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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565화 (563/1,567)

565화. 그러게, 사람이 초지일관해야지. (5)

늦은 저녁.

임소병의 처소에서 마주 앉은 두 사람이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딱히 녹림의 내부 사정에 대해 말씀드린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만……?”

“척하면 착이죠.”

청명의 태연한 목소리에 임소병이 고개를 내저었다.

과연 눈치 하나는 정말 귀신 같은 인간이었다.

“언제부터 아셨습니까?”

“딱히 미리 안 건 아니에요. 다만 말이 아귀가 안 맞는다고 생각했을 뿐이죠.”

“예?”

“장일소가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놈의 성향상 이건 분명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거다.”

“…….”

“그런데 녹림왕이라는 양반이 그런 상황에 녹림을 두고 홀로 화산에 왔다?”

청명이 씩 웃었다.

“이상하죠?”

“…….”

“영단이 중요했다는 말은 마세요. 물론 영단은 중요하고, 녹림왕의 몸도 중요하지만…… 당신에게 녹림은 그보다 더 중요하죠.”

임소병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도장을 속여 먹을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게 좋겠군요.”

“속일 생각도 없었던 사람이 흰소리는.”

청명이 임소병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내가 이걸 알아채는지 아닌지도 확인해 보려고 한 거죠?”

“…….”

“거 함부로 간 보다 손모가지 날아가는 수가 있어요. 나는 내가 간을 보는 건 좋아해도 누가 나를 이런 식으로 떠보는 건 좋아하지 않거든요.”

청명이 당당하게 배를 쭉 내밀었다.

하지만 임소병은 그런 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면서도 전혀 웃을 수 없었다.

“도장.”

“네?”

“도장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저를 도와주기 위해서라고 여겨도 되겠습니까?”

“흐음.”

청명이 피식 웃는다.

“우리 관계에 서로 돕고 말고 할 게 있나요?”

“…….”

“서로 뜻이 맞으면 그걸로 되는 거죠. 그쪽은 골치 아픈 일을 해결해서 좋고, 우리는 적당히 명성을 떨칠 수 있어서 좋고.”

“화산에 명성이 더 필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자꾸 빤한 소리 하시네요. 그거 못된 버릇이에요. 다 알고 있으면서 슬쩍슬쩍 떠보는 거.”

정곡을 찌르는 소리에 임소병이 쓰게 웃었다.

모를 리가 있는가?

화산이 지금에 만족한다면 더 큰 명성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보아하니 북해에서도 큰 활약을 하고 온 모양인데, 말에는 발이 달렸다고, 언젠가는 그들의 활약상이 중원 구석구석 널리 퍼질 것이 분명하고 그에 따라 명성은 자연히 올라갈 것이다.

하지만 화산이 그 이상을 노린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천우맹의 개파를 앞두고 있으니까.’

뭐든 시작이 화려할수록 좋다.

강호의 정세를 긴밀히 파악하는 데 힘쓰는 이들이라면 당가와 화산, 그리고 새외의 문파들이 협력하여 한 식구가 된다는 게 얼마나 큰일인지 바로 알 것이다.

하지만 뜬소문만으로 세상을 파악하는 대부분의 이들에게는 화산도 당가도 그리고 새외조차도 강호의 중심이라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확실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는 개파식에 발맞춰 적당한 활약을 보여 줄 필요가 있으리라.

“녹림이 딱 적당하다 이 말씀이시군요.”

“뒤끝이 없으니까요.”

청명이 손에 든 술병을 홀짝이고는 씨익 웃었다.

“솔직히 화산이 좀 커지긴 했거든요.”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다 보니 웬만한 걸 해서는 인상이 별로 남지 않아요. 북해에서 큰일을 하기는 했지만, 중원 사람들은 사실 새외에서 벌어지는 일에 별 관심이 없거든요.”

담담하게 말한 청명은 술병 입구를 손끝으로 살짝 쓸며 쓰게 웃었다.

‘그리고 저 구파일방 놈들이 화산의 명성이 퍼지게 순순히 내버려 둘 리 없지.’

설령 내버려 둔다고 해도, 화산의 명성이 생각처럼 드높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북해에서 벌어진 일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지켜본 이들이라면 모를까, 듣는 것만으로는 마교에 맞서 싸운 이들은 북해빙궁이며 화산은 겨우 열도 안 되는 인원이 그 전쟁에 참가했을 뿐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북해의 일을 화산의 공으로 돌릴 이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강호의 모두가 인정할 만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어설픈 데가 아니라, 제대로 된 데를 건드려야 해요. 그런데 그런 곳을 건드리면 보통 뒤끝이 남거든요.”

