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3화. 빌어먹게 반갑네! (3)
쭈욱.
“…….”
쭈우욱.
“…….”
쭈우우욱.
“거…….”
참다못한 현영이 못마땅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목 빠지겠습니다, 진짜!”
그 타박에, 창밖으로 목을 쭉 내밀던 현종이 슬그머니 고개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크흐흐흠!”
겸연쩍은 듯 헛기침을 한 그는 슬쩍 현영과 현상의 눈치를 살폈다.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그…….”
하지만 현종은 도무지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열고야 말았다.
“너, 너무 늦는 것 같지 않으냐?”
“……북해가 옆동네도 아니고, 무슨 수로 벌써 다녀옵니까?”
“그, 그래도 우리 애들이 나름 운남도 다녀오고, 사천도 제집처럼 드나들던 애들인데……. 이리 오래 걸린다는 건 무슨 일이 있다는 것 아니겠느냐?”
“부정 타게 왜 자꾸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그러십니까!”
“끄으응.”
현종은 달달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움켜잡았다. 평소엔 다도에 심취하여 식은 차는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지금은 정신이 없는지 다 식은 차를 후후 불어 마시고 있었다.
“거, 거! 코로 들어갑니다! 거긴 코라니까!”
현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현종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제정신은 유지하고 있었는데, 며칠 전부터 아이들이 늦는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 대더니, 결국은 이 지경이 되었다.
달달거리는 손 때문에 찻물을 거의 절반은 쏟은 현종이 도인답지 않게 눈을 부라렸다.
“너, 너희는 걱정도 안 되느냐?”
“걱정할 게 뭐가 있습니까?”
하지만 현영은 헤헹 하고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그놈들 잘못되면 화산도 개판 나는 건데, 쫓아가서 불 싸지르고 나도 콱 뒈져 버리면 그만이지.”
“…….”
저게 미쳤나…….
하여튼 저놈이 더 무섭구나.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현상이 점잖게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별탈 없이 올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아이들은 그리 나약하지 않습니…….”
“저저, 속 편한 소리 하고는!”
“거 사형은 좀 가만히 있으십쇼! 으휴, 뭘 안다고!”
“…….”
아니, 근데 이 양반들이?
“끄으응.”
앓는 소리를 낸 현종이 결국 체면이고 뭐고 양손으로 얼굴을 문질러 댔다.
“내 속이 정말 속이 아니구나. 속 썩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제야 알겠어.”
“아직 썩을 속이 남았다니 다행입니다그려.”
현영이 툴툴거렸다. 하지만 그런 그의 눈에도 은은한 걱정이 서려 있었다.
‘이제 정말 슬슬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는가.’
처음 북해로 떠날 때 계산했던 대로라면 늦어도 칠 주야 전쯤에는 돌아왔어야 한다. 그 청명이 놈이 길바닥에 시간을 버리는 걸 용납할 리는 없을 테니, 분명 북해빙궁에서 시간이 지체된 것이 분명했다.
“만에 하나…….”
현상이 두 사람의 눈치를 슬쩍 살피다 입을 열었다. 그리고 고민하는 듯 주저하며 느리게 말했다.
“그러니까, 이건 정말 만에 하나인데…….”
“빨리! 빨리 말해라!”
“시간 끌지 마십시오! 아오, 답답해 뒈지겠네, 진짜!”
“…….”
그래도 명색이 화산에서 가장 오래 수양을 했다는 사람들이 이래도 되는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하며 현상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애들이 혹여 다치기라도 했다면…….”
“저 주둥아리 그냥 확!”
“이 양반이 정말 제정신입니까? 어디 부정 타게 그따위 말을 입에 올립니까!”
현영아……. 내가 네 사형이다…….
아무리 같이 늙어 가는 처지라지만…….
현종의 입에서는 벌써 몇 번째일지도 모를 한숨이 터져 나왔다.
“끄응. 이러다 내가 먼저 죽겠구나.”
“티 내지 마십시오, 장문인. 장문인께서 불안해하면 아이들도 덩달아 불안해합니다.”
“그래야지.”
“그리고 오밤중에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서 올라오는 길 기웃대지 좀 마십시오. 애들이 그거 다 압니다!”
“……그, 그러냐?”
현영의 타박에 현종이 어색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애들이 옛날 같지 않습니다! 예전에야 애들 이목 속이는 게 일이었겠냐마는 지금은 애들이 하나같이 귀신 같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
백매관의 아이들은 과거에 비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청명이 구해 온 영약들과 처음부터 다시금 기초를 쌓아 가는 운검의 지도가 합쳐져 하루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중이었다.
“북해로 간 아이들만 우리 아이들이 아니잖습니까? 하루 이틀 정도야 장문인께서 제자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보여 줄 미담이 되겠지만, 그게 길어지면 애들도 섭섭해할 겁니다.”
“끄응. 알았다. 내 자제하마.”
