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8화. 세상이 어찌 되려고. (3)
현종이 손에 든 차를 쭉 들이켰다.
그러더니 탁 소리가 나게 찻잔을 다탁에 내려놓았다.
“녹림이…….”
“예.”
“천우맹에?”
“예. 그렇습니다.”
임소병이 해맑게 웃자 청명이 무섭게 눈을 부라렸다.
“아니, 저 산적 놈이 죽어 가다 못해 미쳤나?”
“쿨럭! 쿨럭! 끄으……. 병자한테 말씀이 너무 심하신 것 아니오, 화산신룡?”
“아니, 그러고 보니 이 양반은 지 불리할 때만 기침하네? 확 폐를 뽑아 확인해 버릴라.”
청명이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려 하자 백천을 비롯한 제자들이 황급히 그런 그를 움켜잡았다.
“그러지 마라, 청명아. 너는 진짜 할까 봐 겁난다.”
“내 말이.”
“아니이!”
청명이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소리쳤다.
“도적놈이 도관에 쳐들어와 겸상을 하는 것도 배알이 뒤틀리는 마당에, 뭐? 천우맹에 들어와? 왜? 마교에도 입문하지, 왜!”
“……쿠, 쿨럭!”
“쿨럭은 얼어 뒈질!”
청명의 발이 허공을 가르며 임소병에게 날아들었다. 임소병이 몸을 굴려 피하고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장문인! 장문인! 화산의 객이 화산의 제자에게 맞아 죽게 생겼습니다! 구해 주십시오!”
현종은 정말이지 이 상황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개판이로다.’
아주 개판이야.
“너는 좀 진정하거라.”
“아니, 저런 개소리를 들으시고 어떻게…….”
“청명아.”
“예?”
“물론 황당한 상황이고, 당황할 수밖에 없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현종이 도끼눈을 뜨고 청명을 노려보았다.
“이게 다 누구 때문에 벌어진 상황인지 모르지는 않겠지?”
“…….”
“알면 거기 조용히 있거라.”
“눼.”
사나운 개에게 목줄을 채우듯 청명을 진정시키는 현종을 보며 임소병은 연신 감탄했다.
현종이 말했다.
“이보시오.”
“예, 장문인.”
“지금 하시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계시오?”
“네, 물론입니다.”
임소병을 응시하는 현종의 눈은 단호하고 올곧기 그지없었다.
“천우맹이 아직 실체가 명확하지 않다고는 하나, 그 근본은 화산과 당가의 연합이요.”
“네. 정파와 정파의 연합이지요. 하지만 천우맹에는 야수궁과 유령문 역시 참여하지 않습니까.”
“…….”
“야수궁은 물론이고 유령문도 정파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굳이 따지자면 그 형태는 사파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요.”
현종은 슬쩍 침음성을 흘렸다.
“그리고…….”
임소병이 어느새 백천과 그 무리에게 다시 잡혀 있는 청명을 흘끗 보았다.
“화산신룡이 북해까지 다녀온 이상, 북해빙궁이 천우맹에 들 것은 당연지사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출신과 성분을 가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현종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 한들 쉬이 결정할 일은 아니외다.”
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야수궁이 새외의 문파라 그 경계가 불분명하다고는 하나, 그들은 양민들을 괴롭힌 적은 없소. 그에 반해 녹림은 양민들의 고혈을 빨아 제 배를 채우는 곳이 아니오?”
“장문인, 그것은…….”
현종의 목소리에 단호함이 어렸다.
“화산이 천우맹의 모든 성격을 대변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천우맹을 대표하는 곳이오. 빈도가 천우맹의 맹주로 있는 한은 양민들을 괴롭히는 녹림을 받아들이기는 어렵소이다.”
타협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현영의 볼이 살짝 실룩였지만, 그도 감히 이런 투로 말하는 현종의 말에 딴죽을 걸고 나서지 못했다. 장로인 현영도 그럴진대, 다른 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 단호한 거절에도 임소병은 당황하지 않고 미소 지었다.
“장문인.”
“말씀하시오.”
“하나 여쭙겠습니다. 화산의 도는 무엇입니까? 스스로 선을 좇는 것입니까? 아니면 고통받는 이들을 선으로 인도하는 것입니까?”
“으음.”
예상치 못한 질문에 현종이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스스로 도사라 자부하는 이라면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화산은 스스로 선을 좇고 있소. 하지만 그건 지금의 화산이 미력하기 때문일 터. 도인을 자처하는 이는 스스로 선계에 드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는 법이오. 그리하여 결국에는 모두를 도로 이끄는 것이 화산의 이름을 진 이들의 사명이겠지.”
“하면, 잘못을 저지른 이들은 영영 도에 이를 수 없습니까?”