“만인방처럼 말이죠.”

“물론 그건 우리가 시작한 게 아니지만……. 하, 그 새끼 진짜 생각하니까 또 열받네.”

청명이 주먹을 콱 움켜쥐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 살벌한 기세에, 임소병은 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차를 내밀었다.

“드시지요.”

“됐어요. 술 놔두고 무슨.”

청명은 찻잔을 도로 물리며 병나발을 시원하게 불어 젖혔다. 그리고 캬아, 소리와 함께 병을 탁 내려놓았다.

“아무튼 그러니까 결론은, 녹림이 딱이라는 거죠.”

임소병이 헛웃음을 지었다.

“녹림왕의 허락하에 산채를 처리한다면, 녹림이 추후에 문제 삼을 리도 없고, 화산은 명성을 높이고?”

“그렇죠. 그리고 그쪽은 골칫거리를 해결해서 좋구요. 말하자면 서로 좋은 거죠.”

임소병은 잠깐 눈을 내리깔며 고민하다 씁쓸하게 웃었다.

“저는 때때로 도장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체 이 사람은 언제부터 이런 그림을 그렸던 걸까?

‘북해에서 돌아올 때? 아니면 북해로 떠날 때?’

아니, 어쩌면 임소병을 만나자마자일지도 모른다.

나름 머리 굴리는 일엔 자신 있다 생각하며 살아왔건만, 청명이 바라보는 세상은 임소병으로서도 쉬이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임소병은 자세히 보는 사람이지만, 청명은 멀리 보는 사람이다.

“어차피 다 생각하고 와 놓고는.”

청명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됐으니까, 쓸데없이 말 빙빙 돌리지 말고 이야기해 봐요. 뭐가 문제예요?”

“……음.”

임소병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하게 입을 뗐다.

“도장.”

“네.”

“아시다시피 저는 나이가 많지 않습니다.”

“네.”

“솔직히 무위 측면에서도 녹림왕의 이름을 내세우기에는 조금 부족합니다. 제가 제 스스로를 숨긴 이유에는 그런 것도 있습니다.”

그렇겠지.

물론 임소병은 강하다. 절맥을 타고난 이는 무학에 있어서 남들보다 빠른 성취를 보이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의 나이로는 천하를 호령하는 고수들과 대적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 녹림왕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를 생각한다면 임소병은 더욱 강해져야 한다.

“지금까지는 그게 별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요?”

“제가 약하기 때문이죠.”

“……네?”

임소병이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누군가가 약점을 보이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찌르는 놈이 하나 있습니다. 놈 덕분에 되레 제 약점이 가려졌죠.”

“장일소요?”

“예. 그놈이 녹림과 전쟁을 벌인 덕분에 내분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장일소라는 굶주린 승냥이를 앞에 두고 녹림끼리 서로 싸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자연히 외적을 만든 게 됐네요.”

외환을 일으켜 내환을 덮는 건 고전적인 전략이다.

장일소와 만인방이 이를 드러내 준 덕분에 녹림의 내환이 억눌러질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 장일소가 발을 빼 버렸다?”

“정말이지 평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놈들입니다.”

“그랬더니 지금껏 참아 왔던 놈들이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고?”

“정확합니다.”

“아, 그럼……?”

뭔가 가만 생각하던 청명이 멍한 눈으로 임소병을 바라보았다.

“도망 온 거예요?”

“거 말씀을 참! 쓸데없는 분란을 피하기 위해서 몸을 잠시 뺐다고 해 주십시오! 격조 높게!”

당당하게 말하는 임소병을 보며 청명이 답지 않게 입을 벌렸다.

“……와, 이 양반 진짜 제정신 아니네. 그러니까, 산채에 있으면 그놈들이 댁을 노리고 암살을 시도하거나 전쟁을 벌일 수도 있으니 그놈들이 감히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할 곳으로 도망쳤다?”

“…….”

“그게 화산?”

“후후. 여기라면 그놈들도 얼씬 못 하겠죠.”

“……진짜 미친놈인가?”

청명이 황당함을 어쩌지 못하고 임소병을 바라본다.

아니, 세상 어떤 산적 놈이 위험하다고 도관으로 도주를 하는가? 그것도 칼 쓰는 도관으로?

“단순히 도망치려고 여기에 온 건 아닙니다.”

임소병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일단 몸도 좀 고치고, 화산과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말하자면 겸사겸사죠, 겸사겸사.”

“…….”

