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4화. 그러게, 사람이 초지일관해야지. (4)
“허, 허리…….”
“아아…… 내 다리…….”
화산의 제자들이 저마다 앓는 신음을 내며 벌벌 기었다. 어찌어찌 백매관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대체 무슨 정신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씻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
“저는 주저앉았다가 돌아가신 할아버님을 뵈었습니다…….”
백매관 중앙에 있는 거실에 모여든 그들은 하나둘 힘겹게 의자를 부여잡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그러니까요.”
“심지어 영약까지 먹었는데!”
“…….”
“왜 못 이기냐고! 왜!”
청자 배들의 눈에서 분한 기색과 시퍼런 광망이 흘러나왔다.
“죽빵! 딱 죽빵 한 방만 갈길 수 있으면 원이 없겠다!”
“아까 조걸 사형이 사람 패고 웃는 것 보셨습니까? 그 양반 원래도 성격이 개판이긴 했지만, 청명이 놈이랑 다니다 보니 이젠 아예 인성을 내다 버린 수준이 됐던데!”
“대사형은 또 어떻고? 차라리 조걸 사형처럼 낄낄대면 맞서서 화라도 내지! 근엄하게 할 말 다 하면서 패기는 인정사정없이 다 패지 않느냐!”
“……그러게 말입니다.”
온종일 조걸과 윤종에게 먼지 나게 얻어맞은 걸 떠올리며 모두가 이를 빡빡 갈았다.
이곳에 있는 모두는 자소단을 한 알 더 복용했다.
덕분에 활력이 넘치다 못해 천장을 뚫을 기세였다. 그런데도 이 다수가 그 두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대체 청명이 놈이 저 두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두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사숙들도 백천 대사숙과 유 사고한테 개 맞듯이 얻어맞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혜연 스님에까지 털리던데.”
“가엾게도…….”
사숙들을 떠올리던 청자 배들은 순간 물기가 차오른 눈가를 꾹 누르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제 와 새삼 윤종 사형이나 조걸 사형을 이겨 보겠다는 건 아니다!”
종회가 두 눈에 불을 켜고 말했다.
“그런데 무인이 되어서 이렇게 얻어맞고만 끝낼 수는 없잖느냐!”
“맞습니다!”
“딱 한 대면 된다! 딱 한 대만!”
“청명이 놈이야 바라지도 않지만, 윤종 사형이나 조걸 사형한테까지 평생 맞고 살 수는 없다! 이건 단순히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야!”
“옳습니다!”
청자 배들이 격하게 동조했다.
그런 와중에 종회가 안색을 살짝 바꾸며 한숨을 쉬었다.
“다들 들어 봐라.”
“예, 사형.”
“농처럼 말했지만,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너희도 우리가 먹은 게 뭔지 모르지는 않겠지?”
“……압니다.”
“그게 어떤 영단인데 모르겠습니까.”
청자 배들 역시 자신들이 받은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지 않는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자소단 두 알.
살아생전 어느 문파에서든, 제자들에게 영약을 두 알씩 줬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심지어 자소단은 소림의 대환단에도 뒤지지 않는,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대단한 영단이지 않은가.
“……거기에 공청석유까지.”
“사는 동안 공청석유 냄새도 못 맡아 볼 줄 알았는데.”
새삼 다리가 후들거린다.
대체 어느 문파에서 공청석유를 삼대제자에게 뿌린단 말인가?
이게 화산이니 그러려니 했지, 다른 문파에서 같은 일을 한다고 하면 그들부터 나서서 미쳤다고 욕을 했을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종회는 두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자소단 두 알에 공청석유까지 받아 처먹고 밥값을 못하면 혀 깨물고 죽어야 한다.”
“……그, 그렇죠.”
청자 배들이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좀 과격하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직은 변명거리가 있다. 솔직히 우리가 영약을 먹기는 했지만, 아직 완전하게 흡수한 건 아니잖으냐?”
“예, 사형.”
“하지만 이걸 다 흡수하고도 크게 달라진 게 없다면, 화산은 그 귀한 영단을 바닥에 버린 꼴이 되어 버린다.”
“…….”
“나는 죽어도 그 꼴은 못 보겠다. 이게 어떻게 구해 온 건데. 입만 열었다 하면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저 청명이 놈이 그 먼 북해까지 가서 얻어 온 건데.”
“……그렇습니다.”
