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7화. 좀 과히 건강해서 그렇지. (1)
“으음!”
“크으으음!”
창문에 달라붙은 현자 배와 운자 배들은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애먼 창틀만 움켜잡았다.
“저, 저 위험해 보이는데……!”
“아, 아이고 백상이가!”
“저래도 됩니까? 청명이 놈은 왜 뒷짐만 지고 있고…….”
그들은 마치 당장이라도 창밖으로 몸을 날리기라도 할 듯 들썩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뒤에서 바라보던 임소병은 오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걱정이 되면 나가 보시든가 하지.”
획!
그러자 현상과 현영, 운검과 운암이 동시에 무시무시한 기세로 뒤를 돌아보더니 임소병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누군 나가기 싫어서 이러는가! 나오지 말라 그러지 않는가!”
“그러니까!”
저…… 도사님들.
일문의 장로라는 건 보통 아랫것들에게 명을 내리지, 받는 위치가 아닙니다…….
화산파와 동행하다 보니 임소병의 머리도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여하튼 이놈의 문파는 지위의 고하에 상관없이 그의 상식이 통하질 않았다.
“그래서, 말씀해 보시게!”
“예?”
“지금 몰려온 저놈들은 강한 놈들인가?”
“그…… 그게 음…….”
임소병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저들의 무위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들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가 난감해서였다.
“아시다시피 녹림은 개개인이 그리 강한 문파가 아닙니다.”
“으음?”
“그러니까 정파로 치자면 음……. 아, 그렇지. 개방 같은 곳이라고 해야겠지요.”
“아, 개방!”
적절한 비유에 곧장 이해한 현영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같은 구파일방이라고는 하지만, 개방의 거지들은 타 구파일방의 제자들에 비하면 무위가 떨어지는 편이다.
그럼에도 개방이 한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할 수 있는 이유는, 문도의 수가 다른 문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제일 되기 쉬운 것이 거지고, 도적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이가 제일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산이다 보니, 수는 많지만 그 하나하나는 그리 강하지 않습니다.”
“그럼 저들도 그리 강하진 않겠군?”
“대별채는 그런 산채들 중에서도 조금 특별한 곳입니다. 그런 곳의 정예들이니 일반적인 산적과는 비교를 불허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면이 조금 있겠죠.”
임소병은 자신이 차근차근 잘 설명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하지만 배움이라는 것은 가르치는 이의 능력과 배우는 이의 능력이 함께 뒷받침되어야 하는 법.
“뭐? 정예? 저놈들이 정예라는 말인가?”
“이, 이런! 그럼 우리 아이들이 위험할 텐데!”
“아니! 그런데 청명이 저놈은 왜 자꾸 술만 퍼먹고 있냐고!”
임소병은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소귀에 경을 읽지.’
애초에 들을 마음이 없는 이들에게 대체 뭘 알려 주겠다고 힘을 쓴단 말인가? 차라리 그 시간에 염불이나 외는 게 생산적일 것이다.
‘대체 이 사람들은 뭐가 문제라 이러는 거지?’
그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별채?
물론 대별채는 강하다. 녹림칠십이채 중에서도 특별히 더 강한 녹림십채 중 하나이고, 그중에서도 분명 상위로 평가되는 산채였다.
강호 어디에서도 감히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인 것은 확실했다.
다만 문제는…….
임소병이 고개를 슬쩍 돌려 창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격전을 보았다.
‘당신네 제자들은 그냥 어디 가서 무시당하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고.’
저 짐승들……. 아니, 강한 검수들을 떼거리로 이끌고 다니면서 고작 산적 나부랭이……. 아니,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여하튼 녹림도들과 싸운다고 걱정을 하는 양반들이라니.
임소병은 쓰게 입맛을 다시고는 전장을 넘겨다보았다.
‘죽이지는 않겠지?’
그래도 명색이 도사들인데.
산적이란 실로 괴이한 직종이었다.
폭급한 성향을 가진 데다 평범한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이 선택하는 직업(?)인 것은 분명하지만, 산적이라는 신분을 지속적으로 이어 가기 위해서는 언제 올지도 모르는 손님을 한없이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폭급해서 산적이 된 놈들에게 인내심이 필요하다니. 이토록 역설적인 말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실제로 결국 산적으로 정착한 이들은 근성 하나로 그 인내심을 만들어 낼 줄 아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오늘, 대별채의 산적들은 절실히 실감했다.
