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7화. 화산이 개판이 날 겁니다. (2)
현종이 운암과 대화를 하던 그 시각.
오전 수련이 끝나고 모여든 이들은 식당 밖에 차려진 음식을 앞에 두고 멍하니 먼 처마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희고 검은 두 사람이 전각의 처마를 풀쩍풀쩍 뛰어넘으며 고함을 질러 댔다.
“거기 좀 서 보시라고!”
“싫은데요.”
“아니, 논의를 해야 할 것 아닙니까! 하기로 하셨잖습니까!”
“하기로는 했죠.”
청명이 처마를 폴짝폴짝 뛰어넘으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뭐 시간만 끌어도 내 조건이 더 좋아질 텐데, 내가 왜 벌써 논의를 해요!”
“아아아악! 이 악귀 같으니라고!”
쌩하니 달려 나가는 청명을 임소병이 맹렬히 뒤쫓았다.
화산의 제자들은 아닌 와중에 펼쳐진 추격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거참.”
“저 사람 녹림왕이라고 하지 않았냐?”
“그랬죠.”
“녹림왕이면 엄청 높은 사람 아니냐?”
“그럴걸요?”
“……그렇구나.”
“뭐, 청명이니까요.”
“그래. 하긴, 청명이니까.”
황당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지만, 지켜보는 이들 중 누구도 그 광경을 기이하게 여기진 않았다. 그저 잠깐 시선을 뺏겼다가 그러려니 하고 넘길 뿐.
“신경 쓰지 말고 밥이나 먹어라.”
“……예.”
“안 보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형. 요즘 도를 깨치신 것 같습니다.”
“안 깨치면 속 터져 죽는다.”
하지만 그들의 문제는 청명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근데 이 새끼가 진짜!”
참다못한 조걸이 역정을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윤종이 슬쩍 시선을 주며 물었다.
“왜 그러느냐?”
“아! 이놈 하는 것 좀 보십시오!”
윤종은 그가 가리킨 곳을 물끄러미 보았다. 밥상 위에 당당히 자리한 백아가, 조걸의 몫으로 나온 닭다리를 두 앞발로 야무지게 들고 뜯어 대고 있었다.
“야! 그거 내 거라고……!”
조걸이 빼앗긴 음식을 회수하기 위해 손을 뻗자 털을 있는 대로 부풀리고 세운 백아가 재빠르게 마구 할퀴었다.
“아야!”
그 무서운 기세에 조걸은 기겁하여 뒤로 물러났다.
키이이이이익!
위협하듯 쉭쉭 소리까지 내는 백아를 보며 조걸이 억울한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윤종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는 짓이 어쩜 저리 제 주인이랑 똑같을까…….”
“그러게요…….”
조걸이 눈물을 짜냈다.
“안 그래도 수련 때문에 흙투성이라, 식당 안에도 못 들어가고 밖에서 밥 먹는데…… 그걸 또 뺏어 먹네.”
서러워라.
제 밥은 두고 일단 남의 밥부터 뺏어먹는 것이 꼭 누구의 인성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천은 조용히 피식 웃었다.
“내버려 두어라. 쟤 지금 심기가 편치 않을 것이다.”
“예? 짐승이 심기가 편하고 말고 할 게 있습니까? 무슨 일이 있었나요?”
“자소단 남은 거 훔쳐 먹으려다가 청명이한테 딱 걸렸단다.”
“…….”
짐승이 영단을 훔쳐?
이쯤 되면 더 이상 짐승이라고 할 수 없는 게 아닌가?
“그, 그래서요?”
“뭘 새삼 묻느냐. 절벽에서 기어 올라오느라 고생 좀 했을 거다. 족제비가 재빠르기는 하지만, 화산 절벽이 오죽 높아야지.”
“…….”
던졌구나.
그래. 결국엔 던졌어.
조걸이 저도 모르게 허허 웃었다.
‘사람이고 짐승이고 가리지를 않는구나.’
어쩜 이리 공평할까? 우리 사제.
“영단 훔쳐 먹는 짐승이나, 그 짐승을 절벽 아래도 던져 버리는 인간이나…….”
“그 주인에 그 짐승이지.”
결국 반쯤 비어 버린 제 밥상을 보며 조걸은 눈물을 삼켰다.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제는 밥까지 뺏기는구나.’
사형제들과 수련을 시작한 지 어느덧 사흘이 지났다. 첫 날에는 그럭저럭 상대할 만했는데, 이제는 조금씩 얻어맞는 일이 늘어나고 있었다.
몸뚱이 강건하기로는 어디에서도 뒤지지 않는 조걸이니, 목검으로 몇 대 맞는다고 다칠 일이야 있겠냐마는, 점점 더 밀리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생각보다 정말 빨리 강해지고 있다.’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자소단을 흡수한 효과가 나오고 있다. 거기에 공청석유의 효능까지 감안한다면, 오랜 시간 지나지 않고도 지금보다 배는 더 강해질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쯤 되면 북해빙궁의 무사들에게도 밀리지 않지.’
