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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559화 (557/1,567)

559화. 세상이 어찌 되려고. (4)

차곡차곡 쌓이는 재료들을 보며 임소병이 두 눈을 빛냈다.

‘재료들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군.’

천고의 영약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구하기 쉬운 물건들도 분명 아니었다.

촤르르르륵!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자루에서 푸른빛의 보석들이 쏟아져 나왔다. 임소병은 살짝 묘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빙정이로군요.”

“네.”

“그러니까 북해에는 이걸 구하러?”

“네.”

“완전히 사기는 아니었군요.”

“아니, 이 양반이? 아까부터 아니라고 했잖아요!”

청명이 눈을 부라리자 임소병이 어색하게 기침을 하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뭐 뀐 놈이 성내는 꼴이었지만, 힘센 놈이 장땡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네.”

“색이 좀 다른 빙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 이거요?”

청명이 따로 모아 둔 빙정을 툭툭 찼다. 다른 빙정들과는 다르게 옅은 하늘색을 띠고 있었다. 이는 주교가 치른 부활의 의식에 소모되어 이미 한차례 효능을 많이 잃은 것들이었다.

“이게 품질 좋은 거예요. 제가 댁을 위해 특별히 챙겨 왔죠.”

“……좋은 거 아닌 것 같은데.”

“에헤이. 속고만 사셨나?”

물론 임소병은 속고만 살아오지 않았다. 감히 녹림왕을 속이려 드는 간 큰 인간은 세상에 흔치 않으니까.

하지만 하필이면 그 흔치 않은 인간 중 하나가 지금 그의 앞에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럼 이제 이걸로 혼원단을 만드는 겁니까?”

“네, 그렇죠.”

“호오. 역시 화산이로군요. 도가문의 연단법은 일반적인 문파들과는 다르다는 말을 듣기는 했는데. 그래서 누가 연단을 하십니까?”

“저요.”

“네?”

“저요.”

“…….”

여유를 잃지 않던 임소병의 얼굴에 미미한 경련이 일었다.

“도장이요?”

“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도장이?”

“네. 그렇다니까요.”

“그러니까…… 진짜로 도장이?”

“근데 이 양반이?”

청명이 다시 콱 눈을 부라렸지만, 이번만은 임소병도 할 말이 많았다.

“아, 아니, 화산에 사람이 한둘 있는 것도 아니고, 저리 많은 이가 있는데 왜 하필 도장이 연단을 한단 말입니까?”

청명이 믿을 놈이냐고 묻는다면 분야에 따라 의견이 갈릴 수 있다.

주먹질을 하는 데 있어서는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한 놈일 테지만, 이런 세심하고 꼼꼼한 일에 있어서는 세상에서 가장 믿음이 가지 않는 놈이었다.

그런데 그 청명이, 임소병의 목숨이 달린 만금짜리 연단을 한다니 속이 뒤집어질 수밖에.

“이건 나밖에 못 만들어요.”

“……원시천존이시여.”

자신도 모르게 도호를 왼 임소병의 목소리는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무, 문제는 없는 거겠죠?”

“저 못 믿어요?”

“…….”

난생처음으로 진정한 절망이 무언가를 깨닫는 임소병이었다.

콰아아앙!

조걸의 검에 얻어맞은 곽평(郭坪)이 비명을 내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아, 아악! 내 허리!”

“쯧쯧쯧.”

조걸은 혀를 끌끌 차며 나동그라진 곽평을 내려다보았다.

곽평뿐 아니라 이미 그에게 당한 이들이 수두룩했다. 연무장에 모인 삼대제자들이 다들 어디 한 군데씩은 꼭 보여잡고 있는 모습이 그랬다.

“빈틈투성이잖아. 대체 그동안 수련을 어떻게 했길래 실력이 되레 줄었단 말이냐!”

조걸이 버럭 고함을 쳤다. 매섭고 엄정한 조걸의 일갈에 사제들이 모두 움찔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 광경을 보는 조걸의 마음속으로 어떤 감정이 날카롭게 스치고 지나갔다.

‘이거지!’

생각해 보면 조걸만큼 억울한 이도 없었다.

아무리 아직 삼대제자에 불과하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그는 삼대제자 중 두 번째 배분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삼대제자 중 윤종을 제외하면 그보다 높은 이가 없다는 뜻이다.

일반적인 문파라면 윗 배분에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해도, 삼대제자 중에서는 나름 떵떵거릴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저 양반들이랑 같이 다녀서.’

매번 일이 터질 때마다 이대제자인 백천이나 유이설, 그리고 삼대제자 중 하나밖에 없는 사형이랑 엮여 돌아다니다 보니 어딜 가도 막내 취급을 벗어나지 못했다.

응?