인간의 근성이란 대가리에 처박히는 검집에서 오는 강렬한 타격감 앞에선 완전히 무용(無用)하다는 것을.
콰드드득!
“끄륵…….”
두개골을 아예 부숴 버릴 듯 정수리에 틀어박힌 검집이 한 산적의 의식을 저 먼 곳으로 날려 버렸다.
“이, 이 애송…….”
“누가 애송이야? 약해 빠진 것들이. 아직 덜 맞았냐!”
카앙!
맹렬한 기세로 휘둘러진 대감도는 낮게 비행하는 제비처럼 날렵하게 날아든 검과 부딪히자마자 깔끔하게 뒤로 튕겨 버렸다.
“컥!”
대별채 야차당의 이조장인 마맹(馬孟)이 부러질 듯 꺾인 손목을 움켜잡으며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대체 어디서 이런 놈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가 휘두르는 대감도는 그 무게가 오십 근은 족히 되었다. 신병이기는 아니지만, 내기를 실어 휘두르기만 하면 웬만한 병기는 창이고 검이고 할 것 없이 모조리 동강을 내고도 남을 중병(重兵)이었다.
그런데 그 대감도가 저 얇디얇은 검과 맞부딪히는 순간, 지푸라기로 만든 것처럼 튕겨 나온 것이다.
‘뭐, 뭔 놈의 힘이!’
힘으로는 산채 내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자부하며 살아왔었는데, 검에 실린 힘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백번 양보해서 힘이야 그렇다 칠 수 있다. 타고난 신력이 강한 이들도 종종 있으니까.
하지만 엄마 배 속에서부터 내공을 익히지 않고서야 이 젊은 놈들의 내력이 그를 간단히 제압할 만큼 강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더 속이 터지는 건 저 망할 놈들의 태도였다.
“뭐야! 피죽도 못 얻어먹었어? 왜 이리 약해!”
“이 새끼들이? 힘 더 못 써?!”
“내가 기대한 건 이 정도가 아니라고! 너희 같은 놈 상대하려고 지금까지 그 지옥 같은 시간을 버틴 줄 알아?”
눈에 핏발을 세우며 들이받아 오는 화산의 검수들은 흡사 성난 소 같았다.
마치 원수라도 만난 양 검을 휘둘러 대는 모습에서 억눌린 분노가 느껴졌다.
‘뭐, 뭐냐고, 대체!’
신주오패 중 하나인 녹림, 그중에서도 악명 높은 대별채의 산적들이건만 지금 화산 제자들이 내뿜는 기세는 그들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청명에게 지옥처럼 시달리고, 백천에게 서릿발 같은 구박을 받고, 운검에게 죽어라 굴려진 화산 제자들의 분노가 바로 이곳에서 분출구를 찾은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정말 까마득한 시간 만에 얻어맞지 않고 검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으니 눈을 까뒤집을 만도 했다.
“이 새끼들이 이러고도 산적이라고! 창피하지도 않냐!”
“으아아아아! 죽어! 죽어! 죽어어어어어!”
사파의 요검(妖劍)이 무색하도록 현란하게 휘둘러지는 검에 녹림도들은 제대로 된 대항조차 해 보지 못하고 기겁하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
한편 술병을 든 채 그 광경을 지켜보던 청명의 고개가 슬쩍 옆으로 갸웃했다.
‘뭔가 좀…….’
결과만 놓고 보면 확실하게 화산이 압도하고 있는 건 맞았다. 그가 굳이 입을 뗄 필요도 없이 강하고도 섬세한 검격이 연이어 펼쳐지고 있으니까.
과거 그가 처음 화산에 왔을 때와 비교한다면 상전벽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다.
과격한 수련과 끊임없는 단련, 그리고 입 안에 강제로 쑤셔 넣어진 영약의 조화는 화산 문도들의 수준을 강제로 최대한 끌어올렸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지금 화산의 백자 배와 청자 배는 과거 청명이 있던 시절 화산의 이대제자와 삼대제자의 수준을 깔끔하게 추월하는 중이었다.
