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1화. 어디 산적이 나랑 눈을 마주쳐? (1)
스윽. 스윽.
새하얀 종이 위로 얇은 세필이 춤을 췄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생겨난 글씨들이 커다란 종이를 순식간에 검게 빼곡히 메웠다.
한눈에 보아도 고급스러운 녹빛 장삼을 입은 중년인은 원목 책상에 앉아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과 씨름을 하는 중이었다.
“가주님!”
한참 이어지던 글씨 쓰는 소리는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멈추었다.
쓴 것을 한 번 더 물끄러미 바라본 중년인은 고개를 들어 문 쪽에 시선을 던졌다.
“무슨 일이냐?”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중년인, 즉 당군악의 눈이 살짝 못마땅한 듯 찌푸려졌다.
“업무를 보는 와중에 손님이라니. 장로전에 전하면 될 터.”
말이 다소 날카롭게 나오니 문밖에 선 자가 움찔했다.
“그것이, 화산에서 온 전갈이라…….”
화산이란 말에 당군악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화산?”
“예.”
탁.
세필을 미련 없이 내려놓은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들어오너라.”
“예!”
문이 벌컥 열리고 당패가 안으로 들어와 예를 표했다. 그리고 그의 뒤로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는 거지가 따라 들어왔다.
앞으로 한 발짝 나선 거지가 포권을 했다.
“개방 성도 분타주인 주풍(酒風)이라 합니다.”
“개방.”
당군악의 날카로운 시선이 객을 한차례 훑었다.
실로 싸늘하고도 위압적인 시선에 주풍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거 심장이 떨려서 원.’
당가에 용무가 있어서 오긴 했지만, 설마 가주를 직접 대면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가 아무리 분타주라고는 하나, 일개 분타주와 천하를 호령하는 사천당가 가주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신분 차이가 있었다.
평소라면 대문 앞에서 서찰을 전하고 돌아가거나, 멀리서 가주의 모습을 힐끔 보는 정도가 전부였을 텐데…….
‘다짜고짜 가주전으로 끌고 올 줄 누가 알았냐고.’
주풍은 손바닥을 바지춤에 슥 문지르고는 품 안의 서찰을 꺼냈다.
“섬서의 화산이 본방을 통해서 가주께 전하라고 한 서찰입니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될 말까지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이, 이 서찰은 개방에서 가장 중요한 소식을 나를 때 쓰는 청응(靑鷹)이라는 매에 묶여 온 것입니다. 조금의 시차는 있을지 모르지만, 화산에서 서찰이 나온 지 이틀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을 겁니다.”
“흐음. 이리 줘 보시게.”
“예!”
주풍이 땀을 뻘뻘 흘리며 재빨리 당군악에게 뛰어 가려 했다. 하지만 발을 채 제대로 떼기도 전에 불쑥 튀어나온 당패의 손이 그를 가로막았다.
“이쪽으로.”
“아……. 여, 여기 있습니다.”
당패는 주풍에게서 건네받은 서찰을 당군악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당군악은 말없이 서찰을 열어 안의 내용을 확인했다.
“흐음.”
내내 차갑게 굳어 있던 당군악의 얼굴이 살짝 꿈틀했다.
서찰을 읽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그의 표정은 여러 번 변했다. 가만 지켜보던 당패의 입가에 쓴웃음이 어렸다.
어지간한 일로는 표정이 잘 변하지 않는 당군악이 저런 모습을 보여 줄 때는 화산에 관한 소식을 듣거나, 그 화산신룡을 마주했을 때뿐이었다.
“흐으으음.”
이내 서찰을 모두 읽은 당군악은 묘하다는 듯 턱을 긁적이며 물었다.
“이 서찰을 나에게 전하라 했다?”
“예, 그렇습니다!”
“알겠다.”
“예! 혹여 화산에 전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괜찮네. 그 급한 성미에 내 답변을 기다리며 산을 지키고 있지는 않겠지.”
영문 모를 말이었지만, 주풍은 일단 고개를 숙였다.
“그럼.”
그리고 재빨리 몸을 돌렸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곳에 한순간도 더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정파 내에서도 은근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게 사천당가였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심처라고 할 수 있는 가주의 집무실이 아닌가?
철석간장을 지닌 이가 아닌 이상, 두려울 수밖에 없다.
‘그건 그렇고.’
나가기 직전 저도 모르게 슬쩍 뒤를 돌아본 주풍은 마른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화산과 당가가 모종의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야 웬만한 이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설마 이토록 중히 여길 줄이야.’
