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5화. 어디 산적이 나랑 눈을 마주쳐? (5)
도시 안으로 통하는 성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것을 확인한 동웅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부숩니까?”
“이곳은 산이 아니다.”
산에서 벌어지는 일은 관도 적당히 외면하는 법이지만, 도적이 성문을 부수고 성안으로 난입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제아무리 엉덩이가 무거운 관아 놈들이라도 움직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뇌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없는 일이 있다. 동웅이 해야 할 일은 최대한 그 선을 넘지 않는 것이었다.
그가 슬쩍 고개를 돌려 성벽을 바라봤다. 그리 높지 않은 성벽은 그들이 오르기에 별 무리가 없어 보였다.
“조용히 처리할수록 좋은 일이다. 성벽을 넘는다!”
“예!”
“관군은 최대한 죽이지 마라! 임소병 그 쥐새끼만 잡아서 빠진다!”
“예!”
기척을 죽이고 성으로 접근한 녹림도들이 성벽에 스며들 듯 달라붙었다.
쇄애애애액!
바람처럼 성벽을 타고 오른 산적들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어둠이 진득하게 내려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성벽 위로 그들의 눈빛만이 산중 짐승의 그것처럼 형형한 빛을 내뿜었다.
탁!
타악!
무사히 성벽을 넘어 아래로 뛰어내린 산적들이 주변을 살피던 그 순간이었다.
“웬 놈이냐!”
꾸벅꾸벅 졸던 경계 위병이 수상한 인기척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가 막 목에 찬 호각을 불어 젖히려는 찰나.
서걱!
“끄륵…….”
빛살처럼 날아든 거치도가 위병의 목을 반쯤 갈라 버렸다.
울퉁불퉁 불규칙한 날에 목이 찢긴 위병이 제대로 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쯧.”
동웅이 그 광경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기절만 시켜도 될 것을. 최대한 문제를 만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동웅도 더는 탓할 생각이 없었다.
저들의 손속을 더없이 잔인하게 만든 것이 그, 나아가 채주인 고홍이었으니까.
짧게 혀를 찬 동웅이 품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내, 바닥에 놓인 시신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약병에 든 것을 천천히 시체에 부었다.
취이이이이익!
조금 전까지 뜨거운 피가 흐르던 시신이 이내 새하얀 연기를 뿜으며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이 비싼 화골산(化骨散)을 이런 데다 쓰다니.”
물론 이렇게 시신을 없애도 위병의 실종이 그들의 짓이라는 걸 모를 바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심증과 물증은 엄연히 다른 법.
물증을 완벽히 없애는 것만으로도 화골산의 가치는 충분했다.
“내려간다.”
“예!”
나름 커다란 도시라고 할 수 있는 장사건만, 성벽의 경계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이 많은 인원이 담을 넘는데도 딱히 문제가 생기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시신이 있던 자리의 흔적을 지운 동웅이 눈을 빛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연락책은?”
“저기 오는 것 같습니다.”
성벽 앞쪽으로 쭉 펼쳐진 인가들 틈에서 한 사내가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내더니, 곧장 동웅의 앞까지 달려와 다급히 고개를 푹 숙였다.
“당주를 뵙습니다!”
“음!”
동웅이 큰 눈을 부라리며 입을 열었다.
“임소병 그 쥐새끼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황연루(黃燕樓)에 묵고 있습니다.”
“황연루?”
“예! 장사에서 제일 큰 객잔 중 하나입니다.”
“객잔?”
동웅이 냉소했다.
“아주 팔자가 피셨군. 형산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대놓고 객잔에 짐을 푸셨다?”
뒤쪽에서 둘의 대화를 듣던 이가 슬쩍 끼어들었다.
“병서생다운 수가 아니겠습니까? 대로에 있는 객잔에 묵는다면 저희도 함부로 일을 벌일 수 없을 거란 계산이겠지요.”
“여하튼 쥐새끼 같은 놈이.”
동웅이 불쾌하다는 듯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놈이 끌고 왔다는 정파의 애송이 놈들은 어디 놈들이냐?”
“그게……. 아무래도 화산파인 것 같습니다.”
“화산파?”
동웅이 눈을 치켜떴다.
“그 섬서의 화산파 말이더냐? 과거에 구파일방이었다는?”
“예. 그 화산파가 맞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이놈이?”