아니. 오히려 더 뛰어나게 성장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화산은 지난 마교와의 전쟁 이후, 처음으로 천하에 이름을 날릴 수 있는 문파로서 온전한 전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아악! 이 족제비 놈이 내 닭다리를!”
“그, 그거 건드리면 너 죽일 거다! 진짜 죽인다고! 야! 너 인마!”
“누가 저놈 확 그냥 목도리로 만들어 버려!”
“…….”
물론 그 훌륭하신 화산의 제자 분들께서 족제비 한 마리에 보기 좋게 농락당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리고 그 족제비 주인이라는 놈은…….
“에이, 진짜!”
밥상이 늘어선 곳으로 달려온 청명이 따라붙는 임소병을 냅다 걷어찼다.
“밥 좀 먹자! 밥 좀!”
하지만 임소병을 언제 걷어차여 날아갔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재빨리 다시 청명에게 달라붙었다.
“밥이야 언제든 먹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에이씨. 약은 왜 줘서는! 쓸데없이 건강하네.”
“쿨럭! 아직도 한기가 다 가시질 않았……. 쿨럭!”
“또 시작이네. 또또.”
결국 보다 못한 백천이 한숨을 쉬며 말렸다.
“청명아. 그래도 아직 저분의 병이 다 나은 게 아니잖으냐. 네 입으로 그렇게 말했었다. 아직 일음절맥이라며.”
“북해에 있다가 몽골 초원에만 가도 따뜻하다 느끼는 게 사람인데! 삼음절맥이다가 일음절맥 됐으면, 사람이 날아도 안 이상하지!”
“……그도 그러네.”
확 와닿는 비유에, 백천은 의심 어린 눈으로 임소병을 바라보았다. 청명은 진저리를 치며 임소병에게 말했다.
“아무튼 저 밥 먹을 거니까, 진짜 건드리지 마세요. 밥 먹는 와중에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했어!”
“도장은 개가 아니잖습니까?”
“…….”
“아, 맞습니까?”
“근데 이 양반이 진짜?”
“끄응. 그러니까 얼른 일을 마무리 지어 주십시오. 지금 제 속이 속이 아닙니다.”
“뭔 놈의 산적이 이리 질척대요?”
“산적이니까 질척대죠! 깔끔하게 살 거면 산에는 왜 올라갑니까! 도망가는 사람 붙잡고 늘어지고! 돌아가는 사람 찾아서 쫓아가고! 산적이 하는 일이 그런 건데!”
어?
듣고 보니 또 그러네?
청명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자 임소병은 가슴을 쳐 가며 말했다.
“이러는 와중에도 녹림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단 말입니다!”
“거 일이 벌어질 거면 벌써 벌어졌겠지. 그리고 뭐 산적한테 뭔 일이 벌어지면 세상에는 좋은 거 아닌가?”
“끄……으으윽.”
임소병이 가슴을 움켜잡고 신음하자 백천이 그의 어깨를 잡아 주었다.
“침착하십시오. 일반적인 상식으로 저놈을 대하면 제 명에 못 죽습니다.”
“아, 안 그래도 명도 짧은데.”
“그건 봐야 아는 일이고.”
청명이 다시 톡 쏘며 끼어들었다.
백천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가만 보면 이 두 사람 죽이 참 잘 맞았다. 특히나 스스로를 딱히 높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녹림왕’은 천하오패 중 한자리를 차지하는 녹림의 수좌를 지칭하는 말이다. 아무리 낮게 잡아도 구파일방의 장문인 급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가 이리 소탈할 수 있다는 건 참 신기한 일 아닌가?
“아악! 밥 적당히 먹고 이야기 좀 하자니까!”
“이 양바이 왜 아람 압 멍응데!”
“…….”
너무 소탈해서 문제긴 했다.
한숨을 내쉬며 다시 시선을 돌리려던 백천은 문득 살짝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음?”
돌아보니 산문 쪽에서 누군가가 다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뭐지?’
“사수우우우우욱!”
격하게 달려오던 이가 그를 보고는 고함을 내질렀다. 뭔가 일이 생겼음을 직감한 백천이 정색하게 빠르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사, 산문에 누가 찾아왔습니다.”
“산문에?”
백천이 얼굴을 찌푸렸다.
물론 화산은 워낙에 험하니 평소에 손님이 잘 드나들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객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니, 산문에 누가 왔다 해서 이리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차, 찾아온 이들의 행색이 너무 이상합니다.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응?”
“그…… 아무리 봐도 꼭 사, 산적 같은 것이…….”
산적?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돌아갔다.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임소병이 혀를 찼다.
“쯧쯧. 화산에도 산적이 있나?”
“……이 양반이 진짜 미쳤나? 댁 찾아온 거잖아요!”
