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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576화 (574/1,567)

576화. 어디 산적이 나랑 눈을 마주쳐? (6)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화도 나지 않는다더니, 동웅은 그 말을 뼈저리게 실감하는 중이었다.

‘미친놈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그들을 보고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누군가?

녹림에서도 악명 높기로 유명한 대별채의 식구들이다. 무위는 접어 두고서라도, 겉으로 보이는 외양만으로 심약한 이는 숨이 넘어갈 만했다.

그런데 대체 저 어린놈은 얼마나 겁 대가리가 없으면 감히 저런 망발을 막 내뱉는단 말인가?

“이, 이, 이놈이…….”

황당함이 극에 달한 그가 막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밖으로 나온 이와 그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어쭈?”

“……응?”

그러자 어린놈이 눈을 확 부라렸다.

“어디 산적이 나랑 눈을 마주쳐?”

“…….”

“눈 안 깔아, 새끼야?”

“…….”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는 게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던가.

타고난 외모만으로도 어디에서 험한 대접 안 받고 살았던 동웅이다. 그런데 이렇게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이……!”

그가 발작하려는데, 그때 그의 뒤를 지키고 있던 수하가 다급하게 불렀다.

“다, 당주.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뭐?”

동웅이 당황해 주변을 돌아보았다.

커다란 굉음과 소란스런 목소리에 잠에서 깬 이들이 어느새 우르르 몰려나와 있었다.

잠시간 웅성대며 상황을 파악하는 듯하더니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쪽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저 개 같은 놈이!’

고의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저놈이 소란을 피워 버린 탓에 장사에 있는 사람들이 모조리 다 몰려오게 생겼다.

‘빌어먹을.’

아무래도 조용히 처리하기는 그른 듯했다. 시작부터 일이 틀어지니 분노가 치솟았다.

하지만 그가 화를 뿜는 것보다 눈앞의 어린놈이 입을 연 게 먼저였다.

“아이고오오오오!”

대뜸 고함을 내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산적 놈들이 하다하다 민가도 습격하네!”

응? 민가?

동웅이 두 눈을 부릅떴다.

“무슨 민가?”

아니, 잠시만.

우린 민가를 습격하러 온 게 아니라…….

“세상에, 이 새벽에 민가를 습격하러 오다니! 아무리 산적이라지만 정말 피도 눈물도 없네! 피도 눈물도 없어!”

“…….”

그 말을 시작으로 상황은 동웅이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저, 저……! 산적 놈들이 이제는 도시까지 내려오는구나.”

“다행이지! 다행이야! 화산파의 영웅 분들이 없었다면 어쩔 뻔했어! 오늘 마침 와 주셔서 다행이지!”

“내 말이 그 말일세, 내 말이!”

뒤쪽에서 들불처럼 목소리가 일어나자, 객잔을 포위하고 있던 녹림도들이 획 고개를 돌려 구경꾼들을 노려보았다.

“히익!”

찔끔하며 놀란 이들은 게 눈 감추듯 고개를 푹 숙이며 뒤쪽으로 분분히 물러났다.

빠드드득.

동웅은 이를 빠득빠득 갈아붙였다.

‘저 여우 같은 놈이!’

세인들은 생각보다 강호에 대해 잘 알고, 생각보다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저들이 이곳에 녹림왕이 있는 것을 어찌 알 것이며, 대별채에서 녹림왕을 잡으러 왔다는 것을 무슨 수로 알겠는가?

모르는 이의 입장에선 산적들이 이 야밤에 성벽을 넘었다면 그 목적이야 빤하다 여기는 것이 당연했다.

핏발 선 동웅의 두 눈이 청명을 태워 죽일 듯 노려보았다. 하지만 청명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술만 꼴꼴 넘겨 댔다.

“크으! 좋구나.”

입가를 쓱 문지른 청명은 고개를 내려 동웅과 시선을 마주치며 픽 웃었다.

“근데 이 새끼가 자꾸 꼬나보네?”

“…….”

“하……. 세상 정말 좋아졌다. 산적 새끼가 나한테 눈을 부라리는 날도 오고.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옛날에는, 이 새끼야!

산적이니 뭐니 하는 놈들은 지들 숨은 산에 매화만 펴도 그대로 짐 싸서 도망가고 그랬어!

