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7화. 세상이 어찌 되려고. (2)
“만인방?”
청명이 이를 빠드득 갈아붙였다.
“그 새끼들은 또 왜?”
만인방이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그의 기세가 일변했다. 그야말로 북해의 삭풍이 몰아치는 듯했…….
“청명아.”
“예?”
“은근슬쩍 와서 앉지 말고 저리 가서 다시 손 들고 있거라.”
“……이야, 이거 안 통하네.”
“쯧.”
다시 시무룩해진 청명이 입을 삐쭉 내밀며 터덜터덜 구석으로 향했다. 그리고 털썩 무릎을 꿇고 손을 들었다.
임소병이 그 모습을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자 청명이 눈을 콱 부라렸다.
“뭘 봐, 씨!”
“이놈이 그래도!”
하지만 현종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움찔하며 고개를 슬쩍 돌렸다.
“신경 쓰지 마시게나.”
“……예, 장문인.”
임소병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가 생각해 왔던 화산파와 실제 화산파 사이에는 중원을 가로지를 만큼의 거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크흠. 그러니까…….”
그는 몇 차례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보통 녹림왕이라는 이름을 들은 이들은 알아서 분위기를 깔아 주기 마련이지만, 이곳엔 그 이름의 무게를 발바닥의 때만큼으로도 여기지 않는 놈이 있다 보니 도통 분위기가 잡히질 않았다.
그런 그의 고충을 알았는지 현종이 넌지시 질문하며 도움을 건네었다.
“하여, 만인방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오?”
“그들이 정확히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는 저도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 그들이 분명 무언가를 획책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 생각하는 이유를 물어도 되겠소? 혹 만인방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오?”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음?”
임소병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현종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 반대라니?”
“지금 만인방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저희 녹림과 대치하던 곳에서도 모조리 물러났고, 벌이던 사업들도 하나씩 정리하고 있습니다.”
현종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곁에 있던 현영이 물었다.
“그런데 그게 뭐가 문제라는 게요? 사업을 정리하고 전쟁을 피한다는 건 되레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닙니까?”
“일반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다른 문파가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면 저 역시 장로님처럼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만인방은 아닙니다.”
임소병의 눈이 언뜻 차게 빛났다.
“만인방주 장일소는 평생 무언가를 포기해 본 적이 없고, 싸움에서 물러나 본 적이 없는 이입니다. 그는 은혜는 잊을 줄 알아도, 원한을 잊는 법은 모릅니다.”
현종이 낮은 침음을 흘렸다.
화산 역시 만인방과 원수를 졌지만, 녹림이 오랜 시간 동안 만인방과 원한 관계였다는 건 이미 강호에 유명한 이야기다.
그런 만큼, 아무래도 화산보다는 녹림이 만인방과 장일소에 대해 더 잘 알 것이다.
“그 장일소가 은인자중한다는 건 단 한 가지 이유밖에 없을 겁니다.”
현영이 슬쩍 앓는 소리를 흘리며 말했다.
“지금 벌이고 있는 사업들이나 녹림과의 전쟁에서 승리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보다 더 큰 무언가를 찾아냈다는 겁니까?”
“예, 정확합니다.”
“흐음.”
현영은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찻잔을 든 현종은 입 안에 퍼져 가는 차향을 느끼며 말했다.
“장일소라…….”
이윽고 그의 시선이 임소병에게로 향했다.
“그 일련의 일이 화산과도 관련이 있다 보시는 것이오?”
“장문인.”
몇 차례 기침을 한 임소병이 현종을 똑바로 보며 답했다.
“화산은 이미 만인방과 척을 졌습니다.”
“…….”
“장일소는 해묵은 원한보다는 새로운 원한에 더 목을 매는 사람입니다. 오래된 원한은 그가 아직 미욱할 때 벌어진 일이지만, 새로운 원한은 지금의 만인방을 상대가 얕보아서 그런 거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임소병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했다.
“장일소라는 사람이 짧은 시일 내에 크게 달라진 게 아니라면, 지금 만인방의 움직임은 반드시 화산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현종이 살짝 눈을 감았다.
장일소. 그리고 만인방.
잠깐 뒤로 미뤄 두었던 일이다.
하지만 장일소와 만인방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언제까지고 외면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청명아.”
“넵!”
