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6화. 화산이 개판이 날 겁니다. (1)
현종은 그야말로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아이들이 북해에서 좋은 성과를 내고 온 것은 참 좋은 일이지만, 덕분에 그가 할 일이 부쩍 늘어났다.
“그러니까 남은 일정이…….”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천우맹 쪽으로는 당가주님과의 회동이 예정되어 있고, 북해와의 교역을 확정하기 위해 은하상단주와도 회동을 한번 하셔야 합니다.”
운암의 말에 현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화영문주가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화영문주? 화영문주는 또 왜?”
“이제 서안의 화영문은 완전히 안정이 되었으니, 새로운 지부를 내는 것을 논의하고 싶다 합니다.”
“오? 그러더냐?”
“예. 지부를 늘리는 것이 좀 늦은 감이 있어서 한 번에 두 개의 지부를 더 내고 싶다 합니다.”
“사람 참. 그냥 그리하면 될 일이지, 굳이 나는 왜 보러 오겠다고.”
“그게……. 화영문뿐만 아니라 화산의 속가로 돌아오고 싶다는 문파가 몇 있는 모양입니다.”
“음?”
현종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과거에 이탈했던 곳들 말이더냐?”
“아닙니다. 저들도 염치가 있는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과거 화산에서 하산한 속가제자들 중 화영문을 보고 자신들도 속가문을 세워 보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합니다. 그런 이들이 화영문주와 논의를 했던 모양입니다.”
“허허. 그런 일이 있었구나.”
현종이 천천히 수염을 쓸어내렸다.
관리가 된다면야 속가문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 하나하나가 화산의 재정과 전력에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관리할 수 없는 문파가 너무 많아 화산의 명성에 누가 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애초에 그런 것을 관리하기 위해서 본산이 있는 것 아니던가?
“좋은 일이다.”
속가를 늘릴 필요가 있다는 건 서안의 화영문에 제자가 꽉꽉 들어찼다는 뜻이고, 속가문을 열고 싶어 하는 이들이 생겨났다는 건 화산의 명성이 이제 외부에서도 제자를 받아들이기에 모자람이 없다는 뜻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지만, 현종의 입가엔 한 줄기 미소가 피어났다.
“아이들이 고생을 해 준 덕분에 화산이 이리 덕을 보는구나.”
“모두 장문인께서 마음 쓰신 덕분입니다.”
“그게 어찌 내 덕이 될 수 있겠느냐. 내가 잘해서 벌어질 일들이었다면 벌써 벌어졌겠지.”
현종은 빙긋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화산의 명성은 나날이 드높아지고 있지만, 현종은 결코 들뜨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그의 능력과는 큰 관계가 없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남의 재주를 자신의 재주처럼 여기는 이는 반드시 화를 부른다.
“그래, 그럼 중요한 사안은 그게 전부더냐?”
“……그리고 또 하나 있습니다.”
“음?”
“청명이 놈이 소림 방장한테 한번 쳐들어가야 한다고…….”
운암이 말끝을 흐렸다. 현종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건 조금 나중에 처리하자꾸나.”
“닦달을 합니다만…….”
“……조금만 더 버텨 보거라.”
“예.”
현종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따지긴 해야지.’
처음 소림 방장이 말했던 것과 북해의 실제 사정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화산의 제자들이 대처를 잘했기에 망정이지, 까딱했으면 큰 화를 입을 뻔하지 않았는가?
이건 문파 차원에서도 그냥 묵과하고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장문인.”
“음?”
“정 부담이 되신다면 제가 청명이 녀석을 잘 설득해 보겠습니다.”
운암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현종이 고개를 갸웃했다.
“부담이라니?”
“소림에게 잘못을 따져 묻는 것이 부담이 되어 그러시는 게 아닙니까?”
현종은 살짝 눈을 치켜뜨고는 이내 허허 웃었다.
“그런 게 아니다.”
“…….”
“물론 소림은 부담스러운 상대다. 아무리 근래에 화산의 기세가 좋다지만 어찌 감히 소림에 비견될 수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 나는 이 일에 그런 것들을 끌고 오고 싶지는 않구나. 화산의 제자들이 소림의 잘못된 정보 때문에 생사를 넘나들었다. 그런데도 이에 대해 따져 묻지 못한다면 화산은 현판을 걸 자격이 없다.”
담담하지만 그 안에 서린 의지는 단호하고 확고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소림에 찾아가 드잡이하고 싶은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하면 어째서 망설이시는지요?”
운암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스치자 현종은 잠깐 침묵하다 눈을 다시 질끈 감았다.
“……나만 가면 그랬겠지, 나만 가면…….”
“…….”
“보나마나 청명이 놈이 곧 죽어도 따라가서 소림을 뒤집어 놓으려고 할 텐데, 그걸 어찌 감당하느냐…….”