동웅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병서생의 무위야 그들 기준에서 보잘것없는 수준이지만, 그 지모는 인정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병서생이 모습을 감췄다가 정파 놈들을 끌고 나타났다기에 분명 이름 있는 문파를 끌어들였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비무대회에서 이름을 좀 날렸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래 봐야 섬서 촌구석에 있는 작은 문파가 아닌가?”
“당주. 화산파를 너무 얕보시면 안 됩니다. 저 만인방 놈들이 화산에 쳐들어갔다가 목이 달아나신 것을 아시잖습니까?”
“흠.”
잠시 생각에 잠겼던 동웅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 봐야 애송이 놈들일 뿐이지. 야도나 탈명단창 같은 어중이떠중이들은 내 손에 걸렸으면 이미 허리가 잘려 나갔을 것이다.”
그 말에는 감히 반박하는 이가 없었다.
허세가 조금 섞이긴 했지만,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대별채는 녹림칠십이채 중에서도 특출나게 강한 산채였고, 그 대별채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인 동웅은 웬만한 산채의 채주를 찜 쪄 먹을 만큼 강했다.
명성으로든 실력으로든 만인방의 대주들에 뒤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개도 제집 앞마당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가는 법이지. 하지만 이곳은 장사다. 놈들이 감히 화산을 떠나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게 해 주겠다!”
“그럼 객잔을 치실 겁니까?”
“여기까지 온 이상 다른 길은 없다. 다소 문제가 생기더라도 속전속결로 치고 빠진다.”
“예!”
“가자!”
“안내하겠습니다!”
사내가 앞장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대로를 피하기는 했지만, 이백이 넘는 인원이 한꺼번에 움직이며 사람들의 시선을 완전히 피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저, 저게 뭐야?”
“산적 같은데?”
“사, 산적이 왜 여기에!”
야밤에 길을 오가던 이들이 저 멀리서 달려오는 녹림도들을 발견하고 기겁하며 사방으로 몸을 피했다.
몇몇은 골목 깊은 곳으로 내달렸고, 몇몇은 재빨리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엄마…….”
“쉿! 조용히 해!”
산적들의 관심을 끌까 싶어 모두가 숨을 죽였지만, 다행히도 산적들은 그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집 안에 있던 이들이 조심스레 창문을 열어 산적들이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려고……. 도시 한복판에 산적들이 나타나다니.”
“대체 관군들은 뭘 하고…….”
곳곳에서 숨죽인 사람들의 불안한 시선이 질주하는 산적들의 뒤를 쫓았다.
장사를 거의 가로지르다시피 한 대별채의 산적들이 이윽고 커다란 전각 앞에 멈춰 섰다.
“여기인가?”
“예! 여기가 황연루입니다!”
동웅이 눈을 가늘게 뜨며 황연루를 살폈다.
드문드문 창에 불이 켜져 있기는 했지만, 텅 빈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조용하기 짝이 없는 객잔이었다.
하나 그는 객잔 안에서 흘러나오는 인기척을 놓치지 않았다.
“포위해라!”
“예!”
동웅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녹림도들이 날렵하게 움직여 객잔 주위를 둘러쌌다.
물샐틈없이 포위망을 펼친 이들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객잔을 노려보았다.
“돌입합니까? 보아하니 객잔을 전세 낸 모양인데, 대충 다 죽여 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음.”
신중하게 객잔을 바라보던 동웅이 수하에게 확인차 물었다.
“그놈과 함께 온 인원들이 백이 넘는다고 했지?”
“예. 제가 듣기로는 그랬습니다.”
“백이라…….”
도시 한가운데에서 백이 넘는 인원을 죽인다면, 일이 들불처럼 번질 각오를 해야 한다.
‘다 죽여 버리면 편하겠지만.’
이곳이 산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한 동웅이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했다.
“안으로 들어가라.”
“당주님?”
의문 가득한 얼굴로 묻는 수하를 보며 동웅이 입을 열었다.
“안에 있는 놈들에게 대별채의 영웅들이 왔으니 순순히 임소병을 내어놓으라고 해라. 그럼 목숨만은 살려 준다 전하거라.”
“순순히 말을 듣겠습니까?”
“듣게 해야지.”
동웅이 뒤를 돌아보고 작게 말했다.
