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3화. 어디 산적이 나랑 눈을 마주쳐? (3)
“모두 정지이이이!”
“끄아아아.”
“아오. 빌어먹을!”
청명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무섭게 화산의 제자들이 그 자리에 털썩털썩 주저앉았다.
“쯧쯧쯧쯧.”
수레에서 폴짝 뛰어내린 청명이 혀를 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 얼마나 뛰었다고 더위 먹은 개처럼 헥헥대고 있어?”
그 말에 화산 제자들의 눈에 불꽃이 확 피어올랐다.
“야, 이 새끼야! 수레에 타고 온 놈이 그딴 말을 해?”
“수레바퀴에 콱 매달아 버릴라!”
“네 몸에 흐르는 피는 무슨 색이냐!”
금방이라도 폭동이 일어날 듯 분위기가 들끓어 올랐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청명은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니들이 좀 더 빨리 달렸으면 벌써 도착해서 쉬었지! 하여튼 느려 터져 가지고는!”
“…….”
모두가 경악하여 입을 쩍 벌렸지만 더 이상 반박하진 않았다. 이제는 할 말도 없고 더 말 섞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들을 더 황당하게 만든 것은 우마 대신 수레를 끌고 온 백천과 그 무리의 반응이었다.
“끄응. 오늘은 끝이구나.”
“그래도 북해 다녀올 때보다는 훨씬 낫지 않습니까? 수레도 가볍고.”
“그건 그렇지. 그때도 이 정도만 됐으면 그 고생은 안 했을 텐데.”
비교적 여유 있는 모습으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수레에서 빠져나오는 그들의 모습에, 화산 제자들의 두 눈엔 눈물이 핑 돌았다.
‘사숙, 대체 무슨 일을 겪고 오신 겁니까.’
‘왜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냐고. 왜!’
‘아무래도 조련이 너무 심하게 된 거 아냐?’
청명은 여전히 숨을 헐떡대는 화산의 제자들을 보다 눈살을 찌푸렸다.
“창피한 줄 알아야지! 눈이 달렸으면 뒤에 한번 봐! 병 걸린 사람도 저렇게 문제없이 뛰어오잖아. 그런데 사지 멀쩡한 양반들이 고작 이 정도로 뭐가 힘들다고 그렇게 앓는 소리를 내?”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뒤쪽에 있는 임소병에게로 향했다.
임소병은 화산 제자들의 시선을 받으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 이내.
털썩.
“허억! 녹림왕이시여!”
“정신 차리십시오!”
그 자리에 쓰러졌다.
번충과 흑야호가 기겁하며 엎어진 임소병에게 달려들었다.
“저, 저 하여튼 반편이 같은 게! 으휴!”
청명이 속이 터진다는 듯 가슴을 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끄으으으.”
부축을 받아 상체를 간신히 반쯤 일으킨 임소병은 혼이 빠진 것 같은 얼굴로 멍하게 중얼거렸다.
“……다 미쳤어.”
“…….”
말은 안 했지만, 번충과 흑야호도 같은 심정이었다.
‘못 달려 죽은 귀신이 들러붙었나?’
‘어떻게 눈 뜨자마자 달리기 시작해서 해가 넘어갈 때까지 계속 달릴 수가 있지? 말도 이렇게 달리면 거품 물고 쓰러지겠다.’
달리는 건 그렇다 치자.
이 말도 안 되는 속도는 대체 뭐란 말인가?
더 중요한 것은 녹림에서 나름 고수라 불리는 그들조차 숨이 넘어갈 만한 강행군을 치렀음에도, 낙오한 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화산은 정말 보통이 아닌 곳이구나.’
물론 고수와 하수를 나누는 기준이 비단 체력뿐만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체력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는 중원 어느 문파도 따르지 못할 수준에 오른 것이 분명했다.
번충과 흑야호는, 왜 임소병이 굳이 다른 곳들을 제쳐 두고 화산에 도움을 청했는지를 뼈저리게 실감했다.
“정말 요즘 것들은 근성이 없어요, 근성이!”
“크흠.”
“크흐흐흠.”
편안하게 수레를 타고 온 옛것(?)들이 어색하게 헛기침하며 수레에서 내렸다.
제자들은 열심히 달리는데, 수레에 타고 온 것이 민망한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민망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끄으으응. 흔들리는 수레에 온종일 타고 있었더니 허리가 쑤시는구나.”
현영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도착은 멀었느냐?”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끄응. 평생을 화산에서 크게 벗어나질 않고 살다 보니, 중원이 이렇게 넓은지도 몰랐구나. 가도 가도 끝이 없어.”
현영의 말에 운암이 쓰게 웃었다.
물론 대수롭지 않게 한 말이겠지만, 그 안에 화산이 지난 세월을 어찌 지내 왔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잠은? 오늘도 땅바닥에 누워 자는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운암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 언덕만 넘으면 장사(長沙)입니다.”
“엥? 벌써 그만큼 왔어?”