“참오 하고, 뉘우친다면 가능하외다.”
그 대답이 듣고 싶었다는 듯 임소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장문인. 장문인께서, 그리고 화산이 녹림을 옳은 길로 이끌어 주십시오.”
현종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임소병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녹림은 그저 들에서는 살아갈 길이 없는 이들이 모인 집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재물이 있어 떵떵거릴 수 있는 이들은 산에 오를 필요가 없고, 지은 죄가 두렵지 않은 이들은 수풀에 몸을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으음.”
“녹림이 양민을 털어 큰돈을 번다는 소문이 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문인. 금전을 산처럼 쌓아 놓는다 한들 그 산골짜기에서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단 말입니까? 진정 양민의 고혈을 짜 재물을 많이 모았다면, 다들 산을 버리지 않겠습니까?”
“어…….”
현종이 말문이 막힌 듯하자 청명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돈 많던데?”
“크, 크흠. 평범한 녹림도들은 그렇다는 거지요. 평범한…… 쿠, 쿨럭! 쿨럭! 아이고, 기침이…….”
“저거 진짜 폐 까 봐야 된다니까.”
임소병이 겸연쩍은 얼굴로 슬쩍 웃더니 말했다.
“물론 저도 염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천우맹에 정식으로 가입하여 다른 문파들과 같은 지위를 누리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건 녹림이 지금까지의 오명을 씻고 새로운 이름을 얻은 뒤에도 충분합니다. 그 전에는 단 하나의 약조만으로 충분합니다.”
“약조라 하시면…….”
“녹림을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내내 허약해만 보이던 임소병의 몸에서 고요한 기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특하다 하여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배우지 못하고, 도와 선을 알지 못한다고 하여 쓰레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배우지 못한 자에게는 가르침을 주고, 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도를 알려 주는 것이 사람이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가만 듣던 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더없이 옳소.”
“지금까지의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라고 하시면 그리하겠습니다. 다만 그건 제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니 도움을 주십시오.”
임소병이 그 자리에서 현종을 향해 넙죽 절했다.
“음…….”
현종은 깊이 고민하는 듯 한참을 말이 없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알겠소.”
“하면……?”
“하나 이 일은 나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외다. 화산뿐 아니라 타 문파들 역시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야 할 일이니, 녹림왕께서는 서두르지 마시오.”
“그 대답으로 충분합니다.”
임소병이 빙긋 웃었다.
“하면 화산신룡이 영단을 넘겨 주실 때까지 화산에 잠시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그리하시오.”
“헐.”
청명이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반문했다.
“산적을 먹이고 재워 준다고요? 화산에서?”
“왜? 너도 먹이고 재우는데. 차라리 산적이 낫지!”
“…….”
“잔말 말고 처소까지 안내해 드리거라. 영단도 빨리 제조해 드리고!”
“눼.”
그리하여 임소병이 잠시 화산에 머무르게 되었다.
“…….”
“…….”
임소병은 몇 발짝 떼다 말고 연신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 화산신룡. 아니, 청명 도장.”
“왜요?”
“……이건 아무리 봐도 처소로 가는 길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에이. 속고만 사셨나. 이쪽으로 오세요. 거기 말고 이쪽.”
“……어째 갈수록 으슥해지는 것 같습니다?”
“조용한 게 좋은 거죠.”
임소병이 슬쩍 발을 뒤로 빼자, 청명이 그런 그의 뒷덜미를 콱 움켜잡았다.
거의 동시에 임소병이 전각의 담벼락을 필사적으로 움켜잡으며 매달렸다.
그리고 청명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그를 잡아당겼다.
“아, 잠깐만 가면 된다니까!”
“지금 패려고 그러는 거 아니오! 패려고! 가뜩이나 지금 몸도 약한데 도장한테 맞으면 죽소!”
“안 죽게 살살 팬다니까!”
“거보시오! 패려고 하는 거 맞잖소! 아악! 도사가 산적 잡는다!”
“좋은 일이잖아.”
“어? 그러네?”
임소병이 끄응 하고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에이, 썩을 신분 때문에 뭘 당해도 하소연도 못 하겠네.”
“너스레는. 망할 양반이.”
청명이 이를 빠득빠득 갈며 임소병을 노려보았다. 그도 살면서 능구렁이 꽤나 여럿 보았지만, 이놈은 그중에서도 유별나게 유들유들 능글맞았다.
“뭔 생각이에요?”
“무슨 생각이긴. 못 들었소? 천우맹에 들어가고 싶다니까.”
“뭔 산적 놈이 맹에 들어와.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청명의 불신 어린 눈빛을 보며 임소병이 피식 웃었다.
“이보시오. 청명 도장.”
