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8화. 내 이럴 줄 알았지. (3)
끼아아아아아아악!
문양에서 기분 나쁜 빛과 함께 숨이 멎을 듯한 끔찍한 귀곡성이 터져 나왔다.
“세상에 강림하소서. 그리고 모든 것을 그 발아래 두소서. 이 미천한 종이 천마의 강림을 바라고 또 바라나이다!”
그리고 광기 어린 주교의 외침이 섞여 울렸다.
진정 지옥이라는 것이 있다면 꼭 이러할 터.
청명은 그 지옥 속을 묵묵히 비척이며 걸었다.
그리고,
“흐아아아앗!”
그가 휘두른 검이 주교의 어깨를 가격했다.
퍼어억!
하지만 제대로 힘을 싣지 못한 검은 그의 몸을 가르지 못했고 어설프게 쳐 내는 데에 그쳤다.
다행히 힘을 잃은 이를 쓰러뜨리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는지, 주교는 이내 피를 토하며 옆으로 나가떨어졌다.
“끄으으으........”
그 검에 얻어맞은 주교도, 반동을 감당하지 못한 청명도 모두 바닥에 쓰러진 채 꿈틀거리고 신음했다.
“쿨럭.”
주교의 입에서 피가 울컥 쏟아졌다. 하지만 다 죽어 가는 몸으로도 절대 죽지는 않았다.
“...... 더럽게 질긴 것들.”
청명은 이를 갈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반쯤 몸을 세우다 팔에 힘이 풀려 다시금 엎어졌다.
“......빌어먹을.”
그는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주교를 노려보았다.
“쿨럭! 쿨럭!”
몸을 뒤집은 주교의 눈에도 지독한 독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소용없다.”
“.........뭐?”
그는 이내 얼굴에 득의양양한 웃음을 내걸고 외쳤다.
“의식은 이미 완성됐다! 이제는 누구도 그분의 부활을 막지 못한다!”
주교의 목소리는 점차 또렷해졌다.
“안됐구나. 매화검존의 후예.......”
그런데 청명을 보며 말하던 그의 얼굴이 미묘하게 뒤틀린다.
“너는.....”
그때였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바닥의 기괴한 문양 사이에 놓여 있던 빙정들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더 커다란 귀곡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흐하하하하하하핫!”
주교의 입에서 더없는 광소가 터져 나왔다.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누구도! 천마께서 강림하시어 세상을 피로 씻으실 것이다! 백 년에 걸친 교의 염원이 마침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내 미친 듯이 진언을 외어 대기 시작했다.
청명의 시선이 점점 광채가 짙어지는 문양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화아아악!
아수라 형상이 그려진 거대한 천이 뒤틀리고 휘말리더니 아래부터 타오르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천이 타오르며 재가 되자 마침내 뒤에 가려져 있던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청명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이......”
크게 충격을 받은 청명의 손끝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 미친 새끼들........”
새하얀 장포를 두른 사내가 거대한 문양 한가운데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티 하나 묻지 않은 흰 피부에 더없이 붉은 입술. 거기에 눈을 감고 있음에도 선명하고 짙은, 기다란 눈매.
바람이 휘몰아칠 때마다 바닥까지 길게 자라난 머리칼이 거칠게 휘날렸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무척 신비로운 사내라 생각할 것이 분명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청명의 눈에 가장 충격적으로 닿은 건......... 사내의 목을 가로지르는 붉은 선이었다.
청명은 이 사내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단 한 순간도, 꿈에서조차 잊을 수 없었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살아 있음에도 파멸로 불리어야 마땅했던 이를.
인세에 강림한 신이자, 무의 화신.
그리고 그가 직접 목을 베어 죽였던 존재.
“.....천마.”
청명의 입에서 참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몸속이 불타는 것만 같았다.
- 기억해라. 화산의 제자여. 이것은 끝이 아니다.
“개 같은.......”
청명의 이가 으스러질 듯 갈렸다.
알고 있다. 저건 그저 시체에 불과하다.
천마는 분명 그가 목을 베었고 완전하게 죽였다. 그 증거로 저 시체의 목에 그가 새긴 상흔이 또렷하게 남아 있지 않은가?
“대체 뭐 하는 짓거리야, 이 미친 새끼들아!”
무슨 수를 썼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들이 십만대산의 정상에서 죽은 천마의 시신을 수습하여 지금까지 보존해 왔다는 사실이다.
이제야 천마의 몸 주변에 숱하게 잔득 쌓인 빙정들이 보였다. 문양에 놓은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리 목적이 있다 해도, 죽은 이의 시신을 백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저렇게 말끔하게 유지하는 것은 보통의 광기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빙정, 빙강시, 천마의 시체.’
