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1화. 되찾는 걸로는 부족하지. (1)
“실패?”
광우도 고홍의 눈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와 동시에 앞에 있던 모두가 덜덜 떨며 고개를 푹 숙였다.
고홍이 광우도라 불리는 이유는 그가 늘 평소에도 성격이 폭급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본디 나름 이성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화가 났을 때는 이야기가 달랐다. 분노한 그가 흡사 미친 소처럼 날뛰기 때문에 붙은 것이 ‘광우도’였다.
“동웅 그놈이 실패했다는 것이냐?”
“그, 그런 것 같습니다, 채주!”
고홍이 말없이 보고하는 이를 바라보았다.
납작 엎드린 고호리(苦狐狸) 이정방(李正方)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야차당을 통째로 이끌고 갔는데도 실패했다? 그럼 그놈들에게 피해는 얼마나 주었느냐? 임소병 그 쥐새끼는 또 어떻게 됐고?”
“그, 그것이…….”
이정방이 우물쭈물하자 고홍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둥이를 찢어 놓기 전에 당장 말하지 못해!”
“히, 히이익! 예! 예! 보고드리겠습니다! 적, 그러니까 화산파의 피해는 전무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무?”
“…….”
고홍은 제 귀를 의심하는 듯 고개를 옆으로 슬쩍 꺾었다.
“야차당이 통째로 갔는데, 피해조차 입히지 못했다?”
“송구하오나…… 예…….”
“허허허.”
돌아오는 대답에 고홍은 황당하다는 듯 웃어 버렸다.
“내가 지금 꿈이라도 꾸고 있나?”
“…….”
“야차당 놈들이 내 생각보다 약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냐? 아니면 그 화산파라는 놈들이 내가 듣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한 것이냐?”
이정방이 재빨리 몸을 웅크리며 대답했다.
“화, 화산은 무시할 수 있는 문파가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만인방의 무력대들을 무찌른 성과가…….”
콰아아아아앙!
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커다란 폭음과 함께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주륵.
이정방의 얼굴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의자 뒤에 꽂혀 있던 창이 어느새 그의 바로 옆에 꽂혀 있었다.
만일 한 치만 옆으로 날아왔으면 지금쯤 그는 잘 다져진 육편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채, 채주…….”
“녹림왕의 자리에 오를 내가 그딴 애송이들을 경계라도 하라는 말이냐? 구파에도 들지 못하는 문파를?”
이정방은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화산은 구파의 일원은 아니나, 절대 무시해서는 안 되는 문파다. 하지만 그 사실을 지금 고홍에게 곧이곧대로 고하는 것은 목을 깨끗이 씻고 잘라 달라 애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어, 어찌 저들을 감히 채주의 위엄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이정방이 한계까지 납작 엎드리며 자세를 낮추었지만, 고홍의 얼굴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이 쓸모없는 것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고홍은 이내 산채가 터져 나가라 일갈했다.
“모두 준비시켜라! 내가 직접 갈 것이다!”
“지, 진정하셔야 합니다, 채주!”
“진정?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느냐? 이런 개망신을 당했는데? 다른 채주들이 나를 뭐라 생각하겠느냐?”
대별채를 비롯한 산채들이 힘을 모아 녹채를 몰아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 중 누가 녹림왕의 자리에 오를 것인지는 아직 확실히 정해지지 않았다.
그걸 논의하다 보면 그들끼리 힘을 빼게 될 것이고, 그건 결과적으로 임소병의 지배를 강화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처럼 대별채가 크게 망신을 당했으니, 모두가 이를 꼬투리 잡아 그가 녹림왕의 자격이 없다고 깎아내릴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더 진정하셔야 합니다! 이대로 저희가 화산을 상대한다면 괜히 전력만 깎이지 않겠습니까? 그랬다간 저 다른 산채 놈들이 어부지리로 더 큰 것을 얻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부가 지리는…… 아니, 뭘 얻는다고?”
“저희의 전력이 깎이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이미 피해를 입었거늘, 다른 산채 놈들을 상대한다고 또 전력을 소모하면 대별채는 망합니다! 저놈들은 그때를 틈타 이리처럼 달려들 것입니다! 제발 고정하십시오!”
고홍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화산 놈들을 친히 무찌르는데 왜 내가 손해를 본단 말이냐!”
이쯤 되니 이정방의 얼굴 역시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말귀를 저렇게나 못 알아 처먹으니.’
저 천생의 신력을 뒷받침할 조금의 머리만 있었더라도 이미 녹림왕이 되고도 남았을 것을.
“임소병과 화산파는 반드시 이곳을 노리고 올 것입니다!”
“그걸 얌전히 기다리란 말이냐! 나더러?”
“채주! 생각을 해 보십시오. 이곳으로 오는 길목에 다른 채들이 이미 자리하고 있지 않습니까?”
“흠?”
“그러니 그곳을 지나쳐 오며 당연히 전력을 소모할 것입니다. 그때 약해진 놈들을 집어삼키면 그만입니다.”
