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4화. 설령 내가 이곳에서 죽는다고 해도! (4)
들어 올린 검 끝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몸을 지탱하는 다리도 연신 꺾일 듯 휘청거렸다.
그럼에도 백천은 버텨 냈다. 자신을 죽일 듯 형형한 눈빛으로 노려보는 주교의 앞에서.
“.......화산의 백천이라.......”
주교의 입가가 뒤틀렸다.
“너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느냐?”
주교의 살기 어린 눈이 백천을 꿰뚫는 듯 응시했다. 그 검은 화염이 타오르는 시선에, 백천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천마를 받들어 교에 모든 것을 바친 이들에게, 화산이라는 두 글자가 어떤 의미인지 아느냐?”
백천은 억지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짓씹듯 말했다.
“그건 모르겠고, 확실하게 아는 건 하나 있지.”
그리고 검을 부러져라 움켜잡았다.
“우리의 선조들께서 너희들 신의 목을 쳐 버렸다는 것.”
“아, 그리고 이제는 네 목이 떨어질 거라는 것도.”
주교의 얼굴에서 표정이라 할 만한 것이 싹 사라졌다.
분노가 극에 달하면 더는 화가 나지 않는다고 했던가?
맹렬히 타오르는 노기가 아닌, 내리깔려 검게 지글거리는 분노가 백천을 비롯한 화산의 제자들에게로 쏘아졌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주교는 입을 열었다.
“대답해 보라, 증오스러운 화산의 제자여.”
“화산은 힘을 잃었다. 너희의 정기는 바닥에 떨어졌고, 교조차 경계했던 그 강대했던 힘은 더 이상 찾아볼 수도 없다.”
백천은 이런 상황에도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정기와 힘이라.
우스운 일이었다.
중원은 화산을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화산의 제자들마저도 스스로 마교에 맞서 세상을 구해 냈다는 자부심을 잊고 있었다.
그런데 가장 큰 적이었던 마교의 주교가 오히려 화산의 힘과 정기를 논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우습지 않겠는가?
“화산의 제자를 자칭하는 너희는, 감히 화산을 잇는다고 칭할 수 없을 만큼 나약하고 미약하다.”
“그런데도 감히 나를 막겠다는 것이더냐? 그 나약하기 짝이 없는 힘으로?”
한없이 내려다보는 듯한 멸시 어린 시선에 백천은 조소했다.
“나약하지. 그래 네놈의 말대로 나는 더없이 나약하다.”
“그러니 물러설 수 없는 거다! 이대로 물러나고 달아난다면 나는 평생 나약한 채로 남을 테니까!”
검을 겨눈 백천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화산의 정기라고 했나?"
“그 눈으로 확인해라! 내가 이 검으로 화산의 정기가 끊어지지 않았음을 증명할 테니!”
주교는 말없이 백천을 가만 바라보았다.
‘그래, 저런 눈이었지.’
과거 마교와 중원이 전쟁을 벌였던 때.
누구보다 전방에서 온몸으로 교를 막아섰던 화산의 무인들은 하나같이 저런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두려워도 물러서지 않는, 부족함을 알아도 포기하지 않는.
“화산은 화산인가.”
나직이 읊조리던 주교가 마침내 다시 이를 드러냈다.
“하나!”
콰아아아아아아아!
잠깐 잠잠하던 기운이 그의 전신을 감싸며 광포하게 휘몰아쳤다.
“의미 없구나. 설사 그 정기가 끊어지지 않았다 해도 화산은 더 이상 예전의 화산이 아니다. 너희는 화산의 힘을 잇지 못했다.”
마기의 용권풍이 흡사 검은 흑룡이 승천하는 모양으로 솟구쳤다. 동시에 뿜어진 압력이 사방을 짓눌렀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똑똑히 알려 주겠다!”
검을 부여잡은 백천의 손이 압력에 뒤틀리며 뒤로 꺾이기 시작했다. 전신이 격통을 호소하고 영혼이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한 발을 앞으로 뻗고 자세를 낮췄다.
‘물러서지 않는다.’
나는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끅....”
거센 압력에 검은 부러질 듯 휘어지고, 검을 잡은 손의 혈관은 모조리 터져 피부가 검게 죽어 갔다.
이를 악물어 보아도 자꾸만 밀려나려는 몸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등에 온기가 닿았다.
백천이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사숙!”
“사형!”
윤종과 유이설이 그의 어깨를 받쳐 주고 있었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아주 당연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백천은 다시 시선을 돌려 눈앞의 절망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지옥에라도 떨어진 것 같군.’
새삼 확실하게 느껴졌다.
과거 그의 선대들이 얼마나 두려운 이들과 맞서 싸웠는지. 이들을 물리치고 마침내 천마의 목을 베어 냈다는 게 얼마나 위대한 업적인지.
파아아앗!
검을 세차게 휘둘러 밀려드는 압력을 밀어 낸 백천은 천천히 상단세를 취했다.
“나는....”
