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4화. 장문사형. 애들이 엄청 잘 컸어요. (4)
연회를 마치고 궁주실로 돌아온 설소백은 퍽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야기가 잘돼서 다행이네요.”
“구, 궁주님.”
하지만 한이명은 혼이 나가 버린 듯한 얼굴로 말했다.
“도, 독점권은 그리 간단하게 생각할 만한 게 아닙니다. 교역에서 이득을 보려면 여러 상단에서 서로 경쟁을 해야 하는 법입니다. 독점권을 주게 되면 물품의 대금을 그쪽 마음대로 정할 수 있게 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그렇죠.”
“이건 너무도 큰 손해입니다.”
한이명의 말을 듣고도 설소백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압니다. 아버……. 아니, 총관님.”
“그런데 어찌 그리 편안해 보이십니까. 지금 빙궁이 중원의 문파에 수탈을 당하게 생긴 판인데.”
그의 입가엔 가벼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북해를 수탈할 정도로 제 잇속만을 따지는 이들이었다면, 마교가 일을 꾸미고 있단 사실을 알자마자 북해에서 달아났을 겁니다. 얼결에 휘말렸다 해도 그리 목숨을 걸고 싸우지도 않았겠죠.”
“…….”
“언행이 거칠고 파격적이라 그렇지, 협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 그야 그렇지.
저 사람들을 눈으로 본 게 한 달도 되지 않는다는 점만 뺀다면 다 맞는 말이지!
“하지만 궁주님……!”
“총관님.”
한이명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 낸 설소백은 반짝이는 눈으로 입을 열었다.
“총관님 생각엔 화산이라는 문파가 얼마나 더 강대해질 것 같으세요?”
“그야…….”
무어라 답하려던 한이명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깐의 고민 끝에 답했다.
“얼마 전까지는 화산의 명성이 북해까지 닿지 못했었지만, 이제 곧 북해에서 가장 유명한 문파가 될 겁니다. 그리고 아마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가 되겠죠.”
“그렇습니다. 그건 확실합니다.”
설소백과 한이명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들의 충격적일 만큼 높은 무위를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지금이야 중원에서 가장 강대한 문파인 소림에 미치지 못할지 모른다. 하지만 저 백천을 비롯한 화산의 다른 제자들이 성장하여 화산의 중진이 되었을 때도 그러할 것인가?
‘적어도 중원에서 가장 강대한 문파 중 하나는 되겠지.’
무엇보다 청명의 존재가 그 사실을 확신케 만들었다.
백천이나 유이설, 그리고 다른 화산의 제자들 역시 어떤 문파에 데려다 놓는다 해도 차기 장문인이나 차기 문파제일인을 충분히 노릴 수 있을 만큼의 인재들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저 청명은 확연히 급이 달랐다.
단순히 그 무위만을 두고 논하는 것이 아니다.
정황을 한눈에 파악해내는 분석력과 그에 따른 최선의 대책을 찾아내는 현명함, 그리고 결정한 바를 지체없이 이행하는 실행력과 승부에 있어 뒤를 돌아보지 않는 과감함과 결단력.
그 어느 것을 보더라도 모자람이 없었다.
무엇보다 저 개성이 넘치다 못해 어디로 튈지 모르는 화산의 제자들을 한 손으로 움켜쥔 채 이끌어 가고 있지 않은가?
청명의 뒤를 받치는 이들이 백천을 비롯한 다른 제자들보다 못하다 해도, 화산은 천하제일문을 노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터였다.
한데 심지어 저만한 인재들이 받쳐 주고 있으니 청명에게 두려울 게 있겠는가.
‘거기에 빙궁의 속곳까지 털어 가는 철저함까지.’
생각하다 보니 눈물이 핑 돈 한이명은 설소백이 보지 못하게 눈가를 훔쳤다.
아니.
애초에 아예 먹은 것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았는가!
광산에서 캔 걸로도 모자라 설천상이 빼돌려 놓았던 빙정도 다 가져가고, 마교 놈들이 챙겨 놓은 보화도 모조리 쓸어가 놓고는!
아무리 설천상의 빙정이 마교 놈들의 이상한 대법에 사용되어 그 정(精)이 반의반도 남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빙정은 빙정이다. 그것만 해도 그 가치가 결코 적지 않을 터인데…….
‘너무 잘났네, 너무.’
과하게 잘난 게 문제지!
설소백은 생각에 잠긴 한이명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화산과 연을 대는 것이 빙궁에 손해가 될 리 없습니다.”
“…….”
“물론 당장은 우리가 조금 힘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 화산파와 친우의 연을 맺는 게 북해빙궁에 정녕 해가 되겠습니까?”
한이명은 그 말에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새삼스러운 눈으로 설소백을 바라볼 뿐이었다.
