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4화. 어디 산적이 나랑 눈을 마주쳐? (4)
장사.
거리를 오가는 이들의 얼굴엔 깊은 수심이 어려 있었다.
눈치를 보듯 주변을 슬슬 살피던 이들은 안면 있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작게 대화를 나누었다.
“소식 들었는가?”
“……형산 말인가?”
“그래. 오늘도 형산에 올랐던 상행 하나가 연락이 끊겼다는구먼.”
“어휴. 이게 몇 번째인가?”
모두가 일제히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거 이러다간 정말 큰일이 날지도 모르겠네. 심지어 이번에 연락이 끊긴 상행은 그 등천표국에 호위를 의뢰했었다더군.”
“그게 뭔 소린가? 그럼 표국에서 호위를 했는데도 연락이 끊겼다는 말인가?”
“그렇다니까!”
“세상에…….”
등천표국이라면 이 지방에서는 나름 힘깨나 쓰기로 유명했다. 그런 이들이 호위를 했는데도 산적들을 막아 내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몇십 년 동안 별문제가 없었는데, 왜 이제 와서…….”
“듣자 하니 저 대별산에 있던 산적 놈들이 형산으로 몰려왔다더구먼.”
“그 대별채 말인가? 그 흉악한 놈들이?”
“그렇다지 않는가!”
사내가 불안 어린 얼굴로 은근슬쩍 주변을 돌아보았다. 마치 이 주변에도 산적이 있을까 의심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이건 아직 확실치 않은데, 형산뿐만 아니라 다른 산에서도 실종되는 이들이 속속 생기기 시작했다는군.”
“끄응. 이게 뭔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사람이 실종되는데 관아는 왜 나서지 않는단 말인가?”
“언제 관군들이 그런 일을 처리하는 걸 본 적 있는가? 코앞에서 벌어지는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 양반들인데, 저 깊은 산속에서 벌어지는 일이야 당연히 모르쇠로 나가지!”
“이거 원 불안해서 살 수가 있나.”
상황이 아무래도 영 심상치 않으니 다들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 단순히 형산을 오르지 못하게 되는 데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장사는 위로는 동정호를 끼고, 아래로는 형산을 끼고 있는 도시였다. 다른 큰 도시처럼 특색 있는 물건이 나거나 소출이 좋은 편이 아니었기에 중원의 위와 아래를 잇는 무역의 거점으로 수입을 올리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형산을 오르는 상행들이 변을 당하는 일이 잦아진다면, 상행들이 장사를 피할 수밖에 없고, 그럼 도시에 커다란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어휴. 세상이 어찌 되려고.”
“그러게나 말일세. 산적 놈들이 설치면 그걸 해결해 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정파 어쩌고 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뒷짐 지고 구경만 하니.”
“저들이 어디 보통 산적들인가? 대별채라면 그 녹림 놈들 중에서도 끗발이 좋기로 유명한 놈들이잖은가?”
“큰 도적은 못 건드리고, 작은 도적 놈들만 잡아 대는 게 무슨 놈의 협객이고 무슨 놈의 정파인가!”
“쉿! 이 사람 보게? 겁도 없이……. 목소리 낮추게! 누가 들을까 겁나네!”
“우리뿐인데 듣긴 누가 듣는다고! 산적 놈들이 날뛰자마자 외부인은 싹 발길을 끊었는데! 저길 보게, 성문이 저렇게 뻥 뚫려 있는데 쥐새끼 한 마리도 안 보이……. 어?”
침을 튀겨 가며 말하던 이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어어? 저게 뭔?”
그도 그럴 게, 황량하게 뚫려만 있던 성문으로 인파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검은 무복.
허리에 찬 기다란 장검.
딱 벌어진 어깨와, 옷을 입고도 확연히 보일 만큼 탄탄한 근육은 절로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거기에 의지견정이란 말이 절로 떠오를 만한 눈빛과 단단한 표정까지 더해지니 사람의 마음을 확 이끄는 듯했다.
