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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552화 (550/1,567)

552화. 빌어먹게 반갑네! (2)

“정말 감사했습니다!”

부지런히 준비하던 라마승들이 먼저 준비를 마친 화산의 제자들의 인사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떠날 채비를 마치신 모양이군요.”

“……딱히 준비랄 게 없었습니다.”

백천은 살짝 겸연쩍은 얼굴로 웃었다. 라마승들의 천막을 쓴 터라 짐을 풀 일도 없었고, 그냥 대충 봇짐만 챙긴 게 전부였다. 따로 챙긴 거라곤 충분한 물 정도였다.

“피로에 지친 객을 따뜻하게 받아들여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차인이라 불린 라마승이 다른 이들을 대표해 합장했다.

“그럼 조심히…….”

그때였다.

“읏차!”

“응?”

뜬금없이 들려온 소리에 백천이 뒤를 돌아보았다. 청명이 수레에 질린 짐을 쑥 빼내고 있었다.

쟤가 갑자기 왜 저러지?

모두가 의아한 눈으로 그가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청명은 위쪽에 실린 커다란 곡식 자루를 뽑아낸 후 휘적휘적 걸어와 라마승 앞에 내려놓았다.

“이거 가져가세요.”

“……이게 무엇입니까?”

“그냥 잡곡이에요. 가시는 길에 드세요.”

백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디 그뿐이랴. 다른 화산의 제자들도 순간 입을 너무 쩍 벌려 턱이 빠질 지경이었다.

‘세상에.’

‘청명이가 남한테 제 걸 주다니.’

‘해가 서쪽에서 떴나?’

물론 청명이 다른 이들에게 아주 베풀지 않았던 건 아니다. 간간이, 정말 간간이 제 것을 떼어 줄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제 것을 떼어 줌으로써 이득을 볼 수 있을 때, 혹은 상대가 정말로 힘든 상황에 처한 약자일 때의 이야기다.

살면서 다시 만나게 될지도 확실치 않은 포달랍궁의 라마승들에게 공양을 하는 게 청명에게 무슨 이득을 가져다줄 것인가?

“괜찮습니다. 굳이…….”

“받아 가세요.”

청명은 슬쩍 천막을 정리하고 있는 대활불을 바라보았다.

“짐의 규모를 보아 식량을 그리 넉넉히 챙겨 오진 않으신 것 같은데, 돌아가는 길에 드실 건 있어야죠. 이 초원에서 공양을 받을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

“어른은 몰라도 애는 넉넉히 먹어야죠.”

그 말을 들은 차인이 조금 난감한 얼굴로 웃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예.”

청명은 휘적휘적 돌아오다 저를 보며 입을 쩍 벌린 제자들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어디 아픈 건 아니지?”

“…….”

“화산으로 빨리 가자. 너 이러다 진짜 큰일 나겠다.”

“사형! 진맥 한 번만 해 볼게요!”

아니, 이것들이?

청명이 눈을 부라렸지만, 백천은 되레 손을 뻗어 그런 그의 눈을 활짝 위아래로 벌렸다.

“……눈은 멀쩡한 것 같은데…….”

“눈은 갑자기 왜요?”

“정신이 이상해지면 눈빛부터 달라진다잖아.”

“아…….”

청명은 체념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 가지고 놀다가 제자리에만 가져다 놔라.”

망할 것들아.

그때 마침 천막을 정리하던 반선라마가 대활불과 다른 라마들을 이끌고 배웅을 나섰다.

“옴 마니 반메 훔.”

육자진언을 왼 반선라마는 빙그레 웃었다.

“중원까지는 먼 길일 텐데, 살펴 가시실 바랍니다.”

“서장만 하겠습니까. 가시는 길 무탈하길 빌겠습니다.”

백천이 대표로 인사를 받고는 깊게 포권 했다.

“그럼.”

화산의 제자들이 하나둘 수레에 달라붙었다. 마지막에 남은 혜연이 반선라마를 향해 반장을 했다.

“시간이 부족하여 가르침을 청하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아쉽습니다.”

반선라마가 부드러운 미소를 걸고 말했다.

“그 길에 불법이 있는데, 깨치지 못한 이의 알량한 말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길은 다를지언정 가려 하는 곳은 같으니 그걸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씀 깊게 새기겠습니다.”