“……”
“세상일이라는 게 그렇다. 열을 잘못하면 열만큼의 벌을 주어야 아무 탈이 없지. 그런데 청명이 놈은 하나를 잘못하면 기어코 백 대를 때리는 놈이 아니더냐.”
“그, 그렇지요.”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지겠느냐?”
“…….”
머릿속으로 상상해 본 운암이 살짝 파리해진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안 되겠네요.”
“그렇지.”
현종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푹 터져 나왔다.
“까딱하다가는 되레 우리가 사과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청명이 녀석의 원한이 조금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 보도록 하자꾸나.”
“예, 장문인.”
하지만 대답을 하면서도 운암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잠깐 망설였다. 말해 보라는 듯 현종이 눈짓하자 그가 주저하며 입을 뗐다.
“하나. 한가지…….”
“무엇이더냐?”
“……청명이 녀석이 원한을 잊겠습니까?”
현종은 차마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찻잔을 쥔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다른 일은 없느냐?”
그리고 아무 질문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운암은 연륜이라는 말의 의미를 실감했다.
“그 외에는 큰일이 없습니다.”
“문내에 녹림왕이 와 계시는데, 제자들이 동요하지는 않느냐?”
“청명이 놈이 하는 일이라는 걸 알고는 모두가 깨끗하게 관심을 끊었습니다. 이제는 녹림왕이 아니라 말하는 범이 들어앉아 있어도 놀라는 이가 없을 듯합니다.”
“……그거…… 다행이구나.”
사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다행이라고 해야지.
“그래, 아이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네가 잘 다독이거라.”
“예, 장문인.”
현종은 수염을 다시 한차례 쓰다듬으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더 바빠지는구나.’
몸은 조금 고단하고, 머리가 아픈 일도 많아졌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 상황이 싫은 건 절대 아니었다. 이게 다 화산이 더 훌륭한 문파가 되어 간다는 증거이므로.
“운암아.”
“예, 장문인.”
“현영이에게 일러 둘 터이니, 너도 이제 슬슬 재경각의 일을 주관해 보거라.”
“주관이라 하시면…….”
“재경각의 일을 최종으로 결정하는 걸 네가 했으면 한다.”
“자, 장문인!”
운암이 순간 화들짝 놀라며 정색했다.
“그건 장문인께서 하시던 일이 아닙니까. 그걸 어찌 제게…….”
일을 미룬다고 한탄하는 것이 아니다.
문파의 재정을 결정한다는 것은 장문인의 큰 권한 중 하나였다. 지금 현종은 그 일을 운암에게 넘겨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너도 이제는 슬슬 준비를 해야지. 내가 언제까지 이 자리에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몇십 년은 더 계셔야지요.”
“욕심이다.”
하지만 펄펄 뛰는 운암을 보며 현종은 그저 빙그레 웃었다.
“청명이가 준 영약 덕분에 내 나름 활력을 얻고는 있지만, 사람이라는 건 늙어 갈수록 예전의 총기를 잃기 마련이다. 언젠가 내가 화산에 누가 될 수도 있으니, 그 전에 준비를 해 두어야지.”
“장문인…….”
운암은 그런 장문인의 눈치를 잠깐 살피다 말했다.
“저는 그럴 그릇이 못 됩니다.”
“으음?”
“장문인께서 제게 재경각의 일을 돌보라 하시면 그리하겠습니다. 지금 장문인께서는 더 큰일을 하셔야 하니까요. 하지만 이 일이 제게 장문의 자리를 물려주시기 위한 준비라면 사양하겠습니다.”
“어째서냐?”
현종의 얼굴에 당혹이 어렸다. 냉큼 좋다고 하진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정색하며 펄쩍 뛸 줄은 몰랐던 것이다.
운암은 공손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장문인. 저는 화산의 장문이 되기에는 그릇이 너무도 작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허수아비가 되는 것뿐입니다. 장문의 자리에 저 같은 이가 앉는다면 화산은 더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 녀석이…….”
현종의 얼굴에 옅은 노기가 피어올랐다.
“그게 무슨 말이더냐. 네가 부족하다니!”
“장문인.”
하지만 운암은 한숨을 내쉬며 꿋꿋하게 말했다.
“화산이 과거와 같았다면, 저는 기꺼이 화산의 장문이 되어 이곳에 뼈를 묻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을 다독이고, 화산을 정비하며, 인내하고 또 인내하는 일에서는 화산의 어느 제자도 감히 저를 따르지 못합니다.”
“그렇지!”
“하지만 지금 화산은 인내가 필요한 곳이 아닙니다.”
“…….”
현종이 눈을 딱 감았다.
“저라고 왜 욕심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제 욕심으로 화산을 그르칠 수는 없습니다.”
“하면 운검이에게 장문의 자리를 주란 말이더냐?”
“아닙니다. 그 녀석도 장문인으로서의 자격이 없습니다. 무학은 더없이 중요하지만, 무학만으로 장문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면?”
