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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539화 (537/1,567)

539화. 내 이럴 줄 알았지. (4)

“끄으으윽!”

깊게 파고든 검이 가슴께를 새하얗게 얼렸다.

끊겨 가는 숨을 헐떡이던 마교도가 초점 없는 눈으로 진언을 중얼거린다.

“처, 천...마........ 재림......”

“......”

“그....그분께서...... 너희를.......”

콰드득.

진언에 진절머리가 난 빙궁의 무사가 심장을 파고든 검을 비틀어 마교도의 심장을 헤집었다.

짧게 끄륵, 하는 소리와 함께 숨통이 끊긴 마교도가 절명하여 쓰러졌다.

“이 지긋지긋한 것들.”

동굴을 지키던 마지막 마교도마저 쓰러뜨렸다. 하지만 빙궁도의 얼굴은 결코 밝지 않았다.

그들이 입은 피해 역시 끔찍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세가 이렇게까지 기울면 저항하는 이들의 의지도 꺾이기 마련인데 이 마교도 놈들은 마지막 한 놈까지 조금도 의지를 잃지 않았다. 심지어 죽는 순간까지도.

오히려 밀어붙이는 빙궁도들이 파랗게 질릴 만큼 격렬한 저항을 해 왔다.

‘어쨌든 .....’

천천히 검을 뽑아 낸 빙궁의 무사가 뒤를 돌아보았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새하얗고 아름다웠던 계곡은 이제 붉은 속살을 드러낸 채 엉망으로 무너져 있었다. 그 위로 빙궁도와 마교도가 흘린 피가 내를 이뤄 흘렀다.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광경.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렀고 피해를 입었지만, 어쨌든 빙궁도들은 남은 마교도들을 모두 주살하는 데 성공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의 손으로 말이다.

진이 빠진 얼굴로 뒤를 돌아본 무사의 눈에 비척이며 일어나는 화산의 제자들이 보였다.

‘저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곳에 쓰러진 것은 마교도가 아니라 빙궁도들이었을 것이다. 중원에서 온 방문자들 덕분에 이렇게 북해를 지켜 낼 수 있었다.

그가 막 그들에게 다가가 감사를 표하려던 그때였다.

콰르르르릉!

산맥이 급격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뭐?’

당황한 무사가 황급히 동굴 쪽을 돌아보았다.

진동은 삽시간에 커져 갔고, 이내 그가 발을 디딘 자리 역시 서 있지도 못할 만큼 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콰르르르르르릉!

산 전체가 뒤흔들리는 것을 본 모두의 시선은 오직 한곳, 동굴의 입구에 꽂혔다.

산이 이렇게나 흔들리는데 저 동굴이 과연 버틸 수 있겠는가?

동굴 안쪽에서 천장이 조금씩 부서져 내리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아, 아직 안으로 들어간 이들이 나오질 않았는데!’

빙궁도들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아, 안 돼...”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빠르게 무너지는 동굴 안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초, 총관님!”

다급하게 동굴을 탈출하는 이들의 모습을 확인한 무사가 저도 모르게 외쳤다. 설소백을 끌어안은 한이명을 비롯한 몇몇 무사들이 무너지는 동굴 밖으로 잽싸게 몸을 날렸다.

우르르르릉!

그리고 간발의 차로 동굴이 완전히 무너지며 육중한 바윗덩어리들이 내려앉았다.

콰르르르르르릉!

주위로 희뿌연 먼지가 흩날렸다.

“다, 다행.......”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던 무사는 어느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다시 보니 빠져나온 이들의 수가 들어간 이의 반절도 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그야 빤한 일 아니겠는가.

살짝 입술을 깨문 그는 일단 다급하게 궁주와 한이명을 향해 달려갔다.

“초, 총관....... 아니, 궁주님! 괜찮으십니까?”

그 물음에,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설소백이 넋이 나간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형체도 없이 무너져 내린 동굴을 보며 그는 중얼거렸다.

“.......청명 도장님.”

무너지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안으로 들어간 청명을 구해 오기는커녕 빠져나오기에도 급박했다. 울부짖고 몸부림쳤지만, 결국엔 한이명의 손에 강제로 끌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처, 청명 도장님!”

설소백이 다시 무너진 동굴 쪽으로 달려가려 몸을 일으키자 한이명이 손을 뻗어 그런 그를 단단히 움켜잡았다.