“멍청한 놈! 그러다가 다른 채에서 녹림왕을 잡으면 어쩔 셈이냐! 그야말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 아니냐?”
“개는 지붕에 오르지 못하지만, 채주께서는 오를 수 있으시잖습니까?”
“……으응?”
“놈들이 임소병을 잡으면, 우리가 그놈들을 쳐 임소병을 빼앗으면 그만입니다. 그게 녹림의 법도가 아닙니까!”
고홍도 드디어 살짝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니까…….”
“예! 채주. 다른 채 놈들이 그놈들을 맞아 싸우며 전력이 약해지면 저희가 그때 모두 쓸어 버리면 됩니다! 그럼 누구도 채주께서 녹림왕 자리에 오르는 것에 반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게 그렇게 되는군! 껄껄껄. 과연 나의 지낭이다!”
칭찬이 쏟아졌지만 이정방은 고개를 푹 숙이며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녹림이 어찌 되려고…….’
이미 대별채에 묶인 그에게, 고홍을 따르는 길 외에 다른 길 따윈 없었다.
하지만 저 고홍이 녹림왕 자리에 올라 녹림을 지배하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너무 빤했다. 굳이 오래 헤아릴 필요도 없이 명백했다. 이건 녹림을 사지로 몰아넣는 길과 다를 바 없었다.
‘임소병이 건강하기만 했어도.’
완벽한 녹림왕이 되었을 것을.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녹림은 강자존이 지배하는 곳인 것을.
“그럼 네 말대로 우선 한 번은 참겠다. 하지만 네 말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모가지가 형산 곳곳을 굴러다닐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예! 채주.”
* * *
“흐음.”
촥.
“흐으으음.”
꾸욱. 꾹.
“…….”
분주한 손길 속에, 백천의 눈가가 미미하게 떨렸다. 그의 눈은 주변에 달라붙은 이들을 께름칙하게 응시했다.
잠시간을 더 참던 백천이 결국 입을 열었다.
“저…….”
“아, 움직이지 마십시오! 지금 주름 펴고 있잖습니까!”
“…….”
얘들아. 내 옷은 원래 주름이 없거든?
“여기 먼지!”
“털어! 털어!”
아까부터 제 주변에 달라붙어 투박한 손길로 꽃단장을 시켜 주는 사형제들을 보며, 백천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그만 좀 해라.”
“안 됩니다. 청명이가 잡티 하나 없이 반질반질하게 만들어 놓으라고 했단 말입니다.”
“말 키우냐?”
어? 내가 백마야?
“거 말 많네.”
그때 청명이 천천히 걸어와 백천의 앞뒤를 다시 훑으며 점검했다. 그리고 말했다.
“생각해 봐, 사숙.”
“뭘?”
“예전에 사숙이 종남을 볼 때 어떤 느낌이었어?”
“어떤 느낌이라니?”
“원한 싹 빼고 느낌만 말이야.”
“그야…….”
훤칠하고, 멋있고…… 솔직히 부러울 정도로 모양이 났다. 백천의 표정에서 대답을 읽은 청명이 다시 물었다.
“그게 왜 그런 줄 알아?”
“응?”
“앞에 선 놈이 진금룡이라 그래.”
“…….”
“우락부락하고 뭉개진 것처럼 생긴 놈이 종남의 대사형이랍시고 앞에서 얼굴 들이밀고 있었어 봐. 그거 누가 대단하게 보겠어?”
“…….”
뭔가 도사로서, 사람으로서 꼭 반박해야 할 말 같았지만, 청명이 말한 광경을 떠올려 본 백천은 끝내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평생 검 한 번 잡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우릴 보고 대단한지 등신인지 알 게 뭐냐고. 칼 들고 신명나게 검무 추면서 갈 것 아니면 일단 보이는 게 끝내줘야 한다 이 말이지! 그러니 잔말 말고 가만히 있어.”
백천은 치미는 눈물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청명이 하는 말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도 때와 장소가 따로 있지!’
녹림과 싸우기 위해서 출정하는데 꽃단장이 말이 되냐, 이 미친놈아!
그때 슬그머니 다가온 임소병이 손뼉을 쳤다.
“하하하하. 아주 보기 좋습니다. 확실히 백천 도장께서는 절세의 미남이라기에 한 톨의 부족함도 없으시군요.”
“야, 반 거지.”
“……저요?”
“넌 맨 뒤로 가. 아니, 아예 안 보이게 중간에 적당히 파묻혀.”
“…….”
“어디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 같은 얼굴을 남들 앞에 들이밀려고. 썩 사라지지 못해?”
청명의 신랄한 말에 어깨를 축 늘어뜨린 임소병이 화산 제자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흑야호와 번충은 눈물을 삼켰다.
‘녹림왕이시여.’
‘이 무도하기 짝이 없는 놈들.’