‘누구지?’
‘어, 엄청 많은데?’
한두 사람만 있어도 확연히 티가 날 만큼 존재감이 넘치는 이들이건만, 심지어 그런 이들의 수가 백이 족히 넘어간다.
그 광경에 절로 압도당한 이들은 목을 살짝 움츠린 채 입만 움직여 속삭였다.
“무파 같은데?”
“사, 산적은 아니지?”
“이 양반이 미쳤나. 저게 어딜 봐서 산적인가?”
“아, 아니 팔뚝이 딱 산적 팔뚝인데…….”
그 말을 들었는지 무리의 선두에 선 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뒤쪽에 따라오던 이들이 움찔하더니 걷어 올렸던 소매를 슬며시 아래로 단정히 내렸다.
멀찌감치 서서 쑥덕대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모여들기 시작했다.
겁은 났지만, 딱히 위협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니 궁금증이 두려움을 앞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많아지니 식견이 있는 자도 생겨났다.
“어엇? 저 문양! 화, 화산파 사람들이다!”
“화산?”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말을 한 이를 바라보았다.
“섬서에 있는 화산이 여기에 왜 온단 말인가?”
사람들은 그 말을 쉬이 믿지 않았다. 화산이라면 장사로부터 천오백 리는 더 떨어진 섬서의 문파가 아니던가?
그런 곳의 문하가 한둘도 아니고 백이 넘게 장사를 방문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아니, 맞다니까! 저기 가슴팍에 매화 문양이 보이지 않는가? 천하에 수많은 문파가 있지만, 매화를 상징으로 삼는 곳은 화산파밖에 없다니까?”
세인들이 다시 일제히 화산파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과연 모두의 가슴에 붉은 매화 문양이 수놓여 있었다.
“맞네, 맞아! 화산파구먼!”
“그런데 화산파가 대체 여긴 왜?”
사람들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설마 산적들 때문에?”
“그, 그런가?”
“더 가까운 곳에 있는 무당이나 소림도 오지 않았는데, 그 먼 곳에 있는 화산이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온다고? 산적들을 때려잡으러?”
“에이, 설마!”
모두 믿지 못하는 듯 의심하면서도 미약한 기대감이 피어난 얼굴로 화산파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게 될까? 그 무서운 녹림 놈들을…….”
“에헤이! 모르는 소리! 저 화산이 천하비무대회에서 그 무당과 소림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지 않았는가?”
“그뿐인가? 얼마 전에는 만인방과 맞서 싸워 이기지 않았나. 지금의 화산은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른다고!”
“그, 그렇지! 그랬었지!”
도시 안으로 들어서는 화산의 제자들을 보는 눈빛이 조금씩 달라졌다.
그리고 그 눈빛을 받는 이들은…….
‘야, 어깨 펴! 어깨!’
‘허리 쭉 펴고 걸으라고! 있어 보이게!’
‘눈에 힘 줘! 힘!’
……조금이라도 멋져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애초에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포장이 부실하면 제값을 받지 못하는 법. 과거에는 그런 걸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지금은 다들 청명의 영향으로 외양에도 나름 신경을 쓰고 있었다.
덕분에…….
‘왜 나는 또 맨앞인가.’
강제로 선두에 서게 된 백천은 맹렬하게 쏟아지는 시선을 오롯이 받아야 했다. 심지어 뒤에선 이를 악물고 해 대는 잔소리가 쏟아졌다.
“아, 거 허리 좀 펴라고.”
“…….”
“턱 들어, 턱. 얼굴은 뒀다 어디다 쓸 거야? 이럴 때라도 써야지. 빨리 턱 들고 제대로 보여 주라고.”
저 개새끼…….
등을 연신 찔러 대는 청명의 손길에 백천은 하는 수 없이 턱을 번쩍 들었다. 영웅건이 살짝 흩날리며 희고 단정한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러자 과연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오오. 훤앙하구만.”
