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547화 (545/1,567)

547화. 이번에는 반드시 지켜 낼 테니까! (2)

“……윤종아.”

“예, 사숙.”

“내가 분명히 웬만한 선물은 다 돌려주라고 한 것 같은데.”

“그랬었죠.”

“그런데 이게 다 뭐냐?”

“그게…….”

아침 일찍 각자 짐을 챙겨 수레로 온 화산의 제자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수레 위에는 짐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저만큼이나 쌓을 수가 있는 거였어?”

“저걸 수레가 버틴다고?”

“버티기야 버티지요. 어쨌든 통짜 묵철로 만든 수레 아닙니까?”

“……그래도 이건 좀 심한 것 같은데?”

쌓아 올린 짐의 높이가 못해도 일 장은 될 것 같았다. 덕분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수레의 형상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기껏 쳐 놓은 천막도 다 빼 버렸네.”

백천이 멍한 얼굴로 윤종을 돌아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저는 분명히 돌려줬습니다.”

“그런데?”

“……빤한 걸 물어보고 그러십니까. 청명이 놈이 기껏 받은 선물을 왜 돌려주느냐고, 조걸이 놈이랑 놀더니 부자병이 들었냐면서…….”

“갑자기 저는 또 왜…….”

난데없이 억울하게 얻어맞은 조걸이 입을 삐죽이며 항변했지만, 아무도 들어 주지 않았다.

“……그 미친놈이 정말.”

백천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푹 터져 나왔다. 이래서 청명이 놈이 보기 전에 빨리 돌려주라고 한 건데.

“그래서 청명이 놈은 어디에 있느냐?”

“글쎄요. 해 뜨자마자 자기 짐 들고 나가던데요.”

“얼어 뒈지겠다고 하도 난리를 쳐 대서 천막까지 쳐 줬건만. 저리 높이 쌓은 짐 위에 올라가면 두 배는 더 추울 텐데 뭘 어쩌려…….”

그 순간이었다.

‘어?’

한탄을 하던 백천의 눈에 차곡차곡 쌓인 짐 사이로 작은 틈이 나 있는 것이 보였다.

“설마……?”

그는 수레로 달려들어 그 틈 안으로 대뜸 손을 밀어 넣었다.

아니나 다를까 안에서 뭔가 둥그런 것이 잡혔다. 백천은 얼굴을 구기며 잡아챈 뒤 잡힌 것을 단번에 뽑아내었다.

“나와, 이 새끼야!”

“아, 머리! 머리!”

“이 새끼가 족제비도 아니고! 이제는 아예 짐 사이에 굴을 미리 파 둬?”

“아, 아프다고!”

“키이이이익!”

족제비 같은 인간과 인간 같은 족제비가 동시에 반항을 해 댔다.

억지로 굴(?) 안에서 청명을 뽑아낸 백천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쉬었다.

“도사라는 놈이 욕심만 그득그득 들어차 가지고는!”

“뭐! 왜! 도사는 굶고 살아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어? 내가 뺏은 것도 아니고 지들이 주겠다는 걸 왜 굳이 거절해!”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니지. 뺏은 건 따로 챙겼으니까!”

“…….”

“생각이란 것도 좀 해라. 이걸 무슨 수로 산서성까지 가지고 가냐, 이걸! 마교랑 싸워서 죽기 전에 수레 끌고 가다가 먼저 뒈지겠다!”

“허허, 거참. 사숙 또 이상한 소리를 하고 그러네? 앞으로 더 열심히 수련하겠다고 할 땐 언제고?”

“……그, 그건 수련할 때의 이야기고.”

“뭐?”

청명이 무섭게 눈을 부라렸다.

“일상을 수련으로 만들어야지! 수련하는 시간 따로 챙겨서 언제 강해지나, 언제?! 에잉! 이래서 요즘 것들은!”

아…….

진짜 죽었으면 좋겠다.

귀신은 대체 뭐 하나. 이 새끼 안 잡아가고.

백천이 얼굴을 구기건 말건 청명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말이야, 원래 선물은 거절하는 게 아니에요. 빙궁에서 특별히 챙겨 준 건데 그걸 거절하면 준 사람이 얼마나 섭섭하겠어? 내가 욕심이 나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

“청명아.”

“응?”

“제발 좀 닥쳐…….”

“…….”

그들의 말씨름은 때마침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로 인해 멈추었다.

“준비는 다 끝나셨습니까?”

“궁주님.”

백천은 다가오는 설소백과 한이명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충 끝내기는 했는데, 뭔 선물을 이렇게…….”

“화산 분들께서는 북해의 은인이십니다. 북해인들은 원한은 잊어도 은혜는 절대 잊지 않습니다. 은인들을 빈손으로 보낸다면 북해의 모든 이들이 저를 손가락질할 텐데, 어찌 대접에 소홀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윤종과 조걸이 작게 속삭였다.