간혹 당가에 소식을 전해 나르기는 했다. 하지만 소림이나 무당에서 온 소식을 전할 때조차 가주는커녕 집무실조차 구경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고작 서찰 하나로 이렇게 당가주를 직접 대면할 줄이야.
‘어쩌면 이들의 관계가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끈끈할지도 모르겠군.’
이건 반드시 보고를 해야겠다 생각하며 주풍은 걷는 속도를 올렸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주풍의 모습을 보며 당패가 혀를 찼다.
“저리 걷다간 발에 땀나겠습니다.”
“흠.”
하지만 이미 당군악의 머릿속에서 주풍의 존재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화산에서 보낸 서찰에 집중되어 있었다.
“가주님. 혹여 제가 서찰의 내용을 알아도 되겠습니까?”
“직접 보거라.”
“감사합니다.”
서찰을 다시 건네받은 당패는 그 내용을 빠르게 확인했다. 이내 그의 얼굴도 확 일그러졌다.
“끄응……. 이 작자가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과연 화산신룡답구나.”
당군악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보통 커다란 행사를 앞둔 이들은 은인자중하기 마련이다. 혹여나 뒤에 벌어질 일에 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산, 아니 화산신룡은 오히려 판을 더 키울 작정인 듯했다.
“괜찮겠습니까? 그래도 녹림은…….”
“껄끄러운 것도 사실이지.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을 경우에는 문제가 될 일도 많고.”
“예. 저는 아무래도 우려가 됩니다.”
“하지만 괜찮다.”
“예?”
저도 모르게 짧게 반문해 버린 당패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소자는 알기 어렵습니다.”
“화산신룡이 생각 없이 일을 벌일 리는 없겠지. 겉으로 보기에는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는 것 같아 보이지만, 이미 그 머릿속으로는 계산이 끝나 있을 것이다.”
“아…….”
당패는 슬쩍 당군악의 눈치를 보았다.
그 짧은 동작에서 속내를 알아차린 당군악이 슬쩍 웃었다.
“내가 화산신룡을 과대평가하는 것 같으냐?”
“……소자가 어찌 감히 가주님의 식견을 의심하겠습니까. 하나…… 화산신룡의 무위는 천하의 누구도 의심할 수 없으나, 그 어린 나이에 심계를 논한다는 것은 조금 의아합니다.”
“이치를 따지는 것은 결과가 없을 때에나 하는 것이다.”
“…….”
“눈으로 본 것과 내가 아는 상식이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 범인은 눈으로 본 것을 의심하고, 귀인은 자신의 상식을 의심한다.”
당패가 입을 다물었다.
“너 역시 알고 있는 것에만 얽매여 현혹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서찰에 적힌 대로 사천 내에 소문을 퍼뜨리도록 해라. 조금 노골적이어도 상관없다.”
“예, 가주님! 바로 행하겠습니다.”
당패는 군말 없이 빠르게 집무실을 나섰다. 당군악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천천히 걸어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점점 더 재미있어지는군.’
그런데…….
서찰에 마지막에 적힌 ‘그리고 미리 말해 두는데, 돈을 많이 준비해 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는 무슨 의미일까?
어쩐지 조금 불안해지는 당군악이었다.
* * *
청명의 원래 계획은 그들이 목적지에 도착할 때쯤 이에 대한 소문이 웬만큼 퍼져 있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소문은 놀랍도록 빨리 퍼져 갔다.
화산이 생각해 온 자신들의 입지보다 세인들이 생각하는 화산의 입지가 더 높은 것도 원인 중 하나였고, 천하비무대회 이후로 딱히 큰 사건이 없었던 이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딱 좋았던 것도 원인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거 좀 더 날리란 말입니다! 더! 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누각 위에서 홍대광이 닦달을 해 댔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서찰을 써 대던 거지들 중 하나가 참다 못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빌어먹을! 네놈 때문에 지금 다른 일은 하나도 못 하고 모두 같은 서찰만 수백 장씩 써 대고 있는데 지금 그딴 말이 입에서 나오냐!”
“어차피 평소에는 하는 일도 없잖습니까! 기껏해야 비둘기 밥 주는 게 일이면서.”
“저, 저…… 어디서 저런 종자가!”
개방의 장로인 황구개(黃狗丐)가 무섭게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홍대광은 지지 않았다.
“왕거지가 시킨 일 아닙니까!”
“끄으으응.”
황구개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주변의 거지들을 돌아보았다.
“빨리 써라! 빨리!”
“어휴.”
“망할!”
