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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582화 (580/1,567)

582화. 되찾는 걸로는 부족하지. (2)

“가자, 산적 놈아!”

들려온 목소리에 동웅은 부옇게 흐려진 눈으로 앞에 펼쳐진 산길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그는 명색이 산적이다.

물론 그의 앞마당과 같던 대별산은 아니지만, 어쨌든 산적이니 일단 산에 접어들면 기운이 나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인생에서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격한 슬픔을 마주하고 있었다.

꽈악!

몸을 묶은 줄이 꽉 조여 왔다.

동아줄에 칭칭 묶인 채 길 안내를 하는 입장이 된 동웅은 더없이 서글픈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왜?”

“…….”

청명이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퉁명스레 물었다.

“……아닙니다.”

물론 할 말은 많다. 너무도 많았다.

하지만 그 어떤 말도 이놈에겐 통할 것 같지 않았다. 그가 청명을 오래 본 것은 절대 아니지만, 그 짧은 시간만으로도 이 인간이 어떤 종자인지 파악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뭘 자꾸 보냐고.”

“아,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산적 새끼가 목숨 붙여 줬으면 고맙다고 삼생 동안 절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자꾸 눈알을 굴려? 왜? 동아줄이 불편해? 줄 필요 없게 팔을 아예 잘라 드려?”

“저, 절대 불편하지 않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묶여 있었던 것처럼 편안합니다!”

동웅이 필사적으로 대답했다.

이깟 줄 따위 끊으려면 못 끊을 것도 없었다. 하지만 동웅은 알고 있었다. 지금 이 동아줄이 그의 목숨 줄이라는 것을 말이다. 힘을 주어 이 줄을 끊는 순간 저 악귀 같은 놈이 옳다구나 그의 목을 자르려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내가 어쩌다가 이런 처지가…….’

그는 이곳에서 살아날 수만 있다면 앞으로 평생 화산 쪽으로는 오줌도 싸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걷는 게 영 느린데? 반항하는 거야?”

“여, 여기가 길이 좀 험합니다. 너무 빨리 가다가 낙오하는 분이 생길까 봐…….”

“뭐?”

“화, 화산 분들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아니, 그 앞에. 뭐라고?”

“예? 여, 여기가 길이 좀 험하다고…….”

청명이 뚱한 표정으로 화산파의 제자들을 흘끗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동웅의 말을 들은 다른 제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럼 여기가 산길이라는 거야?”

“산에 언제 들어가나 내내 하품했는데.”

“지금 이 길을 험하다고 하는 건 아니지 않을까? 이제 험한 길이 나온다는 소리 아냐?”

“…….”

동웅의 볼이 푸들푸들 떨렸다.

‘저거 허세가 아닌 것 같은데?’

표정을 보니 정말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스쳤다.

‘아, 이 양반들 화산파지?’

화산파는 그 ‘화산’에 있는 문파다.

중원 내에서도 험하기로 소문난 오악(五岳). 그중에서도 가장 험하다고 이름 높은 곳이 바로 화산이다.

나는 새도 쉬어 간다는 화산에서 평생을 지냈으니 형산 정도는 마실 나가는 뒷동산으로 보여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얘네가 왜 더 산적 같냐고!’

아무리 생각해도 차라리 그가 도사를 하고, 이놈들이 산적을 하는 쪽이 좀 더 적성에 맞을 것 같았다.

“험해?”

“……아닙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최대한 빨리 가도록 하겠습니다.”

“말만 하지 말고 움직여!”

“예!”

동웅이 부리나케 오르기 시작하자 청명은 짧게 혀를 차며 그의 뒤를 따랐다.

“청명아.”

“응?”

“이자를 믿고 가도 되겠느냐?”

“괜찮아.”

백천의 물음에 청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뭔 꼼수를 쓸 정도로 똑똑해 보이지는 않으니까.”

“하긴. 확실히 그래 보이는구나.”

이 말을 들은 동웅이 앞에서 피눈물을 흘리건 말건, 둘은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은 채 태연히 대화를 이어 갔다.

“그리고 듣자 하니 대별채는 제일 위에 있고, 지금은 다른 산채부터 들르는 모양이야. 그러니 더더욱 꼼수는 없을 거야.”

“왜?”

“왜긴 왜야. 같은 산채 내에서도 의리가 없는 산적 새끼들이 다른 산채 놈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겠어? 그럴 의리가 있었으면 산적이 아니지.”

