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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535화 (533/1,567)

535화. 설령 내가 이곳에서 죽는다고 해도! (5)

욱신!

가슴께에서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주교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늘 고통과 함께 지내며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졌다. 설령 누군가가 그의 살을 저미고 뼈를 으스러뜨려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가슴에서 느껴지는 격통은 그런 단순한 육체적인 통증과 달랐다. 이건 훨씬 더 깊숙한 곳에서 치미는, 오래도록 숨어 있던 고통이었다.

핏발이 선 주교의 눈은 앞에 선 청명에게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매화검존이라고?’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저 나약해 빠진 검수를 감히 그 매화검존과 겹쳐 보다니.

매화검존이 누구던가.

그 강대했던 교의 제일대적으로 공인받았던 이다.

그의 검 앞에 죽어간 교도의 시신이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룬다. 온몸을 가루 내어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악귀 같은 자가 바로 그 매화검존이다.

증오스럽고 또 증오스럽기에 오히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였다.

그의 전임 주교뿐만이 아니었다. 대전 당시 절반이 넘는 교의 주교들이 그 매화검존의 검에 죽어 나갔다. 오로지 그 한 명의 손에 죽어 갔다.

심지어 전임 주교는 지금의 그와 비교도 할 수 없는 강자였다. 그런 자의 목을 날리고 결국은 지금의 주교가 어린 나이에 허울뿐인 자리에 오르게 만든 것이 매화검존이었다.

그런데.......

저 나약해 빠진 이를 그 두렵기까지 했던 매화검존과 겹쳐 본다고?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이게 어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으드득.

주교가 이를 으드득 갈아붙였다.

“곱게 죽지 못할 거라고?”

그리고 살기를 뿜는 청명의 모습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하룻강아지가 짖어 대는 것과 다를 것 없는 말이다. 평소라면 저런 말을 듣는 순간 그저 웃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 웃음이 나오질 않았다.

알 수 없는 섬뜩함이 그를 웃지 못하게 만들었다.

‘내가 저 검수를 경계하고 있단 말인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화산의 검수라 해도, 매화검존과 저자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그런데 어째서..........’

그 순간이었다.

저벅.

청명이 천천히 주교를 향해 걸음을 뗐다.

한 손에 든 검을 바닥으로 늘어뜨린 채, 살기 짙은 눈으로 걸어오는 그를 본 순간 주교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과거 그를 향해 다가오던 매화검존의 자세가 딱 저랬다. 다른 화산의 제자에게는 느끼지 못했던 기시감이 저자에게서는 자꾸만 느껴졌다.

또다시 욱신거리는 격통이 밀려들었다.

주교는 가슴의 통증을 애써 외면하며 이를 악물었다.

“감히 내 앞에서 잘도 지껄이는구나!”

머릿속을 뒤흔드는 혼란을 떨친 그는 광포한 마기를 뿜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뒤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주교시여!”

“더는 위험합니다! 옥체를 보존하십시오!”

“대계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절박한 교도들의 비명에 주교의 얼굴이 참혹할 만큼 일그러졌다.

평소라면, 아니 조금 전만 되었어도 저 말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남은 이들에게 뒤처리를 맡기고 그는 다시 공동으로 향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지만, 결국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위험하다.

저자만큼은 반드시 그의 손으로 처리를 해야 한다.

쿠우우웅!

주교가 강렬하게 진각을 내리밟았다. 엉망으로 부서진 바닥의 파편들이 허공으로 부웅 떠올랐다.

“흐아아아압!”

그는 끓는 듯한 기합 소리와 함께 한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솟아오른 암석의 파편들이 흡사 암기처럼 청명을 향해 쏘아져 가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돌조각들을 보며 청명은 입꼬리를 뒤틀었다.

“수작질을!”

세월이 이렇게나 흘렀건만, 저 주교라는 것들은 달라진 게 없었다. 이딴 공격이 그에게 통할 거라 믿는 것부터 글렀다.

청명은 되레 날아드는 암석의 파편들을 향해 짓쳐 달려들었다.

파아아앗!

그의 몸이 긴 잔상을 남기며 쭈욱 늘어났다. 그리고 파편들 사이의 미약한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 어마어마한 속도로 돌진했다.

“이노오오오옴!”

노호성을 내지른 주교가 양손에서 폭발적인 마기를 발출했다. 마치 그의 양손에서 지옥으로 가는 무저갱이 열린 것 같은 광경이었다.

“죽어라아아아앗!”

양손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가 휘몰아 뭉쳐지더니 이내 거대한 짐승의 형상이 되었다.

흑살마장(黑殺魔掌) 마수탐혈(魔獸貪血).

검은 짐승의 형상이 포효하듯 아가리를 벌리고 청명을 향해 덤벼들었다.

그야말로 가공할 내력이었다.

청명의 힘만으로 이 어마어마한 내력을 받아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나.