현종의 약속을 받아 내고 현영은 작게 한숨 쉬었다.
“나이가 들면 애가 된다더니.”
현종이 어떤 인물이었는가? 인내심으로는 감히 따를 엄두도 내지 못할 이였다. 화산이 그토록 힘겹고 어려웠던 시절에도 힘든 티 한 번 내지 않고 묵묵히 화산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안절부절못하는 아이 같았다. 물론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지만 누군가는 쓴 소리를 해서라도 멈춰 주어야 했다.
현종은 헛기침을 하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눈빛이 한층 차분해져 있었다.
“그래, 내가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침착…….”
“장문인! 장문이이이이인!”
그 순간 밖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 어엇!”
뭔가를 직감한 현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혀, 현영……. 엥?”
다급한 마음에 현영을 찾던 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미 버선발로 박차고 나간 현영이 소식을 전하러 달려온 운암의 멱살을 잡아채고 있었다.
‘저게 나보고는 침착하라더니.’
“무슨 일이냐! 애들이 왔느냐? 애들이냐?”
“아, 아래에서 전서구가 날아왔습니다!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내려오시랍니다!”
“누, 누가?”
“처, 청명이가…….”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핫! 청명이 놈이 왔구나! 이런 고얀 놈이 윗사람을 오라 가라 하네! 오라 가라 해! 그렇지! 그래야 청명이지! 으하하하하핫!”
그리고 그 순간 방에서 벼락같이 튀어 나간 현종이 신발을 구기다시피 신고는 산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장문인! 장문인! 애들 데리고 오라잖습니까!”
“아, 아차!”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시간을 지체할 필요 따윈 없었다. 이미 소식을 들었는지, 운검이 제자들을 구름처럼 이끌고 달려오고 있었다.
“장문인! 소식 들으셨습니까?”
“그, 그래! 어서 가자! 어서 가 보자꾸나!”
발을 동동 구르던 현종이 빠르게 대답하며 냅다 산문 쪽으로 달렸다.
“장문인을 따라라!”
현영도 뒤로 획획 젖혀지는 도관을 부여잡고 쾌속하게 뛰쳐나갔다.
“백천 사형이 오셨다!”
“윤종 사형도 왔어!”
“청명이가 돌아왔다.”
“아, 그건 좀…….”
그 뒤를 따르는 백자 배와 청자 배들 모두 기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가족처럼 지내던 사형제들이 멀고 먼 북해까지 갔다가 이제야 겨우 돌아온 것이다.
전쟁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고함을 내지르며 산문을 통과하는 이들을 보며 현상은 허허 웃고 말았다.
‘저리도 좋을꼬.’
한 문파의 장문인이 할 행동이 아니고, 문파의 장로라는 이가 보일 행태가 아니다. 하지만 질책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허허허. 화산도 참 많이 변했구나.”
현상 역시 빙그레 웃고는 뒷짐을 진 채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느긋해 보이는 자세와는 다르게 그의 다리는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으랴아아아아앗!”
“떠, 떨어집니다, 사형!”
“이 정도는 별것 아냐!”
화산의 산은 더없이 험하다. 웬만큼 올라 봤다고 자부하는 이들도 자칫하면 굴러 떨어질 만큼 가파르고, 발도 디딜 수 없는 절벽이 수두룩했다.
그리고 지금 화산의 제자들은 그 험한 화산을 평지처럼 달려 내려가고 있었다. 심심하면 절벽을 타는 수련을 해 댔기에 이제 다들 날다람쥐 뺨을 후려칠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은 오늘을 계기로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눈앞에 진정한 날다람쥐가 있었다. 자신들을 날다람쥐와 견주었던 과거가 창피할 지경이었다.
“비켜라, 이놈들아!”
절벽을 타고 달리는 현영의 발에는 일말의 주저도 없었다.
“……우와.”
“세상에.”
눈썹을 휘날리며 아래로 쏘아지는 현자 배들을 보며 모두가 입을 쩌억 벌렸다.
“아, 아니, 장로님들은 절벽 타는 수련을 하신 것도 아닌데.”
“당연한 것 아닙니까? 장문인과 장로님들은 화산에서만 반백 년을 넘게 살았는데.”
“아, 그러네.”
장로들과 제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순식간에 산을 내려왔다. 화음으로 향하는 산길을 질주한 화산의 문하들의 눈에, 마침내 입구에 세워진 커다란 수레가 보였다.
“저, 저!”
그 수레를 본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화들짝 놀랐다.
“저게 전부 다 짐이라고?”
“수레가 저걸 버틴다고?”
“저걸 사람이 여기까지 끌고 왔다고?”
대체 어디에서 놀라야 할지에 대해서는 의견 통일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여하튼 놀라운 건 놀라운 것이었다.
“애, 애들은? 애들은 어디에 있느냐?”
“그, 그러게요?”
