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583화 (581/1,567)

583화. 되찾는 걸로는 부족하지. (3)

적웅채의 수장인 무자염라(無慈閻邏) 원강(袁江)은 보고를 들으며 꽤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그놈들이 도시로 내려갔다가 씨몰살을 당했다는 거냐?”

“예. 죽지는 않은 듯했습니다만.”

“죽은 거나 무공을 전폐당하고 옥에 갇히는 거나 그게 그거지.”

“예. 맞습니다, 채주.”

“쯧쯧쯧. 그 곰 같은 놈이 결국엔 일을 저질렀구나.”

임소병은 만만한 이가 아니다.

그가 그리 상대하기 쉬운 이였다면 그 꽤나 긴 시간 동안 녹림을 지배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무력이 부족한 점을 지적하는 자들이 많았지만, 원강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무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그 부족한 무력으로도 오랫동안 녹림왕의 자리를 지켜 온 게 대단한 거지.’

만인방의 존재가 그 불만의 목소리를 억눌렀다고는 하나, 어쨌든 임소병이 아닌 이가 그만한 실력으로 녹림왕의 자리에 올랐다면 선대의 자식이고 나발이고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하지만 임소병은 오로지 지략과 처신으로 지금까지 녹림왕의 자리를 지켜 왔다. 서로 죽어라 반목하기만 하던 이 세 산채가 힘을 합쳤다는 것만으로 그가 얼마나 대단한지 증명되지 않는가?

그런 임소병을 상대로 빤히 보이는 수를 썼으니, 당하는 것도 당연했다.

“생각 없이 움직인 것에 대가를 치렀구나.”

“광우도에게 생각이랄 게 있겠습니까?”

“쯧쯧. 그렇지.”

광우도 고홍은 임소병의 완벽한 대척점에 있는 자였다.

임소병이 부족한 무력을 그 두뇌와 처신, 그리고 배경으로 극복하는 자라면, 고홍은 부족한 두뇌를 오로지 일신의 무력만으로 뒤엎어 버리는 자였다.

“그런 놈이 녹림왕이 되느니 차라리 임소병이 그 자리를 지키는 게 낫다.”

“헤헤. 채주. 그 미친 소 같은 놈이 어디 감히 녹림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그 자리는 당연히 채주의 것이 될 것입니다.”

“빤한 소리를.”

원강이 피식 웃었다.

‘적당히 밀어주면 제 풀에 나가떨어지겠지.’

지금이야 아직 임소병을 잡지 못해 자중하고 있다지만, 고홍의 인내심은 형편없었다. 임소병의 신병이 확보되고 녹림왕의 자리가 공석이 되는 순간 그 폭급함을 곧장 드러낼 게 분명했다.

그때쯤 원강이 나서서 적당히 고홍을 고립시키면 녹림왕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꿈은 아니다.

“하지만, 채주. 조심하셔야 합니다.”

“음?”

흐름을 끊으며 들려오는 말에 원강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냐?”

“화산 말입니다.”

“화산?”

“예. 아무리 도시 내였다고는 하지만, 그 대별채의 야차당이 손도 써 보지 못하고 당하지 않았습니까. 화산의 전력이 생각 이상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도 그렇군.”

원강이 턱을 긁어 대었다.

분명 임소병의 계략이 힘을 발휘한 것이겠지만, 계략이라는 것도 짜인 대로 실행할 만한 최소한의 힘이 있어야 먹히지 않겠는가.

적어도 그 화산에게 야차당 정도는 감당할 힘이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쁠 것은 없지. 적의 적은 강할수록 좋다. 어차피 대별채와 화산이 서로 전력을 깎아 먹을 테니.”

“그도 그렇습니다.”

“저놈들이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산채가 셋이나 모여 있는 산을 오르지는 않겠지. 그리고 저 고홍 놈이 그 폭급한 성격에 저리 망신을 당하고 얌전히 엉덩이를 붙이고 있지는 않을 테니, 우리는 저 대별채 놈들이 참다못해 산을 내려가 화산과 전쟁을 벌일 때까지 기다리면 그만이다.”

“예, 채주!”

원강이 입꼬리를 뒤틀었다.

녹림왕이 되겠다는 욕심에 달아 있는 대별채나, 써먹을 데도 없는 정의감에 여기까지 온 화산이나 다들 멍청하기 짝이 없는 놈들일 뿐이다.