“예. 오늘은 장사의 객잔에서 쉴 생각입니다. 벌써 며칠 야영을 했으니, 형산에 들어가기 전에 몸을 풀어 두어야지요.”
그 말에 널브러져 있던 화산의 제자들이 번쩍 눈을 희번덕거렸다.
‘침상!’
‘따뜻한 물!’
‘차갑지 않은 음식!’
하지만 청명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로 도끼눈을 떴다.
“거 대충 아무 데서나 자리 깔고 자면 되지, 돈 아깝게 뭔 객잔이에요?”
“됐다.”
현영은 그 말에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애들은 그렇다 치고, 내가 허리가 아파서 못 버티겠다. 편안한 데서 잠 좀 자자꾸나.”
“헤헤. 장로님이 그러시다면야 괜찮은 객잔을 찾아봐야죠.”
태세를 전환하는 속도가 얼마나 순식간인지, 다른 제자들은 모두 경악하며 이를 갈아붙였다.
‘저 천벌받을 놈.’
“그런데…….”
그 와중에 유일하게 내내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운검이 당연히 가져야 할 의문을 제기했다.
“그럼 도시로 바로 들어가면 될 터인데, 왜 여기서 세운 겁니까, 사형?”
그러자 운암이 쓰게 웃으며 남들 몰래 슬쩍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안 그래도 지금 그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다.”
그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모두를 둘러보았다.
“다들 듣거라.”
“예!”
“장사는 큰 도시다. 그 안으로 우리가 한 번에 들어간다면 세인들의 주목을 끌게 될 게 분명하다.”
모두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야 바닥에 그리 함부로 주저앉고, 너희끼리 농을 해도 문제가 되지 않겠지. 하나 장사 내에서는 그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너희의 모든 행동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화산이 어떤 곳인지를 알게 한다는 장문인의 말씀을 항시 잊지 말거라.”
그 말에 모두가 대답 대신 한쪽을 바라보았다.
“……왜?”
모두의 시선을 한꺼번에 받게 된 청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듯 무구하고 천진난만한 얼굴이었다.
객잔에서 쉴 생각에 밝아졌던 제자들의 얼굴로 다시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괜찮을까?’
‘그냥 여기서 자는 게 낫지 않을까?’
백천 역시 마찬가지로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 사숙. 그러지 말고 그냥 대충 야영을 하시는 게…….”
운암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나도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다만, 해야 할 일이 있다. 일단은 장사의 개방 분타에 들러서 그간 별다른 문제가 없었는지도 확인해 봐야 하고.”
“으음. 그렇군요.”
백천이 연신 청명을 힐끔거렸다. 그뿐만 아니라 함께 수레를 끌었던 모두 하나같이 불안에 가득한 얼굴로 청명을 보았다.
‘불안한데.’
‘위장이 아픈데.’
‘아무리 생각해도 잘하는 짓이 아닌 것 같은데.’
하지 말라는 짓은 늘상 귀신같이 찾아서 하는 청명이 아니던가?
그때 묵묵히 서 있던 현상이 입을 열었다.
“걱정할 것 없다.”
“예?”
늘 완고하던 그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걸려 있었다.
“청명이 너는 장사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말거라.”
“예? 아니, 왜 저만…….”
“허허. 그냥 그리하자꾸나.”
현상의 더없이 현명한 결정에 화산의 제자들이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컴컴하던 얼굴에서 먹구름이 다시 걷힌 것이다.
‘살았다! 역시 장로님이야!’
‘이것이 연륜이다, 이 새끼야!’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되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백천이는 먼저 가서 적당한 객잔을 수배해 보거라. 아이들의 수가 많으니 두어 곳에 나누어 묵게 해도 괜찮다.”
“예, 사숙!”
“자, 다시 출발하자꾸나!”
화산의 제자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장사를 향해 나아갔다.
* * *
단상 위에 놓인, 커다란 짐승 가죽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거대한 의자.
그곳에 앉은 사내가 다리를 꼬며 팔걸이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참으로 길었군.”
이 별것 아닌 의자에 앉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
의자의 아래에서 이곳까지, 고작 몇 걸음에 불과한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해 수십 년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된 것이다.
하나 아직은 이 자리가 온전히 그의 것이라 할 수 없었다.
‘어쨌든 이제 곧 내 것이 되겠지.’
사내는 녹림십채 중 하나인 대별채의 채주, 광우도 고홍이었다.
그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뒤로 젖히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벌컥.
문이 활짝 열리고 짐승 가죽을 두른 사내 셋이 안으로 들어왔다.
“채주!”
“무슨 일이냐?”
“이놈들이 도무지 말을 들어 처먹지를 않습니다.”
“쯧.”
고홍은 못마땅한 얼굴로 짧게 혀를 차며 선두의 사내를 노려보았다.
“네가 산채에서 편히 산 기간이 너무 길었던 모양이구나. 그런 놈들 하나 굴복시키지 못하다니.”
“끄응. 그런 게 아니라 이놈들이 보통 독종이 아닙니다. 손톱을 모조리 뽑고, 열 손가락에 모조리 대침을 박아도 눈 하나 깜빡하질 않습니다.”