“그만 두십시오, 궁주! 낙석이 다시 있을지도 모릅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하지만 도장님이! 청명 도장님이 아직 저 안에 있단 말입니다!”

한이명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라고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이건 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이라고 편한 것은 아니었다. 왜 구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설소백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짓깨문 입술에서 피가 배어났다.

‘도장께서 북해를 구하셨구나.’

갑자기 일어난 커다란 지진과 무너져 내린 산, 그리고 잦아든 진동까지.

그 일련의 과정을 생각하면 안에서 대충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청명이 천마의 부활을 막아 내고........

한이명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은혜를 대체 어찌 갚아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화산 제자들의 얼굴은 또 어떻게 봐야 한단 말인가?

저 동굴 안에서 빙궁의 무사들 역시 숱하게 희생됐다. 빙강시들을 뿌리치고 동굴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미처 몸을 빼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북해인, 북해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 당연하다.

이 먼 이역만리 땅에서 그들을 이끌고 마교의 마수에서 북해를 구해 낸 후 그 목숨마저 내던진 이에게 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음을 다잡으셔야 합니다. 청명 도장도 궁주께서 그저 슬픔에 잠겨 계시기를 원하진 않을 겁니다.”

설소백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무너진 동굴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차마 더 말을 보탤 수가 없었다.

한이명은 비척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는 빙궁의 총관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직도 쓰러진 채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화산의 제자들을 무거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숙.”

“.......왜?”

“살아...... 계십니까?”

“........죽었어.”

“....그럴 것 같았습니다.”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백천이 미미하게 꿈틀댔다.

‘진짜 죽을 것 같다.’

이건 힘들고 어쩌고 할 수준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끄으으으.......”

백천이 제일 먼저 움직이며 남은 힘을 모두 짜냈다. 그리고 기어코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우둑. 우두둑.

부러진 뼈가 비명을 내지르고 그새 살짝 아물었던 상처가 도로 툭 벌어지며 피가 주루륵 흘렀다.

“으.......”

전신이 부서질 것 같은 고통에 이가 절로 갈렸다. 하지만 백천은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다들 괜찮으냐?”

제 몸 상태도 말이 아니건만 백천은 우선 제자들의 상태부터 살폈다. 그러나 그 말에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자... 잠이 옵니........”

“사, 사형. 정신......... 정신 좀 차리십쇼. 여기서 자면 얼어 죽습니다!”

“매화....... 화산의 매화가.”

“아니, 이 양반이 진짜 미쳤나?”

그나마 멀쩡한 조걸이 윤종의 뺨을 세게 찰싹찰싹 때렸다.

“일어나시라고요, 사형!”

조걸아.

아무래도 손에 감정이 실린 것 같은데. 그러다 얼어 죽기 전에 맞아 죽겠다.......

“.......아미타불.”

혜연이 애처로울 만큼 파들파들 떨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전신의 살이 검게 죽은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전의 전투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새삼 실감이 갔다.

백천은 힘겹게 걸어 당소소와 유이설에게로 다가갔다. 당소소는 제 몸도 성치 않으면서 유이설의 몸을 돌보고 있었다.

“어떠냐?”

“......다행히 출혈이 크지 않아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요. 그런데 충격을 워낙 많이 받아서....”

“됐어.”

“사고! 일어나시면 안 돼요, 아직!”

“괜찮아.”

기어이 몸을 일으키려는 유이설의 어깨를 백천이 단호한 손길로 잡아 눌렀다.

“.......사형?”

“무리하지 마라.”

엉망이 된 백천의 얼굴을 본 유이설이 결국 다시 몸에서 힘을 뺐다. 백천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부상을 제대로 다스리지 않으면 후유증이 남는다. 그건 오래도록 무인으로서의 네 발목을 잡을 거다. 소소의 말을 듣도록 해, 사매.”

“.......네, 사형.”

퉁퉁 부은 유이설의 얼굴을 본 백천은 한숨을 삼켰다.

‘이렇게나.’

운이 좋았다.

전투가 조금 더 길어지거나 격해졌다면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 중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그들을 향해 한이명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몸은 좀 괜찮으십....... 아니, 이건 물을 게 아니군요.”

한이명은 화산 제자들의 몰골을 슬쩍 훑어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부끄럽구나.’

물론 빙궁도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만큼 처절하게 싸웠느냐 물어보면 그건 아니었다. 주교와 이들 간의 격전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려 왔다.

사는 동안 그런 전투를 다시 볼 수 있을까?