혜연은 그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혜연까지 합류하니 수레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모두 활기차게 인사를 하며 수레를 밀었다. 높이 쌓인 짐 위에 올라탄 청명은 팔짱을 낀 채 대활불을 내려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무표정한 얼굴의 대활불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어찌하여…….

“쳇.”

괜스레 삐쭉거리던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렸다. 그를 실은 수레가 초원을 가로질러 멀리 나아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수레를 지켜보던 반선라마가 노래하듯 게송을 읊었다. 그가 게송을 외기 시작하니 다른 라마들도 일제히 따라 외었다.

눈을 감고 멀어지는 이들을 축복한 반선라마의 시선이 대활불에게로 향했다.

작은 아이의 깊디깊은 눈빛은 감히 그 안에 깃든 생각을 짐작조차 못 하게 했다.

“무엇을 보시는 것입니까, 스승이시여.”

나지막한 물음에, 말없이 수레를 바라보던 대활불이 눈을 감고 합장을 했다.

“가시밭길.”

“…….”

“삼아승지겁을 이어 갈 가시밭길. 빛이 들지 않는 어둠을 보았습니다.”

“스승이시여…….”

그러더니 가만히 진언을 왼 후 뜻 모를 얼굴로 중얼거렸다.

“스스로를 태워 어둠을 밝힐 초와 같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초라는 것은 결국 그 심지가 다해 꺼지기 마련일 터.”

“…….”

“부디 그를 밝혀 줄 이들이 있기를.”

눈을 감고 참선에 들어간 대활불을 보며 반선라마가 나지막이 침음성을 흘렸다.

선대의 대활불이 입적에 들기 전 남겼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 마귀가 돌아올 것입니다. 만세의 업을 지고, 번뇌의 강 속에서 울부짖는 마귀가……. 그를 막지 못하면 세상은 빛 한 점 없는 어둠으로 물들게 될 것입니다.

반선라마의 무거운 시선이 이제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어진 수레의 뒤를 쫓았다.

‘어둠을 밝힐 이라.’

하나 세상을 물들일 어둠을 그 홀로 밝혀 낼 수 있겠는가?

“번뇌. 또 번뇌로다.”

고개를 내저은 그는 가만히 대활불에게 고개를 숙였다.

“가시지요. 먼 길입니다.”

“예.”

어느새 말간 아이의 얼굴로 돌아간 대활불이 가만히 몸을 돌렸다.

“뭔가 엄청 경건해지는 기분인데.”

“그렇죠, 사숙?”

수레를 끌다 백천이 꺼낸 말에 조걸이 재빨리 맞장구쳤다.

“확실히 느낌이 좀 다르더라고요. 높은 덕을 쌓은 이는 따르는 길에 상관없이 사람을 맑게 해 주는 모양입니다.”

조걸은 반선라마가 더없이 인상적이었던 모양인지 평소보다 조금 흥분해 있었다.

분명 다른 이들을 평가하는 데에 박한 편이었건만 지금은 상기된 얼굴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본 새외오궁은 뭔가 다들 좀 독특한 느낌이라 포달랍궁도 그럴 줄 알았는데.”

“……그건 다른 오궁들이 문제인 것 아니냐?”

“여하튼요.”

야수궁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평범하다 할 수 없는 곳이었고, 북해빙궁도 듣던 것과는 달리 뭔가 괴이한 곳이었다.

하지만 포달랍궁은 괴승들이 모여 있다는 세간의 소문과 다르게 진정으로 불법을 궁구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라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그리 다를까…….”

“그러게요. 같은 불자인데…….”

모두의 시선이 슬그머니 혜연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혜연의 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바, 방장을 욕되게 하지 마십시오! 그저 길이 다르고 방향이 다른 것뿐입니다. 스스로 수양을 쌓는 것은 한 세의 공덕이나, 수많은 이들을 계도하고 이끄는 것은 만 세의 공덕인 법!”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격앙된 목소리로 방장을 감싸는 혜연을 보며 백천이 중얼거렸다.

“……방장이라고 이야기 안 했는데.”

“그러게……. 혜연 스님도 속으로는 좀 다르다고 생각한 모양이네요.”

“우린 혜연 스님 이야기한 건데…….”

“끅…….”

본의 아니게 방장을 욕해 버린 혜연이 황망한 얼굴로 그들을 보다 가슴을 움켜잡고 꺽꺽댔다.

“내, 내가 무슨 소리를…….”

그의 옆에서 수레를 끌던 조걸이 손을 뻗어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괜찮습니다, 스님.”

