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9화. 고개 숙이지 마. (4)
“허억!”
한이명은 경악하여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본디 전쟁에는 암묵적인 절차라는 게 있다.
적을 발견하면 지휘를 하는 이들끼리 전략을 세우고 전술을 정비한다. 그리고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연설을 한다.
이 모든 준비를 마친 후에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 기본이다.
전쟁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취하게 된다.
아무리 칼 밥을 먹고 사는 무인들이라고는 하지만, 목숨을 건 싸움을 앞뒀을 땐 마음을 다잡을 최소한의 시간 정도는 필요하다.
하지만 청명은 그런 기본적인 과정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단 한 번의 신호도 없이, 그 어떤 지시도 없이 마교도들에게 돌진해 버렸다. 그 뒷모습을 보는 순간 한이명의 머리는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이, 이 무슨!’
때문에 순간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하나 그 순간.
“모두!”
한이명의 옆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설소백이 또렷한 목소리로 우렁차게 소리쳤다.
“공격하라! 상대가 진영을 갖출 틈을 주면 안 된다!”
그 말에 갈팡질팡하던 한이명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진영?’
멈추었던 머리가 빠르게 다시 회전하기 시작했다.
적들은 지금 동굴에서 나오고 있다. 말하자면 좁은 곳에 몰려 있는 것이다.
만일 상대가 동굴에서 모두 나와 넓게 자리를 잡는다면 수적인 우위는 모두 무용지물이 된다. 이미 한차례 겪지 않았는가?
‘이런 멍청한!’
한이명은 입술을 짓씹고 목이 터져라 소리를 내질렀다.
“공격하라! 지금 당장! 공격하라아아아아아!”
화산의 제자들은 이미 가공할 속도로 청명의 뒤를 쫓아 달려 나가고 있었다.
가장 선두로 뛰쳐나간 청명은 아직 미처 진영을 갖추지 못한 마교도들을 들이받으며 날려 버리고 있었다.
“공격! 빌어먹을, 공격하란 말이다! 저 기세가 계속 이어져야 한다!”
한이명의 목소리엔 숨길 수 없는 짜증과 울분이 묻어났다.
‘빌어먹을.’
한이명은 뒤를 획 돌아보았다. 빙궁도들은 갑작스럽게 떨어진 공격 명령에 갈피를 못 잡고 웅성거리고만 있었다.
중간에서 그런 그들을 단속하고 명을 이행해야 할 지휘관들조차 당황한 빙궁도들을 다스리는 걸 버거워하는 눈치였다.
왜 빙궁은 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단 말인가?
평소에는 얼이 빠진 것처럼 헛소리만 늘어놓는 청명이다. 하지만 막상 전장에 돌입하면 그의 뒤꽁무니를 쫓는 것조차 힘겨웠다.
‘대체 왜?’
그 순간.
챙!
설소백이 결연한 얼굴로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엇?!’
“전원 돌겨어어어억!”
그러더니 말릴 새도 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어린 궁주가 가장 먼저 달려 나가니 다른 빙궁도들도 생각할 겨를도 없이 황급히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오오오오오!”
“궁주님을 따라라!”
“마교도들을 무찔러라!”
한이명은 그 자리에 굳은 듯 서서 달려 나가는 설소백과 그 뒤를 따르는 빙궁도들을 멍하니 보았다.
이렇다 할 전략도 진영도 없다. 그러니 물론 난잡하기 짝이 없는 돌격이었다. 하지만 그 기세만큼은 분명 이전과 크게 달랐다.
‘저 아이가 어느새……?’
한이명은 아이의 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전대 궁주의 자식이다.
하지만 그가 직접 길러 낸, 그의 아들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 하고 부르며 올려다보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했다.
그렇기에 이 상황이 더욱 낯설었다. 그 어리고 조그맣던 아이가 언제 빙궁의 선두에서 모두를 이끌 만큼 훌쩍 성장했단 말인가?
그것도 이리 짧은 시간 만에.
입술을 질끈 깨문 한이명은 있는 힘을 다해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나도 질 수 없지!’
가장 선두에서 마교를 휘몰아치는 청명과, 그를 향해 똑바로 달려가는 설소백의 모습을 보며 검을 꽉 틀어쥐었다.
파아아아앗!
청명의 검이 섬전처럼 공간을 갈랐다.
촤아아악!
삽시간에 한쪽 팔을 잃은 마교도가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남은 한 손을 맹렬하게 휘둘렀다.
하지만.
서걱! 서걱! 서걱!
채 청명의 몸에 닿기도 전에 손목과 상완, 그리고 옆구리가 깊게 베였다. 시뻘건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끄윽…….”
내력의 흐름을 완전히 차단당한 마교도는 신음을 흘리며 몸뚱이로 청명을 들이받으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청명의 검이 훨씬 더 빨랐다.
푸욱! 푸욱!
십여 번의 찌르기.