“흐음. 그도 그렇구나.”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산적 비하에 임소병이 낮게 헛기침을 했다.

“도장. 제 입으로 이리 말하면 조금 민망하긴 하지만, 산적들 사이에도 의리라는 게 존재…….”

“부하한테 뒤통수 맞고 쫓겨나신 분은 조용히 하시구요.”

“……네.”

임소병이 시무룩해서 입을 다물자 청명이 혀를 찼다.

“여하튼 산적 놈들이 별걸 다 챙기려고 해. 주제도 모르고.”

구시렁거리는 청명의 목소리를 들으며 현자 배와 운자 배는 동시에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그들은 녹림에서도 수위에 있는 산채들을 토벌하러 가고 있다. 강호에서 제법 잔뼈가 굵은 이들도 긴장에 땀을 흘려야 할 상황이건만.

‘저 녀석은 긴장도 안 되나?’

‘아무튼 난 놈은 난 놈이야.’

청명이 저놈은 흡사 아랫마을에 술 사러 가는 사람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심지어 청명이뿐만이 아니었다.

현상의 고개가 슬쩍 뒤로 돌아갔다.

단단하고 의연한 얼굴로 뒤를 따르는 화산 제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장사에 처음 접어들던 때와 비해도 확연히 달라졌다.

‘자신감을 얻었구나.’

자리는 사람을 만들고, 명성은 어깨를 높인다.

장사에서 쏟아진 환호는 이들이 난생처음 받아 본 격려였을 것이다. 물론 청명과 그 일행을 포함한 몇몇은 천하비무대회에서 격한 환호를 받아 보았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누군가가 자신들을 그토록 열렬히 존중하는 경험을 처음 해 보지 않았는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결국 사람이란 그런 사소한 것에서 자신감을 얻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얻는 법이었다.

현상은 청명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참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지.’

대체로 사소한 것은 모조리 무시하고 오로지 결과만을 보고 돌진하고 폭주하는 놈이, 이럴 때는 또 사소한 부분까지 일일이 챙겨 제자들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지 않는가.

나잇값 못하는 어린애 같던 놈이 때로는 연륜을 쌓을 만큼 쌓은 그도 따라가지 못할 만한 노회함을 보여 준다.

청명과 보낸 세월이 벌써 몇 해를 넘었건만, 현상은 여전히 그에게서 새로운 부분을 발견하고 있었다.

‘어쨌든…….’

곧 제대로 된 격전을 치러야 할 이들이 가슴속에 자신감을 품었다는 것은 무척 긍정적인 일이었다.

적지에 쳐들어가는 험한 상황임에도 기죽지 않은 제자들의 모습만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저 청명이 녀석이 여기까지 염두에 두고 계획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허허.”

제자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은 언제나 뿌듯한 일이었다. 이 일이 끝나면 그도 슬슬 일선에서 물러나 저들을 지원하는…….

“아, 거 빨리빨리 좀 가십시오! 뭐 하느라 그렇게 꾸물대십니까!”

“…….”

그의 머릿속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등을 쿡쿡 찔러 오는 현영 덕분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현상은 현영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놈이 물러나기 전에는 절대 안 돼.’

문파 꼴이 개판이 될 게 빤하다! 아암!

“청명아.”

“네?”

청명이 뒤를 돌아보았다. 현상은 조금 굳은 얼굴로 말했다.

“듣자 하니 이대로 가면 적웅채라는 곳이 제일 먼저 나온다고 하더구나.”

“네, 그렇죠.”

“도착한다면 곧장 전투를 치러야 할 텐데, 어찌할 생각이더냐?”

“어찌하다뇨?”

“전략이 있을 것 아니더냐.”

“아, 전략.”

청명이 이제야 알아들었다는 듯이 씩 웃었다.

“장로님. 이런 말 들어 보셨어요?”

“무슨 말?”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그렇지, 그렇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위태롭지 않은 법이지!”

청명이 간만에 맞는 말을 했다는 듯, 현상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 입에서 저렇게 정상적인 말이 나오니 감회가 새로웠다.

“적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그에 따른 전력을 차질 없이 세울 수 있다면 상대함에 어려움이 없다는 말이지요.”

“옳지! 옳지! 우리 청명이가 병법에도 일가견이 있구나!”

병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들었으면 머리를 싸매고 누울 말이었지만, 이건 현상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청명의 말은 그런 그의 기대를 여지없이 부숴 버렸다.

“그런데 우리는 적을 모르잖아요.”