청명의 시선이 주교에게로 획 돌아갔다.
“미친 새끼들....... 시답잖은 짓거리를 했군.”
“크흐흐, 이미 늦었다.”
주교는 비틀대며 몸을 일으키더니 이내 천마를 향해 깊게 절을 올렸다. 그의 두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위대하고 또 위대하신 분이시여! 당신의 종이 당신을 배알하노니, 부디 이 간절한 소망을 저버리지 마시고 강림하시여 이 미욱한 이를 벌하여 주시옵소서!”
청명의 이글거리는 눈이 천마의 시신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아직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지만, 어떻게든 이 일을 막아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가 검을 움켜잡고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광풍을 뿜어내는 문양 한가운데, 천마를 향해 발을 뗐다.
하지만 그 움직임도 잠시.
콰아아아아아아아아!
공동 안에 거대한 기의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큭!”
청명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가 온전한 몸이었어도 과연 뚫고 들어갈 수 있었을지 의문일 정도의 가공할 기운이었다.
거대한 기운이 천마의 시체 주변을 휘감고 돌기 시작하자 공동이 그 기운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천장에서 집채만 한 바윗덩어리가 떨어져 내리고, 벽면의 암석들이 뜯겨나가 땅에 내리꽂혔지만, 그 어떤 것들도 천마의 육체 주변에는 범접하지 못했다.
“오오오오오오!”
쏟아지는 암석 사이로 천마를 지켜보는 주교의 눈엔 벅찬 희열이 들어찼다.
“천마시여!”
스으으으읏.
이내 빙정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들이 문양에서 올라온 혈기(血氣)와 뒤섞여 천마의 시체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무언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듯했다.
“으아아아아아앗!”
청명은 이를 악문 채 바닥을 꽉 틀어쥐고는 암향매화검을 천마에게 집어 던졌다.
하지만 힘없이 날아간 검은 휘몰아치는 기운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올 뿐이었다.
챙그랑.
암향매화검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후욱....... 후욱.”
더는 일어날 힘도 남지 않은 청명은 멍한 얼굴로 의식의 끝을 그 두 눈에 담았다.
스으으으으읏.
쌓여 있던 빙정들이 일제히 빛을 잃기 시작했다.
바닥의 문양에서 뿜어져 나오던 붉은 광채도 서서히 사라졌다. 천마를 휘감아 돌던 광포한 기운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그 몸속으로 흡수된 것이다.
“.......”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공동 안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청명은 보았다.
굳게 닫혀 있던 천마의 눈꼬리가 살짝 떨리는 모습을.
두근.
어디선가 심장 소리가 들린다.
두근. 두근.
그 심장 소리가 어디에서 새어 나오는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 새하얗다 못해 푸르게 질려 있던 시신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으니.
말 그대로 부활이었다.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이윽고.
천마가 천천히 그 두 눈을 떴다.
“천마시여어어어어어어!”
환희의 극에 달한 주교의 고함이 반쯤 무너진 공동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재림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천마시여! 아아, 천마시여어!”
마의 강림.
세상을 어둠으로 뒤덮었던, 하늘이 내린 마귀의 시체가 다시금 숨을 쉬기 시작했다.
하지만 청명은 그 광경을 똑똑히 보았음에도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눈을 뜨고 숨을 쉬는 천마를 그저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싸늘한 침묵이 공동에 내리깔렸다.
그렇게 얼마간 정적이 흘렀다.
“......”
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채 미동도 하지 않던 주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엔 숨길 수 없는 당혹과 의문이 어려 있었다.
그렇게 감히 고개를 들어 천마를 확인한 주교의 얼굴이 이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천마는 분명 그 두 눈을 떴다. 그리고 분명 숨을 쉬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그 뜬 눈에는 초점이 전혀 없었다.
마치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이, 이럴 리가.......”
주교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육체는 텅 비어 있다. 숨을 쉬고 눈을 떴지만 저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저건 그저 숨을 쉬고 있는 천마의 시체일 뿐이다.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다! 아, 이, 이런, 이럴 리가 없어어어어어어어어! 어째서어어어어어어어어!”
주교가 아예 정신을 놓은 듯 고함을 내지르고, 제멋대로 지껄여 대기 시작했다.
“이미 몇 번이나 확인을 마쳤는데! 초혼(招魂)의 의식이 실패할 리가 없다! 저 하찮은 것들조차 다시 살아 숨 쉬는데 어째서 천마께서 강림하시지 못한다는 말이냐! 어째서어어어어어어!”