스스슷.

그 순간 암석의 파편들을 피하며 돌진한 청명의 검이 허공에서 느릿하게 호를 그렸다.

빠르지 않다. 그리고 완벽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연스러울 뿐.

형(形)과 식(式)을 넘고 학(學)과 예(藝)를 넘어, 검은 그저 자연(自然)에 도달한다.

스스슷.

힘 하나 깃들지 않은 듯한 검이 짐승의 머리에 꽂혔다.

그리고,

파아아아아앗!

그저 쇠로 만들어졌을 뿐인 나약한 검 조각이 세상을 집어 삼킬 기세였던 마수의 머리를 가볍게 두 쪽으로 갈랐다.

귀곡성이 귀를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이내 길게 갈린 장력은 청명의 옆으로 빗가며 등 뒤 계곡에 틀어박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콰르르르르르르릉!

거대한 돌산 계곡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며 커다란 낙석들이 지면에 쾅쾅 처박혔다.

둘의 충돌은 이제 평범한 이의 상식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주교의 터무니없이 거센 장력을 대번에 잘라 낸 청명은 두 눈으로 살기를 흘려 대며 앞을 향해 돌진했다.

더없이 무표정한 얼굴과 그 뒤에 어린 한기.

주교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통증은 점점 거세어지며 이제 가슴을 시작으로 온몸을 찢어 버릴 것만 같았다. 무리하게 끌어 올린 마기가 빙정으로 겨우 얼려 둔 상처를 억지로 벌리며 녹이고 있다.

하지만 주교는 상처를 돌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시리도록 찔러 오는 청명의 눈빛이 그를 움켜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분명 애송이에 불과한 놈이다. 평화를 가장한 세상에서 이들이 겪었을 전투라고 해 봐야 어린아이 장난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놈은 전장에서 살아가는 악귀 같은 눈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저 눈이 너무도 익숙하다.

저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자꾸만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흐아아아아아압!”

비명과도 같은 고함을 내지른 주교는 마기를 줄기줄기 내뿜으며 청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짓눌러 죽여 버리겠다!”

태산도 부술 만큼의 거대한 마기가 그의 손안에 뭉쳐 들었다. 마기를 머금은 손이 청명의 머리를 향해 돌진했다.

파아아아앗!

그때 청명의 검이 섬전처럼 주교의 팔꿈치 안쪽 관절에 날아들었다.

카강!

주교의 입꼬리가 순간 말려 올라갔다.

‘멍청한 놈 같으니.’

아무리 빠르게 검을 내지른다고 해도, 저 나약한 내력으로 이 육체를 상하게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애송이가 아니고서야 하지 않을 실수였다.

아무래도 상대를 너무 과대평가했다는 생각을 하며 주교는 휘두르는 손에 더욱 힘을 밀어 넣었다. 이대로 청명의 머리를 완전히 부숴 놓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순간.

파아아아앗! 파아아아앗!

청명의 검이 처음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팔꿈치의 같은 부분을 다시 찔렀다.

카캉!

한 번! 또 한 번! 또 한 번!

숨 한 번 내쉴 여유도 나지 않을 찰나의 순간에 주교의 팔꿈치에 무려 십여 번의 검격이 틀어박혔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같은 곳을 동시에 십여 번을 찌른 끝에.

서걱!

상처가 새겨졌다.

제아무리 마기로 보호했다고는 하나 결국에는 육체. 십여 번을 재차 찔러 대는 걸 버텨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주교의 팔꿈치 안쪽 근육이 잘려 나가며 팔이 움직이자 청명에게로 향하던 손이 자연히 옆으로 획 뒤틀렸다.

장력이 청명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 땅에 내리꽂혔다.

콰아아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부서진 돌덩이들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청명은 그 와중에도 안으로, 또 안으로 파고들었다.

본디 검을 쓰는 이는 상대와의 거리를 벌려야 하고, 권을 쓰는 이는 상대와의 거리를 좁혀야 한다.

하지만 청명은 그런 상식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리고 오히려 주교의 품 안으로 뛰어들며 몸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카강! 카가가강!

검을 휘두르기 위한 최소한의 거리조차 확보되지 않은 좁은 공간.

그러나 청명은 검을 몸에 바짝 붙인 채, 팔이 아니라 몸을 회전시켜 검을 휘둘러 냈다. 그의 검이 주교의 육신 곳곳을 가르고 지나갔다.

주교의 육신 곳곳에 붉은 선이 죽죽 생겨났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주교가 고함을 내지르며 주먹을 내리쳤다.

하나 그 일 격이 채 닿기도 전에 청명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청명은 검병(검 손잡이)의 끝으로 말아드는 주교의 손목을 후려갈겼다.

콰앙!

그 덕에 마기를 머금은 손은 살짝 옆으로 밀려나며 청명의 몸을 스치고 허공을 갈랐다.