그때 수레 뒤쪽에서 몇몇이 고개를 쭉 뺐다.
“뭐, 뭐야? 벌써 오셨어?”
“야야. 술 치워 술!”
“고기는? 고기는요, 사숙?”
“고기는 괜찮잖아! 술이나 치워!”
다 들린다. 얘들아, 애석하게도 다 들려.
“청명이 이놈아!”
현영이 수레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청명을 발견하고는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리고 청명의 양 뺨을 잡아 쭈욱 당겼다.
“아야야야야야야야! 아파요!”
“이놈! 이노오오옴! 얼굴이 반쪽이 됐구나! 얼마나 못 먹었으면! 세상에, 북해까지 다녀오는 길이 얼마나 험했으면 그 멀쩡하던 애가 이렇게 피골이 상접했단 말이더냐! 백천이 이놈! 내가 그만큼 애들을 챙기라고 일렀거늘!”
“…….”
아, 아니. 장로님…….
그 얼굴이 반쪽이면 원래는 뭐 달덩이라도 됐었단 말입니까?
“비켜라, 이놈아!”
그 순간 달려온 현종이 현영의 엉덩이를 걷어차 날려 버렸다. 그리고 아이들의 몰골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눈물을 왈칵 쏟았다.
그도 그럴 게 옷은 다 해졌고, 신발은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 귀신같이 깨끗함을 유지하고 있는 백천의 의복과, 거의 새것 같은 청명의 신발이 눈에 걸렸지만, 현종은 애써 무시했다.
“장문인!”
백천이 현종을 향해 포권 했다.
“이대제자 백천을 비롯한 화산의 제자들이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화산으로 복귀했습니다.”
“그래. 그래!”
연신 고개를 주억거린 현종이 백천의 어깨를 두드린다.
떠나기 전보다도 훨씬 듬직해 보이는 모습에, 괜히 눈가가 시큰거렸다. 현종은 굳이 그 눈물을 숨기지 않았다.
“정말 고생 많았구나. 정말 고생 많았어.”
“화산의 제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 그래.”
다른 제자들 역시, 한층 더 듬직해졌고 눈빛이 훨씬 깊어졌다. 게다가 무슨 일을 겪은 건지 전보다 훨씬 침착해졌다.
현종은 무슨 말을 더 하려는 입을 뗐으나, 뒤에 있던 화산의 제자들이 참지 못하고 환호성을 질러 대는 바람에 막히고 말았다.
“사형! 잘 돌아오셨습니다!”
“사숙! 사형! 정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북해는 어땠습니까? 정말 말처럼 그렇게 춥습니까?”
“이야기 좀 들려 주십시오!”
모두의 열성적인 환대를 받으며 백천은 조용히 웃었다.
“끄응. 그렇다고 사람을 차 대다니.”
현종에게 내동댕이쳐졌던 현영이 엉덩이를 털며 다시 비척비척 다가왔다.
“고생들 많았다.”
“예, 장로님.”
“그런데 왜 다들 내려오라고 한 거냐?”
“아, 뭐 별거 아닙니다.”
백천이 산더미처럼 쌓인 짐을 힐끔 보고는 입을 열었다.
“백상아.”
“예, 사형!”
백상이 씩씩하게 튀어나오자 백천이 짐을 향해 턱짓했다. 그리고 사제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날라라.”
“예?”
“짐 나르라고.”
“…….”
백상의 시선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동산처럼 쌓인 짐들로 향했다. 핏기가 점점 빠져나가는 듯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걸요?”
“그래.”
“산 위로요?”
“그래.”
“……전부 다요?”
“그으래.”
“…….”
“우린 장로님들과 먼저 올라갈 테니, 네가 인솔해서 하나도 빠짐없이 옮기고 창고에 넣어 두거라.”
“사형, 화음에도 저희 창고가 있…….”
“백상아.”
“……예?”
“올려라.”
“……눼.”
가장 곤란하던 문제를 해결한 백천은 현종을 향해 시원스레 웃었다.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 가시지요.”
“그, 그러자꾸나.”
그는 장로들과 함께 화산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북해에서 돌아온 제자들이 휘적휘적 그 뒤를 따랐다.
“거 하나도 빼먹지 마십쇼.”
“해 지기 전에는 올려야지.”
“하나라도 빠지면 가만 안 둬요!”
“빨리 시작.”
“…….”
다들 인성을 북해에 두고 오셨나?
그런데 그때 가장 마지막으로 움직이던 청명이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인정머리 없기는……. 백상 사숙.”
“응? 왜, 왜? 청명아?”
“수레도 올려.”
“…….”
“조심해서 가지고 와. 수레 안 상하게.”
“…….”
“하, 따뜻하니 살 것 같다.”
뒷짐을 지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청명을 보며 백상은 푸근하게 웃었다.
‘왜 돌아왔냐고.’
좋은 시절은 언제나 짧은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