청명이 팔을 내리고 쪼르르 다가와 좌정했다.
“……오라는 말은 안 했다.”
“헤헤. 어차피 곧 그러실 거였잖아요. 장문인의 마음을 미리 짐작하고 행하는 것이 화산의 제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 아니겠어요?”
“말이나 못하면…….”
그 멀고 먼 북해까지 가서 강호의 위기를 막아 내고, 화산의 위상을 드높이고 온 기특함이 털끝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지기까지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
“어찌 생각하느냐?”
“뭐가요?”
“만인방 말이다.”
“아, 만인방이요?”
현종이 살짝 어두워진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녹림왕께서 하신 말을 들어 보면 보통 일이 아닌 것 같구나. 너는 이 일에 대해 생각이 있느냐?”
그러자 청명이 피식 웃더니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뭐…… 다 좋은데, 딱 한 가지.”
“그래.”
“도적놈이 하는 말을 있는 그대로 믿을 수는 없죠. 뱃속에 구렁이가 들어찬 양반이라 무슨 수작질을 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쿨럭!”
청명의 말에 임소병이 피를 토하듯 기침을 했다.
“그…… 그래도 손님 앞에서…….”
“장문인도 지금 혹하신 거예요. 이 양반이 아니라 털북숭이 산적 놈이 커다란 대도를 차고 와 앉았으면, 같은 말을 해도 반은 안 믿었을걸요?”
“…….”
현종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물론 도사의 신분으로 할 말은 아니지만, 듣고 보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임소병의 생김새가 워낙 반듯하다지만, 사실 그 본질은 산적 두목이 아닌가? 그런 이의 말을 덮어놓고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쯧쯧쯧. 산적이 아니라 사기꾼이 됐어야 할 양반인데.”
“누, 누가 사기를 쳤는데 외려 저한테 그러십니까, 화산신룡!”
“아, 준다고! 내가 준다니까? 거 영약 하나 가지고 엄청 보채 대시네!”
“끄으……. 시, 심장이…….”
임소병이 심장께를 부여잡고 몸을 웅크렸지만, 청명은 그런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현종을 향해 말했다.
“일단 사파 놈들이 말하는 건 콩으로 두부를 만든다고 해도 의심하고 봐야죠.”
똑 부러지는 그 말을 들으며 현종이 흐뭇하게 웃었다.
‘어찌 이리 인성이 쑥대밭일꼬?’
물론 영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당사자를 앞에다 두고 저런 말을 해 댈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을 통틀어 청명이 녀석밖에는 없을 것이었다.
아주 자랑스럽다. 아주.
“그럼 대책을 세우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냐?”
“중요한 건.”
청명이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이 양반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거짓을 말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거죠.”
“음?”
청명의 말투가 사뭇 진지해지자 현종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화산이 화산 밖의 정보에 너무 취약하다는 말이로구나.”
“예.”
청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현종도 웬만한 말은 척 하면 착 하고 알아듣는다.
“물론 거지 아저씨를 통해서 웬만큼 정보를 얻고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영 불안한 게 사실이거든요.”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완벽하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홍 분타주가 우릴 속일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구나.”
“네. 물론 저도 홍대광 아저씨가 그럴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럴 능력도 없고.”
“…….”
거…… 뒷말은 굳이 안 붙여도 될 것 같은데.
“그런데 문제는, 홍 아저씨는 결국 구파 사람이고 개방 사람이라는 거죠.”
청명의 입가에 슬쩍 쓴웃음이 비쳤다.
“개방이 순순히 우리에게 옳은 정보를 주겠어요?”
현종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물론 홍 아저씨는 우리를 생각해 줄지도 모르죠. 그런데 홍 아저씨가 물어 오는 정보도 결국은 자기가 발품을 판 정보가 아니에요. 개방에서 작정하고 홍 아저씨를 통해 거짓 정보를 흘린다면 저희는 덮어놓고 당할 수밖에 없어요.”
“으으음…….”
“세상에 믿을 놈이 따로 있지! 구파를 어떻게 믿어!”
청명의 말에, 신음하던 임소병이 반색하며 맞장구를 쳐 댔다.
“크으! 그건 정말 옳은 소리외다, 화산신룡! 아암! 세상에 구파일방만 한 사기꾼 놈들이 없지!”