“모두 무기를 뽑아라. 보는 놈들이 절로 오금이 저리도록!”
“예! 당주!”
무기를 뽑아 든 녹림도들이 일제히 살기를 내뿜었다.
이백에 가까운 녹림도들의 살기가 객잔으로 밀려들었다.
천성적으로 거칠기 짝이 없는 이들이다 보니 그 살기 역시 사납기 이를 데 없었다.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동웅이 턱짓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가서 전해라. 죽을지 내어놓을지 전하라고.”
“예!”
그 말에 명을 받은 이가 객잔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흠.”
팔짱을 낀 동웅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객잔을 바라본다.
‘치기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법이지.’
저 임소병이 대체 무슨 요설로 저들을 현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들도 역시 눈이 있고 감각이 있다면 슬슬 그들이 누구를 상대해야 하는지 실감했을 것이다.
정파 놈들이 굳이 임소병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 이유가 없다. 아마 곧 임소병을 내주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하려 들 것이다.
그런데…….
“…….”
“…….”
일다경이 지나고, 일각이 지나도록 객잔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을 참다못한 동웅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대체 뭘 하느라 이리 오래 걸린다는 말이더냐?”
“그, 그러게 말입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동웅의 성정이 조금 덜 폭급하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고홍과 비교했을 때의 일이다.
성격이 차분하고 인내심이 있는 이라면 산적이 되었겠는가?
열이 받을 대로 받은 얼굴로 객잔을 노려보던 동웅이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버럭 외쳤다.
“이놈들이! 감히 내가 왔는데 시간을 끌어? 좋게 끝내 주려고 했더니!”
분이 치밀어 씨근거리던 동웅이 노기등등하게 명을 내렸다.
“누가 들어가 봐! 무슨 일이 있는지!”
“예!”
동웅의 목소리에서 짜증을 느낀 이들이 파랗게 질려 다급하게 객잔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빌어먹을! 산에서 만났다면 모조리 목을 쳐 버렸을 것을!’
성질 죽이고 조용히 일을 처리하려다 보니 위장 안에 불이 난 느낌이었다.
어쨌건 그들은 산적이고, 이곳은 도시인 이상 최대한 문제가 생기지 않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바람에 흔들리던 객잔 문이 산산조각으로 터져 나갔다.
“어억?”
동웅이 눈을 부릅떴다.
마치 벼락이라도 떨어진 것 같은 거대한 소음에 금세 반응이 돌아왔다.
“뭐, 뭐야!”
“화포 소리인가!”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마치 미리 준비하기라도 한 듯이 도시 이곳저곳에서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기겁하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 광경을 본 동웅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조용……히 처리를…….”
그리고.
쇄애애애애애애액!
쿠우우웅!
문이 박살 난 객잔 안쪽에서 뭔가 빠른 속도로 튕겨져 나오더니 바닥에 처박혔다.
“헉!”
“송초야!”
“세, 세상에!”
산적들이 기함하며 바닥에 처박힌 이에게 달려갔다.
“끄……. 끄으으으…….”
쓰러진 이를 둘러싼 산적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뭐, 뭔 일을 당했길래?”
“세상에 사람 얼굴이 어떻게…….”
두 배는 더 크게 부풀어 올라 본래의 이목구비를 완전히 잃어버린 송초를 본 이들이 다들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체 그 짧은 사이에 사람을 얼마나 패 댔으면 이런 몰골이 나온다는 말인가?
“이, 이놈들이!”
그들이 이 난데없고 어이없는 상황에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던 때였다.
저벅. 저벅. 저벅.
어둠이 자욱한 객잔 안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찰랑. 찰랑.
‘술?’
아직 얼굴이 보이지 않는 이의 손에 들린 것이 술병이라는 것을 확인한 동웅이 아연한 눈길로 그를 주시했다.
이윽고 그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나자, 동웅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제 갓 약관이나 되었을까 싶은 솜털이 보송보송한 어린놈이 불콰하게 취한 얼굴로 휘적휘적 걸어 나와 그들을 보고 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객잔을 포위하고 선 녹림도들을 쭉 훑어보더니,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아니!”
“…….”
“이 산적 새끼들이 미쳤나?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와서 칼을 뽑고 있어? 다 뒈지려고!”
“…….”
거침없이 터져 나오는 파릇파릇한 욕지거리에 동웅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쩌억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