“그,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저라고 이러고 싶었겠습니까? 아니, 막말로 전쟁 벌이던 놈들이 아주 사라진 것도 아니고 그냥 엉덩이만 잠깐 뺀 것에 불과한데, 그걸 기회랍시고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놈들이 미친 거지!”

“……얼마나 신뢰가 없었으면…….”

“에이, 씨!”

결국 참다못한 임소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이 통해야 신뢰를 쌓을 것 아닙니까! 말이 통해야! 뭔 말을 해도, 무슨 전력을 짜도 ‘뭐래? 약한 놈이.’ 하고 나오는 놈들 상대로 뭘 합니까!”

“뭐래. 약한 놈이.”

“…….”

하지만 역시 청명에게는 이길 수 없었다. 임소병의 볼이 부들부들 떨렸다.

“흐음, 그럼…….”

그때 청명이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어중이떠중이 산채가 아닌 데다가.”

“그렇죠.”

“산채가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

“정확합니다.”

청명이 빙긋 웃었다.

“아, 그렇구나.”

그러더니 그 길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 도장? 얘기하다 말고 어디 가십니…….”

“아, 제가 생각한 거랑은 좀 달라서요. 저는 적당히 약한 산채 한 개 정도 조질 생각이었는데, 이게 일이 이렇게 커지면 우리도 부담이 좀 되네요.”

“…….”

“살펴 가세요. 돈 들고 오시면 다음 영약은 드릴…….”

그 순간 임소병이 섬전처럼 몸을 날려 청명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도장! 이렇게 가 버리시면 어떻게 합니까!”

“아니, 이 양반이 왜 이러셔? 이거 놓으세요! 녹림왕이시라는 분이 자존심도 없으시나!”

“사람이 당장 죽게 생겼는데 자존심이 뭐가 중요합니까! 저승 갈 때 챙겨 갈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져?”

“더한 것도 할 수 있습니다!”

“아, 바지 내려가요! 놔요! 놔!”

청명이 소리를 질렀지만 임소병은 눈에 불을 켜고 그의 바지를 당겼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청명은 미련 없이 임소병을 뻥 걷어차 날려 버렸다.

“아아악!”

바닥을 거하게 구른 임소병이 입을 가리며 기침을 했다.

“쿠, 쿨럭! 벼, 병자를 이렇게…….”

“안 통해요, 이 양반아!”

“아……. 나 영약 먹었지.”

임소병이 멀끔하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청명을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이, 일단 좀 앉으시지요.”

“됐네요. 할 말 없거든요?”

“그러지 마시고 좀.”

울상을 짓는 얼굴이 제법 절박해 보였다.

“이대로 돌아가면 제가 어떻게 될지도 모릅니다. 도장께선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안 될 이유라도?”

“끄으으응.”

하지만 역시 청명은 청명이었다. 조금도 통하질 않았다. 임소병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공짜로 해 달라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제가 온갖 배려를 다 해 드리지 않습니까?”

“배려는 얼어 뒈질. 어쩐지 처음부터 척척 내놓는다 했다. 사기꾼 같은 게.”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임소병이 녹림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다른 건 다 접어 두고라도 임소병 정도의 무위로 녹림왕을 자처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설천상이라도 가능할지 아닐지 의문이 들 정도인데.

“도와주십시오, 도장!”

“쯧. 어쩌다 이렇게 거머리 같은 게 붙었어.”

혀를 찬 청명의 의자를 빼 다시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래서.”

“네.”

“그것들 다 정리하고 제대로 된 녹림왕 자리에 앉으면.”

“얼마든지 내겠습니다! 돈은 산더미처럼 쌓아 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 이 양반이 내가 돈에 미친 사람인 줄 아나? 돈이면 다 되게?”

“……아닙니까?”

“…….”

차마 아니라고 곧장 대답하지 못한 청명이었다.

“입 싹 닦고 딴말할 생각은 아니겠죠?”

“제가 그런 놈으로 보이십니까?”

“네.”

“…….”

불신과 불신이 쌓여 산이 되어 버린 현장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계약서 쓰겠습니다.”

“조항은?”

“……마음대로 하십시오.”

“흐으으음.”

그제야 구미가 좀 당긴다는 듯 청명이 씩 미소를 지었다.

“산적이랑 동맹은 못 맺어요.”

“그, 그럼…….”

“하지만!”

청명의 두 눈이 반짝이며 빛났다.

“노예로는 쓸 수 있지!”

“…….”

“낄낄낄낄. 생각해 보면 꼭 나쁜 것도 아니네!”

“…….”

희희낙락하는 청명을 보며, 임소병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생각했다.

차라리 녹림으로 돌아가 장렬히 죽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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