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0화. 세상이 어찌 되려고. (5)
말이라는 건 여러 가지 의미로 전달되기 마련이다.
같은 말이라도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의미로 전달될 수 있으니, 사람은 언제나 말을 전함에 있어서 신중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에는 잘 전한 말도 반드시 꼬아 듣는 인종이 존재했다.
“뭐?”
청명의 눈이 무섭게 번들거렸다.
“애새끼들이 더럽게 약하다고?”
……이 새끼는 귀에 거름망이 있나?
분명 같은 말을 들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저런 결론이 나온단 말인가?
“그 말이 아니라…….”
“그럼?”
“애들이랑 북해에 다녀온 이들이랑 차이가 벌어진…….”
“그게 그 말이잖아!”
“아니라고, 이 새끼야! 아니라고! 우리가 더 세다는 게 걔들이 약하다는 의미는 아니잖아.”
“아, 그럼 사숙이 잘났다는 소린가? 크으, 우리 동룡이 많이 컸어. 이제 대놓고 자랑도 할 줄 알고.”
“끄으윽. 위, 위장이…….”
백천이 윗배를 움켜쥐며 휘청거렸다.
‘아, 얼굴이 하얘진 게 아니라 핏기가 없는 거였구나.’
‘힘들 만도 하지.’
윤종과 조걸이 그런 백천을 동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청명이 코웃음을 치며 다리를 꼬았다.
“뭐…… 사실 따져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지.”
“음?”
“슬슬 때가 된 거지.”
영문 모를 말을 중얼거린 그는 턱을 괴더니 고민에 빠졌다.
다른 이들은 그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었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에는 그런 눈치가 약에 쓸래도 없는 인간이 있었다.
“뭐래? 혼자 생각하지 말고 말로 해, 말로!”
“…….”
청명의 뺨이 언짢은 듯 살짝 경련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런 그의 눈빛 앞에서도 조걸은 그저 당당했다.
“왜?”
“……아무것도 아냐.”
말을 해서 무엇 하겠는가?
들어 처먹을 것도 아닌데.
“이해가 안 가서 그런다.”
조걸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경험이 다르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차이가 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가 다시 확인해 봤는데, 수련은 정말 제대로 한 것 같거든. 사실 운검 사숙조께서 제자들이 놀게 두실 분은 아니시잖아.”
“그렇지.”
“게다가 사숙들은 우리한테 안 지려고 밤잠 줄여 가며 수련하시는 분들인데…… 이렇게 성과가 없다는 게.”
청명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툭 내뱉었다.
“왜? 조걸 사형도 자랑 좀 하게?”
“그런 게 아니라, 인마!”
조걸이 억울해하며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지금 이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거, 너도 알잖아.”
제법 진지한 목소리에 청명이 피식 웃었다.
평소라면 애들을 좀 더 굴리면 된다고 간단히 결론을 내렸을 이들이, 그를 부여잡고 이런 말을 해 대는 이유는 빤했다.
‘시야가 넓어진 거지.’
지금까지 이들에게 있어서 수련이란 스스로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었다. 나를 더 단련하고, 몰아붙이는 것.
하지만 만인방 사태와 북해빙궁 사건들을 겪으면서 모두가 알았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 말이다.
막말로 북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덜떨어진 일 장로 때문에 생고생을 하긴 했지만, 그 북해빙궁이라도 없었더라면 청명 일행은 무슨 수를 써도 마교를 막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천마가 부활하지는 않았겠지만, 그 뒤 마교가 쓸모를 다한 북해를 유린하는 것을 눈 뜨고 구경해야 했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면 부리나케 중원으로 달아났든가.
초조함이 짙게 어린 일행의 얼굴을 본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 백천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청명아.”
“응?”
“때가 되었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말 그대로야.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가 됐다는 거지.”
“다음 단계?”
“실전이지.”
청명의 말에 백천의 눈이 살짝 커졌다.
“실전?”
청명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걸 사형이 말한 대로야. 사형들이 북해에 다녀오면서 뭐 대단한 수련을 한 것도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
윤종이 슬쩍 못마땅한 얼굴로 딴죽을 걸었다.
“수레 끈다고 허리 부러질 뻔했는데.”
“거 수레 좀 끈다고 고수 될 거면 개나 소나 고수 되지! 그럼 소가 천하제일인이겠네!”
“…….”
“그런데도 확연히 차이가 나는 이유는 하나야. 목숨을 건 실전을 겪어 보았는가, 그렇지 않은가.”
백천이 약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반문했다.
“그래도 화산에서는 실전과 같은 비무를 하고 있지 않느냐?”
“목검 들고?”
“…….”
“이건 설명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사숙은 둘 다 겪어 봤잖아. 그 실전 같은 비무를 천 번 하면 그 주교랑 한 번 붙었던 것만큼의 경험을 얻을 수 있겠어?”
“그건 절대 무리다.”