“잘생겼네. 정말 훌륭해!”
칭찬이 쏟아졌지만, 백천은 어쩐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화산이 장사를 구하러 왔다!”
“녹림과 싸우러 오셨다!”
그때 조금 부자연스러운 말투로 몇몇 사람들이 외쳤다. 그러자 잔뜩 흥분해 있던 세인들이 열광하며 박수를 쳐 대기 시작했다.
청명은 흐뭇하게 웃었다.
‘거지새끼들 일 잘하네.’
오늘 객잔 밖에다가 음식 많이 내놔야겠네.
홍대광이 이를 악물고 당부했는지, 거지들이 필사적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선동을 하는 중이었다. 평소에도 이 정도만 일을 해 주면 무능하다고 구박받을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쏟아지는 환호와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화산의 제자들은 미리 알아 둔 객잔에 도착했다.
운암이 다시 한번 당부했다.
“다들 오늘은 여기에 여정을 푼다. 객잔을 전세 내어 다른 객들은 없겠지만, 그래도 폐를 끼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거라.”
“예!”
화산의 제자들이 걸음 맞추어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마저도 훌륭하다며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어 대었다. 그때,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청명이 그들을 돌아보며 씨익 웃어 주었다.
“너무 걱정 마세요. 곧 처리해 드릴게요!”
“우와아아아아아아!”
“화산파 만세!”
커다란 함성이 장사에 가득 울려 퍼졌다.
“……아. 살 것 같다.”
“세상에. 따뜻한 물이 이렇게 좋은 것일 줄이야.”
백천은 며칠 만에 말끔해지고 보송보송해진 제자들을 보며 조금 쓰게 웃었다.
‘고생들이 많긴 했지.’
늘 같이 다니던 인원들이야 청명이 놈의 패악에 당한 경험이 많아서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다른 제자들은 이런 강행군을 해 보는 게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불만 한 마디……. 아니, 사실 불만은 끝도 없이 쫑알댔지만 어쨌든 반항은 하지 않는 모습이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었다.
백천은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들 정말 노고가…….”
“백천 사숙! 진짜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그동안 사숙께서 청명이 놈에게 이렇게까지 시달리신 줄은 몰랐습니다.”
“어흑, 사숙!”
칭찬을 하려던 백천은 슬그머니 다시 입을 닫아야만 했다.
얘들아……. 사람을 그런 눈으로 보지 말거라.
눈물이 날 것 같잖니.
생각해 보면 백천이 이들을 걱정하고 기특해할 때는 아니었다. 자타공인 가장 큰 피해자는 백천이 아니던가.
작게 한숨 쉰 그는 말했다.
“어쨌든, 쉬는 것도 좋지만 여기에도 남의 눈이 있다고 생각하고 너무 풀어지지 말거라.”
“예, 사숙! 걱정 마십시오!”
화산의 제자들이 허리를 쭉 폈다. 그리고 다시 조잘조잘 저들끼리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아까 그 시선들 봤어?”
“나는 오금이 다 떨리더라.”
장사에 들어오며 받았던 그 시선들을 떠올리며 모두 몽롱하게 풀어졌다.
애초에 밖을 다녀 본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은 화산파지만, 간간이 일이 있어 밖으로 나갈 때에도 이토록 선망 어린 시선을 받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결국 화산의 위상이 얼마나 올랐는지 가장 모르는 이들이 되레 화산파의 제자들인 셈이었다. 그들도 이제야 입지가 얼마나 올랐는지를 실감했고, 장로님들이 왜 그렇게 문파의 위신을 생각하라 당부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더 열심히 해야지.’
‘무당이고 소림이고 다 박살을 내 버릴 테다.’
의지에 불타는 제자들을 보며 백천은 나지막이 웃었다.
“내일 당장 전투를 치러야 할지 모르니 오늘은 푹 쉬어 두거라. 마음도 단단히 다잡아 두고!”
