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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533화 (531/1,567)

533화. 설령 내가 이곳에서 죽는다고 해도! (3)

쩌적!

“음?”

현종의 시선이 손에 들고 있던 찻잔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는 멀쩡했던 찻잔에 길게 금이 가 있었다. 소담스레 새겨진 매화를 갈라 버리듯 말이다.

애써 담담함을 유지하던 현종의 얼굴에 슬쩍 어둠이 드리워졌다.

실로 불길한 징조였다.

물론 찻잔이야 언제든 금이 갈 수 있지만, 시름에 차 있었던 그에겐 대수롭지 않게 여길 일이 아니었다.

“으음.”

현종은 찻잔을 가만히 내려놓고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틈으로 차디찬 바람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북해는 이보다 몇 배는 시리겠지.’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다.

“장문인.”

앞에서 함께 차를 들던 현상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아이들이 걱정되어 그러십니까?”

“음.”

현종은 대답 대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 닥쳤지만 그는 바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드높은 화산의 봉우리에 시선을 던졌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봉우리 끝에 자라난 고목을 응시했다.

현종은 안다.

새로 움튼 매화 봉오리 중 절반 이상은 화산의 차디찬 겨울을 이기지 못하고 시들고 만다는 것을.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겨울을 버텨 낸 매화는 더없이 아름답지.”

그는 두 눈을 반개하고 조용히 뇌까렸다.

“그러니 겨울은 개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다 고개를 돌려 현상과 현영을 바라보았다.

“하나 매화가 정말 시련을 바라겠느냐?”

“무슨 말씀이신지…….”

현상이 조심스레 되묻자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나무야 그저 꽃을 피우면 족하다. 그 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사람이고, 그 꽃이 모진 겨울을 버텨 한층 화사해지길 원하는 것도 그저 사람이다.”

“…….”

그의 시선은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

“어쩌면 그 아이들이 시련을 딛고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도 그저 우리의 욕심일지 모르겠구나.”

도란 서는 곳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 아니던가?

현자 배의 도가 그 아이들의 도와 같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화산의 부흥을 원하는 것은 그들에게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아이들에게는 어쩌면 다른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저 지금에 만족하고 화산에서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그 아이들에게는 더 행복한 길이 아니었을까?

현종은 어쩌면 자신들의 노욕이 아이들을 괴롭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편치 않구나.”

그의 얼굴에 내내 어려 있던 수심이 더욱 깊어졌다. 그때 현상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장문인. 그건 장문인의 오만입니다.”

현종이 가만 고개를 돌려 현상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들을 말리지 않은 게 아니잖습니까? 그 아이들은 스스로 북해행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화산은 우리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현상이 단호하게 딱 잘라 말했다.

“장문인께서 그리 생각하시는 것은 아직 우리가 화산을 이끌어 가고 아이들이 장문인의 의지에 따라 우리를 돕는다고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현종의 눈가가 미미하게 떨렸다.

“화산은 화산에 있는 모두의 것입니다, 장문인.”

“…….”

“그 아이들의 행복을 장문인의 마음대로 재단하셔서는 안 됩니다. 그 아이들 역시 화산의 제자이고 한 사람의 무인입니다. 더는 품 안의 자식이 아닙니다, 장문인.”

현상의 말에 현종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품 안의 자식이라는 생각은 이미 진즉에 버렸다.

다만…….

“우리의 작은 도량으로 그 아이들을 재단하려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 아이들은 이미 우리보다 나은 무인이 아닙니까?”

“그렇지. 그래, 그렇다. 나는 그저…….”

현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상이 옆에 앉은 현영을 바라보았다.

“너도 뭐라고 말 좀 해 보아라.”

“뭔 말을 합니까?”

하지만 현영은 야멸차게 콧방귀를 꼈다.

“노친네 걱정을 누가 말립니까? 다 이야기해 놓으면 이제는 날씨가 안 좋다고 걱정하기 시작할 건데.”

“…….”

“그냥 걱정하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마음 편히 먹는 것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는 법입니다.”

“……거 말을 해도 참.”

현종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련을 그 아이들이 선택했다…….’

그도 맞는 말이다.

청명이야 당연하고, 백천을 비롯한 다른 제자들 역시 더 강해지고 싶다는 향상심이 있는 아이들이다. 어떤 이유를 들며 말렸어도 결국엔 그 아이들이 북해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시련을 선택한 것은 본인들이지만, 그 시련이 얼마나 혹독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현종은 그저 북해로 떠난 제자들이 감당하기 힘들 만한 시련이 없길 바랄 뿐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 모두 그저 무사히만 돌아오거라.’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말을 속으로 건네 보았다. 현종의 시선 끝에 금이 간 찻잔이 우두커니 놓여 있었다.