백천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겪어 보지 않은 이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막연히 생각하던 주교와 바로 눈앞에서 맞닥뜨린 주교는 중원을 한 번 가로지르고도 남을 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그 영혼을 찢어발기는 듯하던 살기와, 몸을 으스러뜨리는 압력을 대체 무슨 수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백천은 그때를 떠올리다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겪어 보지 않은 이들은 몰라.”
“그렇지.”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학이라는 건 오묘한 면이 있어서, 그럴싸함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부분이 있어. 내가 아무리 진검을 들고 실전처럼 몰아친다고 해도 마음 한구석에는 기대는 곳이 있다는 말이야.”
“네가 우리를 정말 죽이지는 않을 거라는 거?”
“그렇……. 아. 진짜 죽일 것처럼 해 볼 걸 그랬나?”
“……아서라.”
그건 주교보다 더 무섭다.
“흐음. 그럼 실전이 부족했다는 건가?”
백천이 일견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사실 따져 보면 그들을 제외한 화산의 제자들은 제대로 된 실전은커녕 제대로 된 비무도 겪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화종지회 때는 청자 배 일부와 청명이 놈을 제외하고는 모두 힘도 써 보지 못하고 패배했다. 그리고 천하후기지수비무대회 때도 소수의 대표만이 비무자로 참여했을 뿐이다.
그나마 만인방 사태 때는 실전을 겪어 보았지만, 고작 그 한 번만으로 실전에 익숙해졌다 말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런데 실전이라는 걸 겪고, 겪지 않고에 따라 그렇게 차이가 나나?”
“말하자면 내기 바둑 같은 거야.”
“……엥?”
이건 뭔 개소리냐는 듯 백천이 청명을 바라보았다.
“연습을 할 때는 수가 잘 보여. 자기 실력을 얼마든지 발휘할 수 있지. 하지만 거기에 전 재산이 걸리면?”
“……손이 후들거리겠지.”
“그런데 목숨은 전 재산보다 더 귀하거든.”
청명이 차게 말했다.
“그런 내기 바둑을 몇 번이고 치른 이는 실력이 비약적으로 높아지지. 그저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는 거야.”
“으음.”
가만 듣고 있던 조걸이 조용히 윤종에게 물었다.
“줄 없이 절벽 타는 정도로는 안 되나 봅니다?”
“그것도 밑에는 그물이 있잖느냐.”
조걸은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모두 이제는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직접 실전을 겪으며 느낀 바가 있는 터라 감각적으로 그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아챈 것이다.
“확실히 다르지.”
“음, 많이.”
청명이 심드렁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문파는 적당히 숙성된 제자들을 강호로 내보내는 거야. 수련이 정말로 만능이라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강호에 명성을 떨치는 이들보다 문파 안에서 열심히 수련만 한 이들이 더 강해야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거든.”
“강호행이라는 거로구나.”
“그렇지.”
“한데 이상하구나……. 나는 예전에 강호행을 겪었지만, 그때 딱히 크게 발전했다는 생각은 안 해 봤는데.”
“……사숙.”
“응?”
“숙성이 되어야 한다니까, 숙성이!”
“…….”
“거 술도 좋은 걸로 빚어서 숙성을 시켜야 맛이 나지! 싸구려를 대충 묻어 두면 그냥 썩는 거야! 그때 그 시절 사숙은 한 푼에도 못 팔아 치워. 내가 돈 주고 팔아야 돼!”
“끄으으…….”
조걸과 윤종이 부들부들 떠는 백천을 슬그머니 부여잡았다.
“진정하십시오, 사숙.”
“무시당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하루 이틀이 아니라서 이러는 거잖아, 인마!”
“왜 저한테 화를 내십니까…….”
괜히 타박을 받은 조걸이 시무룩해져선 입을 삐쭉 내밀었다.
“여하튼!”
겨우 진정한 백천이 청명을 보며 말했다.
“그럼 모두의 실력을 상승시키기 위해선 결국 실전을 겪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거군.”
“그렇지.”
“……실전이라는 건 그만한 위험을 동반한다.”
“늦는 것보다는 나아.”
청명이 조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두려워서 실전을 피하다가는 정말 피할 수 없는 것을 맞닥뜨리게 돼. 그때 가서 후회하는 건 너무 늦어.”
이곳에 있는 이들은 저 ‘피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마교.
사형제들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서, 화산 안에서만 보호하다가 언젠가 마교와 싸워야 할 날이 훌쩍 다가온다면?
실전도 제대로 겪어 보지 못한 이들이 마교도들의 살기를 감당할 수 있을까?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알겠다.”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부분은 내가 장문인께 따로 한번 말씀드려 보마.”
“그래.”
백천의 단호한 얼굴을 보며, 조걸은 미묘한 불안감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데 사형.”
“응?”
“실전을 겪는다는 건 사숙들과 사제들이 다들 강호로 나간다는 거잖습니까.”
“그렇지.”
“……괜찮을까요?”
“…….”
윤종 역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거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실력이야 그렇다 치고, 인성으로는 세상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는 자랑스러운 사형제들이 아닌가?