‘궁주께서는 이제 진정 내 손을 벗어나셨구나.’
단순히 그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빙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하고 있다.
이는 설소백이 진정한 북해빙궁의 궁주가 되어 가고 있다는 의미이자, 이제 그의 품을 떠나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홀로 서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 성장의 뒤에 그가 아닌 청명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은 조금 씁쓸하지만…….
‘나쁘지 않다.’
청명 도장은 궁주로 모시기에 절대 나쁜 이가 아니었다. 상대하는 입장에서야 속이 썩고 배알이 뒤틀리지만, 그가 자신의 윗사람이라 생각한다면 이보다 더 든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좋은 변화라 생각해야…….
“더구나 청명 도장께서 제안하신 일이 아닙니까!”
“……예?”
“청명 도장께서 하시는 일인데 잘못될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청명 도장을 믿습니다.”
“…….”
아니…….
뭐가 좀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 같은데?
한이명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설소백이 정말 성장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청명에게 말려든 것인지 도무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독점권은 너무 과한 것 아니냐?”
“뭐가?”
“아니……. 북해라는 곳이…….”
조걸은 할 말이 없다는 듯 청명을 바라보았다.
상인인 그는 전매권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이득을 가져오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운남에 대한 무역 독점권을 얻어 낸 후 화산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들였는가?
심지어 이건 그것과도 경우가 다르다. 운남과의 무역은 화산과 야수궁이 동등한 상태에서 맺은 계약이기에 적절한 수준에서 이문을 조율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청명이 빙궁을 완전히 틀어쥔 상태로 독점적으로 무역을 할 수 있다면, 그에 대한 이문이 얼마나 발생할지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물론 당장이야 큰돈이 안 되겠지만, 해가 넘어갈수록 그 이문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것이다.
“한 총관은 절대 멍청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설마 이걸 받을까?”
“이상한 소리를 하네, 사형.”
“응?”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서 안 받는 게 아니라, 멍청한 사람이 아니니까 받는 거지.”
“…….”
청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한 총관은……. 아니, 빙궁은 이걸 받지 않을 수 없어. 그리고 이건 빙궁에게 있어서도 절대 손해가 아니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빙궁은 눈으로 봤거든. 마교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
“그런데 세상에는 아직 마교 놈들이 남아 있단 말이지. 그리고 한 교구가 일을 벌였다는 건 다른 교구들도 언제든 일을 벌일 수 있다는 의미야.”
“그, 그건 그렇지.”
“그런데 빙궁은 그걸 막을 힘이 없거든.”
“아…….”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 전쟁에서 너무 크게 힘을 소비했지. 그리고 새로 궁주가 된 설소백은 너무 어려.”
“그렇지.”
“궁주가 장성하고 새로 무사들을 수련시켜서 예전과 같은 전력을 갖추려면 시간이 필요하단 말이야. 그새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빙궁은 쫄딱 망해. 손도 써 보지 못하고.”
“…….”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그때,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백천이 입을 열었다.
“빙궁은 지붕이 필요하다는 거로군.”
“바로 그렇지. 역시 동룡이야. 말을 잘 알아들어.”
버럭 소리칠 듯 이마에 핏대를 세운 백천이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독점권은 부담스러운 일이겠지만, 이미 전력을 많이 잃은 빙궁의 입장에서는 승냥이처럼 달려들 중원의 세력들을 상대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겠지.”
“그건…… 또 그러네요.”
조걸이 그제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인들은 탐욕스럽다. 그리고 교역을 위해 빙궁까지 방문하는 상가라면 뒷배로 적당한 문파 하나씩은 끼고 있기 마련이다.
더는 예전과 같은 위세를 보일 수 없는 빙궁이 그런 이들이 떨어 댈 유세를 감당하는 것은 골치 아프고 힘든 일일 수밖에 없다.
“문파의 전력을 되찾을 시간과 궁주의 성장까지 걸릴 시간을 벌기 위해서, 무엇보다 언제 또 발호할지 모르는 마교의 발톱에서 빙궁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방패막이가 되어 줄 문파가 필요하다는 거지.”
“정확해.”
청명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이었다면 일일이 하나하나 설명해 주어야 했을 테지만, 이제는 몇 마디 하지 않아도 저마다 알아서 답을 찾아낸다.
무위뿐 아니라 식견 역시도 성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해는 됐지만, 뭔가 이상한 기분이군.”
“뭐가?”
“빙궁의 생각으로는 화산이 중원의 다른 문파들이나 마교로부터 자신들을 지켜 줄 수 있는 문파로 보인다는 의미지 않느냐?”
“그렇지. 그게 왜?”
“아니. 뭐…….”
