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6화. 세상이 어찌 되려고. (1)
“그러니까…….”
현기 가득한 눈에 미세한 의혹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현종은 앞에 앉은 사내를 가만 바라보았다.
“녹림의……?”
“예, 장문인.”
정좌한 사내가 더없이 깍듯한 예를 다해 현종에게 고개를 숙였다.
“부족하나 현 녹림의 수좌를 맡고 있는 임소병이라 하옵니다.”
“녹림…….”
현종의 시선이 한쪽으로 슬쩍 돌아갔다. 눈이 마주친 백천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사실 이 모든 일의 원인에 대해 따지자면 추궁을 받아야 할 이는 당연히 청명이었다. 하지만 현종은 청명을 추궁할 생각이 없었고, 백천 역시 그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녹림왕…….”
“예. 그렇습니다, 장문인.”
다시 한번 돌아온 확답에 현종은 천장을 보며 허허 웃었다.
‘내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봤지. 그래 별꼴을 다 보기는 했지.
하지만 아무리 화산이 예전 같진 않다고 해도, 설마 살아생전 녹림왕이 화산에 들어오는 꼴을 보게 될 줄이야.
현종은 뭔가 도무지 형용할 수 없는 감정 앞에 그저 웃어 버렸다.
심지어 지금 그를 더욱 당황하게 만든 건, 스스로를 녹림왕이라 주장하는 자의 행색이었다.
‘누가 봐도 문사 아닌가?’
복색만 그런 것이 아니다.
행동 하나, 말투 하나에 예의와 기품이 묻어났다. 화산의 장문인으로서 이런 생각을 해도 되는가 싶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그 뒤에 앉아 있는 화산의 제자 놈들이 더 산적 같았다.
“귀하신 분께서 화산을 찾아 주시다니……”
원래는 더없는 영광입니다, 혹은 삼생의 광영입니다 따위의 적당히 상대를 추켜세워 주는 말이 뒤에 들어가야 맞겠지만, 현종은 차마 입으로 그 말까지는 뱉을 수가 없었다.
대체 어느 화산 장문인이 녹림왕을 반긴단 말인가?
여기서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선계에 오른 전대의 장문인들이 오늘 밤 꿈에 총출동하여 그를 후려 깔지도 모른다.
다행히 임소병은 그런 쪽으로는 눈치가 빤한 인간이었다. 그는 현종의 머뭇거림이 더 이어지기 전에 선수를 쳤다.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오면서도 걱정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환대를 해 주시니, 장문인의 자애로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허허.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오. 천하가 다 동도인 것을.”
현종은 나지막이 헛기침을 하고는 임소병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귀한 차는 아니나, 화산의 매화 잎으로 만든 차이니 한번 들어 보시오.”
“감사합니다.”
임소병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차를 음미했다. 다도(茶道)에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완벽한 동작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눈물이 날 것 같은 현종이었다.
‘대체 누가 산적이고 누가 도사인가?’
산적 같지 않은 산적 두목이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산적 같은 도사가 잘못된 것인가?
“향이 퍽 좋습니다. 이 한 잔의 차에 화산이 어떤 곳인지 모두 담겨 있는 것만 같습니다.”
“……감사하외다.”
“하하하. 그동안 주변에 다도를 아는 이가 없어서 괴롭던 참이었는데, 이리 조예가 깊은 분을 만나니 그 기쁨이 한량없습니다. 염치 불고하고 한 잔 더 청해도 되겠습니까?”
“염치라니요. 당연히 내어 드려야지요. 허허허허!”
얼굴에 화색이 도는 현종을 보며, 조걸이 윤종에게 속삭였다.
“사형.”
“응?”
“그래도 산적 두목인데, 장문인께서 저래도 되는 겁니까?”
“……그게 어디 장문인의 잘못이겠느냐. 무식한 우리 탓이지.”
“그, 그래도 그게…….”
“조용히 하거라.”
무어라 말을 더 보태려던 조걸이 결국 체념한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차를 한 잔 더 내어 준 현종이 임소병을 향해 물었다.
“녹림이 천하에 그 적을 둔다고 하나, 이 먼 화산까지 찾아오기가 쉽지는 않으셨을 터인데 어인 일로 예까지 행차를 하셨소이까?”
“아, 그게……. 쿨럭! 쿨럭! 커허허허억! 쿨럭!”
갑자기 등을 들썩이며, 폐라도 토할 듯 기침을 해 대는 임소병을 보며 현종은 화들짝 놀랐다.
“괜찮으시오?”
“괘, 괜찮……. 쿨럭! 쿨럭! 어휴, 이 기침이……. 쿨럭! 죄, 죄송합니다. 제가 몸이 그리 좋지 않아서…….”
