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6화. 이번에는 반드시 지켜 낼 테니까! (1)
“짐은 다 챙겼느냐?”
“……아니, 그게…….”
“왜?”
“와서 좀 보셔야겠습니다, 사숙.”
“응?”
윤종의 떨떠름한 반응에 백천은 고개를 갸웃하며 성의 뒤쪽으로 향했다. 이윽고 수레 앞에 당도한 그는 입을 쩌억 벌리고 말았다.
산.
말 그대로 짐으로 만들어진 산이 있었다. 얼마나 많은지 끌고 왔던 커다란 수레가 짓눌려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이, 이게 다 뭐냐?”
“북해에서 준 선물들입니다.”
“뭔 선물을 이렇게 무식하게 많이…….”
“사숙, 그 꼬마 궁주님이 정말 장난이 아닙니다. 거의 북해 살림 다 털어 버릴 기세던데요.”
“…….”
백천은 벌어져 있던 입을 뒤늦게야 꾹 다물었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 보네.’
그동안 청명의 야바위에 당해 속곳까지 탈탈 털린 사람이 어디 어디 한둘이던가?
하지만 그들 중에서 이리 나서서 화산을 챙기고, 없는 살림에 선물 보따리까지 바리바리 퍼 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거 정말 괜찮을까?’
물론 백천의 입장에서 청명은 더없이 믿음직……. 아니, 훌륭한……. 아니다. 그냥 사질이다. 그냥 사질.
여하튼 아무리 청명이 그의 사질이라고는 하지만, 한창 자라날 나이의 촉망받는 기재가 ‘그’ 청명이 놈의 영향을 받는다는 건 너무도 불안하고 무서운 일이었다.
“그…… 윤종아.”
“예, 사숙.”
“빙궁주가 청명이를 많이 따르는 것 같더냐?”
“사숙이 우리 장문인을 보는 눈도 거기엔 못 따라갑니다.”
“…….”
“거의 주인 보는 강아지 눈이던데요.”
“이 새끼야! 궁주님한테 강아지라니!”
“사실이 그런 걸 어떻게 합니까…….”
“끄으응.”
백천이 갑갑한 듯 머리를 벅벅 긁었다.
물론 이해는 된다. 청명이 북해에서 보여 준 게 오죽 많았어야지.
의지할 곳이 마땅치 않았던 설소백에게 청명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神將)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니 이토록 믿고 따르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놈은 마귀라고요! 궁주님!’
어쩌다가 이리 끔찍한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어떻게 합니까, 사숙?”
“끄응……. 뭐 달리 방법이 있겠느냐? 일단 적당한 것만 골라서 남기고, 남은 것은 다 돌려줘라.”
“그래도 받은 건데…….”
“청명이 놈이 수레 하나 더 만드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빨리 돌려줘라.”
“……지금 당장 돌려주겠습니다.”
백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돌렸다.
‘빙궁이 어찌되려고.’
새삼스레 빙궁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불편해진 백천이었다.
그날 저녁.
“다른 준비는 다 끝났냐?”
“준비랄 게 뭐가 있겠습니까? 몸만 가면 되는 거죠.”
“몸이라…….”
백천은 모여든 화산의 제자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청석유의 효험을 톡톡히 본 덕에 다들 이제는 부상의 여파에서 벗어나 거의 쾌차한 상태였다.
‘그 몸이 문젠데…….’
백천이 헛기침을 하고는 고개를 돌려 당소소를 바라보았다.
“소소야.”
“네, 사숙.”
“내일은 출발해도 될까?”
“흐음.”
당소소가 매와 같은 눈으로 사형제들의 몸을 점검했다. 잠깐 긴장이 흐르고, 그녀의 입이 열렸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네요. 네. 내일 출발하시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드디어!”
“좀이 쑤셔 죽는 줄 알았네.”
모두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빙궁을 떠나 화산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빙궁이 싫어서는 아니었다. 다만 화산을 떠나 온 지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부터 이미 마음이 화산에 당도해 있던 그들은 침통을 들고 눈을 까뒤집은 당소소의 기세에 제압당했다.
- 뭐? 그 꼬락서니로 이 추위를 뚫고 가겠다고? 이 양반들이 지금 부상을 우습게 봐? 왜? 당장 정수리에 대침 하나 박아 드려? 그게 더 안전할 것 같은데? 가는 와중에 부상 도져서 뒈질 바에야 차라리 여기서 뒈지는 게 어때요? 그게 무덤 만들기도 편하지 않겠어?