만일 혼자였다면 벌써 검을 던지고 달아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에는 그가 지켜야 할 이들이 있었다. 그의 등을 밀어 주는 이들이 있었다.
무인인 백천으로서가 아니다. 화산의 대제자인 백천으로서, 그는 이곳에서 단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었다.
"나는 화산을 잇는 이다!”
백천의 검 끝이 소담스러운 매화를 그려 내기 시작했다.
작은 매화.
불길한 악룡처럼 요동치는 검은 마기를 상대하기에는 너무도 작고 미약해 보이는 매화였다.
하나 매화는 홀로 외롭게 피어나지 않는다.
또 하나. 그리고 또 하나.
백천이 피워 낸 매화에 유이설이 그린 매화가 더해졌다. 조걸과 윤종이 그려 낸 매화도, 당소소가 필사적으로 만들어 낸 매화까지도 모두 한데 겹쳐졌다.
“흐아아아아아앗!”
거대한 매화의 숲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봄을 맞은 화산에 매화가 만발하듯.
세상 모든 것이 매화로 뒤덮여 버린 것만 같다.
그 찬연한 광경에 주교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었다. 찢어진 입술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저건...’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저 증오스럽고 끔찍한 광경을.
순간적으로 온 세상이 매화로 가득 찬 듯 꽃이 만발하고...... 그 후에는....
욱신.
주교는 저도 모르게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단 한 순간도 벗어날 수 없었던 기억이 그를 휘감은 탓이었다.
저토록 끝도 모르고 피어난 꽃들 속에서 섬전같이 솟아올라 그의 가슴을 베어 버린, 그 증오스러운 이를 눈앞에 둔 듯했기 때문이다.
‘매화검존....’
서늘하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그의 가슴을 베어 버리던 매화검존의 모습이 똑똑히 떠올랐다.
“감히.......”
이가 갈렸다.
머리를 새하얗게 태워 버릴 듯한 분노가 온몸을 타고 솟구쳐 올랐다.
그가 그때 그곳에서 매화검존을 막아 냈다면, 천마께서 다시 하늘로 승천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백 년의 미련. 그리고 백 년의 후회.
짓누르고 또 억눌러 놓았던 분노가 지금 대번에 그를 모조리 태울 기세로 타올랐다.
“매화검조오오오오오오온!”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들은 매화검존의 후예. 그 증오스러운 검을 이어받은 존재란 것을!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 흐아아아아아아압!”
휘몰아치던 마기가 한데 뭉쳐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화산의 제자들을 향해 급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수라천살마강(修羅天殺魔剛) 마라폭류(魔羅瀑流)!
마교의 주교들만이 익힐 수 있는 초상승절학이 백 년의 시간을 넘어 마침내 이곳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수백, 수천의 검은 망령들이 뒤얽히고 뭉쳐 귀곡성을 내지르며 달려드는 것만 같은 광경, 지옥이 아니고서야 볼 수 없는, 실로 끔찍한 모습이었다.
검은 망령의 급류는 세상을 뒤덮었던 매화의 숲을 덮쳤다.
콰르르릉!
고고한 매화는 이내 광폭한 검은 탁류를 버티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졌다.
“끄윽.....”
백천은 만신창이가 된 손으로 검을 꽉 틀어쥔 채 이를 악물었다.
어마어마한 압력에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쳐 버릴 것 같았다.
‘버텨!’
그는 혀를 꽉 깨물며 멀어지는 의식을 강제로 되돌렸다.
그의 뒤에는 사제들이 있다. 그리고 또 그 너머에는 절대 잃어서는 안 되는 놈이 있다.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난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아미타불!”
그의 등 뒤에서 황금빛의 웅장한 물결이 밀려왔다.
혜연의 무상대능력(無上大能力)이 매화들 사이로 스며들며 금빛의 기류를 만들어 낸다.
검은 탁류.
붉디붉은 매화.
그리고 황금빛의 서광이 한데 얽혀 휘몰아쳤다.
“와 봐! 이 빌어먹을 새끼야아아아아아아!”
백천의 커다란 고함이 금세 뒤이어 터져 나온 거대한 폭음에 묻혀 들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한데 얽혔던 기운들이 그대로 터져 나가며 거대한 충격이 사방을 휩쓸었다. 서 있던 것은 모조리 날아갔고, 멀쩡한 바닥도 통째로 뒤집혀 허공으로 솟구쳤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세상이 거꾸로 무너지는 듯한 광경 속에서 홀로 오롯이 두 발로 선 주교가 광소를 터뜨렸다. 이성을 거의 놓은 두 눈에선 혈광이 줄줄이 뿜어졌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광기에 자신을 맡긴 그는 닥치는 대로 장력을 날려 주변을 모조리 부수어 대기 시작했다. 산이 뒤흔들리고 땅이 비명을 질러 대었다.
“으하하하하하하핫!”
검은 마기가 인세의 끝을 알리는 듯 세상을 유린하며 뻗쳐 나갔다.
지익.
지익지익.
‘무슨 소리지?’
자꾸만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해할 수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소리의 정체를 확인할 의욕도, 힘도 없었다.
