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537화 (535/1,567)

537화. 내 이럴 줄 알았지. (2)

금세라도 바닥으로 쓰러질 것 같던 주교의 몸이 휘청하더니 뒤로 나자빠졌다.

털썩.

그의 가슴에선 피가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왔다. 기운이 역류하는 듯 그의 칠공에서도 피가 울컥울컥 샜다.

“끄으....”

서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화산의 제자들은 모든 힘을 소진하고 바닥에 쓰러졌고, 주교 역시 더는 일어서지 못했다.

심지어 청명마저 무릎을 꿇은 채, 암매검을 지지대 삼아 겨우 상체를 세우고 있을 뿐이었다.

“후욱....... 후욱.......”

청명의 입에서 거친 숨이 쏟아졌다.

그그극.

암매검을 꾹 누른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쓰러진 주교를 향해 절뚝이며 걸어갔다.

저벅 저벅.

“쿨럭!”

주교가 경련하듯 기침을 할 때마다 벌어진 가슴과 입에서 피가 세차게 쏟아졌다.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제는 대라신선이 온다 해도 저자를 살릴 순 없다는 것을.

“끝장을....”

하나 힘이 다한 건 청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검을 지팡이 삼아 주교에게 다가가던 청명이 힘이 풀린 듯 휘청이다 그 자리에 다시 고꾸라졌다. 부러진 다리로 더 걸을 만큼의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

하지만 이를 악문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다시 몸을 밀어 올렸다. 두 눈에선 지독한 독기가 넘실거렸다.

청명은 다리를 끌며 걷듯이, 기듯이 다가갔다.

주교의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해서.

하나 그 순간.

콰드드득.

주교의 손이 바닥을 꽉 움켜잡았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 몸을 벌떡 일으켰다.

청명이 두 눈을 부릅떴다.

여력?

아니, 아니다.

몸을 일으킨 주교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실성한 이처럼 그저 흐릿한 눈으로 홀린 것처럼 몸을 일으킨 것뿐이었다.

회광반조(回光返照)였다. 초가 꺼지기 직전 가장 밝게 타오르듯, 생명의 기운이 다한 이에게 마지막 생기가 돌아온 것이다.

청명이 검을 움켜잡고 다시 자세를 잡으려는 순간 주교가 필사적으로 몸을 돌려 동굴 쪽으로 휘청휘청 걸어갔다.

“천...마.......”

“이 새끼가....”

청명이 따라붙으려 하자, 마침 빙궁의 저지를 뚫으며 도달한 마교도들이 그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주교를 지켰다.

“주교시여!”

“으아아아아아! 주교시여! 아아아아아악!”

그들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섬뜩하게 귀를 파고들었다.

목숨을 주저없이 버려서라도 주교를 지켜 내겠단 광기가 청명에게 절절히 느껴졌다.

청명이 이를 갈며 치를 떨었다.

이래서야 마치 그가 악당이라도 된 것 같지 않은가?

주교는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뒤를........ 뒤를 부탁한다.”

“가십시오!”

“우리가 막아 내겠습니다! 가십시오!”

이내 그는 비척이며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천마......’

청명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목적은 주교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천마의 부활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주교를 죽음까지 몰아넣었다고는 하나, 천마가 부활해 버린다면 그 모든 과정은 허사일 뿐이다.

‘안 돼!’

하지만 그에게는 더는 이들을 뚫고 나아갈 힘이 없었다. 정신을 붙들고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헤.”

청명은 어느 순간 히죽 웃었다.

“나도 병신이 다 됐네. 안 된다는 소리를 하다니.”

세상에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그리고 이건 당연히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청명이 막 검을 들어 올리려는 찰나였다.

“으아아아아아아!”

처절한 고함과 함께 누군가가 그의 앞으로 뛰어들어 마교도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엇?’

청명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예전에 광산까지 화산의 제자들을 안내했던 경비대장 송원이었다. 곳곳이 베어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악귀처럼 마교도들에게 달려든 것이었다.

“길을 뚫어라아아아아아!”

처절한 함성이 계곡에 울려 퍼졌다.

“이 병신 같은 새끼들아! 언제까지 외인들에게 운명을 맡기고 뒷짐이나 지고 있을 생각이냐! 지켜야 할 게 있으면 제 손으로 지켜!”

송원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달려온 설소백이 검을 들고 마교도들에게 달려들었다.

“저 미친!”

그 광경에 청명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쏟아져 나왔다.

“궁주!”

“궁주님!”

콰아아아아앙!

마교도가 날린 흑살장이 설소백의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다행히 늦지 않게 달려온 한이명이 그런 설소백의 앞을 막아섰다.

“뭐 하고 있느냐!”

그의 고함은 빙궁도들을 향한 것이었다.