“잘 배웠네.”

“……너무 잘 배워서 문제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서, 왜 이 짐을 가지고 먼 길 가야 할 사람에 대한 생각은 안 해 주는가! 왜!

“그래도 좀 과한 것 같은…….”

어떻게든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 보고자 백천이 조심스레 입을 떼는데, 설소백이 먼저 깊게 포권 했다.

“그러니 부디 백천 도장께서는 북해빙궁의 성의를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

백천은 그런 설소백을 빤히 바라보다가 슬쩍 청명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청명이 먼 하늘을 바라보며 휘파람을 불어 댔다.

‘짰네.’

짰어.

아니, 이 인간들은 대체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쿵짝이 맞아떨어진단 말인가?

청명도 청명이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거부감부터 가지게 될 청명이 놈을 저리 찰떡같이 따르는 설소백도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북해빙궁의 궁주인 설소백이 이리 나와 버리면 백천이 할 말이라고는 하나뿐이었다.

“……궁주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글렀네.”

“사숙도 가만 보면 말이 거창한 거에 비해 별로 쓸모가 없어.”

“쉿. 들릴라.”

이미 들었어, 이 새끼들아…….

백천은 패배감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그때 한 발짝 뒤에 있던 한이명이 슬쩍 나서서 말을 건네 왔다.

“아직 겨울이 다 가지 않아 중원으로 돌아가는 길이 적잖이 험할 터인데, 며칠이라도 더 묵고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말씀은 더없이 감사합니다. 다만…….”

정중히 말한 백천은 짐을 단단히 고정시키느라 동분서주하는 제자들을 보다 빙그레 웃었다.

“집에 가겠다고 들떠 있는 놈들을 말릴 자신이 없습니다. 물론 들뜬 건 저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화산이 정말 좋은 곳인 모양입니다.”

“다른 이들도 그리 생각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화산의 제자들에게 있어 화산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 말을 들은 설소백이 두 눈을 빛냈다.

“그리 말씀하시니 한번 가 보고 싶네요. 저도 언젠가는 화산에 가 볼 수 있을까요?”

백천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은 언제고 궁주님을 환영할 것입니다. 북해가 정리된 후, 꼭 한번 들러 주십시오.”

“그 말씀 꼭 기억하겠습니다.”

백천과 대화를 끝낸 설소백은 청명에게로 다가갔다. 심드렁한 얼굴로 짐을 바라보던 청명이 설소백을 향해 고개를 획 돌렸다.

“왜?”

“도장……. 이리 가시면…….”

눈물 맺힌 강아지처럼 초롱초롱한 설소백의 눈에, 청명은 끄응 하며 슬쩍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내가 잘못 봤나?’

‘세상에, 청명이가 물러났어.’

‘저 새끼한테도 상대하기 곤란한 사람이라는 게 존재하는구나.’

눈물이 그렁그렁한 두 눈을 보던 청명이 결국 눈을 질끈 감고는 설소백의 머리를 가볍게 통통 두드렸다.

“그래도 명색이 궁주인데 그렇게 쉽게 우는 거 아니다.”

“……예.”

그리고 진지한 눈으로 어린 궁주를 바라보았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네가 제대로 해야 북해가 똑바로 선다.”

“예.”

“그리고 할 만큼 했는데도 답이 없다 싶으면 손을 털고 놔 버려.”

“……예?”

“언제고 이 말은 기억해라.”

“…….”

청명이 단호하게 말했다.

“네 책임이 아니다.”

살짝 벌어졌던 설소백의 입이 굳게 닫혔다.

“궁주 하나가 모든 걸 할 필요는 없어. 북해를 바꾸고 북해를 이끌어 가야 하는 건 결국에는 북해의 궁주가 아니라 수많은 북해인들이다.”

“…….”

“권한에는 책임이 따른다. 네가 궁주로서의 권한을 놓지 않고 부여잡고 있으면 네가 책임져야 할 일도 많아지는 거야. 너는 똑똑하니까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거다.”

“예, 도장.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

청명이 빙긋 웃었다.

“너는 잘할 거다.”

“…….”

“그러니 표정 좀 풀어라. 누가 보면 영영 이별인 줄 알겠다. 앞으로 네가 중원에 와야 할 일이 종종 있을 거야. 그때 보면 되지.”

“예!”

표정이 조금 밝아진 설소백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준 청명은 걸음을 옮겨 한이명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그는 눈치 빠르게 옆으로 슬쩍 벗어나 청명과 둘만 따로 이야기할 공간을 만들었다.

“머지않아 천우맹이 개파식을 열고, 정식으로 출범을 선언할 거예요.”

“북해빙궁 역시 공식적으로 개파식에 참가해야 한다는 의미군요.”