으휴, 니들이 뭘 알겠냐.

쯧쯧 혀를 찬 청명은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은 이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이 정도면 장사에 사는 이들 중 십분지 일은 모인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얼추 판은 다 깔렸고.’

청명이 씩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뭐 해? 저 산적 새끼들 다 밟아 버리지 않고.”

그러자 어둠으로 물든 객잔 안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밟아만 놓으면 되냐?”

“야들야들하게 만들어 놔.”

“오냐.”

이윽고 객잔 안에서 한 무리의 무인들이 성큼성큼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

하나, 둘…… 열, 아니…….

부서진 문을 통해 끝도 없이 밀려나온 이들이 객잔을 포위한 녹림도들과 대치하고 섰다.

검은 무복.

전장에서 갓 돌아온 듯 살기 가득한 얼굴.

그리고 옷을 입고도 존재감을 과시하는, 산적보다 더 산적 같은 근육.

객잔을 포위하고 있던 녹림도들은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애송이들이라며?’

‘얼굴은 애송이 맞잖아?’

‘몸이 애송이가 아니잖아! 이 새끼야!’

객잔을 둘러싼 녹림도들은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걸 애송이라 일컫는다면, 세상에 애송이가 아닌 이가 누가 있겠는가?

딱 벌어진 어깨와 살기 가득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동종업계의 형제(?)들을 마주친 기분이었다. 입은 옷만 아니면 누가 산적이고 누가 도사인지 구분이 불가능할 듯했다.

“산적이라더니, 애들이 생각보다 몸이 영 별론데?”

“산에만 처박혀 있는 놈들이 먹어 봐야 얼마나 잘 먹었겠어? 비실비실하지.”

“우리도 산에만 처박혀 있잖아?”

“어? 그러네?”

자리를 잡고 서선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던 화산의 제자들은 이내 피식피식 즐겁단 듯 웃으며 대별채의 산적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조용.”

뒤쪽에서 백천이 느릿하게 걸어 나왔다. 그러자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좌우로 길을 열어 그가 나갈 길을 만들어 주었다.

저벅. 저벅.

제자들의 사이로 느릿하고 힘 있게 걸어 나온 백천은 앞에 서선 흘러내린 머리를 살짝 쓸어 올렸다. 그리고 녹림도들과 그 뒤로 모인 장사의 군중들을 바라보았다.

“시절이 하 수상하다고는 하나, 양민들이 사는 곳에 도적 놈들이 발을 들이다니.”

그의 눈에서 정광이 흘러나왔다.

“협의를 숭앙하는 화산에서 이런 꼴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청명이 앞서 한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말이었다.

하지만 제자들의 반응은 물론이고, 몰려든 군중들의 반응들도 확연히 달랐다.

“오오!”

“협객님께서 산적들을 무찌르실 모양이구나!”

“아암! 그렇지! 딱 봐도 신뢰가 가지 않는가.”

중인들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이다.

그러자 청명의 어깨가 힘없이 축 처졌다.

조걸은 말없이 그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뭐?”

“괜찮다, 청명아.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뭐, 씨!”

“원래 세상이 공평하지는 않잖으냐?”

“……더러운 세상.”

생긴 것 하나로 이렇게까지 반응이 달라져도 된단 말인가!

물론 생긴 것 하나만으로 이렇게 되지는 않았겠지만, 어쨌든 청명은 억울하고 원통했다.

하지만 그가 느끼고 있는 가슴 아픔은 동웅이 느끼는 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놈들이…….”

상황을 파악한 동웅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우리가 올 것을 알고 있었구나?”

“오, 그걸 이제야 아셨네. 칭찬해.”

“허.”

동웅이 황당하다는 듯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이 버러지 같은 놈들이…….”

이내 그의 눈에서 차가운 빛이 흘러나왔다.

“함정도 주제가 되는 놈들이나 파는 것이지. 새파란 애송이 놈들이 주제 파악이 안 되는구나. 감히 우리 대별채를 상대로!”

“뭐래, 산적 주제에.”

청명이 시큰둥하게 쏘아붙이고는 백천을 바라보았다.

“밤도 늦었는데 빨리 정리하지?”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스르르릉.