그 영혼이 찢어지는 것 같은 통렬한 비명을 듣던 청명이 꼭꼭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 내 이럴 줄 알았지.”
천마는 부활하지 못했다.
하지만 청명은 일말의 기쁨조차 느끼지 못했다.
아주 조금도.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주교는 넋이 나간 얼굴로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스르릉.
그런 그의 정신을 되돌린 것은 청명이 떨어진 검을 다시 움켜잡는 소리였다.
그의 시선이 멍하게 청명을 쫓는다. 청명은 검을 지그시 꽉 잡으며 말했다.
“이제 끝내자. 빌어먹을 놈아.”
그러자 모든 의지를 잃은 듯, 초점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주교의 몸이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뒤흔들렸다.
마치 무언가를 크게 깨달은 사람 같았다.
“너.....”
그의 머릿속에서 내내 풀리지 않던 의문의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했다.
“......초혼의 의식은.........”
그의 목소리가 점점 놀랍도록 또렷해졌다.
“그래. 초혼의 의식은 실패할 리가 없다.”
점점 확신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가능한 건 오직...... 오직 하나!”
청명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환희와 절망, 공포로 물들었다.
“너...... 네놈! 네놈 정말로 매화검존이구나!”
“.......”
모든 것을 깨달은 주교는 목이 터져라 웃어 젖히기 시작했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핫! 그래! 그랬구나! 네놈이 정말 매화검존이었구나! 그래, 그렇지! 그랬어!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핫! 이제야 알겠구나! 정말 매화검존이야! 정말!"
청명은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그를 향해 다가갔다.
"초혼의 의식은 혼을 부르는 의식! 응답하지 않는다는 건 오직 한 가지만을 의미한다! 그 혼이 이미 다른 육신을 찾은 경우!”
주교의 두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네놈이 가능했다면 그분께서도 불가능했을 리 없지. 그래! 그렇다면 그분은........”
푸욱!
암향매화검의 끝이 주교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자신의 심장을 꿰뚫은 검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주교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천마께선.......”
힘없이 잦아 들어가는 목소리였다.
“이미.......”
마침내 그의 몸이 축 늘어졌다.
털썩.
그의 심장에서는 선혈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미 생명의 빛이 오래 전에 끊겼음에도 지독한 의지만으로 살아 숨 쉬던 자였다. 그리고 그 의지를 잃은 순간 허무하리만치 간단하게 무로 돌아갔다.
이미 죽어 버린 주교의 얼굴은 환희로 가득 찬 채 웃고 있었다. 청명은 입술을 짓씹었다.
“.....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의 시선이 천천히 천마에게로 돌아갔다. 천마의 초점 없는 눈이 묘하게도 그가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그가 천마의 시선이 놓인 곳에 서 있을 뿐이다.
하지만.......
청명은 비틀거리며 천마를 향해 다가갔다.
저벅 저벅.
그리고 똑바로 마주 보았다. 숱한 피와 시신들 위에 둘만 남아 있었던 오래 전 그때처럼.
물론 천마의 두 눈은 초점을 잃었지만, 그 입가에는 마지막 그 순간에 청명을 보며 지었던 오만한 미소가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으득.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청명의 입술 새로 이 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 천마께선 이미.......
파아아아아아앗!
섬전처럼 휘둘러진 청명의 검이 천마의 목을 쳐 날렸다.
허공으로 치솟은 머리가 힘없이 굴러 떨어졌다.
다시 목이 잘렸지만, 그 미소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 조소하는 듯한 미소를 본 청명은 끓어오르는 울분을 어쩌지 못하고 떨어 대다 몸을 옹송그렸다.
토악질을 하듯 경련하며 만신창이가 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미?
‘웃기지 마.’
그가, 그 마귀가 이 세상에 다시.......
“으으.....”
피와 죽음밖에 남지 않았던 십만대산의 정경이 그의 머릿속에 지독히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나도 남김없이 죽어 갔던 이들. 드넓게 펼쳐진 시체의 벌판.
그리고 그 세상에 홀로 고고히 서 있는 천마.
청명의 모든 것은 그의 손에 처참히 짓밟혔고 스러졌다.
뇌를 하얗게 태워 버리는 듯한 분노와 증오에 잠식된 청명은 입을 쩍 벌린 채 신음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을 토해 내는 듯한 끔찍한 고함을 내질렀다.
“으으아아아아아아아악!”
울부짖음과 함께, 공동이 통째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 마(魔)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결코 들릴 리 없는 천마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쏟아지는 바위들이 그의 피 끓는 울부짖음을 무심히 묻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