얼마나 빠른지, 열 개의 검을 들고 동시에 움직인 듯한 공격이 마교도의 전신에 박혔다. 검은 무복 차림의 마교도의 상체에 순식간에 구멍이 숭숭 뚫렸고,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푸우우우욱!
마지막 검은 마교도의 심장을 꿰뚫었다.
“끅…….”
검이 심장을 가르고 지나가는 섬뜩한 감각을 느끼면서도 마교도는 멈추지 않았다.
덜렁대는 팔을 어떻게든 뻗어 청명의 목을 움켜잡으려 악을 썼다.
청명은 천천히 중얼거렸다.
“……확실히…….”
콰득.
심장에 박힌 검이 자비 없이 비틀렸다.
“쿨럭!”
마교도의 입에서 분수처럼 피가 뿜어져 나왔다.
“저 안에 뭐가 대단한 게 있는 모양이군. 이렇게까지 필사적인 걸 보니 말이야.”
“……처, 천마재…….”
파아아아앗!
심장에 틀어박힌 검을 그대로 휘둘러 마교도의 상체를 뜯어내듯 날려 버린 청명은 무심한 얼굴로 전진했다.
허공으로 솟구쳤던 피가 마치 비처럼 그의 몸 위로 후드득 쏟아졌다. 상황을 알지 못하는 이가 이 광경만을 본다면, 되레 청명을 마교도라 오해했을 것이었다.
그만큼 손속이 잔인하고 가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그 잔인한 광경은 상대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그의 뒤를 따르는 이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기에 충분했다.
“몰아쳐라!”
백천이 크게 외치며 마교도들을 압박해 들어갔다. 검 끝에서 뿜어지는 매화검기는 평소보다 몇 배 더 살기 짙게 요동치며 적들을 향해 쏟아졌다.
“아미타불!”
혜연의 주먹 역시 그에 못지않은 기세로 움직였다.
주먹 끝에서 나온 불광이 매화검기를 막느라 정신이 없는 마교도들에게 틀어박혔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마교도들이 피를 왈칵 내뿜으며 뒤쪽으로 날아갔다. 몸속을 곤죽으로 만들고도 남을 공격이었다.
혜연은 커다란 눈으로 앞을 매섭게 응시하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내가 아니면 그 누가 지옥에 가겠는가?’
불도를 따르는 몸으로서 살인을 저지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를 죽이지 않을 정도로 힘을 조절해 왔다.
하나 이런 상황에서 그 생각은 그저 오만이다.
“물러나시오!”
우우우웅!
혜연의 전신이 상서로운 황금빛 기운을 뿜어냈다.
칠십이종절예 중 무상대능력(無上大能力)을 운용한 그는 이를 악물고 마교도들을 향해 기운을 폭포처럼 쏟아냈다.
백색의 대지가 불광을 받아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보호받는 이가 아니다.’
그가 살인을 피한다면 누군가는 또 그만큼 살인을 해야 한다.
가장 앞에서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청명의 모습을 두 눈으로 보면서도 그런 소리나 지껄인다면, 이는 스스로 저질러야 할 죄악을 타인에게 미루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아-미-타-불!”
산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도록 불호를 지른 혜연은 양손을 힘차게 앞으로 쭉 뻗었다. 무상대능력의 장력들이 어둠을 뚫고 비추는 서광처럼 마교도들에게로 쏟아졌다.
쿠우우우우우웅!
어마어마한 굉음이 울렸다. 무상대능력에 얻어맞은 이들이 칠공으로 피를 내뿜으며 우수수 나가떨어졌다.
그 어마어마한 힘에 계곡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진동하고 뒤흔들렸다.
“우와, 씨! 진짜! 소림에 입문했어야 하는 건데!”
“입 닫고 집중해라, 조걸.”
“아니, 사형. 저거 보라니까요? 저게 말이나 되는……. 으엑! 아 그렇다고 사제한테 검 휘두르기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 제발 좀 닥쳐, 좀!”
윤종의 검을 피하며 낄낄 웃어젖힌 조걸은 두 눈으로 섬뜩한 안광을 뿜어내며 마교도들의 머리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파파파파팟!
이윽고 그의 검이 만들어 낸 수십 개의 검영이 마교도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아악!”
“이놈이!”
미처 피하지 못한 자, 그리고 어떻게든 피해 낸 자. 마지막으로.
“죽어라아아앗!”
조걸의 하체를 향해 검게 물든 손을 섬뜩하게 휘둘러 대는 이.
하지만 그가 휘두른 손은 조걸의 몸에 닿기도 전에 불쑥 튀어나온 검 끝에 가로막혔다.
카캉!
검을 뻗어 조걸을 지켜 낸 윤종은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연신 검을 내지르며 말했다.
“갑자기 날뛰지 말라고 했잖느냐!”
“이놈들은 이 정도는 해 줘야 합니다.”
“적은 마교다.”
“압니다!”
잠깐 침묵하던 윤종은 슬쩍 웃으며 씹어뱉듯 말했다.
“그래. 어디 죽어 보자꾸나!”