서걱! 서걱! 서걱!

그 짧은 시간 사이에도 청명의 검격은 연신 주교의 몸뚱이를 베고 또 베었다.

굳이 상대의 공격을 정면에서 막아 낼 필요는 없다. 아무리 강대한 공격이라 해도 몸에 닿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저 방향을 조금 바꿔 놓는 것으로 충분했다. 내리치고 후려치는 상대의 힘. 그 힘이 오히려 청명을 도와줄 테니까.

극의에 달한 이화접목(移花接木).

주교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이...!”

그 순간 청명의 검이 그의 가슴께를 찌르고 들었다.

카캉!

주교가 움찔하는 동시에 청명의 눈이 빛을 발했다.

파아아아앗!

암향매화검이 연이어 그의 가슴을 가격하고 또 찔렀다.

굳건하게 청명의 검을 막아 주었던 가슴팍의 얼음은 이제 공격을 받을 때마다 뒤흔들리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 순간 주교가 비명과 함께 양손을 쫘악 벌렸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폭발처럼 뿜어져 나온 마기가 그의 몸 주변을 광포하게 휩쓸고 지나갔다.

기의 폭풍에 휩쓸린 청명은 입으로 피를 뿜으며 밀려났지만, 그 와중에도 검을 휘둘러 주교의 가슴을 공격하는 데에 집중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마침내 기의 폭풍에 휩쓸린 청명의 몸이 저 멀리 뒤로 튕겨져 나갔다.

하나.

빙글.

이내 몸을 뒤집은 청명은 그대로 땅에 툭 내려섰다.

입술 새로 붉은 피가 주륵 흘러내렸지만 그의 눈빛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차갑기 짝이 없었다.

쩌적!

그때 귀를 파고드는 불길한 소리에, 주교는 천천히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을 단단히 뒤덮고 있던 얼음에 커다란 금이 가 있었다.

“..........”

숨 몇 번 내쉴 만한 짧은 순간에 오고 간 공방에 이렇게나 큰 타격을 입은 것이다. 주교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대체 저놈의 정체가..........’

물론 여전히 나약하다.

성취는 보잘 것 없고, 내력 역시 주교에 비한다면 한 줌에 불과하다.

한데 어찌 그런 이가 이렇게 짐승처럼 싸울 수 있다는 말인가?

그의 목숨조차 위협할 정도로.

“........ 인정하지.”

그의 입에서 인정이란 말이 나온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몰랐다.

십 년? 오십 년? 아니, 어쩌면 백 년?

하지만 그런 그라 해도 이쯤 되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는 강하....”

“주둥아리 처닫아.”

청명이 불쾌한 기색으로 이를 드러냈다.

“너 따위에게 평가받을 몸이 아니니까.”

주교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 오만함조차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군. 너는 정말 대단하다.”

“하지만 그뿐이다. 이 짧은 공방만으로도 그렇게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네가 정녕 나를 끝까지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더냐?”

청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의 몸은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단 한 번만 스쳐도 몸이 으스러진다.

그런 공세 속에서 집중력을 끝까지 유지한다는 건 아무리 그라고 해도 쉽지 않았다. 물론 공격은 그가 더 많이 했지만, 힘이 더 빠진 것 역시 그였다.

“나약한 자여. 칭찬해 주마.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나약하다라....”

청명은 가만 되뇌다 피식 웃었다.

“그 말도 맞지. 나는 나약하다.”

과거의 그, 매화검존에 비한다면 지금의 청명은 확실히 나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런데 그게 뭐 어쨌는데?”

“......뭐라?”

“네 말대로 나는 나약하지. 하지만.......”

청명이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꼭 내가 강해야 이기는 게 아니거든. 나는 혼자가 아니니까.”

그그그극.

검으로 바닥을 긁어 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청명의 등 뒤를 향해 다가왔다.

“........”

주교는 이 전투에 접어들어 처음으로 머릿속이 허물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미 쓰러졌다 여긴 화산의 제자들이 청명의 뒤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입과 코로 피를 흘려 대면서도 그들의 눈빛은 여전했다.

얻어맞아 검게 물든 몸도, 금방 쓰러질 듯 꺾이는 다리도, 모두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형형한 눈빛이 올곧게 주교를 향해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백천.

유이설.

윤종.

조걸.

당소소.

그리고 혜연까지.

단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고 일어나 청명의 뒤를 받쳤다.

청명은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 모든 상황을 아는 것 같았다. 그는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잘 들어라, 과거의 망령아.”

“이게 화산이다.”

청명의 검이 허공에서 한차례 회전한 후 그의 손에 안착했다.

“그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봐라. 화산의 매화가 어떻게 피어나는지!”

청명의 검 끝이 다시 한번 작은 매화를 그려 내었다.

작은, 아주 작은.

그러나 결코 작지 않은 매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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