“……지독하군.”
“여기서 더 하려면 팔다리 하나쯤은 잘라 내야 하는데, 그래도 됩니까?”
그러자 고홍의 눈에 살기가 화르륵 타올랐다.
“이 병신 같은 놈이!”
우레와 같은 고함에 안으로 들어온 산적들은 일제히 목을 움츠렸다.
“그놈들을 못쓰게 만들어 버리면, 글자도 모르는 네놈들을 데리고 녹림을 운영하란 말이냐? 왜? 차라리 망해 자빠지라고 고사라도 지내지!”
“하, 하지만 도무지 회유가 되지 않아서…….”
“빌어먹을.”
고홍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래서 그 쥐새끼가 도망치게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임소병이 죽었다면 녹채에 남은 놈들을 회유하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그들의 충심이 대단하다고는 해도, 결국 충심이란 모실 이가 있을 때나 발휘되는 법이니까.
적당히 대우를 해 주고, 어르고 달래다 보면 결국은 못 이기는 척 그를 따르게 될 터였다.
하지만 그는 임소병을 잡는 데 실패했다.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놈이 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모습을 감춰 버린 것이다.
“녹림왕……. 아니, 그 쥐새끼의 종적은 여전히 찾지 못했느냐?”
“……예.”
“이 쓸모라고는 없는 놈들 같으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본 고홍은 이내 의자 뒤에 꽂혀 있던 창을 뽑아 그대로 집어 던져 버렸다.
“히익!”
산적들이 재빨리 몸을 웅크렸다. 기운을 잔뜩 품은 창이 팽팽 돌며 그들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온몸이 저릿할 정도였다.
“찾아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놈을 찾아내!”
“예!”
일그러진 고홍의 얼굴은 참혹할 정도였다.
‘이대로 시간을 끌다가는 다른 놈들에게도 기회를 주게 된다.’
다른 채주들이 임소병을 먼저 찾아낸다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임소병이라는 패를 틀어쥐고 그를 공격해 올 수도 있고, 제 손으로 직접 죽이고 정당한 녹림왕의 승계를 주장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에게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다른 산채보다 먼저 그놈을…….”
“채주!”
그 순간 다른 누군가가 고함을 내지르며 안으로 박차고 들어왔다. 고홍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나, 나타났습니다!”
“음?”
안으로 들어온 이는 숨을 잔뜩 들이쉬더니 토하듯 빠르게 말을 쏟아내었다.
“자, 장사! 장사에 녹림왕……. 아니, 임소병 그놈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뭐?”
고홍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어디라고?”
“자, 장사입니다.”
“……장사라면 바로 옆이 아니냐?”
“예!”
“그놈이 내 코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고?”
“예!”
“허……. 허허허.”
순간 어이가 없어진 고홍은 한참을 웃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콰아아앙!
내리밟은 그의 발이 바닥을 두부처럼 으스러뜨렸다.
“이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모양이로군! 나를 우습게 보고 코앞에서 얼쩡거리는 걸 보니.”
“채, 채주, 진정하십시오!”
“진정?”
“장사입니다. 도시입니다. 저희가 그곳에 직접 가면 문제가 커집니다.”
“문제는 빌어먹을! 그놈이 지금 내 앞에 나타났는데 눈 뜨고 구경이나 하란 말이냐?”
“혼자가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정파 놈들을 우르르 끌고 왔습니다.”
“정파?”
“예. 일단 신분을 확인하고는 있습니다만…….”
“그놈이 단단히 미쳤구나! 하다못해 이제는 정파 놈들을 끌어들여?”
버럭 소리친 고홍은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 수가 얼마나 되느냐?”
“이백은 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뭐라 했느냐?”
“이백이 넘지 않는다고…….”
“허허?”
고홍이 헛웃음을 흘린다.
“고작 이백을 이끌고 왔다고? 내 코앞에?”
“그,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면면을 살펴보았을 때는 대체로 어린 티가 풀풀 나는 것이, 일단은 그리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다고…….”
“동웅(董雄)!”
“예, 채주!”
“당장 아이들을 이끌고 가서 그놈을 잡아 와라!”
“하, 하지만 관아는…….”
“관아 따위는 신경 쓸 것 없다. 어차피 내가 녹림왕만 된다면 그놈들은 감히 나를 건드릴 수 없어!”
“예!”
“이런 기회가 두 번 오리란 보장도 없으니 당장 움직여라! 지금 당장!”
“예, 채주!”
먼저 들어왔던 세 사람이 헐레벌떡 밖으로 뛰쳐나갔다.
고홍은 의자에 다시 털썩 앉았다. 그리고 의자 팔걸이를 가만히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그 멍청한 놈이, 이쯤 되니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로군.”
녹채를 잃은 놈이 쓸 수 있는 수라 해 봐야 빤하다.
곧 이 자리가 제 것이 될 거라는 생각에, 고홍의 입꼬리가 절로 슬그머니 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