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545화 (543/1,567)

545화. 장문사형. 애들이 엄청 잘 컸어요. (5)

사해상회의 둘째 아들.

태생만을 따지고 본다면, 검수의 길이 아니라 상인의 길을 걸었어야 할 사내.

조걸이 낮게 심호흡을 했다.

비록 상인의 길은 버렸지만, 살아온 환경이 있다 보니 거래에 대한 그의 지식은 결코 얕지 않은 수준이었다. 북해에 함께 온 화산의 제자들 중에서는 독보적인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지금 이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 모를 리 없었다.

그는 화산을 위해서 이 거래를 반드시 유리한 쪽으로 이끌겠다고 굳은 다짐을 하며 이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거래 내역을 논의하는 회의 자리에 들어온 이후로 조걸은 근본적인 의문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 정말 내가 들어올 필요가 있었을까?’

“아니이이이이이!”

청명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이해를 못 하시는 모양인데, 그 정도로는 해결이 안 된다니까요?! 지금 북해에서 팔아먹을 거라고는 한철밖에 없는데, 그걸 그렇게 쥐꼬리만큼 내다 팔아서 무슨 돈을 버시겠다고!”

“하, 하지만 도장……. 한철이라는 게 그리 많이 나는 게 아니오. 그렇게 쉽게 채굴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면, 북해는 예전에 부자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럼 이제부터라도 많이 채굴해서 부자가 되면 되는 거죠!”

“그, 그게 말처럼 쉬운 게…….”

땀을 뻘뻘 흘리는 한이명을 향해 청명이 두 눈을 부라렸다.

“아저씨! 아니, 총관님!”

“예?”

“그럼 대체 빙궁은 언제 부자가 돼요?”

“…….”

한이명은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어쩔 수 없다 소리만 하니까! 빙궁이 지금까지 계속 가난한 것 아니에요?!”

“그, 그건 저희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총관님.”

“예?”

청명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물론 총관님의 책임은 아니겠죠. 그건 북해의 환경상 어쩔 수 없는 문제잖아요.”

“그렇습니다.”

한이명이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것이었다.

북해는 척박한 곳이다.

그 살벌한 추위를 이겨 내는 것도 쉽지 않고, 그 추위를 버티며 일을 하는 것은 더욱더 쉽지 않은 일이다.

북해인들이라고 해서 왜 더 많은 빙정과 한철을 캐고 싶지 않겠는가? 인력에 한계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잖아요. 무사들을 채굴에 투입하면 되죠.”

“도, 도장.”

한이명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빙궁이 북해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근본은 결국 무파입니다. 무파에서 무학을 익히는 이들을 다른 데로 돌리게 되면 그 근본이 무너집니다.”

“아, 그렇죠. 그럴 수도 있겠죠.”

청명은 한이명의 말을 심드렁하게 대충 받아넘겼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냈다.

“그런데요, 총관님.”

“예?”

“총관님은 대체 후대에 뭘 물려줄 생각이세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총관님이 돌아가시고 궁주님이 온전히 북해를 다스려야 할 때는 어떻게 하실 건데요?”

그 말에 한이명의 눈이 떨렸다.

“그때도 빙궁은 무사의 자존심을 지켜야 하는 곳이니, 무인의 혼을 잃지 말고 근근이 먹고살라고 할 셈이세요?”

“…….”

한이명이 주먹을 살짝 움켜쥐었다.

그에게 있어서 설소백은 어느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가 모셔야 할 궁주이자, 전전대의 궁주에 대한 충심을 고스란히 바쳐야 할 자며…… 무엇보다 그의 사랑스러운 아들이었다.

피가 이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직접 젖을 동냥해 먹이고, 업어 키운 그의 자식이었다. 오히려 피가 이어지지 않았기에 더욱 애틋했다.

“궁주에게도 이 가난을 물려줄 생각이세요?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

한이명은 괴로운 얼굴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럴 수는 없지요…….”

“그렇죠!”

청명이 옳다구나 손뼉을 쳐 댔다.

그렇게 슬슬 한이명을 낚아채는 그를 보며 조걸은 빙그레 웃었다.

‘이게 무슨 협상이야.’

살다 살다 이런 협상은 처음 본다.

