 건 없었다.
제자가 자신보다 강해지는 것은 모든 스승이 바라고 또 바라는 일이니, 되레 자랑스러울 뿐이었다.
“그래도 우리가 화산의 어른이다! 아직은 후대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어라!”
“예, 사숙!”
현상을 필두로 한 운자 배들이 경쾌하게 달려 나가 전장에 합류한다.
더없이 웅혼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역사적인 광경에 끼지 못하는 두 사람만이 뒤에 남았다.
청명과 현영이 서로를 향해 슬쩍슬쩍 곁눈질했다.
“…….”
“…….”
미묘하고 어색한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현영이었다.
“……너는 여기서 뭐 하느냐?”
“아니, 그건 제가 드릴 질문인 것 같은데…….”
청명의 묘한 눈빛을 받은 현영이 낮게 헛기침을 한다.
“내 무위야 빤하지 않으냐. 자존심 세운다고 나대다가 칼이라도 맞으면 걱정만 끼칠 몸이니, 괜히 방해하지 않고 뒤에서 구경이나 하는 게 낫지.”
“저도 어설프게 끼었다가는 쟤들이 잡을 놈들 뺏어 먹는 거나 마찬가지라 그냥 구경이나 하는 게 나아요.”
“그래?”
“예.”
“흐으으음.”
슬쩍 고개를 끄덕인 현영은 품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전병 좀 먹겠느냐?”
“헤헤. 여윽시 준비성이 철저하시네요.”
청명은 그가 내민 전병을 받아 아작아작 씹으며 전장을 바라보았다.
“거 시원하게도 싸우네.”
확실히 지금의 화산은 과거와 미묘하게 느낌이 달랐다. 본디 같은 검술이라 해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개인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화산의 검은 과거 그가 매화검존이던 시절에 비해 좀 더 빠르고, 조금 더 실리적으로 바뀌었다.
좋게 말하면 실리적인 거고, 나쁘게 말하면 조금 더 살기가 짙고 사파스럽다.
‘뭐, 어쩔 수 없지.’
가르치는 사람이 청명이니 별수 있겠는가?
청명은 화산 역사상 가장 많은 전투를 치렀고, 가장 많은 피를 뒤집어썼던 사람이다. 마교와 전투를 그만큼이나 치렀으니 그의 검에 좀 더 살기 짙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저 검을 상대하는 입장에서야 욕이 절로 나오겠지만, 그건 청명이 알 바가 아니었다.
‘전통은 얼어 죽을. 내가 전통이다.’
과거를 무조건적으로 답습하는 것이 진리는 아니다. 조금 변하고 달라진다 해도 화산의 혼만 살아 있다면, 그건 여전히 화산의 검일 것이다.
청명은 전병을 우물거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와중에도 그의 두 눈은 상황을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었다.
‘느려.’
곽회의 눈에 정광이 어렸다.
녹림이라는 이름은 수도 없이 들어 보았다. 그리고 적웅채라는 이름 역시 몇 번쯤 들어 본 적이 있다.
중원의 수많은 산들을 지배하는 사파의 거두.
신주오패라 불리는 이들.
과거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어마어마한 곳이 바로 녹림이다. 하지만 막상 직접 상대해 본 녹림도들은 생각만큼 강하지도, 정교하지도 않았다.
‘이들이 약한 게 아니야.’
화산이 강한 것이다.
‘평소에 실감할 수 있었을 리가 없지.’
그들은 항상 저 괴물 같은 청명이 놈의 검을 상대하며 굴렀고, 순식간에 그들을 앞서 나간 오검들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체력의 한계가 찾아올 때까지 거듭 수련하고, 오기와 근성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갈고닦았음에도 앞서 간 이들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고 오히려 벌어지기만 했다.
그런데 무슨 수로 스스로를 강해졌다고 느끼겠는가?
강함이란 애초에 상대적인 개념이다. 강함을 실감하기 위해서는 잣대가 되어 줄 상대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들의 잣대는 너무도 높았고, 또 거칠었다.
파아아아앗!