생각지 못한 말에 현종은 적잖이 당황했다.
녹림왕이 몸이 약해?
무당 장문인이 검을 쓸 줄 모르고, 소림 장문인이 불경 욀 줄 모른다는 소리와 비슷하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이 양반 혈색도 영 좋지 않고, 몸도 삐쩍 말랐다.
“제가 선천적으로 병이 있어서…….”
“아아.”
“괜찮습니다. 저는 멀쩡……. 쿠웨에에에에엑!”
임소병이 익숙하게 섬전 같은 손길로 손수건을 꺼내 입을 틀어막았다.
“헉?”
그 입을 막은 천이 순식간에 붉게 물드는 걸 본 현종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임소병은 입가를 가볍게 훔치며 말했다.
“괘, 괜찮습니다. 자주 있는 일이라……. 쿨럭.”
이를 본 현종의 눈에 안타까움이 어렸다.
“그 약한 몸으로 녹림왕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고초가 많으셨겠구려.”
“타고난 것을 어찌할 수 없으니, 다만 궁구하고 노력할 뿐입니다.”
“오…….”
현종의 표정이 대견한 이를 보는 듯하게 바뀌었다.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실로 군자가 아닌가?
대체 어쩌다 이런 이가 녹림이라는 험한 곳에 머무르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몇 번 잔기침을 하며 몸을 진정시킨 임소병은 깊은 한숨을 쉬고는 다시 입을 뗐다.
“그러니까, 제가 이곳에 온 연유는…….”
그리고 슬쩍 청명을 한차례 돌아본 뒤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잠시 후, 현종의 이마에 핏대가 서기 시작했다.
“그…… 귀하께서 몸이 약하셔서 치료가 필요한데…… 그걸…….”
“예.”
“돈은 받아 처먹고…….”
“만금이 넘어갔지요. 쿨럭!”
“무, 물건은 주지 않…….”
급기야 현종은 꺽꺽대며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장문인!”
“진정하십시오, 장문인!”
그의 좌우에 서 있던 현상과 현영이 넘어가는 현종을 잡고 그의 뒷목을 열심히 주무르기 시작했다.
“끄으윽…….”
숨이 꺽꺽 넘어가던 현종은 돌연 두 눈에서 새파란 광채를 뿜어내며 벌떡 일어났다. 그 시선이 향한 건 당연히 청명 쪽이었다.
“……사실이냐.”
“헤헤.”
청명이 조금 머쓱한 얼굴로 히죽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조금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사실이냐고.”
“그게, 겉만 보면 그런데 여기에는 나름 깊은 사정이…….”
“에라, 이 썩을 놈아!”
현종이 옆에 놓인 목침을 잡아 청명에게 냅다 집어 던졌다. 청명은 빠르게 그 자리에 납작 엎드리며 날아드는 목침을 피했다.
현종은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외쳤다.
“화산의 제자라는 놈이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사기를 치고 다녀? 그것도! 어? 산적! 산저어어억! 도가의 제자라는 놈이 사기를 쳐! 산적한테 사기를!”
“그게 사기를 치려고 친 게 아니라, 화산 와 보니까 물건이 없어서…….”
“저, 저 물에 빠져도 조동아리는 동동 뜰 놈이!”
현종이 눈을 까뒤집고 청명에게 달려들려고 하자 현상과 현영이 그런 그의 양쪽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지, 진정하십시오, 장문인. 외인이 있지 않습니까?”
“청명이도 다 생각이 있었을 겁니다!”
“생각? 무슨 생각? 저놈이 사고 칠 때 생각이 있는 걸 내가 지금껏 본 적이 없는데! 너는 봤느냐? 너는?”
“…….”
힘이 빠진 현종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 살다 살다…… 화산의 제자가 녹림의 도적에게 사기를 치고 다니는 꼴도 보는구나. 세상이 어찌 되려고…….”
그러자 가만 듣던 현영이 코웃음을 쳤다.
“아니, 말이야 바른 말이지. 도적이면 나쁜 놈인데 그런 나쁜 놈한테 사기를 친 거면 선한 일이지요!”
“넌 입 좀 다물어! 너는!”
남은 힘을 짜내어 하나 남은 목침을 힘껏 현영에게 던져 버린 현종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지, 진정하시지요, 장문인.”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그 모습에, 보다 못한 임소병까지 나서서 만류했다.
“내…… 내가 참 면목이 없…….”
그때 청명이 돌아가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투덜거렸다.
“거 무슨 산적 새끼한테 사과씩이나. 모가지 안 벤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지.”
“너는 좀 다물라고!”
현종이 거품을 물고 청명에게 발길질을 했다. 하지만 현영과 현상이 워낙에 그를 꽉 잡고 있는 터라, 허연 버선발은 애처롭게 허공만 걷어차 대었다.