“어?”
순간 화들짝 놀란 그가 산문 쪽으로 획 몸을 틀었다.
“아, 그렇지!”
“……이건 똑똑한 건지 등신인지 아무리 봐도 모르겠네.”
“처, 청명아 그래도 녹림왕이신데 말을 좀…….”
“뭐가 녹림왕 같아야 대접을 해 주지!”
이 말에는 백천도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동감이었다.
“어쨌든 우리도 가 보자!”
임소병과 화산의 제자들은 산문 쪽으로 재빨리 달려 나갔다.
활짝 열린 산문 너머의 광경을 본 이들은 저마다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번충!”
일전에 산채에서 청명의 무리와 마주했었던 번충이 힘겨운 얼굴로 앉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곳곳이 붉게 물든 의복과 드러난 몸에 말라붙은 피딱지가, 딱 봐도 위중하기 짝이 없었다.
“어? 흑야호? 곽민?”
번충의 뒤에 있는 이를 알아본 윤종이 외쳤다.
흑야호의 상태도 번충에 비해 딱히 나을게 없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시체와도 같았고, 신발을 가득 채운 피가 넘치며 걸음 닿은 곳마다 흘러 있었다.
임소병의 얼굴이 굳어졌다.
“……놈들이 일을 벌였구나.”
그 말에 흑야호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고, 번충이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죽여 주십시오! 녹채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누구냐?”
“제가 눈으로 확인한 것은 광우도(狂牛刀)뿐이었습니다.”
“……광우도. 대별채인가.”
의외로 임소병의 얼굴에는 흥분한 기색이 없었다.
“광우도라면 홀로 움직이지는 못했겠지. 그는 우둔하여 이리 전격적으로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이가 아니다. 적어도 셋 이상의 산채가 함께 움직였다고 봐야지.”
낮게 중얼거린 임소병이 흑야호에게 시선을 주었다.
“상황은?”
“녹림의 형제들은 아직 이 상황을 알지 못합니다. 녹채는 완전히 무너졌고 십영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알았다.”
임소병은 짧게 답하며 청명을 바라보았다.
“도장.”
“흐음.”
“이제는 결정을 내려 주셔야겠습니다.”
임소병의 표정은 지금껏 보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늘 그의 얼굴에 어려 있던 장난기와 억울한 기색은 어느새 씻은 듯 사라졌고, 얼음이라도 한 겹 씌운 듯한 차디찬 표정만이 남았다.
“도장께서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이 자리에서 떠나야 합니다.”
“떠나서 뭘 어쩌게요?”
“할 수 있든 없든 포기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맞서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
“끙.”
청명이 막 뭔가 말을 하려 입을 벌리는 찰나였다.
“무슨 일이냐.”
“장문인!”
“장문인을 뵙습니다.”
어느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현종을 발견한 이들이 일제히 포권을 하며 예를 표했다.
가볍게 손을 내저어 예를 받아 준 현종이 산문의 상황을 눈으로 살폈다.
“아무래도…… 일이 터진 모양이구나.”
“네, 그게…….”
“소소.”
“예, 장문인!”
당소소가 재빨리 대답하자 현종이 말했다.
“객들을 의약당으로 모시거라. 한눈에 보아도 위중해 보이니.”
“그래도 될까요?”
“비를 피해 처마 밑으로 들어온 이를 내쫓는 법은 없다. 상대가 누구든 부상을 입은 이들을 그냥 돌려보낼 정도로 각박해서야 되겠느냐. 화산은 그런 곳이 아니다.”
“예, 장문인! 그리하겠습니다.”
당소소가 재빨리 달려 나가 환자들의 상태를 살피고는 소리쳤다.
“못 움직이는 분들이 있으니 의약당으로 옮겨 주세요, 사형들!”
“알았다!”
청자 배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부상자들을 수습했다.
“상처가 더 벌어지지 않게 조심해요! 더 벌어지면 진짜로 목숨이 위험해요!”
“알았다!”
반충이 자신의 양팔을 잡아 오는 화산의 제자들을 보다 임소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 저는…….”
“치료부터 받아라.”
“…….”
“정보는 그거면 충분하다. 뒤는 내가 맡으마.”
잠깐 말이 없던 번충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번충까지 의약당으로 옮겨지자, 남은 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시선을 교환했다.
“그래.”
현종은 심유한 눈으로 임소병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빈도가 녹림왕께 사정을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임소병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에게는 이미 했던 이야기지만…….”
잠깐 청명을 본 그는 이내 현종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제는 단순히 한 사람만 설득해서 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모두 말씀드릴 테니 저를 도와주십시오, 장문인.”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예.”
현종이 몸을 돌리며 백천과 그 무리를 향해 말했다.
“너희도 모두 따라오거라.”
“예!”
현종이 앞장서자 임소병을 비롯한 모두가 뒤를 따라 처소로 향했다.
무언가 심상찮은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