* * *

“사혀어어어어어엉!”

당소소의 날카로운 비명이 북해의 차디찬 땅에 울려 퍼졌다.

모든 화산 제자들의 눈에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지는 청명의 모습이 아로새겨졌다.

“처…… 청명아!”

“청명 시주우우우!”

물론 청명이 상대의 공격에 밀려나는 걸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모두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들의 눈에 보이는 광경은 지금껏 보았던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축 늘어진 청명의 몸만 보더라도 상황은 너무도 명확했다.

으드드득.

조걸이 충혈된 눈을 부릅뜨며 이를 갈아붙였다.

“이 새끼! 죽여 버리겠어어어어어어어!”

광포한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곧장 주교를 향해 돌진하는 그의 눈에선 이제껏 없던 악의(惡意)와 살기(殺氣)가 뿜어져 나왔다.

“으아아아아아아악!”

기합이라기보다는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지르며 독기로 가득찬 검을 휘둘렀다.

붉은 매화.

더없는 어둠 속에서 피어난 핏빛의 매화가 정파의 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살기 짙게 흩뿌려졌다.

“이……!”

그런 조걸의 옆으로 이를 드러낸 윤종이 뛰어들었다.

평소라면 흥분한 조걸을 말리느라 여념이 없었을 윤종이다. 하지만 그의 검은 오히려 곁에 있는 조걸보다도 훨씬 더 파괴적이고 과격했다.

“죽여 버리겠어!”

자신의 전면을 가득 메워 오는 매화를 보며 주교는 기쁜 듯 희게 웃었다.

“멍청한 것들!”

파아아아아아아아!

주교의 양손에서 검은 마기가 먹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검디검은 마기는 순식간에 그 크기를 불려, 날아드는 매화들을 모조리 떨구었다. 두 사형제가 있는 힘을 다해 만들어 낸 매화조차 주교의 마기를 뚫어내지 못했다.

그건 차라리 절망의 벽이었다.

두 사람을 막아 내고도 만족하지 못한 마기는 일순 요동치더니 조걸과 윤종의 육신을 뒤덮어 가기 시작했다.

조걸과 윤종이 두 눈을 부릅뜨며 사위를 살폈다. 시야를 가득 메운 마기 탓에 세상이 온통 검게 물든 것만 같았다.

“물러서!”

그 순간 백천이 섬전처럼 몸을 날려 조걸과 윤종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파아아앗!

그의 검이 일순 수십 개로 분열했다. 이윽고 수십, 수백 송이의 매화가 피어났다. 겹쳐지고 또 겹쳐지며 그들의 앞에 꽃잎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벽이 세워졌다.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 매화분분(梅花紛紛).

카가가가가각!

백천이 만들어 낸 매화검기와 주교의 마기가 충돌하자 수백 개의 쇳덩어리가 서로 뒤얽혀 마찰하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매화 잎이 사방으로 튕겨 나가고 백천의 한철검이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뒤틀리며 꺾였다.

“끄윽…….”

전신을 으스러뜨릴 것 같은 어마어마한 내력 앞에 백천의 손끝이 툭툭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마지 머리 위에 태산을 인 것 같다. 하지만 그는 피로 물든 손끝에 더 힘을 실었다.

그 순간.

“아미타불!”

거친 노호성과 함께 혜연이 날린 불광이 매화의 벽으로 날아가 강하게 꽂혔다.

“오오오오오오!”

한 번! 또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세 번의 백보신권을 날려 백천을 도운 혜연이 반장을 하며 반대 손을 옆구리에 붙였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

옆구리에서부터 혜연의 손이 느릿하게 내밀어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주먹 끝에서 가공할 내력을 담은 권력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소림칠십이종절예(少林七十二種絶藝) 아라한신권(阿羅漢神拳)!

평소 무학을 펼칠 때는 자애롭고 온화한 표정을 짓던 혜연이지만, 지금 그의 얼굴에서는 자비를 찾아볼 수 없었다. 수라처럼 일그러진 얼굴에는 오로지 상대를 짓누르겠다는 의지만이 가득했다.

백천의 검기에 혜연의 권력마저 더해지자, 거세게 밀려들던 마기가 잠시 주춤했다.

“으아아앗!”

“빌어처먹을!”

윤종과 조걸 역시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앞으로 달려들며 검기를 내뿜었다.

“호?”

