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528화 (526/1,567)

528화. 고개 숙이지 마. (3)

새하얀 무복을 입은 병력들이 진군했다.

백색의 대지 위로 백색의 병력들이 줄을 지어 나아가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일종의 경건함마저 느끼게 했다.

하지만 막상 그 군세의 선두에서 달리고 있는 화산의 제자들은 뒤를 따르는 북해빙궁의 무사들을 보며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숙.”

“음.”

윤종의 낮은 부름에 백천이 고개를 낮게 끄덕였다.

‘사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마교를 치러 가는 길이다.

모두가 사기충천하여 열의를 끌어 올려도 부족할 판이다. 그런데 뒤에선 미묘한 혼란과 불안함이 전해져 왔다. 굳건하게 내딛는 다리와는 별개로 말이다.

“……문제로구나.”

설소백의 지시로 여사혼은 일 장로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공훈을 생각하여 장로직에서 축출하지는 못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장로들을 대표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평범한 장로의 신분으로 뒤쪽에서 그저 종군하고 있었다.

때문에 지금 빙궁은 나이 어린 설소백, 그리고 실질적으로 그를 대리하는 한이명이 이끌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이명이 빙궁의 총관으로서 전대 궁주를 모셨던 이라고는 하나, 아무래도 여사혼에 비한다면 그 명성과 실적에서 한 수 처질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적을 상대하러 가는 상황에서 이끄는 이의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것은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다.

힐끔힐끔 뒤쪽을 훔쳐보던 조걸이 윤종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형?”

“뭐가 말이냐?”

뜬금없는 조걸의 말에 윤종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엔 벌써부터 불신의 빛이 가득했다. 이상한 말 지껄이면 묻어 버리겠다는 듯.

“그렇잖습니까. 지금 사기가 떨어지는 이유가 여사혼 장로가 물러난 것 때문이죠?”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럼 애초에 일 장로의 자리에서 축출할 때, 반대를 했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

“장로 자리에서 밀어낼 때는 군말 없이 따르고, 막상 없으니 불안해한다니. 이게 뭔 상황인지 모르겠습니다.”

윤종의 입가에 쓴웃음이 어렸다.

조걸답지 않게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윤종이 마땅한 대답을 못 찾고 침묵하는 중에 백천이 대신 말했다.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책임이요?”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에서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누구든 자신의 의견을 내었겠지. 그리고 자신이 낸 의견으로 인해 따라온 결과는 당연히 자신이 책임을 졌을 것이다.”

윤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아니, 그런데 잠깐 생각해 보니까 당연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화산에서는 내가 하지 않은 일도 책임을 져야 하지 않습니까? 저 새끼가 친 사고도 우리가 수습하는 판에!”

어?

듣고 보니 그것도…….

“크흐흠!”

헛기침을 한 백천이 정색하며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더구나. 그저 위에서 명하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일이지. 그럼 불만은 생길지언정 책임은 질 필요가 없으니까.”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조걸의 의문 어린 목소리에 백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가 옳고 그름을 어찌 판단하겠느냐? 중원의 삶을 사는 우리가 이 먼 북해의 방식을 판단하고 이해한다 말하는 건 오만일 뿐이지. 그저 눈으로 보고 스스로 느끼면 될 일이다.”

“알겠습니다, 사숙.”

조걸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기색이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렇지, 새파란 애를 궁주라고 앉혀 놓고…….’

아이가 궁주라 해도 그저 따른다.

얼핏 들으면 충심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말을 해석해 보자면, 북해빙궁이 겪고 있는 모든 위기의 책임을 설소백에게 미루고 있단 뜻이었다.

조걸은 그게 더없이 못마땅했다.

설소백은 앞쪽에서 달리는 한이명의 등에 업혀 있었다. 물론 그가 숨어 살며 설소백에게 무공을 가르치지 않았을 리는 없지만, 어쨌든 어린아이에게는 가혹한 길이다.

하지만 저 아이는 단 한 번의 불평불만 없이 꿋꿋하게 버텨 내고 있었다.

“사형.”

“왜, 또?”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짜증부터 내십니까.”

“알았으니 이야기해 봐라.”

“아, 됐습니다. 안 할 겁니다.”

“이 새끼가?”

윤종이 눈을 부라리자 조걸이 찔끔하며 목을 움츠렸다.