“그렇죠?”
“그렇고말고요! 하하하하핫!”
임소병과 청명이 화기애애하게 어깨동무를 한 채 구파에 대한 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현종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제는 하다못해 산적 두목이랑 죽이 척척 맞는구나.’
그래도 정파의 제자라는 놈이 녹림도와 같이 의기투합해서 구파일방을 욕해 대다니.
화산은 망했다.
아무리 봐도, 어떻게 봐도 이젠 망했다.
“농담이 아니라.”
어느 순간 정색하고 임소병을 확 밀쳐 낸 청명이 말했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화산에 대한 악감정으로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는 정도였겠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달라지죠.”
“천우맹 말이냐?”
“예.”
청명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천우맹이 발족한다면 구파일방을 중심으로 한 세력과는 척을 지게 될 게 분명해요. 아무리 소림 방장이 공인을 해 준다지만, 공인을 하는 것과 우호를 다지는 건 별개의 문제거든요. 제 손에 쥔 쌀 한 톨도 내어 주지 않으려는 놈들이 방해를 하면 했지 도와줄 리가 없죠.”
“으으음.”
그제야 현종도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했다.
그동안 화산은 외부 정보의 대부분을 개방에 의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청명의 말대로 천우맹이 발족하게 된다면, 앞으로 개방에서 오는 정보의 진위부터 의심해야 할 판이었다.
북해에서 마교가 발호하고, 중원의 남부에 있는 만인방이 화산을 향해 마각을 드러내는 상황.
화산이 신경 써야 할 곳은 점점 넓어지는데, 정보력이 줄어들게 된다면 언젠가는 단단히 화를 입게 될 것이 분명했다.
“정보력의 확충이 시급하구나.”
“네.”
현종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잠시간 생각을 정리한 후 눈을 다시 뜬 그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당가주를 만나 봐야 할 것 같구나.”
“당가를요?”
“네가 말한 문제는 단순히 화산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개방에 정보를 의지하는 건 사천당가 역시 마찬가지일 터. 이 일은 화산이 아니라 천우맹의 차원에서 대책을 논의해야 할 일 같구나.”
“흐음. 나쁘지 않겠네요. 개파식도 의논할 겸.”
“으음. 그럼 내가 당가에 한번…….”
“안 됩니다, 장문인.”
“에잉!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현종의 말에 현상과 현영이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왜 또?”
영문을 모르는 현종을 보며 현영이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장문인께서는 맹주가 되실 분이십니다. 아무리 아직 그 자리에 오르지는 않았다고 한들, 맹주가 될 분이 아랫사람을 만나러 가는 경우가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맹주의 권위를 위해서라도 그분을 화산으로 부르심이 맞습니다.”
“으음. 그런가.”
현종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
“장문인.”
중간부터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임소병이 입을 열었다.
“말씀하시게나.”
“그 정보라는 부분 말입니다.”
부드러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 번졌다.
“저희 녹림이 해결을 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녹림이?”
“예.”
임소병이 손에 든 부채를 쫙 펴 입을 가렸다.
“정보력이라면 녹림 역시 천하 어느 곳에 비해도 빠지지 않습니다. 원하신다면 저희가 개방 대신 화산과 천우맹에 그 정보를 제공해 드립지요.”
“녹림의 정보력이 대단하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소만?”
“그건 녹림이 외부와의 소통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개방의 정보력이 뛰어난 것은 그들에게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방방곡곡에 거지가 없는 곳이 없기 때문이지요. 하오문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으음……. 그렇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 산적이 없는 곳이 있겠습니까?”
“…….”
“정보력에 대한 증명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결코 장문인을 실망시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현종이 눈을 가늘게 떴다.
“녹림왕의 말씀은 이해했소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는 법이지요. 화산에 그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받고자 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녹림왕 임소병이 자세를 반듯하게 펴며 선언하듯 말했다.
“천하칠십이채의 산채를 지배하는 녹림왕의 이름으로, 녹림의 천우맹 가입을 요청드립니다.”
순간 장내의 모두의 입이 쩍 벌어졌다.
무거운 정적이 한참을 흘렀다.
마침내 한 사람의 목소리가 침묵을 깨며 흘러나왔다.
“뭐래, 산적 놈이.”
“…….”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청명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