그리고 이를 악문 채 조걸의 뒤를 받치며 맹렬히 싸우기 시작했다.
슬쩍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청명은 묘한 표정으로 검을 휘두르며 생각했다.
‘어린놈들이라 그런가, 하루하루가 다르네.’
처음 이 북해에 들어왔을 때의 저들과, 지금 저들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달라졌다. 목숨을 건 전투를 연이어 경험하면서, 검은 더욱 날카로워졌고, 심지는 더욱 굳건해졌다.
이제는 후기지수로 부르는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유이설과 당소소 역시 한 쌍을 이루어 무서울 정도의 속도로 적들을 몰아치고 있었다. 유이설이 당소소를 이끌어 주고, 당소소가 그런 그녀의 뒤를 받치며 빈틈을 메꿔 주었다.
“이 간악한 놈들이!”
연이은 화산 제자들과 혜연의 활약에 마교도들의 눈이 그쪽으로 쏠렸다.
하나.
“안 되지.”
파아아아앗!
청명의 검이 바로 앞에 있던 마교도의 목을 쳐 날렸다.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지자 저쪽으로 향했던 시선이 일제히 청명에게로 되돌아왔다.
청명이 입꼬리를 기괴하게 뒤틀며 씩 웃었다.
“섭섭할 뻔했잖아?”
검을 역수로 쥔 그는 피에 굶주린 늑대 같은 기세로 날뛰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설소백을 추월한 빙궁의 무사들이 새하얀 파도처럼 밀려와 마교도들을 들이받았다.
“무찔러라!”
“수는 우리가 훨씬 많다! 물러서지 마라!”
“이놈들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어차피 북해는 끝이다! 절대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화산파의 활약에 고무된 빙궁의 무사들은 거의 이성을 잃은 듯 어마어마한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그들은 이미 한 번의 승리를 경험했다.
물론 끔찍할 정도의 피해를 입었고, 스스로 해낸 것은 거의 없었지만, 어쨌건 승리는 승리였다.
더욱이 지금 그들이 상대해야 할 마교도들은 일전보다 그 수가 많지 않았다.
그러니 또다시 해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선두에서 적을 분쇄하는 청명이 여전히 건재하지 않은가?
“빙궁의 힘을 보여 줘라!”
“오오오오오오!”
수는 그 자체로 힘이 된다.
동굴 앞쪽에 좁게 포진한 마교도들은 순식간에 빙궁의 무사들에게 둘러싸였다. 안 그래도 좁았던 진영이 더욱 좁아지니 제 실력을 발휘하기가 힘들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청명의 눈에서 섬뜩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어설퍼.’
싸우면 싸울수록 확실해졌다.
과거의 독기와 잔인함은 잃지 않았으나, 그만큼 강하진 않다. 무력도, 전술도 모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설프다.
‘천마.’
결국은 그의 존재가 문제였다.
천마가 없는 마교는 그저 광신도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 광기가 지켜보는 이를 소름끼치게 하지만, 냉정히 말해 강호에 그만한 사교 집단은 몇이나 더 있다.
한데 그 사교 집단에 천마가 더해지는 순간, 마교는 강호의 역사를 뒤흔들 만큼 최강의 살육 집단이 되어 버린다.
살아 있는 신을 모시는 이들에게는 두려울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으니까.
눈앞의 이들은 아직 사람이라 할 수 있으나, 천마가 부활하는 순간 더는 아니게 될 것이다.
‘그러니……!’
파아아아앗!
청명의 검이 앞을 막아선 마교도들을 통째로 베어 버렸다.
“비켜라.”
저 안에 있다.
이들의 행동으로 보아, 저 안에서 분명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죽엇!”
마침 마교도 하나가 눈을 까뒤집으며 달려들었다. 청명은 그 손에 검을 깊숙이 찔러 넣고 이를 드러냈다.
촤아아아악!
손에 박힌 암매검이 전진하며 팔을 길게 갈라 버렸다.
“끄아아아아악!”
그 어마어마한 고통 앞에서는 마교도도 어쩔 수 없었는지 차마 들을 수 없는 처참한 비명을 질러 댔다.
파아앗!
목을 쳐서 상대의 고통을 줄여 주는 자비를 베푼 청명은 두 눈을 섬뜩하게 빛내며 동굴 쪽으로 빠르게 전진했다.
“비켜.”
그의 얼굴을 타고 마교도들의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피로 뒤덮인 그의 얼굴에서 두 눈만이 새하얗게 살기로 빛나고 있었다.
“아니면 모두 이 자리에서 죽는다.”
휘릭.
검을 빠르게 돌려 잡은 청명이 앞으로 쇄도했다.
그대로 마교도 하나의 심장에 검을 단단히 박아 넣었다. 그리고 경련하는 몸뚱이를 방패처럼 들어 올린 채 동굴 쪽으로 밀고 들어갔다.
“흐아아아아아압!”
앞으로 거침없이 밀고 들어오는 청명을 보며, 두 눈에 핏발을 세운 마교도들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괴성을 내지르며 그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