종회가 잔뜩 분한 얼굴로 이를 갈자 옆에 서 있던 진우보(陳牛步)가 느릿하게 거들었다.
“사형의 말이 맞다.”
그가 청자 배들을 쭉 둘러보고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너희…… 아까 사형들의 몸에 난 상처를 봤느냐?”
“……예.”
대련을 하는 와중, 얼핏얼핏 드러나는 옷 안의 상처를 모두가 확실히 보았다.
“그런 상처를 입었다는 건, 필시 생사를 오갔다는 뜻이다. 사형들이 미련스러워 자신들의 공을 내세울 줄 몰라서 그렇지, 저건 말 그대로 목숨 내걸고 구해 온 영약이다.”
“…….”
“그런 영약을 거드름 한 번 없이 주는 분들이다. 우리가 사람이라면 그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 하다못해 짐승조차도 은혜를 아는데.”
청자 배들이 다들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형들은 예전보다 말이 많이 거칠어졌고, 점점 더 속내를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한결같이 사형제들을 위하는지, 청자 배들이 모를 리 없었다.
“모두 수련에 목숨을 걸자.”
종회가 눈을 부라렸다.
“화산에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청명이 놈과 사숙, 사고, 사형들만 불려 가는 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우리가 믿음직스러웠다면 장문인께서 그 인원들만 먼 곳으로 보냈겠느냐?”
“…….”
“우리가 등을 밀어 주어야 한다. 언제까지 짐 덩어리로 있을 수는 없어.”
“그렇습니다, 사형!”
분위기가 점점 타오르자 종회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 앞으로 수련을 게을리하는 놈이 나온다면, 사형들이 나설 것 없이 나부터 가만히 있지 않겠다. 다들 목숨 걸고 달려들어라. 알겠느냐?”
“예!”
청자 배들의 가슴에서 타오른 불길이 눈으로 또렷하게 번졌다.
그들 역시 화산의 무인.
화산오검이라는 이름으로 사숙과 사형들이 앞서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 하여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 두고 게으름을 부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들 빨리 쉬고, 내일은 진짜 한 대만 때려 보자!”
“예! 사형!”
“내일은 진짜 패 볼 겁니다!”
청자 배들이 저마다의 의지와 다짐을 품고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 * *
“……생각보다 빨리 올라오는데.”
“확실히 자소단은 보통 영약이 아닙니다. 검에 실린 힘이 어마어마해졌어요.”
오늘 치렀던 수련에 대해 논의하러 모인 백천과 그 무리는 살짝 감탄한 얼굴로 저마다의 감상을 늘어놓았다.
“청명이 놈이 실전이 부족했다 평한 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녀석들 몸이 상할까 걱정하지 않고 맹공격을 퍼부으니 맞서 오는 검도 점점 날카로워지더구나.”
“확실히 저도 느꼈습니다.”
그때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듣던 유이설이 작게 말했다.
“아직 부족해.”
“……그렇죠, 사고.”
“더 실전처럼.”
“이 이상은 어려울 것 같은데요?”
“돼.”
“…….”
유이설이 조걸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다 화산의 제자야. 버틸 수 있어.”
“……못 버티면요?”
“버티게 해.”
단호한 뜻이 서린 목소리에, 조걸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백천이 그 광경을 보다 빙그레 웃었다.
“다들 들어라.”
“예.”
“너희가 생각하기에 지금 제자들의 무위가 어느 정도라고 보느냐?”
“……으음.”
윤종이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청자 배들은 아직 북해빙궁의 무인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다들 많이 강해지기는 했지만…….”
당연한 일이다.
청자 배들은 이제 겨우 약관을 넘은 애송이들이다. 나이가 지긋하게 먹을 때까지 수련을 반복해 온 빙궁의 일반 무사들과는 최소 열 살에서 최대 스무 살 이상의 차이가 난다.
비견이 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 봐야 할 일이었다.
“백자 배는 맞설 정도는 돼요.”
“그렇지.”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리 평가한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의 얼굴이 살짝 단호하게 굳어졌다.
“그 북해의 무사들도 마교도들을 상대로 집단처럼 썰려 나갔다. 물론 기세에서 밀린 탓도 있겠지만, 실력 자체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잖느냐?”
“맞습니다.”
“그럼 지금 마교가 화산으로 쳐들어온다면 어찌 되겠느냐?”
그 질문에 모두가 일제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심지어 늘 표정이 없는 유이설조차도 눈살을 찌푸렸다.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은 제대로 된 대거리도 해 보지 못할 것이다.