“목숨을 걸고 길을 뚫어라! 청명 도장이 갈 길을 북해의 피로 열어 내라! 너희에게 아직 의기라는 게 남아 있다면 이곳에서 증명해라!”

빙궁 무인들의 눈에 독기가 들어찼다.

이것은 본래 그들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들과는 하등 관련도 없는 중원인들이 대신해 피를 뿌리고, 목숨까지 걸며 싸웠다.

이 처절한 싸움을 보고도 부끄럽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고, 이 절박한 싸움을 보고도 피가 끓지 않으면 무인이 아니다.

단 한 번의 질책이라도 있었다면, 꾸짖음이라도 있었다면 이토록 부끄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그 어떤 비난의 말도 없이 그저 적과 맞서 싸웠다.

그 사실이 빙궁도들을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길을 열어라!”

“청명 도장이 갈 길을 열어 내라!”

“목숨을 아끼지 마라!”

빙궁의 무사들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세로 마교도들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상대하기에 급급하고, 겁먹어 주저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살기를 쏟으며 악다구니를 쓰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상처 입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로지 상대를 응시하며 공격했다.

제 몸이 잘려 나가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최대한 빨리 길을 뚫기 위해서.

덥석.

휘청거리는 청명의 양쪽 어깨를 설소백과 한이명이 움켜잡았다.

“가십시다!”

“도장!”

청명은 곁에서 부축해 주는 두 사람을 한 번씩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말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끄윽!”

“죽어라! 더러운 마교의 종자!”

“이곳은 북해다! 너희 같은 것들이 설칠 곳이 아니란 말이다!”

마교도의 손에 배를 뚫려도 물러서지 않고 검을 휘둘러 상대의 목을 베어 낸다.

변화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법.

다른 이에게 책임을 미루고 스스로의 안위를 돌보는 것으로는 무엇도 이뤄 낼 수 없다. 오히려 더 큰 희생이 생겨날 뿐.

그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한 이들은 이제 제 목숨을 돌보지 않고 청명을 위한 길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격렬하게 저항하던 마교도들이 차츰 좌우로 밀려났다. 청명이 뛰는 것보다 더 빠르게 동굴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송원!”

“예!”

가장 앞장서서 길을 뚫던 이들 중 몇몇이 청명을 호위하듯 그 주변에 합류했다.

“가자!”

“예!”

청명은 굳이 뒤를 확인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북해빙궁에 맡기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러 떠날 뿐이었다.

빙궁의 정예들과 청명이 동굴 안으로 진입했다.

곳곳이 무너지긴 했지만 안으로 향하는 길은 여전히 존재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주교는?”

“그 몸으로는 얼마 가지 못했을 겁니다!”

분명 경공조차 쓰지 못하고 비틀거렸으니, 조금 거리가 벌어졌다 해도 이 속도라면 금세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하나 그들은 곧 따라잡는 과정이 그리 녹록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지?”

“앞에 뭔가가 있다!”

마교도들은 이제 동굴 안에 없어야 하는데, 동굴 안쪽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다수.

감각이 예민한 자들은 앞쪽에서 풍겨 오는 한기에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한이명은 두 눈을 부릅뜨고 다가오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이....”

송원이 입술을 짓씹었다.

실혼인, 두 눈에 초점이 풀린 이들이 이쪽을 향해 비틀대며 걸어오고 있었다.

“초, 총관님!”

“망설이지 말고 공격해!”

한이명이 한껏 일그러진 얼굴로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사람이 아니다! 저건......... 저건 이미 산 사람이 아니야! 이 빌어처먹을!”

실혼인들의 복장은 분명 북해 고유의 것이었다.

‘사람이 실종되었다더니.......’

이 개 같은 놈들이 북해인들을 잡아다 무슨 짓을 한 것이 분명하다. 생의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이들이 제 발로 걷고 있으니 말이다.

어찌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빙강시(儒)인가.”

청명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모두가 이 끔찍한 일에 울분을 토했지만 청명은 다가오는 빙강시들의 기운이 모두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예리하게 알아챘다.

‘아니야.’

저건 수족으로 부리기 위한 강시가 아니다. 무언가를 위해서 사람을 잡아다가 실험을 반복한 것임이 분명했다.

하나 강시는 강시. 북해의 한기를 품고 만들어진 빙강시라면 저주받은 마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십시오!”

송원이 일행을 향해 단호하게 소리쳤다.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맡겠습니다! 가십시오!”

한이명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길을 열어라!”

그 말과 동시에 빙궁도들이 앞으로 뛰쳐 나갔다.

카가가가강!

검기와 장력이 빙강시들의 몸을 가격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뒤이어 강철과도 같은 강시들의 손이 빙궁도들의 살을 찢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흐아아아아아앗!”