그 기세가 얼마나 서슬 퍼런지 유이설마저 식은땀을 흘려 대며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결국 화산으로 출발하기 위해선 당소소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윤종이는 내일 출발하겠다고 빙궁 쪽에 알리고 오거라.”
“예, 사숙.”
“그리고…….”
무어라 말하려던 백천이 문득 이상한 걸 깨닫고 고개를 갸웃했다.
“청명이 이 새끼는 또 어디 갔냐?”
그러자 조걸이 한숨을 푹 쉬며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백천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그 ‘저는 알지만 죽어도 말 못 합니다’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연기력은 칭찬해 주마. 그러니 그냥 말해라.”
“……그게, 그 새끼가 설천상이 분명히 재산을 더 꿍쳐 뒀을 거라고…… 그거 찾아보러 간다고…….”
“……이 야밤에?”
“네.”
“야행복 입고?”
“……네.”
“또?”
“…….”
마치 혼이 빠져나가는 듯, 백천의 얼굴에서 급격히 생기가 가셨다.
‘제발 적당히 좀 해라, 청명아. 제발. 제발!’
“아니, 이제 그놈이 대놓고 설천상의 재산을 찾아다닌다고 해도 빙궁의 누가 뭐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으냐! 그런데 야행복은 왜 또 처입고 나가!”
“……입으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내 마음이 불타는 건 누가 책임질 건데! 누가!”
“그걸 왜 저희한테…….”
백천이 고개를 획 돌렸다.
아무리 화가 나도 눈물이 차오른 것을 사질들에게 보일 수는 없으니까.
“……차라리 걸렸으면 좋겠다. 그럼 북해 사람들도 그놈의 실체에 대해 알겠지.”
“일단 걸리는 건 둘째 치고, 걸려도 그냥 그러려니 할 것 같던데요.”
“왜?”
“지금 북해에서는 청명이가 거의 부처님급이던데요.”
“아, 아미타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십니까?”
“아니, 근데 없는 말이 아니라 진짜 그렇더라고요. 북해에서는 부처님을 별로 안 따라서 그런 건진 몰라도.”
“아,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 마구니! 아미타불!”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도 들은 듯 사색이 된 혜연이 연신 불호를 외어 댔다.
“소소야.”
“예, 사숙.”
“위장약 좀…….”
“네. 청명 사형 안 보이자마자 미리 만들어 뒀어요. 챙겨 드릴게요.”
“……고맙다.”
한숨을 푹푹 내쉰 백천이 고개를 들어 모두를 바라보았다. 표정이 사뭇 진지해져 있었다.
“마침 청명이도 없고, 이제 곧 화산으로 출발해야 하니,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가자.”
“예, 사숙.”
“내 생각에는 청명이 놈이 이번 일에 대해 우리에게 뭔가 숨기는 게 있다.”
백천의 말에 화산의 제자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생각지 못한 반응에 백천이 조금 당황하며 물었다.
“……다 알아?”
“……사숙.”
“응?”
“사숙은 한 번씩 본인이 눈치가 비상하게 빠르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좀 있습니다.”
“…….”
“그런데 알고 보면 사숙 눈치가 좀 없는 편이거든요. 사숙이 알 정도면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
아, 진짜?
유이설마저 고개를 끄덕이자 백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크, 크흠. 여하튼.”
크게 헛기침한 백천이 말을 이었다.
“너희도 청명이 놈을 알겠지만, 그놈은 해야 할 말은 하는 놈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숨기는 게 있다는 건, 아직 우리가 그놈이 생각하기에 그리 믿음직스럽지 않다는 의미겠지.”
이제는 다들 청명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
알아야 할 일은 굳이 묻지 않았음에도 강제로라도 알려 주고, 알 필요가 없는 일은 아무리 물어도 말해 주지 않는 사람이 청명이다.
그렇기에 화산의 제자들도 굳이 그 동굴 안에서 있었던 일을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던 것이다.
“마교는 끔찍했다.”
“…….”
“그리고 앞으로 그들을 다시 상대할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다. 언젠가는 진짜 마교를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
백천의 진지한 눈빛이 더없이 빛났다.
“그러니 우리는 더 강해져야 한다.”
마교에 맞서 싸우던 그때보다도 조금 더 단단해진 눈빛이었다.
“이번에도 대부분의 일은 청명이 놈이 해결했다. 우리는 그놈의 뒤꽁무니를 쫓는 게 고작이었어. 겨우 몇 발짝 더 나아갔다는 걸로 만족할 일이 아니야. 나는 그놈의 뒤에 겨우겨우 따라붙는 것에 만족할 생각이 없다!”