청명이나 당소소가 조걸보다 배분이 낮지 않냐고?

그게 뭔 의미가 있나, 대체!

어쨌든 간만에 자신을 은근하게 두려워하는 사제들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긴 여행 동안 내내 비어 있던 무언가가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내 너희에게 분명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지, 진짜 열심히 했습니다.”

“허리가 부러져라 수련했단 말입니다. 이건 운검 사숙조께서도 인정하신 겁니다.”

“사형이 돌아오면 이렇게 지랄……. 아니, 화내실 걸 알아서 하루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고요.”

“구라 치고 있네, 새끼들이!”

“진짜예요!”

청자 배들이 입을 모아 억울함을 호소하자 내내 밀어붙이던 조걸도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라고?”

“예!”

“근데 왜 이렇게 약해?”

“…….”

청자 배들의 얼굴에 뭐라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죽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래서 천재가 싫어!’

‘저, 저 얼굴 봐, 저거. 진짜로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잖아.’

청자 배들이 절망에 빠져 꿈틀대자 조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닌데? 분명히 북해로 가기 전보다 약해졌는데.”

“아니라고요!”

“무각주님께서도 수련의 성과가 흡족하다고 하셨단 말입니다!”

“……이게 뭔 일이지?”

조걸은 무언가 잘못되었다 생각하며 고민에 잠겼다.

그때 마침 윤종이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왜 그러고 있느냐?”

“아, 사형. 마침 잘 오셨습니다.”

“왜?”

“아니, 이놈들이 분명히 수련을 게을리한 것 같은데, 자기들은 아니라고 우기잖습니까.”

“그럼 혼을 내면 되지.”

“그런데 무각주님과 백매관주님은 수련을 열심히 했다고 칭찬을 하셨답니다. 그래서 좀…….”

“음?”

잠깐 눈썹을 꿈틀한 윤종이 손을 내밀었다.

“줘 봐라.”

“예.”

조걸이 손에 든 목검을 잽싸게 내밀었다. 목검을 편안한 자세로 쥔 윤종이 종회를 보며 턱짓했다.

“들어와 봐라.”

“……사형. 저 진짜 좀 전에 한 대 맞았는데…….”

“어서.”

종회가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목검을 들자마자 그의 몸에서도 무시하기 힘든 예기가 흘러나왔다.

“차아아아아압!”

그는 재빠르게 달려들어 윤종의 머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목검의 끝이 순식간에 십여 개로 갈라지며 윤종의 전신을 뒤덮기 시작했다.

하나.

파아앗!

종회의 검이 거의 몸에 닿을 때까지도 그 자리에서 꼼짝을 않던 윤종의 검이 일순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 그리고 섬전처럼 종회를 향해 날아들었다.

퉁!

종회의 목검이 순식간에 손을 벗어나 하늘 위로 팽그르르 돌며 솟아올랐다.

턱.

목검을 종회의 어깨에 올린 윤종이 눈살을 찌푸렸다.

“으음.”

“…….”

그 광경을 지켜본 이들은 모두 입을 쩍 벌리며 경악했다.

“단 일 수에…….”

“원래 이렇게 차이가 나지는 않았는데.”

“세상에, 검을 튕겨 냈어.”

검수가 잡고 있던 검을 일격에 허공으로 날린다는 건 보통 실력차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조걸이야 예전부터 청자 배 최고의 실력자로 모두에게 인정받던 이였으니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윤종은 아니었다. 본디 윤종과 다른 청자 배들 사이에는 그리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거 보십시오, 사형. 이 새끼들 놀았다니까요?”

“너는 좀 조용히 해라.”

“…….”

윤종은 잠깐 심각한 얼굴로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천 사숙을 봬야겠다.”

찰랑.

백천의 매끄러운 머리칼이 바람에 부드럽게 나부꼈다. 눈부시게 흰 옷도 우아하게 흩날렸다.

‘광이 나네.’

‘뽀송하네.’

물론 그는 긴 여행 동안에도 결코 청결함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의 기준에는 한참 모자랐던 모양.

화산에 돌아온 지 불과 이틀 정도가 지났건만, 그새 백천은 털갈이를 한 짐승처럼 뽀송뽀송하게 변해 있었다.

‘세상에, 옷에 주름은커녕 잡티 하나 없네.’

‘아무리 봐도 우리 옷이랑 재질이 다른 것 같은데. 따로 제작하나?’

“무슨 일이냐?”

등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듯한 백천을 멍하니 보던 조걸과 윤종이 움찔했다.

‘혜연 스님 계시는 줄 알았네.’

‘뭐가 저렇게 반짝반짝한대.’

윤종은 고개를 휘휘 젓고는 입을 열었다.