뻗어 나간 곽회의 검이 거칠게 날아드는 도의 빈틈을 매섭게 파고들었다.
푸우욱!
깔끔하게 상대의 어깨를 찌른 검이 재빠르게 회수되었다. 그리고 곧장 상대의 가슴을 내리그었다.
‘느려 터졌어.’
조걸의 검에 비하면 이 도는 멈춰 있는 것 같다.
윤종의 정교함에 비하면 투로조차 제대로 좇지 못하는 몸부림에 불과하고, 백천의 검이 가진 웅혼함에 비한다면 갈대가 휘청거리는 것처럼 맥없이 흔들린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같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도무지 질 것 같지 않아!’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이가 그뿐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파아아앗!
옆에서 검을 휘두르는 사형제들의 검에도 조금씩 더 자신감이 어리기 시작한 것이다. 검 끝이 가면 갈수록 안정화되었고, 표정에도 단호한 확신이 어렸다.
‘우리는 강해졌다!’
그 숱한 시간 동안 한 번도 제대로 확신할 수 없었던 일.
화산의 명성이 높아지고 과거와는 다른 곳이 되어 간다고는 하나 그건 청명을 비롯한 오검들의 공이지, 그들의 공이 아니었다.
화산이 하루하루 달라지는 동안 그들이 한 것이라고는 산을 지키며 수련을 버틴 것뿐이었다. 만인방을 막아 냈다고는 하지만, 결국엔 그 역시 그들이 아닌 저 오검의 성과였단 걸 모를 이가 누가 있는가?
그렇게 쌓여 가던 허탈감과 어찌할 수 없었던 자괴감이 지금 이 순간 눈 녹듯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간의 수련은 헛되지 않았어!’
의심이 확신이 되고, 확신이 자신감이 되는 순간 그들의 매화는 더욱 짙게 피어났다.
“더 밀어붙여!”
백상이 크게 고함을 내질렀다.
검을 쥔 그의 손은 여느 때보다 힘 있고 다부졌다. 물론 이제 검의 끝을 보기로 했던 그 마음은 접었다. 하나 그 역시 화산의 검수. 하루도 검에 소홀한 적은 없었다.
“화산에는 오검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너희가 증명해라! 우리 역시 화산의 한 축이다!”
“예, 사형!”
“예, 사숙!”
모두가 일제히 한 몸처럼 검을 떨친 순간, 수도 없이 매화가 피어났다. 마치 화산의 정경 한 폭을 이곳으로 옮겨 온 것만 같았다.
화산에 있기에 화산파가 아니다.
화산파가 있는 곳이면 그 어느 곳도 화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지금 이들이 검으로써 증명하고 있었다.
“마음은 차갑게, 검 끝은 단호하게. 그리고 언제나 기본을 잊지 않을 것.”
검을 휘두르는 제자들의 사이를 산책하듯 거닐던 외팔의 검수가실로 냉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잊지 마라. 꽃이 피는 곳은 가지이나, 그 꽃을 피워 내는 것은 결국 뿌리다.”
“예, 관주님!”
그리고 얼음장처럼 굳어 있던 그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걸렸다.
이내 오른쪽에 매달려 있던 그의 검이 날카롭게 뽑혀 나왔다.
“본보기가 될 수 있을 만큼 깔끔하지는 않지만, 나도 구경만 할 순 없지.”
운검의 검은 쾌속하고 날카롭게 산적들의 전신을 노리고 들었다.
‘사숙!’
‘사숙조!’
화산의 제자들은 이 모습에 저마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운검은 만인방과의 격전에서 한 팔을 잃었다. 검수가 검을 쓰던 팔을 잃는다는 것은 평범한 이가 두 다리를 잃는 것보다 더 큰일이었다. 극심한 상실감에 시달렸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운검은 지금 그들의 앞에 서서 다시 한번 그들을 이끌고 있었다. 익숙지 않은 팔로 검을 들었음에도 한 치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힘겨운 시간을 버텼겠는가?
그가 보냈을 시간의 무게를 어렴풋이나마 헤아린 제자들의 표정이 일변했다.
