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화. 설령 내가 이곳에서 죽는다고 해도! (1)
“밀어붙여라!”
한이명이 내질렀던 검을 회수하며 고함을 쳤다.
그의 얼굴은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강하다.’
몇 배가 넘는 수로 끊임없이 몰아붙이고 있음에도 확실한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되레 조금씩 밀려났다.
‘이렇게나 차이가 크단 말인가?’
이전의 전투에서 그들은 완벽하게 기세에 짓눌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작부터 중원인들이 활약해 준 덕분에, 그래도 어느 정도 기세를 유지한 채 전투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완전하게 몰아붙이지 못한다.
기세는 물론이고 실력에서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듯 말이다.
“아아아아악!”
또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왔다.
피가 흩뿌려지고 누군가가 비명을 내지를 때마다,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이들이 늘어 갔다.
한이명은 입술을 짓씹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다고는 하지만, 빙궁에 대한 그의 충정이 달라졌을 리는 없었다. 생때같은 이들이 저리 죽어 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심정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붙잡고 늘어져라! 저들이 동굴 안으로 가게 해서는 안 된다!”
그는 더욱더 빙궁도들을 채찍질했다.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버텨야 한다!’
희생은 가슴 아프지만, 저놈들이 치르는 의식을 막아 내지 못한다면 빙궁과 북해는 더욱 끔찍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기에.
‘우리의 실수는 하나.’
싸워야 할 때 싸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누구도 피를 흘리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이명은 이제 안다. 피를 흘려야 할 때 흘리지 못한다면 결국 더 많은 피를 쏟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이들을 북해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것.
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한 것은 지금 치러지는 의식을 저지하는 것!
“목숨을 걸고 사수해라! 이곳은 북해다! 저들이 원하는 대로 하게끔 두지 마라!”
목이 찢어지도록 고함을 내지르고 독려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의지와 빙궁도들의 필사적인 움직임에도,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기만 했다.
‘서둘러야 하네!’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동굴 쪽을 흘끗 보았다.
그런데 그때 설소백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조금만 더 힘을 내면 됩니다!”
“…….”
“버텨 내기만 하면 화산 분들이 반드시 저들을 막아 줄 겁니다! 일단 최선을 다해 버텨야 합니다!”
한이명은 살짝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궁주께선 저들을 완전히 믿고 있군.’
심지어는 자신이 이끌어야 할 북해빙궁보다 화산을 더 신뢰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한이명은 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수가 없었다. 당장 그부터도 동굴로 들어간 이들만을 바라보며 믿고 있지 않은가?
믿을 수밖에 없다.
항상 선두에 서서 검을 휘두르는 그 뒷모습을 본 이라면 누구라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누구라도 말이다.
“조금만 더 버티면 안으로 들어간 이들이 구원을 올 것이다! 물러서지 마라! 북해빙궁의 무사로서 자부심을 보여라!”
안으로 들어간 이들이 나올 거란 말에 힘을 얻었는지, 밀려나던 이들이 다시 이를 악물고 마교도들의 공세를 버텨 내었다.
‘된다.’
한이명의 두 눈에 작은 희망의 빛이 차올랐다.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북해빙궁에게도 다시 광명이 찾아올…….
바로 그때였다.
쿠르르르르르릉!
“뭐, 뭐야?”
“지진인가?”
계곡이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이 밟고 선 대지의 앞쪽에 있는 산맥. 화산의 제자들이 돌입한 동굴이 뚫린 그 산이 통째로 뒤흔들리고 있었다.
그 기경할 기사에 치열하던 전투가 일순 멈췄다.
‘이, 이게 대체……?’
한이명은 두 눈을 부릅뜨고 앞쪽을 바라본다. 땅이 얼마나 크게 뒤흔들리는지 무학을 익힌 그조차 제대로 서 있기 힘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를 정말로 놀라게 한 것은 흔들림이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오싹함이 온몸을 내달리고 있었다.
세상이 흔들리는 건지 그의 몸이 떨리고 있는 건지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 산이 진동함과 동시에 전신이 비명을 질러 대고,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섰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모두의 눈이 혼란에 휩싸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동굴의 입구 쪽이 터져 나갔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쏟아졌다.
“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악!”