이게 다 쥐면 터질라, 불면 날아갈세라, 애지중지(?) 제자들을 키워 온 청명이 공이겠지만…….
하지만 뭔가가 좀 이상했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어…….
화산의 이대나 삼대가 강호행을 하면, 정광 넘치는 백색의 무복을 입은 이들이 이야기 속에서 나온 영웅들처럼 멋들어지게 검을 휘두르는 그런 맛이 있었는데…….
지금은…….
“흐하하하하핫! 힘을 좀 더 써 보라고! 뭔 놈의 산적이 이리 힘이 없어!”
“으하하하하핫! 허리! 허리! 이 새끼야! 대가리!”
“맞은 데는 또 안 맞을 줄 알았냐?”
청명은 멍한 얼굴로 그의 사형제들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누가 사파이고, 누가 정파인가?
두 눈에 불을 켜고 연약한(?) 산적들을 죽어라 까는 화산의 제자들을 보고 있으니 양민을 약탈하러 온 도적떼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둠에 잠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장문사형…….’
내가 그…… 내 식대로 한번 해 본다고 하긴 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게 이런 건 아니었거든요?
- 됐어. 이 새끼야. 이제 와서 뭘!
아니……. 이거 뭔가 억울하네?
청명은 미쳐서 날뛰는 화산의 제자들을, 조금 먹먹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
그래, 내 새끼들.
성격이 좀 나쁘면 어떠냐?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솔직히 무엇보다 건강한 게 최고 아니겠는가? 좀 과히 건강해서 그렇지…….
청명이 감회(?)에 젖는 동안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당황한 이가 또 하나 있었다.
수하들을 이끌고 온 거력패웅 동웅이었다.
커다랗게 떠진 그의 두 눈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직접 보고 있는데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저 어린놈들이?’
그 역시 수많은 전투를 치러 본 몸.
순간적인 상황이나 기세의 차이 때문에 무위의 차를 무시한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는 걸 모를 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지금 이 상황의 원인은 단순한 기세 차이가 아니었다.
카아아앙!
낭창하게 휘어진 검이 수십 배는 무거운 도를 깔끔하게 날리고, 서로를 밀어 낼 때면 되레 도를 든 쪽이 밀려나고 있었다.
힘에서 밀리고, 내력에서 밀린다.
굳이 초식의 정교함까지 논할 것도 없었다. 그건 이미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나니까.
정교함으로 승부해야 할 검과 힘으로 승부해야 할 도가 맞붙는데 도를 든 쪽이 힘에서 밀린다면 무슨 수로 싸울 수 있겠는가?
이건 지나치게 일방적이었다.
그 말 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채, 채주!”
해안을 덮쳐 오는 파도처럼 밀려드는 화산의 제자들을 보며 그의 수하들이 기겁하여 소리를 질러 대었다.
이대로라면 전멸할 게 분명해지자, 동웅은 뭐라도 해 보려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 순간.
“그쪽이 수장인 모양이로군.”
저벅. 저벅.
그를 향해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왔다.
“이…….”
아까부터 여유를 부리던 헌앙한 얼굴의 청년 검수였다.
동웅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이 애송이 놈들! 천지를 모르고 날뛰는구나!”
“천지를 모르고 날뛰는 건 그쪽이지. 긴말할 것 없다. 덤벼라. 그동안 저지른 죗값을 한꺼번에 치르게 해 주겠다.”
으득!
이를 갈아붙인 동웅이 짓쳐 덤벼들려는 찰나였다.
“에이. 소 잡는 데 닭 잡는 칼을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사숙!”
“……걸아. 그 반대다.”
“아, 그래요?”
조걸이 히죽 웃고는 앞으로 나서서 동웅과 마주 섰다.
“어이, 산적.”
“…….”
“사람이 깔끔 떨 줄도 알아야지. 덤벼 봐. 그 추잡스러운 수염 내가 오늘 깨끗이 밀어 드릴 테니까.”
결국 동웅의 머리에서 노화가 폭발했다.
“이 개 같은 놈! 뼈를 모조리 분질러 버리겠다!”
“주제에?”
낄낄 웃은 조걸은 무시무시한 얼굴로 달려드는 동웅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