돌아가는 상황에 만족한 원강이 웃는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뭐, 뭐냐!”

귀를 찢는 천붕지음에 그는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그의 고개가 채 돌아가기도 전에 천장이 무너지며 무언가가 그를 덮쳐 왔다.

‘목책?’

쿠우우웅! 쿠우우우웅!

거목들이 집을 덮치며, 건물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원강의 얼굴 바로 옆으로 커다란 나무기둥이 스쳐 지나갔다.

“…….”

그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이게 무슨 난리야!”

“괜찮으십니까, 채주?!”

뿌득.

원강은 대답 대신 이를 갈아붙였다.

나무 따위에 깔릴 그가 아니었지만,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은 인내심을 바닥내기에 충분했다.

“뭐 하고 있느냐, 이 머저리들아!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확인해라!”

“예, 채주!”

먼지를 뒤집어쓴 수하들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원강은 주먹을 으드득 움켜쥐었다.

자연적으로 이런 일이 벌어질 리는 없으니, 분명 누군가가 산채로 쳐들어왔다는 뜻이다.

‘고홍인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발을 옮겼다.

엉망으로 널브러진 잔해를 뛰어넘어 나아간 곳에서 그가 본 것은 산산조각이 나 무너진 목책을 뛰어넘어 안으로 돌진해 들어오고 있는 한 무리의 무인들이었다.

“습격입니다!”

“채주! 습격! 습격입니다!”

“나도 눈이 있다!”

버럭 고함을 내지른 원강이 핏대를 세웠다.

‘대별채는 아닌데?’

처음엔 대별채 놈들이 열받은 김에 조약을 어기고 습격이라도 했나 생각했지만, 안으로 돌진하는 이들의 복색은 그가 아는 대별채 놈들의 것과 확연히 달랐다.

“뭐냐, 저놈들은?!”

“화, 화산파 같습니다!”

“화산파?”

“예! 저 가슴의 매화 문양을 보면 확실합니다.”

“이, 이런 미친! 장사에 있을 화산파가 왜 여길 쳐들어온단 말이더냐!”

생각이 있는 이들이라면 백 명 남짓한 수로 천오백이 넘는 그들을 공격할 리가 없다. 이건 굳이 병법을 논할 일도 아니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어린아이도 그런 싸움을 걸면 안 된다는 걸 알 테니까.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지금 그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대별채와 상잔하고 있어야 할 화산파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이냐!”

속에 불이 난 것 같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단 말인즉슨 그의 계획이 이미 모두 무너졌다는 뜻이 아닌가!

“채주!”

“빌어먹을! 막아라아아앗! 저 망할 놈들의 목을 모조리 쳐 날려 버려!”

“예!”

갑작스런 습격을 받았지만, 원강 역시 녹록한 자는 아니었다. 당황하기야 했지만 빠르게 대처해 나갔다.

그의 명을 받은 적웅채의 산적들은 노호성을 내지르며 화산의 제자들을 맞아 돌진했다.

“목을 잘라라!”

“껍데기를 벗겨 주마!”

그리고 흡사 자신들의 정체성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거친 말을 내질러 댔다. 하지만 이건 사실 단순히 흉포함을 내보이고 증명하기 위해 내뱉는 고성이 아니었다.

비무로 서로의 실력을 확인하고, 싸움에도 예를 차리는 정파 놈들은 흉악한 살기와 거친 욕설을 마주하면 일단은 당황하기 마련이다.

설사 당황하지 않는다고 해도 기세에서 눌리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이건 그들이 오랫동안 정파인들을 상대하며 경험으로 익힌 방법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지금 그들이 상대하는 이들은 일반적인 정파인이 아니었다.

“이것들이 어디서 아가리를 함부로 털어, 콱 뒈지려고!”

“아예 절벽에서 던져 주마, 이 산적 새끼들아!”

“주둥이에 매화가지 쑤셔 박혀도 그따위로 지껄일 수 있는지 보자!”

오히려 더욱 험악한 기세로 쌍소리를 하며 달려드는 화산 제자들을 보며, 기세를 올리던 산적들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뭐야? 이 새끼들은?’

‘정파인들이 아닌가?’

두 눈에 핏발을 세운 화산 제자들의 기세가 순간적으로 산적들을 압도한 것이다.

그들이 어찌 알았겠는가?