부서진 바위의 파편들이 빙궁도들을 꿰뚫었다. 비명이라도 지른 이들은 차라리 사정이 좋은 편이었다. 파편에 직격당한 대부분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절명해 쓰러졌다.
잠시 후, 구름처럼 일어난 흙먼지 사이에서 십여 개의 인영이 튕겨 나왔다.
쾅!
“끄으윽…….”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이들을 확인한 한이명은 두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배, 백천 도장!”
쓰러진 백천이 바닥을 짚으며 신음했다.
“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그를 보고 있던 한이명의 시선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동굴 쪽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자욱하게 피어난 흙먼지가 불어오는 바람에 밀려났다. 무너지며 배는 넓어진 듯한 동굴 입구 쪽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나오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아…….”
한이명의 몸은 숫제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저건…….’
저벅.
저벅.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오는 그 모습을, 한이명은 물론이고 아직 숨이 붙어있는 모두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저건 대체……!’
피처럼 붉은 적색 장포.
거칠게 묶어 반쯤 흘러내린 새하얀 머리카락.
그런 사내의 몸 주변으로 너무도 검디검어 이질감마저 드는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지옥 굴에서 피어나는 연기처럼 사내의 몸을 뒤덮고 있었다.
‘악마인가?’
하얗게 질린 한이명의 손끝이 싸늘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저 사내를 보는 순간부터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숨을 내쉬는 순간 저 불길한 검은 기운이 전신을 갈가리 찢어 태워 버릴 것만 같았다.
저벅.
사내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가공할 압력이 그들을 짓눌렀다.
이성이 반쯤 날아가 버린 한이명의 입에서 차마 불러서는 안 될 이름이 흘러나왔다.
“……처, 천마?”
그리고.
그 말을 입에 담는 순간 마기를 뿜어내던 이의 시선이 정확하게 한이명에게 꽂혔다.
섬뜩.
그저 눈빛일 뿐인데, 마치 무형의 칼이 영혼을 베고 지나가는 듯했다.
저항의 의지를 잃어버린 한이명의 무릎이 꺾였다. 금방이라도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릴 것처럼.
천천히 걸어 나오던 이의 걸음이 멈춘다. 그의 시선은 느릿하게 전장을 훑었다. 빙궁도들은 어찌할 수 없는 공포에 덜덜 떨며 뒤로 물러났고, 마교도들은 즉시 그 자리에 부복했다.
“주교시여!”
“천마재림 만마앙복!”
주교?
한이명의 입술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자가 주교라고? 천마가 아니라?
손짓만으로 산을 무너뜨리고, 눈빛만으로 숲을 불태울 것 같은 악귀 같은 자가, 천마도 아니라 겨우 마교의 주교일 뿐이라는 건가?
그럼?
그럼 대체 천마는 어떤 존재인가?
그제야 한이명은, 아니 빙궁은 자신들이 대체 어떤 존재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지를 이해했다.
이들은 고작 북해를 유린하는 자들이 아니다.
이들은 세상을 파멸시킬 자들이다.
천천히 전장을 바라보던 주교의 눈이 일그러졌다.
“쓸모없는 것들…….”
“죽여 주십시오!”
마교도들이 처절하게 고개를 조아리고 바닥에 머리를 찧어 댔다.
“천마께서 부활하실 이 신성한 곳에 감히 더러운 불신자들이 발을 들이게 두다니. 그 죄는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다!”
힐책이 이어지자 마교도들은 더욱더 깊게 머리를 박아 대며 죄를 빌었다.
못마땅한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던 주교의 시선이 빙궁도들에게로 향했다.
“…….”
하지만 그 시선은 이내 거두어졌다. 마치 두 눈으로 확인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가 닿은 곳은 다름 아닌 한이명이 있는 곳이었다. 그는 긴장으로 굳어 버린 한이명을 보다 중얼거렸다.
“버러지 같은 놈들이…….”
눈앞이 캄캄해지고, 세상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주교의 존재감은 감히 한이명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무리야. 미친 짓이야.’
저런 자에게 검을 휘두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찮은 너희의 피 따위는 천마의 부활에 바칠 제물조차 되지 못한다. 모조리 죽여 썩어 문드러지게 하겠다.”
쿵!