“네?”
“지난 마교와의 전쟁에서 제일 많이 죽은 이들이 누군지 알고 있소?”
“그야…….”
“사파요.”
청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사실이다.
“사파 중에서도 제일 많이 죽은 이들이 바로 녹림의 산적과 장강수로채의 수적들이오. 이유가 뭔지 알고 있소?”
“도와주지 않으니까.”
“바로 그렇소.”
웃기는 일이다.
물론 청명은 구파를 증오한다. 하지만 적어도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서로를 도와 가며 마교에 대항했다.
새외사궁 역시 구파와 연합하진 못했지만, 자기들끼리는 수천 리를 오가며 지원했다.
하나 사파만은 서로를 돕지 않는다.
“평소에도 구역을 놓고 심심할 틈 없이 칼부림하던 놈들이 새로운 적이 생겼다고 갑자기 우애가 생길 리 없지. 서로 공격이야 하지 않았다 해도 끝끝내 마교를 상대로 힘을 합치지는 못했소.”
“그렇죠.”
“그러니 남아날 리가 있나.”
지금도 마찬가지다.
마교가 발호한다고 해서 만인방과 녹림이 서로 힘을 합쳐 대항한다? 천만에. 만인방은 녹림을 완전히 부술 수만 있으면 되레 마교를 지원하고도 남을 놈들이었다.
사파는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하고, 정파는 굳이 사파를 돕지 않는다. 그리고 새외는 중원의 문파를 도울 이유가 없다.
때문에 녹림은 천하 어느 곳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했다.
“그게 이번이라고 다를 리가 있겠소? 지금 녹림이 강성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지난 전쟁의 피해가 너무도 처참했기 때문이오. 삶의 터전을 잃은 양민들이 살기 위해 죄를 짓고, 관을 피해 산으로 도주했기 때문이지. 그런 이들이 하나하나 녹림으로 흡수되다 보니 이제야 좀 먹고살 만해졌소.”
“산적질을 해서?”
“그걸 변명하려는 건 아니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임소병이 차게 가라앉은 눈으로 입을 뗐다.
“녹림의 식구들을 보살펴야 하는 녹림왕으로서 나는 절대 지난 전쟁처럼 그들이 죽어 나가는 꼴을 지켜보지만은 않겠다는 거요. 그 대가로 화산신룡의 발을 핥아야 한다면 나는 얼마든지 그럴 용의가 있소.”
그 의지 가득한 눈을 본 청명이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숙였다.
“……뭐 하시는 거요?”
“신발 벗는데요?”
“신발은 왜?”
“아니, 핥으신다길래…….”
움찔한 임소병이 황급히 외쳤다.
“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쯧쯧. 이래서 산도적놈들이란. 말 한마디를 믿을 수가 없네!”
“끄으으응.”
임소병도 어디 가서 언변으로 밀려 본 적이 없는 인물이건만, 이 도사와는 이야기만 섞었다 하면 자꾸 말려드는 느낌이었다.
“휴.”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진지하게 입을 뗐다.
“도장.”
“네?”
“도와주시오.”
“흐음.”
청명은 심드렁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요.”
“예.”
“왜 아까부터 자꾸 강호에 예전과 같은 환란이 벌어질 게 당연하다는 투로 말하는 거죠?”
임소병이 싱긋 웃었다.
“그야 너무 당연하지 않소.”
“왜요?”
“도장이 그러고 있으니까.”
“…….”
임소병이 손에 든 부채를 활짝 펼쳐 입을 살짝 가렸다.
“도장 같은 이가 주변에 세력을 겹겹이 쌓아 올려 뭔가에 대비한다는 것은 도장의 능력만으로 해결하기 힘든 일이 벌어질 거란 의미가 아니오.”
“…….”
“보아하니 북해에서 마교의 종적이 발견된 모양인데, 도장께서 북해로 부리나케 달려간 것도 그것 때문일 테고.”
“…….”
“그런데도 상황을 모른다면 내가 멍청하다고 자인하는 꼴이지. 안타깝게도 나는 산적치고는 머리가 좋은 편이오.”
“하…….”
청명이 피식 웃고 말았다.
머리가 좋은 건 둘째 치고, 겨우 그런 정도로 녹림왕이라는 작자가 화산까지 찾아와 머리를 조아린다?
확실히 이 인간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리고 뭐…….”
“응?”
“도장 옆에 붙어 있으면 영단이라도 하나 더 얻어먹을 수 있지 않겠소? 쿨럭! 그거……. 쿨럭! 쿨럭! 나한테는 생존의 문제……. 쿨럭!”
“…….”
고개를 내저은 청명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내 주변에는 이런 인간들만 들러붙나.’
전생의 업보로다.
업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