주교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이제 겨우 약관이나 넘었을 법한 어린놈들이 예상 이상의 실력을 보여 주고 있다.

보라.

비록 넷이 힘을 합친 것이긴 하지만, 그의 장력이 뻗어 나가질 못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어려도 중원이라는 건가.’

이래서 중원은 위험하다.

심지어 조금 전 그의 장력에 맞고 피를 뿌린 놈은, 순간적이나마 그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라 여겼던 남은 놈들조차 녹록치 않다.

하나.

“그래 봐야 피라미!”

그의 눈이 혈광을 내뿜었다. 그리고 장력에 더욱더 막대한 내력을 밀어 넣으며 전방에 있는 이들을 휩쓸고자 했다.

“모두 죽……!”

하지만 그때.

스슷!

맞부딪친 기운들이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더없이 위험한 공간 위를 검은 무복을 입은 검수가 유령처럼 뛰어넘었다. 그리고 곧장 주교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 차갑기 짝이 없는 검수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천하의 주교도 순간적으로 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파아아아앗!

몸을 날린 유이설이 뿜어낸 섬뜩한 검기가 주교를 향해 날아든다. 그와 동시에, 어느새 반대편에서 몸을 옮긴 당소소가 전력으로 비도를 들이붓듯 날렸다.

쇄애애애액!

좌우로 날아드는 매서운 검기와 비도.

전방에서 밀고 들어오는 가공할 권력과 매화검기.

천지사방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피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잡았…….’

하나 그 순간 주교가 양손을 단전 앞으로 모았다. 이내 웅혼하게 뿜어져 나가던 검은 마기들이 방향을 바꿔 그의 손안으로 순식간에 뭉쳐 들었다.

“하찮은 것들!”

손안에 모여든 마기가 맹렬하게 회전하더니 사방으로 뿜어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마기의 폭발이 천지를 뒤덮었다.

“으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화산의 제자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포탄처럼 튕겨 나갔다. 그리고 땅에 메어꽂힌 듯 나뒹굴었다.

콰르르르르르릉!

뿜어진 마기는 삽시간에 대지를 엎고 산맥을 뒤흔들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절벽이 쩌적쩌적 갈라지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실로 가공할 위력이었다.

지형을 바꿔 버릴 만한 힘을 어찌 사람의 힘이라 하겠는가?

“쿨럭!”

바닥에 처박히며 피를 뿜어낸 백천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주교를 바라보았다.

흡사 용권풍처럼, 주교의 전신을 휘감은 마기는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솟구쳤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지 못할 광경이었다. 마치 거대한 검은 흑룡이 하늘로 승천하는 듯했다.

주교는 용권풍 속에서 혈광을 쏟으며 입을 열었다.

“더러운 불신자 놈들이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구나.”

패왕의 호령처럼 계곡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는 심장을 짓누르는 듯 위압감 넘쳤다.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 단 한 놈도!”

그가 만든 검은 소용돌이는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부서진 바위들이 휩쓸리며 회전하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실로 인세의 것이라 믿기 힘든 일들에, 누구라도 전의를 잃을 수밖에 없을 듯했다.

“우선은 네놈부터!”

주교의 시선은 애써 몸을 일으키려 하는 화산 제자들과 혜연을 넘어, 청명에게로 향했다.

마기에 정신을 뺏기고 이성을 잃어 가는 와중에도 누가 가장 위험한지를 본능적으로 놓치지 않는 것이었다.

단숨에 마기를 날려 청명의 목숨을 끊으려던 주교는 순간 멈칫했다.

“음?”

어느새 몸을 일으킨 백천이 검을 지지대 삼아 비틀비틀 걸어오고 있었다. 힘겹게 발을 옮긴 그는 청명과 주교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핏기 없는 얼굴.

그런 그의 시선과 노기로 넘실대는 주교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닥뜨렸다.

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목구멍으로 역류하는 피도 멎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백천의 눈에는 단 한 점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등 뒤로 당연하다는 듯 화산의 제자들이 비척이며 걸어와 섰다.

주교의 살기 어린 눈이 그런 그들에게 꽂혔다.

“어이, 영감.”

창백한 낯으로 앞을 응시하던 백천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날 죽이기 전에는 저 망할 놈에게 손가락 하나 못 댄다.”

등 뒤에서 검들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그의 목소리에 호응하듯 울렸다.

백천은 천천히 검을 들었다.

“나를 넘기 전에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 내가 화산의 백천이다!”

필사적으로 짜낸 그의 목소리가 하늘로, 또 하늘로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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