“……엥?”

“적웅채니 혈랑채니 해 봐야 뭘 알겠어요. 얘네들도 잘 모르는데 우리가 알 도리가 있나?”

“…….”

청명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적을 알아야 전략을 세울 텐데, 적을 모르니 세울 전략도 없네요.”

“…….”

그게 왜 그렇게 되냐?

어? 그게 왜 그렇게 되냐고!

“그, 그럼 아무 전략 없이 그냥 무턱대고 가서 싸우겠다는 거냐?”

“에이, 장로님.”

“응?”

“전략 그거 별거 없어요. 그건 약한 쪽이 센 쪽을 상대하느라 머리를 싸매는 거죠. 우리가 더 센데 우리가 왜 전략을 세워요? 그냥 들이받아 버리면 그만이지.”

“…….”

뭐랄까, 듣기에는 그냥 개소린데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인 것도 같고…….

개소리를 그럴싸하게 하는 데에는 청명을 따라올 자가 세상에 없을 듯했다.

그래도 현상은 어떻게든 설득해 보려 입을 열었다.

“아니, 그래도 뭔가 대책이 있기는 해야…….”

그때였다.

“저깁니다!”

“헐…….”

아니. 왜 벌써…….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상의 눈앞엔 사람 키보다도 더 높게 쌓인 목책이 펼쳐졌다.

“산채네.”

“산채군.”

“누가 봐도 산적 소굴이네.”

청명이 목책을 보며 박수를 쳐 댔다.

“크으. 남의 산에 와서도 어떻게든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니 감동적이네.”

두터운 아름드리나무를 베어 만든 목책은, 딱 보아도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이곳에 얼마나 머무를지도 모르는 놈들이 도착하자마자 나무를 베어다가 임시로나마 산채를 지은 것이었다.

“후후.”

“뭘 쪼개?”

또 어느새 다가온 임소병이 자랑스럽다는 듯 웃자, 청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임소병은 가슴을 쫙 펴며 말했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 하지 않습니까. 비록 산적이지만 제 역할에 충실한 모습을 보니 실로 아름다워 웃었습니다.”

“그러니까 산적이 산적다워야 세상이 아름답다?”

“…….”

“미친놈 아냐, 이거?”

청명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걸 본 듯이 혀를 차고는 모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장로님.”

“으으음.”

현상은 떨떠름한 얼굴로 청명과 산채를 번갈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도리가 없구나.’

이미 적의 코앞까지 밀고 들어와 버렸고, 여기에서 무슨 전략을 세워서 쓰겠는가?

“끄응. 괜찮겠느냐?”

“에이. 장로님도 담이 많이 약해지셨네요. 산적 나부랭이들 정리하는데 무슨 괜찮고 말고를 따집니까? 그냥 다 까 버리면 그만이지.”

다른 제자들 역시 그 말에 적극 공감하는 듯 달아오른 얼굴로 콧김을 내뿜고 있었다. 검을 든 채 안달복달하는 제자들을 보고 있자니 현상은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누가 보면 너희들이 털러 온 줄 알겠다.’

결국 마음을 다 내려놓은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모두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거라.”

현상의 시선을 받은 백천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백천과 청명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바로?”

“응.”

“선두는?”

“뭐, 사숙이 서도 되지만…….”

청명이 히죽 웃으며 앞으로 휘적휘적 나섰다.

“이왕이면 시작은 화려한 게 좋지 않겠어?”

동웅을 제치고 가장 선두로 나선 그는 높게 치솟은 목책 앞에 섰다.

“으라차아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뻗어 나간 발길질이 전방의 목책을 모조리 휩쓸어 날려 버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천둥과도 같은 굉음이 울렸다. 산산조각 난 목책들이 태풍 맞은 낙엽처럼 날아 산채를 휩쓸었다.

쿠웅! 쿠우우우웅! 쿠우웅!

비처럼 쏟아진 거목이 산채 내부에 얼기설기 지어진 오두막과 천막에 떨어져 내렸다.

“뭐, 뭐야!”

“습격인가!”

“웬 놈들이냐!”

그 괴사(怪事)에 산채 안을 지키고 있던 산적들이 부리나케 칼을 뽑아 들고 쫓아 나왔다.

“뭐긴, 새끼들아.”

청명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천벌이지. 다 쓸어 버려!”

“오오오오오오오!”

일제히 매화검을 뽑은 화산의 제자들이 산적들을 향해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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