한이명은 진심을 가득 담아 백천을 향해 깊게 포권 했다.

“그리고.......”

고개 숙인 그의 어깨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유감을 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희가 어찌 감히 그 마음을 짐작하겠냐마는......”

그는 느리게 말을 하다 끝내 말문이 막힌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잠시 후에야 다시 힘겹게 말을 이었다.

“북해는 청명 도장의 희생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를 북해를 구한 영웅으로 대대손손 전하여 기리겠습니다.”

“네?”

백천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반문하자 한이명의 얼굴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청명 도장께서 동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셨습니다.”

“.......”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그분은........”

“아, 난 또 뭐라고.”

백천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생각과 다른 반응에 한이명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충격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인가.’

그런데 그때 조걸이 백천을 향해 물었다.

“뭐라고 하셨어요? 청명이 뭐가 어쨌다고요?”

“청명이가 바위에 깔려 죽었다고 하시는 것 같은데?”

“하....”

조걸이 엉망이 된 얼굴을 훔치며 피식 웃었다.

“그렇게 죽을 놈이면 이 고생도 안 하지.”

“내 말이 그 말이다.”

한이명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천하태평인 것은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아미타불....... 청명 시주는 지옥에 던져 놔도 살아 돌아올 사람입니다. 산에 깔린 정도로 죽을 거였으면 벌써 죽어도 열 번은 더 죽었겠지요.”

“아아........ 매화가.........”

“아니, 이 양반이 진짜 죽으려고 하나? 사형! 정신 좀 차리시라니까요! 사형!”

찰싹! 찰싹!

“걸아. 그러다 윤종이 맞아 죽겠다.”

“아니, 이 양반이 자꾸 잔다니까요? 소소야. 사고도 사곤데, 이 양반 좀 봐 줘야겠다. 자꾸 죽으려고 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한이명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이게 뭔....’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려는 찰나에 백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한 총관님.”

“........예?”

“청명이가 싸움 말고 제일 잘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사기?”

“아, 협박?”

“......”

어...... 맞는데. 어, 그게 맞긴 한데........

틀린 말이 아니라 화도 못 내겠고, 이거.

“마, 맞긴 한데 그런 종류 말고.”

왠지 모를 서글픔을 느낀 백천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말을 이었다.

“청명이가 싸움이나 사람 괴롭히기, 사숙 굴리기, 돈 떼먹기, 버르장머리 없이 굴기, 사람 열받게 욕하기 등등을 제외하고 제일 잘하는 것 두 가지가 뭔지 아십니까?”

아니....... 그쯤 되면 '제일 잘하는 것'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절벽 타기와 땅 파기입니다.”

“.....예?”

답변은 더욱더 황당했다. 한이명은 눈을 끔뻑거리며 백천을 바라보았다. 농을 할 상황도 아니건만..........

그런데 더 황당하게도, 그 말을 들은 화산의 제자들과 혜연은 모두 깊게 동의하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귀신이지, 귀신.”

“아미타불, 확실히 그렇소.”

“매, 매화.......”

“그만하라고! 이 양반아!”

어쩔 줄을 모르는 한이명을 보던 백천이 씨익 웃었다.

그의 시선은 무너진 산의 중턱으로 향해 있었다. 한이명도 자연스레 그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시 말해 그놈은........”

그 순간.

백천의 목소리에 호응이라도 하듯 무너져 움푹 파여 버린 산 중턱이 살짝 들썩이기 시작했다.

‘엇?’

순간 한이명은 두 눈을 의심하며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무덤 속에서도 다시 기어 나올 놈이라는 거죠. 놈은 그 정도로는 안 죽습니다. 절대로!”

들썩! 들썩!

파아아아아앗!

무너져 내린 흙과 돌 더미 사이에서 시뻘건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한이명의 두 눈이 순간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

“저, 저.......”

더듬. 더듬.

튀어올라온 팔이 주변을 이리저리 더듬었다. 이내 그 주위의 흙이 폭발하듯 좌우로 뿜어져 나갔다.

“푸아아아아아아아아앗!”

그리고 그 속에서 청명이 얼굴을 쭉 뽑았다.

“끄으으응! 진짜 뒈지는 줄 알았네! 사수우우우우우욱! 사숙 어딨어! 사수우우우우우욱! 빨리 와서 이거 좀 파 봐아아아아아! 처자빠져 있지 말고오오오!”

자랑스레 말하던 백천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그건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안타깝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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