그저... 머릿속이 멍했다.
멀어진다.
흐릿하다.
깊은 심해를 한없이 부유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육체를 벗어 던진 듯 힘을 잃은 몸은 자꾸 어딘가로 떠밀려 갔다.
질질질질.
저 거슬리는 소리만 없으면 완전하게 평온해질 수 있을 것 같.........
그리고 그 순간.
“윽!”
손끝이 뜨끔하며 끔찍한 아픔이 느껴졌다.
갑작스레 눈을 콱 부릅뜬 청명은 허공을 응시했다. 흐릿하던 두 눈이 순식간에 초점을 되찾았다.
‘....이게 뭐.....?’
말도 안 되는, 당혹스러운 광경이 그를 반겼다.
사방에서 부서진 바위 파편들이 비산하고, 솟구쳐 오른 날선 얼음 조각들이 화살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청명은 여전히 고통이 느껴지는 자신의 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새하얀 무언가가 그의 손을 피가 나도록 깨물고 있다.
‘백아?’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청명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쪽으로 내렸다. 그의 몸이 끌려오며 남긴 긴 자국이 선명했다.
청명은 백아를 다시 바라보았다.
“키이!”
동물의 감정을 표정만 보고 이해하기는 힘들겠지만, 지금 이 짐승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 절박함만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산산이 부서지고 있는 계곡.
미쳐 날뛰고 있는 주교.
그리고 ....
저쪽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화산의 제자들.
그 순간 그의 눈에 새파란 살기가 휘몰아쳤다.
“이…..”
의식을 잃은 와중에도 결코 놓지 않았던 암향매화검을 부러져라 움켜잡았다.
“마의 하늘께서 강림하실 것이다!”
광기 어린 주교의 목소리가 우렁우렁 울렸다.
“불신자들은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천마께서 세상을 정화하시고 새로운 하늘을 여실 것이다! 하찮은 버러지들이여, 감히 조아릴 머리조차 남겨 두지 않겠.........”
움찔.
그때, 이성을 잃은 듯 광소를 터뜨리던 주교가 순간적으로 말을 멈추었다.
‘뭐?’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린 것처럼 멈추었다.
하지만 주교조차 자신이 왜 말을 멈추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욱신!
“끅.....”
그때 갑자기 밀려드는 통증에 주교는 가슴께를 쥐어뜯듯 움켜잡았다.
가슴을 뒤덮은 얼음에서 싸늘한 한기가 밀려오고 있었다.
상처를 칼로 도려내고 후벼 파는 것 같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마치 처음 매화검존이 그의 가슴을 갈랐던 그때처럼 말이다.
‘갑자기 왜.......’
이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그 어떤 신의조차 고칠 수 없었던 상처다. 그렇기에 빙정으로 얼리고, 가장 한기가 강한 곳에서만 머무르며, 상처의 악화를 막아 왔다.
과하게 무리한다면 상처가 도져 죽음에 이른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집법사자도 이를 알기에 자신의 목숨을 바쳐 구해 온 빙정을 천마가 아닌 그에게 먼저 쓰도록 간청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동안 이 상처에서 이토록 극심한 고통이 느껴진 적은 없었는데........
욱신!
“큭....”
가슴을 움켜잡은 주교는 고통을 억누르려 애썼다.
‘무리했는가?’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찾을 수가 없었다. 입술을 짓깨문 주교가 눈앞의 화산의 제자들을 노려보았다.
‘몸에 더 한계가 찾아오기 전에, 저놈들을 모조리...........’
하지만 그의 생각은 채 다 이어지지도 못했다.
섬뜩.
등 뒤에서 뭔가 서늘한 것이 느껴진 것이다.
북해의 한기와는 다른, 그의 가슴팍 상처를 할퀴고 옥죄는 차가움과도 다른.
서늘함보다는 섬뜩함이라 해야 할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주교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돌아갔다.
저 먼 곳에서, 바닥에 쓰러져 있던 한 사람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눈에 박혔다.
주교는 영문을 알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 정체가 고작 저놈이라면, 그가 느낀 섬뜩함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저 다 죽어 가는 이가 몸을 일으키는 게 대체 뭐가 어쨌다고?
하지만 주교의 눈은 이내 찢어질 듯 커다래졌다. 마기로 탁하고 붉어진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고개를 숙인 채 몸을 일으키는 이의 모습에 과거 매화검존의 환영이 겹쳐진 것이다.
그의 가슴을 베어 내었던 그 시절의 매화검존의 모습이 말이다.
이 믿을 수 없는 환각에 주교는 눈을 부릅뜬 채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느새 몸을 완전히 일으킨 청명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눈을 떴다.
너무도 차가워 심혼을 얼려 버릴 것 같은 눈빛이 주교를 꿰뚫었다.
“너.”
흡사 지옥에서 다시 돌아온 듯한 음산한 목소리가 청명의 입술 새로 새어 나왔다.
“곱게 죽을 생각은 하지 마라.”
그의 검 끝에서 피처럼 붉은 검기가 파도처럼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