운암은 결심을 굳힌 듯 말했다.
“운자 배를 건너뛰시고 백천이에게 자리를 넘겨주십시오.”
“이런!”
결국 현종이 노기 어린 얼굴로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더냐! 그 아이들이 아무리 화산을 이끌고 있다지만, 그 전부터 수십 년간 화산을 지켜 온 이들은 바로 너희 운자 배들이다. 그런데 어찌 너희를 건너뛰고 백자 배에 장문을 줄 수 있단 말이냐! 그 어디에도 그런 법은 없다!”
“…….”
“모자라면 채우면 되는 것 아니더냐! 너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장문인.”
그러나 운암은 쉬이 물러나지 않고 쓰게 웃었다.
“장문인께서는 평생을 화산을 위해 살아오셨습니다.”
“…….”
“저 역시 그리하고 싶습니다. 저와 같은 상황이셨다면, 장문인께서는 어찌하셨겠습니까?”
“……이놈아.”
현종이 더없이 안타까운 눈으로 운암을 바라보았다.
지금 운암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이는 화산을 통틀어 아마 그뿐일 것이었다.
“그러니 고려해 주십시오. 모든 것은 사문을 위함입니다.”
“백자 배는 너무 어리다.”
“장문인께서 이십 년만 그 자리를 더 지키시면 문제없습니다.”
“하면, 그 이십 년간 너는 그저 지금의 자리에 만족하겠다는 것이냐? 그 후에는 뒷방으로 물러나도 괜찮고?”
“뒷방이라니요.”
운암이 빙긋 웃었다.
“저는 화산에서 제일가는 잔소리꾼이 될 생각입니다. 백천이 놈도 때때로 막 나가는 면이 있지만, 제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한은 함부로 경거망동할 수 없을 것입니다.”
“……끄응.”
“나아감에 있어서는 백천이 제일이고, 안정에 있어서는 윤종이 제일입니다. 백천으로 하여금 화산을 발전하게 하고, 그 후 윤종으로 하여금 발전된 화산을 정비하게 한다면 화산은 비로소 장문인께서 꿈꾸던 곳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운암은 이미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후였던 것이다. 현종은 이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이야기는 일단 접어 두자꾸나. 너무 먼 이야기다. 지금 나누기에는 너무도 멀어.”
“예.”
운암도 더는 현종을 몰아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화두를 꺼내 둔 이상 모든 것은 결국 순리대로 돌아갈 것이다.
운암을 바라보는 현종의 눈에 안쓰러움이 깃들었다.
운암이라고 해서 어찌 욕심이 없겠는가?
과거의 화산이 아니다. 현종이 장문을 맡을 때에야 모두 그 자리를 기피했지만, 지금의 화산은 천하의 문파들로부터 인정받는 곳이고, 천하의 어떤 문파보다 부유해질 가능성도 있다.
이런 문파의 장문인 자리는 누구라도 뿌리치기 힘든 유혹일 터.
그럼에도 운암은 화산을 위해 스스로 그 자리를 고사하고 있는 것이다.
대견하기도 하고, 또 마음속 깊이 안쓰럽기도 했다.
“그런데…….”
“예.”
“그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예, 장문인.”
“……백천은 발전시키는 이고, 윤종은 안정시키는 이라 했느냐?”
“예. 그러니 적당한 시점에 백천으로 하여금 윤종이에게 장문인의 자리를 물려주게 해야지요.”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다.”
“예?”
운암이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갸웃했다. 현종은 차마 말로 하기가 어려운 듯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 그럼 혹시 그…… 청명이 놈이 장문인에 오르고 싶다고 하면…….”
“막아야 합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운암의 목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목소리에 이제껏 없던 한기가 어려 있었다.
어찌나 단호한지 전쟁을 앞둔 사람 같았다.
“화산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고, 제자들을 모조리 이끌고 그놈을 뇌옥에 처박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막아야 합니다!”
“…….”
“백천이 발전시키는 이고, 윤종이 안정시키는 이라면, 청명이 놈은 말아먹는 이입니다! 화산이 개판이 날 겁니다.”
“지, 지금까지는 그래도 잘하지 않았느냐?”
“그건 장문인도 계시고, 저도 있고, 그리고 어쨌거나 사숙과 사형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망아지도 고삐가 쥐어져 있을 때는 얌전합니다. 고삐가 풀리면 그제야 진면목이 나오는 법이죠.”
“…….”
“저는…… 저는 절대 그놈의 진면목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아, 알았다.”
현종은 평소 운암의 사람 평가하는 안목을 높이 신뢰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저렇게까지 말하다니…….
‘그러게, 좀 사람답게 살지 그랬더냐. 청명이 이놈아…….’
현종은 청명을 떠올리다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였다.
“음?”
현종과 운암의 시선이 동시에 문 쪽으로 향했다.
밖에서 뭔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무슨 일이냐?”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두 사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