그런 이들이 한둘도 아니고 단체로 강호에 나가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져도 크게 벌어지지 않을까?
“그런데 실전이라고 해도. 딱히 싸울 이가 없잖느냐? 만인방에 쳐들어갈 것도 아니고.”
“뭐 고민할 것 있어? 적당한 산채 하나 잡아서 털어 버리면 그만이지.”
“쉿! 인마! 여기 녹림왕이 와 계시는데 들으시겠…….”
“들었습니다.”
“봐, 들으셨잖……. 응?”
움찔 놀란 백천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벽에 나 있는 작은 창문으로 이제는 좀 익숙한 두 쌍의 눈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들었다고요.”
“…….”
백천이 나직하게 헛기침을 했다.
이걸 어떻게 수습을 해야…….
“그…… 창이 나 있다지만 타인의 대화를 엿듣는 것은 도리가 아닌…….”
“뭔 산적한테 도리를 따지십니까. 그럴 거면 내가 과거를 봤지.”
그렇지요.
네. 그 말은 확실히 틀린 점이 없네요.
근데 당신 너무 필요한 대로 군자랑 산적을 오고 가는 거 아닙니까? 거참 편리하게?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온 임소병이 청명을 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연단 준비하던 사람이 또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뭐? 산채를 까?”
“어허. 재촉한다고 쌀이 밥이 되나! 뜸이 들어야지!”
“그럼 끓여 놓기라도 하고 말을! 쿨럭! 쿨러억! 에헤헤헤헤헤에에취이! 끄윽. 가, 가슴이…….”
얼굴이 새파래진 임소병을 보며 백천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연기가 아닌 것 같은데. 진짜 삼음절맥쯤 되신 것 아니냐?”
“아냐. 내가 대충 봤는데 그거 구라더라고.”
“아, 그래?”
“응. 삼음이 아니라 좀 더 갔더라. 삼음하고도 반의반 절맥 정도?”
“…….”
거 이름 한번 더럽게 기네.
“청명아.”
“응?”
“송장 치기 전에 빨리 영단 하나 만들어 드려라.”
“쯧. 귀찮아 죽겠네.”
청명이 슬쩍 임소병을 보며 말했다.
“그…… 내가 영단은 만들어 줄 건데요.”
“예! 예! 제발! 제발 좀 부탁드립니다! 제가 오죽하면 산채 버리고 여기에 와서 이러고 있겠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예?”
“혹시 남는 산채 같은 거 하나 없어요? 말을 안 들어 먹어서 모조리 패고 콱 묻어 버려도 괜찮은 곳이라든가.”
“야, 인마!”
“녹림왕께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냐!”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지!”
화산의 제자들이 기겁을 하며 만류했다. 하지만 임소병은 그들의 걱정처럼 그리 발작하진 않았다.
오히려…….
“어……. 있긴 한데.”
“응?”
있어?
그런 게 왜 있어?
“처리해 주실 겁니까?”
“자, 잠깐만요.”
백천이 기겁을 하며 물었다.
“그, 그래도 되는 겁니까! 그래도 녹림왕이신데, 산채를 턴다고요?”
“거 그래 봐야 산적인데.”
“예. 그래 봐야 산적인데요, 뭐. 몇 놈 죽는다고 세상에 문제가 생길 것도 아니고.”
“…….”
백천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이 새끼들 미쳤어.’
아니. 도사랑 산적이 왜 이리 쿵짝이 잘 맞냐고! 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지. 이쪽은 골치 아픈 거 처리해서 좋고!”
“우리는 애들 훈련시킬 수 있어서 좋고?”
“아니. 돈 벌어서 좋은 거지.”
“응? 돈?”
청명이 빙긋 웃으며 임소병을 바라보았다.
“얼마 내실 건데요?”
“…….”
“내가 싸게 해 드릴게, 싸게.”
“…….”
임소병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렸다.
“돈이요?”
“네.”
“……그때 제 재산을 다 털어 가고, 대가로 주기로 한 영단은 주지도 않았으면서 돈을 또 내라?”
“그거랑 이건 다른 거죠. 헤헤.”
청명이 해맑게 웃으며 밉살스레 덧붙였다.
“거래란 그런 것 아니겠어요?”
임소병이 말없이 입가로 손을 가져갔다.
주르륵.
“헐?”
“엄마야!”
딱히 기침도 없었건만, 임소병의 입에서 선지와 같은 피가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괘, 괜찮으십니까?!”
“죽는 거 아냐?”
창백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입에서 흐르는 피를 막던 임소병이 가만히 말했다.
“저…….”
“저?”
“……저주할 테다. 망할 화산 놈들.”
털썩.
그 말만을 남기고, 임소병은 그대로 쓰러졌다.
환자처럼……. 아니, 환자답게 쓰러져 경련하는 그를 보며 백천이 힘없이 말했다.
“……가서 소소 불러와라.”
“예, 사숙.”
“오는 길에 내 위장약도 가져오라고 하고.”
“……예, 사숙.”
임소병에게 뭔가 이상한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게 된 백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