“문제가 조금 있는데…… 아무래도 사숙께 보고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앉아 보거라.”

백천이 앞을 가리키자 두 사람이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보고라니.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일이 터진 것은 아닐 테……. 설마 청명이냐?”

“……아니요.”

청명이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백천의 등 뒤에 보이던 후광이 순간적으로 약해졌다.

“청명이는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다행이구나. 이제 겨우 위장이 나았는데.”

백천의 눈 밑에 순간적으로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두 사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물론 그들도 청명이 놈 때문에 위장에 구멍이 뚫릴 만큼 고생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 한들 백천의 마음고생에 견줄 수야 있겠는가.

일순간 지쳐 보이던 백천의 얼굴이 다시금 사뭇 진지해졌다.

“하여, 무슨 일이더냐.”

“흐음…….”

보고를 받은 백천의 얼굴은 미미하게 굳어 있었다.

“격차라…….”

“예.”

윤종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손을 섞어 본 결과, 확실히 사제들이 성장하지 않은 건 아니었습니다. 몸에도 힘이 더 붙었고, 검술은 분명 더 정교해졌습니다.”

“그래?”

“예. 하지만…… 뭔가 맥이 없다고 해야 하나.”

“흐음.”

백천이 조걸을 슬쩍 돌아보자 그 역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뭔가 분명히 조금 나아진 것 같기는 한데…… 살아 있지 않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조걸은 잠깐 말을 멈추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뗐다.

“이런 말을 사제들에게 직접 할 수는 없겠지만, 저는 차라리 소소가 다른 사제들보다 더 강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당소소가 화산에 입문한 게 언제던가?

물론 그녀는 하루도 게을리 보내지 않고, 다른 이대제자나 삼대제자들이 민망해할 만큼의 강도 높은 수련을 소화하고 있다.

하지만 냉정하게 봤을 때, 아직 다른 삼대제자들을 능가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아니어야 했다.

하지만 조걸은 분명히 그리 느끼고 있었다.

“음.”

그 말까지 들은 백천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안 그래도 나도 막 같은 것을 느끼고 있던 참이다.”

“사숙도 손을 섞어 보셨군요.”

“청명이 놈이 없으니 내가 해야지. 사제들을 이끄는 건 대제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

백천이 조금 어두운 얼굴로 윤종과 조걸을 보며 말했다.

“우선 한 가지는 확실히 하자꾸나. 우리가 없는 동안 다른 사형제들이 수련을 게을리한 건 아니다.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그들의 실력은 확실히 일취월장했다.”

“……하면?”

“눈의 문제겠지.”

“예?”

그의 단정한 입가에 쓴웃음이 어렸다.

그들은 북해에서 말 그대로 사선을 넘나들었다.

새외사궁 중 하나인 북해빙궁의 정예들과 목숨을 걸고 검을 겨뤘고, 빙궁의 장로들과도 싸웠다.

그뿐인가?

그 빙궁 따위는 순식간에 쓸어 버릴 수 있는 마교도들과 이를 악물고 싸웠고, 합공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 두려운 마교의 주교와도 결전을 치렀다.

그런 그들에게 평범하게 수련을 해 온 다른 사형제들의 검이 눈에 찰 리가 없었다.

“같은 곳에서 시작했다 한들, 백 장을 간 이가 십 장을 걸은 이를 돌아본다면 출발점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 않겠느냐?”

“아…….”

조걸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윤종은 상황을 이해한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저희가 북해를 다녀오면서 딱히 다른 이들보다 수련을 더 한 것도 아닙니다. 수레를 끌어 대는 것도 수련이라고는 하지만, 화산의 남은 이들도 나름의 고련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차이가 벌어진다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까?”

“문제지.”

백천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야.”

“하지만 방법이 마땅히…….”

“흐음.”

살짝 눈을 내리깔고 고민하던 백천이 이내 어깨를 쭉 폈다.

그러자 이내 화산의 대제자다운 웅장한 기세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얼마나 압도적인지, 윤종과 조걸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고 말았다.

‘사숙…….’

‘언제 이렇게?’

그는 위엄 흐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방법은 찾으면 그만이지. 이곳은 화산이다. 무엇이 문제가 되겠느냐?”

“예!”

“그렇습니다, 사숙!”

실로 헌앙한 그 기세에 살짝 감동한 두 사람은 가슴이 기대로 부푸는 것을 느끼며 크게 대답했다.

백천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은 곧장 가서.”

“네!”

“청명이를 불러오너라!”

“…….”

반짝반짝 빛나던 조걸과 윤종의 얼굴에서 일순 힘이 쭉 빠졌다.

“어서.”

“…….”

거…… 그럴 거면 기세는 왜 뿜으십니까?

환장하겠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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