“관주님을 따라라!”
특히 운검 주변의 제자들은 날카로운 검에 더욱 기세를 높이며 산적들을 몰아붙였다. 여기저기서 검과 도가 맹렬히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좋구나!”
또 다른 쪽에서 뛰쳐나온 현상이 고아하게 검을 휘둘렀다.
아이들의 검과는 조금 다른, 과거 화산의 향취가 묻어 있는 검.
“화산의 협의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저들에게 보여 주어라!”
“예, 장로님!”
현상의 등까지 보이니 모두가 용기 백배하였다.
화산 제자들에게 현자 배는 단순히 문파의 어른들이 아니다. 그 기나긴 고난을 온몸으로 버티며 지금의 화산을 만들어 준 뿌리나 다름없었다.
그런 이가 앞서서 검을 휘두르니 어찌 용기를 얻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른 운자 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선두에 선 오검들의 옆을 현상과 운자 배들이 채우기 시작했다.
비단 개인의 강함에서 비롯되는 기세가 아니다.
청명뿐 아니라, 오검뿐 아니라, 화산파 자체가 강해졌다는 것을 모두가 함께 증명하고 있었다.
물론…….
“아미타불!”
콰아아아아아아앙!
이상한 것(?) 하나가 중간에 끼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일방적이라는 말 외에는 그 어떤 걸로도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다. 녹림도들은 정교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갖춘 화산의 검에 혼비백산했고, 정파와 거리가 먼 날카로움에 의지마저 꺾였다.
“아, 안 돼!”
“이건 못 당해!”
기겁을 한 녹림도들이 하나둘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들에게는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목숨 걸고 싸울 의지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이유가 있다면 단 하나.
“으아아아! 이 쓰레기 같은 놈들이!”
서걱!
흥분한 원강이 물러나는 녹림도의 목을 쳐 버리고 괴성을 질렀다.
“물러나는 놈은 내 손에 죽는다! 물러서지 마라! 그래 봐야 애송이들에 불과하다!”
악에 받친 고함에, 물러나던 녹림도들이 움찔하며 다시 다리에 힘을 주었다.
어떻게든 모두가 전의를 상실하고 달아나는 걸 막았지만, 사실 원강 역시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화산이 과거에 얼마나 대단한 문파였건, 지금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하건, 어쨌든 대부분이 하나같이 솜털도 벗지 못한 애송이들이다.
하지만 지금 적웅채의 산적들이 느끼기엔 강호 물을 먹을 대로 먹은 노련한 검수들을 상대하는 것만 같았다. 특히 저 날카로움과 정교함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가장 믿을 수 없는 건 역시 내력.
내력이란 시간과 함께 상승한다. 그래서 수련 기간이 길지 않은 이들은 날뛰어 봐야 후기지수인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한두 명도 아니고 대부분이 무거운 도를 검으로 튕겨 낼 정도의 내력을 지니고 있다.
‘단체로 모두 반로환동이라도 한 게 아니고서야 어찌…….’
하지만 느긋하게 상황을 파악할 여유 따윈 없었다.
지금 당장 그가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겨우겨우 유지하고 있는 전열이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은 것은 일방적인 학살밖에는 없다.
이를 악문 원강의 눈에 선두쯤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현상이 들어왔다.
‘일단은 저 늙은이를 죽여서 기세를 꺾겠다!’
미숙한 이들의 특징 중 하나는 분위기에 쉽게 휩쓸린다는 것이다. 높은 사람이 당하는 반전이 일어난다면 생각 이상으로 쉽게 상황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몰랐다.
“비켜라!”
원강이 앞을 지키고 있는 이들을 밀치며 현상에게 달려들었다.
하나 그 순간 누군가가 전열을 벗어나 그의 앞으로 부드럽게 날아들었다.
탁.
가뿐히 바닥에 착지한 이는 검을 들어 그를 정확히 겨누었다.
“……뭐냐, 너는?”
“화산의 유이설.”
차가운 유이설의 눈빛이 원강의 숨통을 옥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