빙궁도들은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강시들을 좌우로 밀어 냈다. 이지가 없는 강시들은 밀려나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눈앞의 빙궁도들을 후려갈기고 물어뜯기에 바빴다.

청명이 두 눈으로 한기를 뿜어내며 열린 길을 따라 달렸다.

‘개 같은!’

한계치까지 끓어오른 증오와 분노가 가슴을 태워 버릴 것만 같았다.

마교와의 전투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앞에 또 있습니다!”

빙궁도의 외침에 한이명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가십시오! 청명 도장!”

심지어 이번에는 수가 제법 되었다. 한이명은 독한 의지가 서린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뚫어 낼 것입니다! 가십시오!”

“소백......”

“가세요! 도장!”

청명의 망설임에, 오히려 설소백은 더욱 단호한 얼굴로 외쳤다. 청명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무인의 얼굴이 되었군.’

전쟁은 아이를 어른으로 만든다.

어찌 보면 슬픈 일이겠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이 아이를 한 사람의 무인으로 인정해야 했다.

“열어!”

“예!”

남은 빙궁의 무인들이 모조리 빙강시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거칠게 강시들을 밀치고 베며 길을 열었다.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만한 틈이었지만, 청명은 그 사이를 비집고 비틀거리며 앞으로 계속 전진했다.

또옥. 또옥.

손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바닥으로 점점이 떨어졌다. 눈앞이 자꾸만 흐려지고, 검을 잡은 손에 더는 감각이 느껴지질 않았다.

이제는 고통조차 사라져 버린 육체를 어떻게든 강제로 움직여 걷고 또 걸을 뿐이다.

크르르르르르........

“........”

어디선가 들려오는 짐승의 소리 같은 것에 청명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눈앞에 또다시 다가오는 빙강시들이 보였다.

“흐........”

아주 더럽게도 꼼꼼하시군.

청명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포기라는 걸 해 본 적 없는 사람이거든.”

청명은 말을 듣지 않는 팔을 움직여 천근보다 더 무거운 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그런데 그때 귓가에,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게나.”

청명은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죽을 자리를 찾지 못한 이는 추해지기 마련이지. 이제야 내가 죽을 곳을 찾았군.”

청명은 멍한 눈으로 여사혼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얼굴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미안했네.”

“당신......”

“가게나. 우리가 나눌 말이 뭐가 있겠는가?”

어쩌면 청명을 두고 여사혼 홀로 뚫고 가는 것이 더 현명한 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사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천마의 부활을 막는 것. 그리고...........

‘잃어버린 북해의 정기를 되찾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이가 아닌 청명 같은 이가 남아 주어야 여긴 것이다.

여사혼이 날린 장력이 빙강시들을 거칠게 밀어 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눈앞의 상대가 적기 때문인지, 꽤 많은 수의 빙강시들이 길을 뚫고 간 청명의 뒤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나.

“가게! 뒤돌아보지 말고!”

여사혼은 악착같이 그런 빙강시들을 막아섰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절박한 고함 소리를 들으며, 청명은 앞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이상하지.

처음 들어왔을 때는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던 동굴이 지금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기만 했다.

질질질.

움직이지 않는 발을 끌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은 추라도 달린 것처럼 계속해서 무거워졌다.

자꾸만 시야가 흐려진다. 귀에 들리는 거라곤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자신의 숨소리와 심장 소리뿐이었다.

털썩.

결국 무릎을 꿇으며 고꾸라진 청명은 뼈가 드러난 손으로 바닥을 긁듯이 움켜잡았다.

‘웃기지 마.’

예전에는 이보다 몇 배는 더 힘들었다. 이보다 더 고통스러웠어.

청명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축 늘어질 것만 같은 몸을 일으켰다.

‘나는 화산의 매화검존이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끌며 좁고 어두운 길을 따라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더 그렇게 걸었을까?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던 길을 하염없이 걸은 그의 눈에 마침내 한 줄기 창백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공동에 도달한 것이었다.

거대한 아수라의 형상과 그 아래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무릎을 꿇은 주교의 뒷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이 새끼.......”

그그그극.

청명이 검을 끌며 주교를 향해 비틀비틀 나아갔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힘겨운 주교의 진언이 그의 귀에 주술처럼 연신 쏟아져 들어왔다.

“천마시여....... 천마시여. 이 몸의 피를 받으시고, 세상에 강림하소서. 이윽고 세상을 불태울 업화가 되리니....”

막을 틈도 없었다. 주교의 손목에서 흐른 피가 바닥의 문양에 후두둑 떨어지더니 빠르게 스며들었다.

이윽고 문양이 거대한 핏빛의 광채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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