마교는 그만큼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겠지. 하지만 벌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예.”
“그러니…….”
백천이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저들을 단련시켜야 한다. 언제 마교가 쳐들어와도 맞서 싸울 수 있게 말이다.”
그때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조걸이 한숨을 내쉬었다.
“새삼 느끼는 건데요.”
“응?”
“……그냥 무작정 수련을 하는 게 아니라 특정한 수준까지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부담이 장난이 아닙니다. 솔직히 지금 당장은 어떻게 된다 쳐도 사제들이 점점 더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만큼 더 성장시키기가 버거워질 텐데.”
“그렇지. 그런데 갑자기 그런 말은 왜 하느냐?”
백천의 물음에 조걸은 조금 불뚝거리는 얼굴로 툭 내뱉었다.
“……청명이 놈은 예전부터 이걸 쭉 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 말에 모두가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그놈은 처음 왔을 때부터 화산이 강해지는 것만 생각했으니까요. 화종지회까지 어떻게든 청자 배를 굴려서 종남보다 강하게 만들었고, 천하비무대회까지 또 같은 걸 반복하고…….”
“……그랬지.”
백천은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듯 복잡한 얼굴로 작게 고개를 저었다.
역지사지.
사람은 입장이 바뀌어 봐야 그 심정을 알 수 있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제자들을 이끄는 입장이 되니, 그동안 청명이 어떤 고민을 홀로 해 왔었는지 비로소 조금 알 것 같았다.
“하여튼 괴물 같은 놈이.”
한숨처럼 쓰게 중얼거린 백천은 모두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우리도 이제는 더 이상 예전의 애송이가 아니다.”
그의 눈에는 강한 확신이 어려 있었다.
만인방과의 싸움. 그리고 빙궁과의 격전. 거기에 목숨을 내놓고 싸웠던 마교와의 전쟁까지.
이 모든 경험은 그들에게 확실한 실적을 남겨 주었고, 그 실적은 자만이 아닌 자신으로 그들의 등을 받쳐 주었다.
“놈이 했던 거라면 우리도 응당 할 수 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그놈의 등을 밀어 주어야 한다.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여 줘야지.”
“예, 사숙. 그래야죠.”
“네, 사형.”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은 겪을수록 넓어진다.
화산이라는 작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며 보던 것과, 더 넓은 세상을 겪고 온 뒤 보는 것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제들도 사질들도 더 강해질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들이 영약의 기운을 더 빨리 흡수하고, 조금이라도 더 강해질 수 있게 돕는 것이다.”
“예.”
“너희도 알다시피 청명이 놈은 한번 말로 뱉어 놓은 건, 어떻게든 하는 놈이다.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두가 실전을 겪게 될 거다.”
윤종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그때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라. 누군가가 크게 다치거나 죽게 된다면 그 괴로움을 어찌할 수 없을 테니까.”
백천의 말에 유이설, 조걸, 윤종의 눈에 작은 불꽃이 타올랐다.
“……그러느니 다 제 손에 죽는 게 나아요.”
“진짜 죽도록 굴려야겠네요.”
“내일부턴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백천이 가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도 자소단과 공청석유를 먹었으니, 밥값은 해야지! 다들 푹 쉬고 내일부턴 더 노력하자꾸나.”
“예!”
그들을 격려하기라도 하는 듯 달빛이 환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훈훈하게 끝나려는 그 순간이었다.
“저…….”
“응?”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구석에 박혀 있던 혜연이 처량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못 먹었는데요.”
“…….”
백천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왜……. 아니…… 아니, 왜 못 드셨……?”
“아, 안 주는데 어떻게 먹습니까.”
“분명 인원수대로 분배를 했는데…….”
“처, 청명 시주께서 어디 소림 놈이 화산의 영단에 손을 대냐면서 챙겨 가셔서…….”
황망하게 떨리던 백천의 눈이 질끈 감겼다.
‘그 마귀 같은 놈이.’
혜연도 함께 북해에 가서 그 죽을 고생을 하고 왔는데, 설마 영약을 뺏어 갔을 줄이야.
“사람도 아니야…….”
“진짜.”
혜연의 두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보며, 조걸은 그의 어깨에 손을 툭 얹었다.
“……어떻게든 받아다 드릴 테니 울지 마십시오, 스님.”
“아, 아미타…불…….”
혜연의 눈물과 함께 화산의 밤이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