서찰을 작성하는 거지들은 팔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붓을 들지 않은 거지들은 서찰을 수거하여 새장 안에 든 비둘기의 다리에 묶고 날리기를 반복했다.
수십 마리의 비둘기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일부는 개방의 여러 분타로 가고, 다른 일부는 중원의 중간중간에 지어져 있는 또 다른 누각으로 가게 될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
“장로님은 제가 거기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몰라서 그럽니다! 개방이 무능하다고 그놈이 얼마나 구박을 해 대는지 알기나 하십니까?”
“그놈이라니? 대체 누가?”
“끄응……. 그건 말하기 좀 그렇고…….”
홍대광은 차마 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사람이 자존심이 있지.
스무 살은 더 어린 놈에게 구박이나 받는다는 소리를 어찌 제 입으로 하겠는가?
“어쨌든 이번에야말로 화산파에게 개방의 능력을 제대로 보여 줘야 합니다!”
“끄응.”
황구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리 말하면 안 할 수도 없고.’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평생을 중원 전역의 정보를 수집하고, 그 정보를 통해 명령을 전달하는 일을 해 온 이가 바로 황구개다. 그런 그가 지금 화산파가 얼마나 중요한 곳이 되었는지 모를 순 없었다.
‘소문은 더없이 빠르지만, 언제나 한발 느리기도 하지.’
화산파에 대한 중원의 평가는 최근 들어 극도로 치솟았지만, 여전히 그 영향력에 대해선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과장 조금 보태면 화산의 영향력은 이미 구파일방급의 문파를 초월한 지 오래고, 그 성장세와 왕성한 활동력을 감안한다면 곧 세상을 움직이는 문파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하나 묻겠는데!”
“예?”
“화산과의 친분은 제대로 쌓아 뒀겠지?”
“…….”
“이 짓거리까지 했는데, 화산이 개방을 걷어차고 딴 주머니를 차는 날이 오면 내가 네놈을 직접 갈아서 비둘기 밥으로 줄 것이다.”
“허, 허허……. 허허허허! 뭐 그런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까. 그 화산의 화산신룡이 저를 아저씨라고 부르며 조카처럼 따릅니다!”
“화산신룡이?”
“예!”
“……진짜냐?”
“속고만 사셨습니까?”
홍대광이 가슴을 탕탕 치며 호기롭게 말했다.
뭐…… 아주 거짓은 아니었다. 청명이 그를 거지 아저씨라고 부르는 건 사실이니까. 그 의미가 홍대광이 말하는 ‘아저씨’와 조금 많이 달라서 그렇지.
“화산은 제가 꽉 잡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빨리 서찰이나 쓰십시오.”
“끄응. 도무지 믿을 수가 있어야지.”
황구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순순히 서찰을 다시 작성하기 시작했다.
“대광아.”
“예?”
“내가 여기 왕거지가 없어서 하는 말인데.”
“예, 장로님.”
“네가 정말 화산을 꽉 잡아 놓았다면, 네놈이 방주가 되는 것도 꿈은 아니다. 돌아가는 정황이야 내가 개방에서 가장 훤한 사람이 아니더냐?”
“그렇지요.”
“그런데…… 만약에 네가 화산을 제대로 엮어 놓지 못한다면.”
“…….”
“왕거지가 아마 네놈을 통구이로 만들어서 개먹이로 주려고 할 거다. 그러니 잘 생각해라.”
홍대광의 온몸에서 식은땀이 삐질삐질 솟았다.
“거, 걱정 마십시오. 확실합니다!”
“믿는다.”
고개를 격하게 끄덕인 그는 슬그머니 발을 뒤로 뺐다.
“그럼 남은 일은 잘 부탁드립니다.”
“어디 가려고?”
“저야 얼른 화산파를 따라가 봐야죠. 누가 가서 생색을 내 줘야 우리가 일했다는 걸 알 것 아닙니까.”
“…….”
“고생하십시오!”
누각에서 훌쩍 뛰어내리더니 쏜살같이 사라지는 홍대광을 보며 황구개가 혀를 찼다.
“저 입만 산 놈 같으니.”
그리고 사방으로 날아가는 비둘기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세상일 어찌 될지 알 수 없다더니.”
설마 그 화산이 말 몇 마디로 개방을 통째로 부리는 날이 올 줄이야.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끌끌끌.”
웃으며 고개를 내저은 황구개는 빠르게 서찰을 써 내려갔다.
청명의 계획대로, 세상천지에 화산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갔다. 아주 빠르게, 더없이 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