“예, 사숙!”
“걱정 마십시오, 사형.”
“그래. 많이 먹어라.”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인원을 파악하고 관리를 끝낸 백천은 계단을 올라 최상층으로 향했다.
똑똑.
“백천입니다.”
“들어오너라.”
문을 열자 객실 안에 모인 이들이 보였다.
현상과 현영, 운암과 운검을 포함한 운자 배 다섯, 거기에 임소병.
마지막으로 청명의 모습까지 확인한 백천은 끄트머리 쪽 자리에 앉아 단정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제자들은 다들 식사를 하며 쉬고 있습니다.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그런데…… 이걸 이리 요란하게 해야 하는 건지…….”
백천이 슬쩍 얼굴을 붉히자 임소병이 낄낄 웃었다.
“이런 건 화려할수록 좋습니다. 그리고 왜 부끄러워하십니까! 협의를 위해서 산적 놈들을 때려잡는 건 당연히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이지요.”
“…….”
아니, 다 좋은데…… 그 말을 댁이 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예? 산적 놈아?
백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내일 오전에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아, 그건 잠깐만.”
“응?”
청명의 말에 백천이 고개를 돌렸다.
“일단 조금 기다려 보자, 사숙.”
“기다리다니?”
“이만큼 요란하게 떠들어 댔으니, 아마 그 산적 놈들도 곧 이 사실을 알게 되겠지.”
“…….”
“그럼 쳐들어오지 않겠어?”
“산적이 여기에? 여긴 도시가 아니냐. 그런데 산적 놈들이 여길 쳐들어온다고?”
“평소 같으면 모르지만, 여기에 인질이 있잖아.”
“이, 인질?”
백천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인질(?)이 조금 수줍은 듯 웃었다.
“살면서 지금이 몸값이 제일 높은 시절 같은데. 하하, 뭔가 뿌듯합니다.”
아무래도 저 새끼는 제정신이 아니다.
아, 아니. 녹림왕한테 저 새끼라고 하면 안 되는데…….
혼란에 빠진 백천을 내버려 두고, 청명이 임소병을 바라보았다.
“오겠지?”
“당연히 오겠죠.”
임소병이 어깨를 으쓱한다.
“고홍은 성격이 매우 급한 자입니다. 이쪽에서 행동을 취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릴 리 없습니다.”
“자, 잠시만요.”
백천이 조금 다급하게 소리쳤다.
“산적이 도시에 쳐들어오면 난장판이 나잖습니까! 그럼 더더욱 우리가 밖으로 나가야죠.”
“쯧쯧쯧. 저 양반 아직도 순진하네.”
“응?”
청명이 혀를 찼다.
“기껏 산적 놈들 때려잡아서 명성을 높일 기횐데, 산속에서 쿵짝쿵짝 하면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봐?”
“…….”
“눈앞에서 때려잡아 줘야 소문도 잘 퍼지고 훨씬 자극적이다 이 말씀이지!”
백천은 황망하게 그를 바라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화산은 어디로 가는가.’
원시천존이시여.
저 새끼가 도삽니다, 도사! 대체 벼락은 뒀다가 어디 쓰십니까?
“이왕 할 거면 확실한 게 좋지. 조금 기다려 보자고. 며칠 내로 뭔가 벌어질 테니까.”
하지만 그 청명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고홍의 성격은 그의 예상보다도 훨씬 급했고, 그들의 정보력은 이미 장사까지 닿아 있단 점이었다.
“이 안에 있다 이 말이지?”
산기슭에서 장사의 성문을 바라보던 거력패웅(巨力覇熊) 동웅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느 미친놈들인지 모르겠지만, 대별채가 어떤 곳인지 똑똑히 알려 주지!”
그를 따르는 녹림도들도 클클거리며 쉰 목소리로 웃어 댔다.
“가자!”
“예!”
어둠 속에서 형형한 눈빛들이 싸늘하게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