“몸이 약한 사람한테 몸을 고쳐 주겠다고 사기를 치다니! 그게 도사가, 아니, 인간이 할 짓이냐!”
“헤헤헤. 근데 이게 따지고 보면 도사들의 유구한 방식이거든요. 분명 선조 분들께서도 몇 번 했을 텐데.”
“끄으으윽.”
“장문이이이인!”
“소소! 소소를 불러오거라! 당장!”
그 혼란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가까스로 진정이 되었다.
“……똑바로 들거라.”
“저 팔 아픈데…….”
“팔몽둥이를 부러뜨려 버리기 전에 똑바로 들어라.”
“끄응.”
한쪽 구석에 무릎을 꿇은 채, 양팔을 높이 든 청명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 와중에도 연신 입을 삐쭉거리며 불평을 쏟아냈다.
“장문인, 저도 사회적인 체면이라는 게 있는 사람인데 이렇게 새파란 애들 앞에서 벌을 주시면…….”
“왜 새파란 애들 앞에서 맞는 게 더 좋으냐?”
“참 적절한 체벌인 것 같아요. 그 말이죠.”
“끄응.”
한숨을 푹푹 내쉰 현종이 칼날 같은 눈으로 다른 제자들을 노려보았다. 백천을 비롯한 다른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푹 숙여 현종의 눈빛을 피했다.
“내가…….”
현종이 으르렁대듯 말했다.
“말리라고는 안 한다! 저놈이 말린다고 말려지는 놈도 아니고! 너희들로는 어찌 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
“하지만 사고를 쳤으면 적어도 보고는 했어야지! 이놈들이 하나같이 청명이 놈 옆에 찰싹 붙어서 입을 꾹 다물고 있어? 내가 너희를 그리 가르쳤느냐?”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북해에서 모두 성장해 돌아왔다고 기꺼워하며 칭찬해 준 게 바로 어제다.
‘성장은 얼어 죽을.’
이쯤 되니 과연 북해에서 무슨 난장을 치고 돌아왔을지가 두려워지는 현종이었다. 말을 안 하면 알 도리가 있나?
그래도 예전에는 청명이 놈이 사고를 치면 쪼르르 달려와 일러바치기라도 하더니…….
‘끄응. 앓느니 죽어야지.’
깊은 한숨을 푹 내쉰 현종이 임소병을 항해 미안함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죄송하게 되었소이다. 제자라고 들여 놓고는 제대로 키우질 못해서…….”
“아닙니다, 장문인.”
한편 임소병은 또 그 나름대로 식은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대책이 없으니 여기까지 와서 일러바치기는 했지만, 설마 저 괴물 같던 놈이 서당에서 혼나는 꼬마 꼴로 대놓고 벌을 받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무위는 그리 높아 보이지 않지만, 저 화산신룡을 이처럼 벌주고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현종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이였다.
“될 수 있으면 기다려 보려 했습니다만…… 병세가 워낙에 깊어진 데다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화산신룡은 독촉을 한다고 들어 먹을 사람 같질 않아서…….”
“그렇지.”
“들은 척도 안 했겠지.”
“할 일 다 하고 정 심심해지면 하나 대충 만들어 던져 주지 않았을까?”
여기저기서 속닥속닥 나오는 말에 현종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어디 가서 일을 척척 해결해 올 때는 세상 다시없이 믿음직한 놈이건만, 사고를 쾅쾅 치고 올 때는 낙안봉에 끌고 가 냅다 던져 버리고 싶었다.
그런다고 죽을 놈도 아니지만.
“아무튼…… 실로 죄송하외다. 내 저놈을 닦달하여 최대한 빠르게 영약을 받아 가실 수 있게 해 드리겠소.”
“귀찮은데…….”
“조동아리!”
청명이 입을 삐죽 내밀고는 임소병을 노려본다.
“이따 나 좀 따로 봐요. 내가 할 말이 좀 있거든.”
“어디서 협박질이냐, 이놈아!”
현종의 일갈에 시무룩해진 청명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 꼴을 보는 현종의 속은 말 그대로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때, 내내 어색하게 웃음 짓던 임소병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얼굴이 사뭇 진지해져 있었다.
“제가 화산을 방문한 이유는 그 연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으음?”
“조금 깊은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며 현종이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십시오.”
임소병이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 귀가 너무 많다는 듯한 그 몸짓에, 현종은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화산에는 비밀이 없소이다. 이들에게 하지 못할 말이라면 빈도도 듣지 않아야겠지요.”
“……아닙니다. 그리 큰 비밀은 아니니, 그냥 말씀드리겠습니다.”
조금 깊게 숨을 내쉰 임소병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만인방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눈이 차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