본디 문파간의 거래에선 동전 한 문도 손해 보지 않기 위한 각축이 벌어진다. 상대의 체면이 상하지 않도록 온갖 좋은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칼 같은 계산으로 머릿속에 잔뜩 날을 세우는 게 기본이다.

그런데 이건 뭔…….

그때 청명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애초에 후대에게 물려줄 게 뭐가 있겠어요?”

“…….”

“좋은 무공? 드높은 명예? 빙궁이라는 자부심?”

그러더니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좋죠. 다 좋죠. 하지만 입에 풀칠도 제대로 못 하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후대가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고 명예를 추구하는 건 좋은 일이겠죠. 하지만 선대가 그걸 위해서 배를 곯으라고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

“당장 나는 힘들더라도 내 자식은 배고프지 말아야죠! 그게 선대의 역할 아닙니까?”

한이명은 차분한 얼굴로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장의 말씀에 틀린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콰앙!

청명이 탁상을 부러져라 내리쳤다.

“자존심은 잠시 접으세요.”

“…….”

“무사에게는 자존심이 있죠. 그리고 무사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네, 저도 그건 압니다. 하지만…….”

청명의 눈은 사뭇 진지해져 있었다.

“아버지에게 자존심은 없는 거예요.”

한이명이 눈을 감았다.

‘옛 궁주님이시라면 어떻게 답하셨을까?’

아마 그분은 이 협상에 동의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분은 빙궁의 자부심을 그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분이셨으니까.

한이명 역시 마찬가지다. 불과 몇 해 전에 그에게 이런 제안이 들어왔다면 아마 생각할 것도 없이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자부심이나 자존심 따위는 때로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설소백을 힘들게 자신의 손으로 키우며 그걸 깨닫지 않았던가.

“도장.”

한이명은 청명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나만 묻고 싶습니다.”

“네, 물으세요.”

“도장께서 빙궁을 통해 이문을 취하려 한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은혜를 입은 입장에서 감히 그걸 따져 물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한이명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저는 빙궁의 총관이고, 도장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아직은 어린 궁주님께서 다스릴 빙궁을 온전하게 이뤄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감히 염치 불고하고 묻겠습니다.”

청명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더없이 진중했다.

“이 모든 거래가 진정으로 빙궁에 도움이 되는 거래입니까?”

청명은 씨익 웃었다.

“제 원칙은 하나예요.”

“…….”

“내가 피를 흘리게끔 한 자에게는 피를, 은혜를 베푼 자에게는 은혜를.”

진중하게 답하는 청명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믿음직스러웠다.

“어정쩡하게 명분과 친분으로 만들어진 관계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진정으로 서로를 위하고,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관계가 필요하죠. 서로가 위험하면 만사를 제쳐 두고 달려올 수 있는, 진짜 친구 같은 관계가.”

“…….”

“북해가 위험해진다면 화산은 이번처럼 달려올 거예요.”

한이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북해는 어떤가요?”

“그건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로지 궁주님의 선택에 달려 있지요.”

“아, 그러네.”

“다만…….”

한이명은 슬쩍 미소 짓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제가 궁주님의 선택을 막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친우를 도우러 가는 것을 어떤 명분으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청명이 씨익 웃으며 그 손을 맞잡았다.

“잘 생각하셨어요.”

두 사람이 손을 꽉 맞잡고 서로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동안 그렇게 굳건한 눈빛을 교환한 두 사람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음.”

한이명은 조금 걱정이라는 듯 슬쩍 앓는 소리를 흘렸다.

“이제는 무사들을 잘 설득해 일에 투입하는 게 문제군요. 그들도 자존심이 있는지라…….”

“아,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예?”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보는 한이명을 향해 청명이 의기양양하게 씩 웃었다.

“지금부터 제가 사람 다루는 법을 알려 드릴 테니까요.”

“…….”

“무사의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애초에 그런 걸 신경 쓰니까 문제인 거예요. 그러니까 일단은 다짜고짜 후려 까시고…….”

청명의 특강이 시작되자 조걸이 허허, 하고 웃었다.

‘여기도 끝이네.’

북해빙궁에 암운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크!”

문을 박차고 나온 청명의 얼굴이 햇살을 받아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그의 어깨에 올라탄 백아도 일광욕을 하듯 몸을 쭉 펼치며 세상 다시없을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마무리로군!”