주교가 한 발을 강하게 내디디며 마기를 뿜어냈다. 그의 몸 주위를 휘감고 돌던 검은 연기들이 흡사 검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 엄청난 기세에 한이명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아……. 아아…….”
검은 악령들이 귀곡성을 내지르며 주교의 몸 주위를 도는 것만 같았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이었다.
그야말로 마(魔)의 강림.
“하아아압!”
주교의 한 손에서 검은 기운들이 휘돌며 응집했고, 이내 뭉쳐 있던 빙궁도들을 향해 세차게 뿜어졌다.
고막을 찢어 버릴 것 같은 끔찍한 귀곡성과 함께, 검디검은 장력이 빙궁도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귀를 틀어막고 싶은 처절한 비명과 함께 장력에 삼켜진 빙궁도들의 몸이 그대로 터져 버렸다. 잘게 부서진 뼈와 갈기갈기 찢겨진 육편이 폭죽이라도 된 양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것들 중, 사람이라 부를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바닥을 붉게 물들인 피와, 육편만이 이곳에 사람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간신히 증명할 뿐이었다.
“아아…….”
결국 한이명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 보는 공포에 이성은 모두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저것은 사람의 힘이 아니다.
대체 내력이 얼마나 강하면, 장력에 맞은 이가 저리 분쇄될 수 있단 말인가?
저것이 마교의 주교.
천마의 수족.
“감히 이 신성한 대지에 그 더러운 발을 들인 것을, 지옥의 밑바닥에서 후회하거라.”
한이명이 이럴진대 빙궁도들이라고 크게 다를 리 없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변을 지리는 이들도 있었고, 이미 등을 돌린 채 엉금엉금 기어 조금이라도 주교에게서 멀어지려는 이들도 있었다.
“죽어라!”
검은 마기는 금방이라도 다시 쏘아질 듯 꿈틀거리며 주교를 휘돌고 움직였다. 한이명이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려던 바로 그때였다.
“아이고오, 등짝이야!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힘은 더럽게 세서는.”
그의 등 뒤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한이명은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딱히 의지를 주는 말도 아니고, 저 주교처럼 위압감 넘치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있는 힘을 다해 대항하려는 고강한 의지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심드렁한, 평범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저 주교가 주던 공포가 훅 가시는 느낌이었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터덜터덜 걸어오는 청명을 바라보며 한이명은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토했다.
그때였다.
스릉.
“배, 백천 도장?”
바닥에 검을 콱 내리꽂은 백천이 거기에 의지하며 몸을 일으켰다. 질끈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단 한 번도 상처 입지 않은 사람처럼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청명의 뒤로 검을 든 백천이 따라붙었다.
“아미타불.”
그리고 반장을 한 혜연을 비롯하여, 다른 화산의 제자들도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나섰다.
주교의 주름진 눈가가 살짝 꿈틀거렸다.
“어리석은 놈들…….”
그리고 이내 괴이한 웃음을 머금었다. 악마가 웃는다면 필시 저런 얼굴일 것이었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느냐, 어리석은 불신자들이여.”
“상대가 안 돼?”
청명은 농담이라도 들은 양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딴 말을 지껄인 놈이 몇 명이었는지 이제 셀 수도 없다. 그런데 그 새끼들이 다 어떻게 됐는지 알아?”
“…….”
“아냐. 아니다. 몰라도 돼.”
청명은 검을 들어 주교를 똑바로 겨눴다.
“지금부터 몸으로 자세히 알게 될 테니까.”
“하하하하핫!”
주교가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야지. 그래. 너희는 그래야 한다.”
광소를 머금은 그의 두 눈이 붉은 피를 뚝뚝 흘려 대기 시작했다.
“저주받을 화산 놈들, 너희는 반드시 그래야 한다! 그래야 찢어 죽이는 맛이 있을 테니까! 그 육신을 가르고, 피를 마셔 지난 백 년의 원한을 풀겠다!”
“그건 이쪽에서 할 말이야, 이 새끼야.”
허공에서 검을 한 번 돌려 잡은 청명이 악귀와도 같은 얼굴로 살기를 뿜어냈다.
“목을 잡아 뜯어 주마!”
괴성을 내지른 청명이 한 줄기 검은 빛살처럼 주교를 향해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