“그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창피한 일.”
모두가 입을 모아 동감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백천은 그런 사형제들을 돌아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길게 말하지 않는다. 적은 더없이 강대하고, 가야 할 길은 멀다. 뒤처지지 않도록 스스로 더 노력하자.”
“예, 사숙!”
“알겠어요, 사형.”
돌아오는 단단한 대답에 백천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스님은 왜 거기서 고개를 끄덕이고 계십니까?
우리 사형제인 줄 알았네…….
“아미타불.”
혜연의 나직한 불호 소리와 함께 창밖에선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 * *
“아, 추워. 왜 갑자기 눈이 오고 지랄이야.”
지붕 위에 걸터앉아 투덜거리던 청명은 옷 안으로 파고드는 백아의 등을 꾹꾹 눌렀다.
“아니, 이게 이제는 아예 여기가 제자린 줄 아네?”
공 좀 세웠다고, 어? 너 그러다가 훅 간다?
“쯧.”
짧게 혀를 찬 그는 챙겨 온 술병의 마개를 뽑았다. 그리고 흩날리는 눈발을 보며 술을 한 모금 홀짝였다.
독한 술이 속을 뜨끈하게 데우며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주향이 코와 입 속을 가득 메웠다.
“장관이네.”
성 가장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북해는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거기에 눈까지 더해지니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풍광이 펼쳐졌다.
“북해라…….”
청명은 가만 그 풍경을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사형, 그래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요.”
전생에서는 이곳에 올 일이 없었다. 그러니 이 세상을 두 눈에 이리 담을 일도 없었다.
마교가 없고, 전쟁이 없는 세상이었다면…… 어쩌면 그와 사형제들은 이런 풍광 좋은 곳을 찾아 천하를 유람하다 생을 마무리했을지도 모른다.
“다시 사니까 이런 것도 보고…….”
청명이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때로는 혼자 다시 태어나 이런 세상을 누리는 게 죄스럽기도 했다. 물론 그의 두 번째 삶이 그리 편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골치를 썩는 일도, 어린 화산의 제자들을 윽박지르는 일도 살아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던가?
그에게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다른 화산의 사형제들에게는 그런 기회조차 없었다.
그저…….
술병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더 머금었다. 그리고 흩어지려는 정신을 다잡았다.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지.’
항상 고민했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왜 자신만이 다른 사형제들과 달리 두 번째 삶을 얻었는가?
아직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하나는 알 것 같았다.
“천마…….”
병을 잡은 청명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그분은 이미…….
“알고 있었다고.”
의식적으로 피해 왔던 일이지만, 이제 더 이상은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주교의 획책이 실패로 돌아간 건, 결국 청명이 내내 품고 있던 불안을 확실한 위기로 굳혀 주었다.
천마는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다.
분명히.
그 생각만 하면 전신에 힘이 들어가고 이가 비틀릴 만큼 갈렸다.
하지만 그는 솟구치는 분노를 억지로 억눌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이번에야말로 그놈의 손에서 화산을 지켜내는 것이다.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
제아무리 천마라고 한들, 다시 살아나자마자 예전의 힘을 되찾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힘을 되찾는 중일 수도 있고, 혹은 청명이 다시 깨어나기 전 초삼의 의식으로 몇 년간 살았듯이 그도 다른 이의 의식으로 살아가며 잠들어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가 청명과 같은 과정을 겪을지, 아니면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돌아올 것인지도 확실치 않다.
다만 한 가지.
‘놈은 반드시 다시 한번 세상을 먹어 치우려 할 것이다.’
그 끔찍할 만큼 순수한 악의(惡意)를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은 이라면 누구라도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세상은 다시 겁화로 뒤덮일 것이고, 또다시 피와 죽음이 난무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안 돼, 이 개자식아.”
다시는 화산을 잃지 않는다.
그리하여 미래가 끊기는 일이 없도록 지킬 것이다.
이를 갈아붙인 청명은 천천히 고개를 내려 화산의 제자들이 묵고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느리지 않게, 하지만 결코 다급하지도 않게.’
그가 해야 할 일은 이전처럼 화산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을 걸어 화산을 지켜 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걱정 마세요, 사형.”
청명이 손에 든 술병을 하늘을 향해 높이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반드시 지켜 낼 테니까!”
눈이 흩날리는 북해의 하늘.
청문이 그를 향해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