“네. 적절한 때에 따로 사람을 보내 시기를 조율하겠지만, 일단 미리미리 준비를 해 두시는 쪽이 좋을 거예요.”

한이명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질 없이 준비할 터이니, 도장께서는 마음을 놓으십시오.”

천우맹의 대한 교섭은 이미 진즉에 완료되었다. 그 자리에서 빙궁은 화산, 당가, 야수궁과 함께 천우맹에 가입하기로 결정을 마쳤다.

그 휘하의 자잘한 문파들을 제외한다면, 실질적으로 이 네 문파가 천우맹의 중심이 될 것이었다.

“자, 그럼…….”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려 화산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가자!”

맑은 하늘.

그리고 더없이 새하얀 건물들.

북해빙궁을 상징하는 성에서부터, 커다란 외벽까지 곧게 뻗어 있는 중앙대로의 좌우로 빙궁의 무사들이 정렬해 있었다.

백색의 대지를 밟고 도열한 백색 무사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오와 열을 맞춘 그들은 입 한 번 떼지 않고 곧 나타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끼리릭. 끼리릭.

마침내 그들의 앞에 짐을 산더미처럼 쌓아 올린 검은 수레가 등장했다.

적잖이 당황할 만한 모습이었지만,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 누구도 웃지 않았다.

그저 경건하고 단호한 눈빛으로 화산의 제자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많이도 모이셨네.”

“날도 추운데 뭐 하러 이런 걸 다.”

화산의 제자들은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저벅.

중앙을 지키고 있던 경비대장 송원이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정복을 차려 입은 그에게선 북해의 무인다운 칼날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낮게 심호흡을 한 그는 화산의 제자들을 향해 포권 하며 소리쳤다.

“북해는 은혜를 잊지 않는다(北海不忘恩)!”

동시에 도열해 있던 북해의 무인들이 일제히 포권 하며 복창했다.

“북해는 은혜를 잊지 않는다!”

고개를 든 손원은 화산의 제자들을 보며 다시 한번 우렁우렁 외쳤다.

“은인들께 감사드립니다!”

“은인들께 감사드립니다!”

북해의 무사들이 일제히 포권을 한 채,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무인으로서 보일 수 있는 최상의 공경이었다. 화산의 제자들은 절로 울컥하는 마음에 차마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그…….”

“사숙.”

백천이 뭔가 대답을 하려 하자 청명이 슬쩍 그를 말렸다.

“이럴 때는 말없이 그냥 가는 거야.”

“…….”

“가자.”

“그래.”

백천이 수레를 끌며 앞으로 나아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북해의 무사들이 차례로 공경과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또 들러 주십시오!”

“북해는 결코 화산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화산의 제자들은 수레를 끄는 와중에도 연신 좌우로 마주 포권 했다.

거기에 몰려나온 북해의 주민들까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화산 분들!”

“반드시 북해에 화산의 이름을 전하겠습니다!”

협의는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백천은 항상 그 말을 가슴속 깊은 곳에 품고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는 그 말의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한 것 같았다.

바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필요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어떤 재물과 명예도 이 진심 어린 감사에 견줄 수는 없을 테니까.

우레와도 같은 환호와 쏟아지는 칭송 속에 마침내 북해의 성문에 도달한 화산의 제자들은 수레를 잠깐 놓고 좌우로 걸어 나왔다.

선두에 선 백천이 대표로 포권 했다.

“화산을 대표하여 북해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언제고 북해가 다시 화산을 찾는 날이 온다면, 화산은 만 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올 것입니다!”

“감사했습니다!”

“또 봐요!”

마주 예를 표하고 손을 흔들어 준 화산의 제자들은 환호를 받으며 수레 앞에 다시 섰다.

남은 미련 같은 건 이제 한 점도 없었다.

“자, 가자!”

“예!”

경쾌하게 성문을 나선 그들은 눈이 부시도록 흰 대지 위를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화산까지 쉬지 않고 간다!”

“오!”

잠시 후, 그들이 끄는 수레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어졌다. 그들이 아주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묵묵히 서서 지켜보던 설소백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갔네요.”

“예, 갔습니다.”

진한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많겠어요, 총관님.”

“예, 궁주님. 무척 바빠지겠지요.”

북해 역시 바뀌어 갈 것이다.

만년빙(萬年氷)은 변함이 없을 것이고, 눈 역시 예전처럼 호되게 내릴 테지만…… 적어도 만년빙 위를 스쳐 흐르는 북해의 바람에는 옅은 매화향이 스며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안녕히…….”

설소백이 미소 지으며 포권 했다.

‘잘 가십시오, 청명 도장. 그리고 화산 분들.’

수레가 지나간 자리 위로 북해의 햇살이 부드럽게 쏟아지고 있었다.

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