백천이 어색하게 웃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다 현판을 내릴 뻔했던 화산이다. 그런 화산이 새외사궁 중 하나인 빙궁이 의탁할 만한 곳이 되었다는 사실이 더없이 뿌듯하면서도 어색했다.
“저쪽에서 지금 당장 이 모든 것을 고려할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을 들여 생각하다 보면 결국 한 가지 결론밖에 내릴 수 없을 거야.”
“허.”
청명의 당당한 목소리에 백천은 헛웃음을 흘렸다.
웬일로 재물을 그리 탐내지 않는다 싶었더니 더 큰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게 화산에 이득이 된다는 거겠지?”
“물론이지.”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해빙궁이 지금 당장에야 부침이 있지만, 새외사궁 중 하나고 역사와 저력이 있는 문파야. 궁주만 좀 똘똘하게 굴어 주면 결국에는 과거의 위상을 회복하게 될 거야.”
“음.”
“그럼 우리는 강한 친구를 가지게 되는 거지.”
“……그 와중에 돈 거래도 좀 하고.”
“돕고 사는 거지. 서로서로.”
백천이 그런 청명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서로서로는 아닌 것 같기도 한데.’
뭐 여하튼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넘어가고.
“그런데 내가 이해가 안 가는 건…….”
“뭐가 또?”
“그 말대로라면 빙궁을 뜯어먹으려 달려들 다른 문파들을 우리가 물리쳐 줘야 한다는 의미지 않느냐?”
“그렇지.”
“그런데 우리가 당장 그걸 해낼 수 있겠느냐? 아무리 화산이 강해졌다고는 해도 다른 구파들의 불만을 감당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잖으냐?”
“사숙.”
“응?”
“좀 똘똘해졌다 싶더니 또 실없는 소리 하네.”
“…….”
“그걸 왜 우리가 해? 원래 빙궁 쪽을 감시하고 뒤탈 없도록 처리해야 하는 애들이 따로 있잖아.”
“…….”
“이 정도로 부려 먹었으면 뒷감당은 자기들이 해야지. 양심이란 게! 있으면! 어?!”
“…….”
그 말에 모두의 고개가 일제히 한곳으로 돌아갔다.
“크, 크흠. 아미타불!”
그리고 혜연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청명은 코웃음을 쳤다.
“당연히 소림 방장이 나서게 해야지. 수염 다 뽑히고 싶지 않으면. 그리고 남만야수궁도 도와줄 거야. 새외사궁의 이름으로 압박해 준다면 문제없어.”
“아……. 야수궁이 있구나.”
모두가 야수궁주 맹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은 단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무엇보다 빙궁이 천우맹에 가입하면 다 끝나는 일이지. 화산의 이름은 아직 구파를 감당하기에 부족할지 모르지만, 천우맹은 그렇지 않거든.”
“확실히…….”
청명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졌다.
“천우맹이 발족할 때, 빙궁도 천우맹에 참여하기로 했다 선포하면 돼. 그럼 같은 맹 내에서 교역이 오가는 것을 트집 잡기는 어려워질 테니까.”
“좋은 생각이다.”
청명이 구상하는 것을 모두 이해한 백천이 입을 열었다.
“그 말인즉슨, 책임은 소림과 천우맹에 다 떠넘기고 화산은 잇속만 쏙쏙 빼내겠다는 거로구나. 지금 화산에 제일 필요한 빙정과 한철을 모조리 독점해서?”
“…….”
“역시 우리 사질 청명이로구나. 악마도 울고 가겠어.”
“이쯤 되면 마교랑 누가 더 나쁜 놈인지 생각을 좀 해 봐야 합니다.”
“나는 청명이 한 표.”
“그럼 저도 사고랑 같이 사형한테 한 표요!”
“…….”
백천이 고개를 내젓는다.
‘대단한 놈이야. 여하튼.’
야수궁주의 가벼운 몇 마디로 시작한 일이 점점 커지더니 결국은 빙궁마저 화산과 연을 맺게 됐다. 대체 어디부터가 저놈의 계획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결과만은 최고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럼 이제 정리가 대충은 끝난 건가?”
“빙궁의 선택만 남았으니까. 결과야 어떻게 되든 이제 정리는 됐다고 봐야겠지. 남은 건 뒤처리뿐이야.”
청명은 가볍게 말하며 어깨에 앉은 백아의 턱을 톡톡 두드렸다.
“……지옥 같았다.”
“나는 이제 북해 쪽으로는 고개도 안 돌릴 거다.”
“……다 끝난 듯이 그렇게 산뜻하게 이야기하지 마세요, 사형들. 이제 다시 화산까지 돌아가는 길이 남았다고요.”
당소소가 볼멘소리를 했지만, 다른 이들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이제 돌아가야지.”
“예, 사숙.”
화산.
그새 그리워진 그들의 터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