“맞아. 다른 건 다른 거지요.”

“소림 방장한테 일러야지.”

혜연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이 마구니들 같으니.’

번뇌고 나발이고, 이 마구니들 때문에 수양을 할 수가 없다. 부처께서 보리수나무 수양을 할 때, 마구니들이 그 수양을 방해했다고 하더니 딱 그 꼴이 아닌가!

“아미타불! 아미타불! 물럿거라, 마구니들아!”

“거 쓸데없이 불호 외지 말고 수레나 똑바로 끄십시오.”

“끄으으응.”

한편 짐 위에 올라탄 청명은 화산 제자들의 대화를 듣다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평소라면 끼어들어서 깐죽거렸을 텐데 간밤에 들었던 말이나 라마승들과 나누었던 대화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누운 채 하늘을 보던 청명은 이내 빙긋 웃었다.

‘다시 생각해도 뭐라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알게 뭐야. 젠장.

덕 높은 선인이라면 반선라마의 깊은 진의를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청명은 애초부터 도니 어쩌니 하는 것과는 그리 친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건 이런 게 아니다.

당장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 모를 천마 놈을 막아 내기 위해서 화산을 키우고, 천우맹을 더욱 공고히 만들어야 한다.

‘고민 같은 건 그 뒤에 해도 충분해.’

깔끔하게 머릿속을 정리한 청명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굼벵이가 기어가도 이것보다는 빠르겠다! 더 빨리 못 끌어? 이제 쌓인 눈도 없는데 왜 이리 느려!”

“……진짜 마구니가 있긴 있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사숙. 마구니도 저 새끼 보면 도망갈 겁니다. 어디 저놈한테 마구니를 가져다 붙이십니까.”

“동감.”

구시렁거리는 화산의 제자들을 보며 청명은 환하게 웃었다.

“내가 마구니가 뭔지 제대로 보여 줘?”

“응?”

“읏차!”

청명이 짐 더미 위에서 훌쩍 뛰어내려 수레의 앞부분에 걸터앉았다.

“쫑알거리는 걸 보니 좀 쉬워진 모양이네.”

“으, 으응?”

“이게 다 수련인데 쉬우면 안 되지. 쉬우면 그게 어디 수련이야? 수련은 힘들수록 좋은 거지!”

“뭐, 뭘 하려……. 아악! 이 새끼야!”

순간 수레가 배는 무거워졌다.

수레가 멈췄음에도 달리던 힘을 주체 못 한 백천은 손잡이에 몸을 박고 비명을 내질렀다. 그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허, 허리!”

“아이고! 발목 부러진다, 발목!”

“저 미친놈이 또!”

청명의 눈에는 광기가 어려 있었다.

“수련! 또 수련이다! 마교 새끼들이 설쳐 대는 판국에 이리 약해 빠져서 대체 어떻게 살아남아?! 화산에 도착할 때까지 몸뚱이를 두 배는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지! 달려!”

“이 썩을 놈아!”

“귀신은 뭐 하냐고, 진짜! 저 새끼 안 잡아가고!”

죽는다고 앓는 소리가 폭포처럼 쏟아졌지만, 청명은 되레 천근추를 운용하는 공력에 힘을 더 실었다.

그 무게에 신음하면서도 화산의 제자들과 혜연은 있는 힘껏 수레를 끌고 나아갔다.

‘중요한 건 화산이 더 강해지는 것.’

난세가 온다.

험난한 난세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힘이었다. 어떤 방법을 쓰든 화산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져야 한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고.’

예전이었다면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었을 반편이 주교를 상대하며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로도 모자라 다른 사형제들의 도움까지 받았다.

이런 상태로 마교의 진짜 주교들, 그리고 더 나아가 천마를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더 강해져야 해. 지금보다 더.”

청명이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사형제들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미 깊은 생각에 빠진 청명은 그들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 모두는 뭔가 결심한 듯 수레의 손잡이를 손이 희게 질릴 만큼 꽉 움켜잡았다.

“가자!”

“화산까지 단숨에 가요!”

“빌어먹을, 수련이다! 수련!”

“달려.”

이를 악문 모두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전보다 배는 무거워진 수레가 오히려 전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초원 위를 질주했다.

새하얀 대지가 환상처럼 펼쳐진 북해를 넘고, 황색의 대지가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초원을 넘어.

그들이 떠나온 곳.

깎아지른 절벽마저 정겨운 곳.

화산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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