이들에게 있어서 살기와 쌍소리 같은 건 수련 중에 일상처럼 마주하는 공기나 추임새에 불과하다는 것을.

청명이 내뿜는 살기와 위장을 바늘로 파내는 것 같은 신랄한 비꼼에 비한다면 이들의 욕설 따위는 공맹의 가르침과 다를 바 없이 평화롭고 예의 바른 것이었다.

기선을 제압한 화산의 제자들은 주춤한 산적들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으라차아아아아앗!”

“죽어어어어어엇!”

폭급하기 짝이 없는 기세로 달려든 그들은 그 기세와 걸맞지 않게 정교하고 화려한 검기를 흩뿌렸다.

“엇!”

“매, 매화?”

꽃과 같은 검기를 본 산적들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름답게 피어난 검기는 이내 매서운 기세로 그들의 치명적인 부위를 파고들었다.

“아아악!”

“으아아악!”

삽시간에 베인 산적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지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전열이 순식간에 무너지자, 화산의 제자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더욱 맹렬한 기세로 앞으로 돌진했다.

“무찔러라!”

“화산의 이름이 우리 어깨에 걸려 있다!”

“청명이가 뒤에서 보고 있다!”

“그 말은 왜 하는데, 이 새끼야!”

실로 괴이한 광경이었다.

거칠기 짝이 없는 기세와 마치 사파의 그것을 방불케 하는 살기. 하지만 그들의 검 끝에서 만들어지는 초식은 더없이 정교하고 깔끔하다.

산적들은 크게 당황했다. 이토록 괴리감 느껴지는 광경은 살면서 본 적이 없었다.

‘이놈들은 대체…….’

한편 뒤쪽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청명은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화산의 제자들이 완벽히 기세를 잡은 것이 보였다.

‘개도 자기 앞마당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그건 자신감이 있으니 그런 거지. 그런데 지금은 이쪽이 자신감이 붙었다고.

“선빵을 때렸으면 결정타를 넣어야지!”

청명이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가라, 사숙! 사고! 사형! 허리를 분질러 버려!”

“오냐! 간다, 이 새끼야!”

“여하튼 저건 진짜!”

다들 입으로는 욕을 해 댔지만, 청명이 손가락을 뻗은 순간 이미 그들은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섬전처럼 달려 나간 백천과 유이설, 그리고 윤종과 조걸이 다른 화산 제자들의 머리 위를 훌쩍 뛰어넘으며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원강은 두 눈을 부릅떴다.

역광을 받으며 허공으로 치솟은 네 사람의 모습이 두 눈에 새겨지듯 똑똑히 보였고, 순간적으로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하아아아압!”

네 사람은 동시에 산적들의 머리 위로 하강하며 검으로 허공을 그었다.

이윽고 매화가 피어났다.

그건 개화(開花)이며, 동시에 낙화(落花)였다.

서로 같은 듯 다른 매화가 어우러지며 산적들을 향해 꽃의 비(花雨)를 뿌려 댔다.

멀리서 지켜본다면 실로 아름다울 광경이건만, 그 비를 온몸으로 맞이하는 산적들에겐 공포 그 자체였다.

하늘하늘 날아든 꽃잎이 육체를 가차없이 파고들었다.

비명 한 번도 내지르지 못하고 쓰러진 이들 위로 화산오검이 사뿐히 내려섰다.

꾸욱.

검을 꽉 쥔 백천이 냉랭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분분히 물러나는 산적들을 겨누었다.

“화산이 어떤 곳인지, 저들에게 똑똑히 보여 줘라!”

“오오오오오오!”

사기 백배한 이들이 세상이 떠나가라 고함을 내질렀다. 화산오검을 필두로 모두가 산적들을 향해 맹렬히 검을 휘둘렀다.

“우리가 화산파다!”

“간다아아아아!”

누가 지켜봐 주지 않아도 매화는 피어난다.

기나긴 겨울 동안 차디찬 눈 속에서 한기를 버텨 낸 매화가 마침내 그 붉고 화려한 자태를 세상에 뽐내고 있었다.

훗날 누군가 이 순간을 논한다면 이리 표현할 것이었다.

와신상담하던 화산이 마침내 낡고 금이 갔던 검을 새로이 들어 올려 세상으로 웅비하기 시작한 날이라고.

화산이 마침내 돌아왔다고.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