“……독한 놈.”

결국 청명은 한이명이 제시했던 거래량을 두 배로 늘리는 데 성공했다. 계약서에 도장까지 찍은 이상, 빙궁은 이제 꼼짝없이 화산에 빙정과 한철을 비롯한 특산물들을 가져다 바쳐야 한다.

물론 생각보다 매입가를 높이 쳐주기는 했지만, 조걸은 그게 결코 빙궁을 향한 배려심으로 이뤄진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지속적으로 뽑아 먹겠다는 거지.’

단기적으로 이문을 취할 때는 상대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지만, 지속적인 거래를 할 때는 상대에게도 반드시 이득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거래가 끊어지는 일 없이 지속적으로 더 많은 이문을 볼 수 있으니까.

“그런데 수급한 물건들은 어디다 쓸 셈이냐?”

“어디다 쓰긴.”

조걸의 물음에 청명이 기지개를 켜던 팔을 툭 내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지금 중원에 빙정이 씨가 말랐으니, 풀었다 하면 천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사람이 널려 있겠지. 우리가 쓸 건 남기고 남은 하품들은 그런 양반들한테 팔면 돼.”

“한철은?”

“한철이야 당가에서 비싸게 사 주겠지.”

한철을 본 순간 당군악이 지었던 표정을 떠올린 청명이 낄낄 웃었다.

“심지어 이번에 한철검을 만들면서 한철 맛을 봤잖아. 기껏 한철로 무기 만드는 법을 제대로 익혔는데, 재료가 없어서 아무것도 못 하니 속이 타지 않겠어?”

“그렇지.”

“그런데 앞에다 한철을 떡하니 가져다 놔 봐. 눈이 돌아가겠지.”

“그, 그런데 당가와는 친구라면서? 친구한테 비싸게 팔겠다는 거냐?”

“쯧쯧쯧. 상인 집안 출신이라는 양반이 말하는 본새 좀 보소. 글렀어, 글렀어.”

아니…… 청명아.

그건 상인이고 나발이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성의 문제 아니겠니? 응?

“사형이 뭘 모르나 본데!”

“…….”

“친구일수록 금전 거래는 확실히 해야 돼. 어설프게 깎아 주고 어영부영 그냥 주고 하다 보면 나중에는 감정이 쌓인다니까? 내가 돈 좀 벌자고 이러는 게 아니야! 이건 관계와 신뢰의 문제지!”

“……지랄을 한다.”

조걸이 씁쓸하게 중얼거리건 말건 청명은 낄낄 웃어 대었다. 그러더니 돌연 정색을 하고 조걸을 획 돌아보며 말했다.

“이거 소소한테는 비밀이야.”

“…….”

“엣헴!”

이내 배를 쭉 내밀며 처소로 향하는 청명을 보며 조걸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하여튼 저 사기꾼 같은 놈.’

그리고 얼른 그 뒤를 따라갔다.

청명은 느긋하게 걷다가 문득 먼 하늘을 슬쩍 바라보았다.

“이걸로 됐어.”

“응?”

“북해의 모든 문제는 중원과 먼 데다 땅이 더없이 척박하다는 것에서 시작되지.”

“…….”

“끊을 수 없는 교역을 시행하고, 지속적으로 곡식과 재화를 벌어들이다 보면 스스로 바뀌게 될 거야.”

“…….”

“그럼 그 꼬맹이도 조금은 편해지겠지.”

말끝에 ‘그 김에 나도 돈 좀 벌면 좋고.’ 하고 작게 덧붙인 청명은 휘적휘적 앞으로 걸었다.

조걸은 청명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다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여하튼 못 말리는 놈이야.’

청명이 무슨 생각을 하며 움직이는지 이해 가지 않을 때가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때.’

저 감당하기 힘든 사제가 걷는 길은 결코 그가 생각하는 정도에서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 확신은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두터워졌고.

“같이 가자, 청명…….”

“아!”

“응?”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설천상 그 새끼가 빙정만 꿍쳐 놓지는 않았을 것 같아. 좀 더 뒤져 볼까? 이왕 털 거 제대로 털어 가야 후회가 안 남지! 최선을 다해야 해, 암.”

“…….”

아니.

가끔은 좀 어긋난 것 같기는 하다.

좀 많이…….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