백천이 앞으로 한 발짝 내디디며 검을 뽑았다. 그리고 느릿하게 동웅을 겨누었다.

“순순히 항복한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마.”

“이 애송이 놈이 하늘 높은 줄을 모르는구나! 내 오늘 네 가죽을 벗겨 북을 만들어 버리겠다!”

그 말로 대화는 끝났다는 듯 백천이 나직하게, 하지만 더없이 웅혼하게 외쳤다.

“화산!”

“예!”

“악적들을 제압하라!”

“예!”

챙! 채앵! 챙!

검 뽑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밤공기를 가르며 동시에 울려 퍼졌다.

일백이 넘는 인원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발검하는 모습은 지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뭐라 설명하기 힘든 위압감을 불러일으켰다.

“물리쳐라!”

“오오오오오오!”

백상의 신호와 함께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고함을 내지르며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 거침없는 기세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던 산적들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손에 든 병기를 틀어쥐고 거세게 휘둘렀다.

“이 애송이 놈들이!”

“껍질을 벗겨 버리겠다!”

그들 역시 녹록치 않다는 걸 증명하듯 살벌한 욕지거리를 씹어뱉으며 달려드는 화산의 문도들을 맞이했다.

두 눈에서 정광을 내뿜는 검수들과, 흉흉한 살기를 내뿜는 녹림도들이 맞부딪쳤다.

그 충돌을 바라보던 중인들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들이 보기에는 아무래도 저 어린 티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화산의 제자들보다는 험상궂은 녹림도들이 배는 더 강해 보였다.

설령 화산이 저들을 무찌를 수 있다 하더라도 커다란 피해를 감수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을 듯 보였다.

하나.

막상 벌어진 일은 그들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흐아아아아압!”

청자 배의 임평(林平)이 이를 악물며 자신을 맞상대해 오는 녹림도를 노려보았다.

‘최대한 힘을 실어서!’

한눈에 보아도 그의 검보다 열 배는 더 무거워 보이는 도다. 저런 도와 정면으로 마주쳐서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그러니 일단은 저 도를 옆으로 흘려 내고…….

적평이 내력을 불어넣은 검으로 도를 후려쳤다.

그리고 그 순간.

콰아아아아앙!

그의 검에 부딪힌 도가 쩌적 소리와 함께 갈라지더니 뒤로 튕겨나가 그대로 주인의 어깨에 틀어박혔다.

‘응?’

“아아아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녹림도가 뒤로 나뒹굴었다.

“……뭐야?”

되레 더 놀라 버린 임평이 두 눈을 끔뻑였다.

아니…….

그냥 비껴가게 하려고 했는데 그거에 튕겨 나가면 어떡하라고? 지금 저게 날 놀리는 건가?

하지만 이런 상황에 놓인 건 임평뿐만이 아니었다.

“아아아아악!”

“뭐, 뭐냐, 이놈들!”

“무슨 힘이……!”

좌우에서 경악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임평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화산의 제자들이 일방적으로 녹림도들을 밀어 내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을 만큼 거대한 도와 얇디얇은 검이 부딪친다면 당연히 검이 밀려나야 하거늘, 화산의 제자들이 휘두르는 검은 저보다 열 배쯤 더 무거워 보이는 도를 장난감처럼 튕겨 내고 있었다.

“뭐야, 이 새끼들?”

“아니, 애들이 생긴 거에 비해 왜 이리 힘이 없어?”

얻어맞는 녹림보다 후려 까는 화산의 제자들이 더 당황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대별채라면 녹림에서도 나름 유명한 산적들인데, 이렇게나 약하다고?

그때 그들의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뭣들 하느냐?”

모두의 고개가 일제히 뒤로 돌아갔다.

백천이 검을 뽑은 채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빨리 끝내라고 했을 텐데?”

“…….”

이 상황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는 듯 담담한 눈빛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화산 제자들의 가슴속에 확고한 자신감이 피어났다.

‘저 새끼들이 약한 게 아니야.’

‘우리가 강한 거다!’

검을 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박살을 내 버려!”

“가자아아아아아아!”

용기백배한 그들은 고함을 내지르며 빛살처럼 산적들을 휩쓸기 시작했다.

언제까지고 세상에 그 이름을 떨칠, 매화검수들의 전설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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