세상 어디에서 녹림왕이 저런 대접을 받겠는가? 아무리 지금은 반쯤 쫓겨난 입장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어쨌든 녹림왕으로 살던 사람인데.
하지만 청명의 불똥은 그들에게로도 튀었다.
“야, 니들도.”
“예?”
“보는 사람 심란하게 험악한 얼굴 들이밀지 말고 중간에 가서 얌전히 허리 숙이고 있어.”
“……예, 형님.”
“알겠습니다.”
흉한(?) 것들을 모두 치워 낸 청명이 나머지 사람들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야! 대머리!”
“하지 마, 이 새끼야!”
“양심도 없나! 혜연 스님께 그게 뭐 하는 짓이야!”
“이건 아니지, 이건!”
“끄응.”
혜연의 얼굴이……. 아니, 머리 전체가 벌게졌다. 청명은 반짝이는 그의 머리를 영 못마땅하게 바라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쓰읍, 별수 없지. 너는 적당히 앞쪽에.”
“……감사합니다, 시주.”
그래도 숨어서 가지 않게 된 게 다행이라는 듯 혜연이 반장을 했다.
보다 못한 현상이 슬쩍 청명을 향해 물었다.
“청명아.”
“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
“곧 알게 되실 거예요.”
청명이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때마침 문이 살짝 열리더니 유이설이 안으로 들어왔다.
“다 모인 것 같아.”
청명이 깔끔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두를 돌아보았다.
“다들 어깨 똑바로 펴고 나가.”
“응?”
“이제 알게 될 거야. 앞으로 우리가 어떤 시선을 받게 될 건지. 사형들도 모두 여기에 익숙해져야 돼.”
하지만 아직 실감하지 못한 이들은 심드렁한 얼굴로 소곤거렸다.
“쟤 뭐라는 거냐?”
“내버려 둬. 쟤가 모를 소리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청명은 니들이 뭘 알겠냐는 듯 혀를 찼다. 그리고 문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자, 그럼 가자!”
이내 문이 확 열어젖혀졌다.
빛이 쏟아져 들어오며 문 밖의 광경이 훤히 펼쳐졌다. 선두에 선 백천이 살짝 눈을 부릅떴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뭐야?’
문 밖으로 펼쳐진 대로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금방이라도 눌려서 압사당할 것 같은 밀도로 선 이들은 연신 크게 환호하며 소리쳤다.
“화산의 영웅들이시다!”
“화산파가 산적들을 토벌하러 간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마치 귀가 찢어질 듯한 함성이었다. 청명이 태연하게 말했다.
“뭐 해?”
“응?”
“가자.”
“……알았다.”
백천이 작게 숨을 내쉬며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뒤로 화산의 제자들이 따라붙었다. 모두 어안이 벙벙한 듯했다.
물론 그들도 예상을 아주 못 한 건 아니었다.
이미 한차례 산적들을 막아 주었으니, 호의가 섞인 시선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처럼 사람들이 있는 대로 모여 환호를 해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대로로 나온 화산의 문도들은 사람들이 좌우로 꽉꽉 들어찬 길을 걸어 성문으로 향했다.
“산적 놈들을 박살 내 주십시오!”
“다치시면 안 됩니다!”
“화산파 만세!”
걷는 걸음마다 환호와 응원, 염려 등이 따라붙었다. 화산의 제자들은 당황한 얼굴로 저들끼리 속삭였다.
“워, 원래 이런 거냐?”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처음 겪어 보는데.”
“다른 문파들은 다들 이런 환호를 받나?”
“쯧.”
그때 청명이 속닥이는 이들을 돌아보며 잔뜩 찌푸렸다.
“미, 미안…….”
“어깨!”
“응?”
“어깨 쫙 펴!”
불호령에 화산의 제자들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쫙 폈다.
“사형들이 한 일에 대해 환호해 주는 거야. 당당하게 어깨 펴고 받아들여. 앞으로는 수도 없이 겪게 될 테니까.”
청명의 말을 들은 그들의 어깨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색하지만 당당한 표정.
청명은 피식 웃고 말았다.
‘으쓱하겠지.’
과거의 화산은 이런 광경을 일상처럼 마주했었다. 화산파 문도들이 서안에 나왔다는 말만 돌아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으니까.
하지만 이들에겐 더없이 낯설고 어색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야지.’
이건 화산이 잃은 수많은 것들 중 하나.
잃어버린 명성과 잃어버린 평가다.
청명은 이제 화산의 명성을 다시 되찾을 생각이었다.
‘우선은 저 산적 새끼들부터.’
그의 시선이 저 멀리 보이는 형산으로 향했다.
“되찾는 걸로는 부족하지.”
아주 전 중원에 화산의 명성이 쩌렁쩌렁 울리게 만들어 주마! 과거보다 더!
좋죠, 장문사형?
- 오랜만에 네가 옳은 소리를 하는구나.
뭔 소리래. 나는 맨날 맞는 말만 하는데.
낄낄낄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