“아, 아니. 제자를 들이는 일도 보통이 아니겠다 싶어서요. 저 꼬맹이…….”

“궁주, 인마! 궁주!”

“……예. 그러니까 궁주님을 보고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드네요.”

그러자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당소소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조걸 사형이 그걸 느꼈다는 것만으로도 북해에 올 가치는 충분히 있었네요.”

“동감이다, 소소야.”

백천이 슬쩍 사형제들을 돌아보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녀석들도 참.’

이건 화산의 제자들이 제 나름대로 긴장을 푸는 방식이었다. 사소한 말장난 등이 많아진다는 건 그만큼 긴장하고 있다는 반증과도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정작 백천도 근육이 뻣뻣하게 굳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긴장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저 유이설마저 평소보다 조금 더 표정이 굳어 있었다.

전투에 대한 두려움과 마교에 대한 공포.

모두가 압박에 시달리는 와중에 천하태평한 사람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아으! 얼어 뒈지겠네! 도착하려면 멀었어? 뭐가 이렇게 멀어!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것 맞아?”

“…….”

어느새 곰 가죽으로 몸을 똘똘 만 청명이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 대었다.

쉴 새 없이 달달달 떨면서도 저렇게 불같이 화를 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저 새끼는 진짜 간이 남들 세 배는 되나?’

남들은 긴장해서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춥다고 성질이나 부리고 있다. 저걸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생각이 없다고 해야 할지.

그리고…….

“키이이이이이이익!”

청명의 앞섶에서 머리만 쏙 뺀 백아가 자기도 춥다는 듯 달달 떨면서 날카롭게 울어 댔다.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저건 또 어디에 있다가 튀어나왔어?’

싸울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하여튼 진짜!

속으로 한탄한 백천은 작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청명아.”

“왜?”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렸다.

“사기가 너무 떨어진 것 같은데, 괜찮겠느냐?”

“사기?”

그러더니 슬쩍 뒤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마. 뒈지기 싫으면 싸우게 될 테니까.”

“……그것 참 간명하네.”

백천은 새삼 다시 한번 깨달았다. 청명이 놈에게 뭔가를 상담한다는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라는 걸.

차가운 눈보라가 얼굴을 사정없이 때려 댔다.

백천은 눈을 가늘게 뜨며 앞으로 꿋꿋하게 나아갔다. 그리고 한이명을 향해 물었다.

“아직 멀었습니까?”

그러자 설소백을 등에 업은 그가 평소보다 훨씬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기 앞쪽에 산맥들 보이십니까?”

“예.”

“저 산맥 깊은 곳에 백담(白潭)이라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사시사철 얼어 있는 작은 연못이지요. 북해에서도 가장 추운 곳입니다.”

“그럼…….”

“예.”

한이명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빙정을 전달하던 이를 추궁해 보았는데 그에 따르면 마교도들은 저곳에 있습니다.”

백천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이 속도를 유지한다면 저 산맥에 도착하기까지 불과 반 각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한이명의 등에 업혀 있는 설소백을 바라보았다.

강풍에 입술이 새파랗게 질린 아이는 더없이 단호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웃음이 났다.

‘북해의 희망이라.’

백천은 문득 현종을 떠올렸다. 지금의 자신은 현종이 그를 볼 때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았다.

선대가 제대로 서지 못했다 해도, 후대가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언제나 희망은 있다. 설소백이 스스로를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북해에도 새 봄이 찾아올 것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저 마교 놈들을 반드시 무찔러야겠지.’

백천의 눈에 마침내 불안이 걷히고 단호함이 서렸다.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얼마 남지 않았다! 가자!”

“예!”

화산의 제자들이 백천의 목소리에 힘입어 더더욱 속도를 높였다.

* * *

“주교시여!”

가부좌를 틀고 앉은 주교를 향해 검은 무복 차림의 마교도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엎어지듯 부복했다.

“보고드립니다! 현재 빙궁의 무리들과 중원의 악적들이 이곳으로 빠르게 밀려들고 있습니다. 정확한 수는 지금 파악하고 있으나, 일단은 최소 삼백 이상으로 보입니다.”

더없이 다급한 목소리에도, 주교는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정면에 위치한 아수라의 형상을 향해 가부좌를 튼 채, 경건히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

보고를 한 이도 감히 그를 이 이상 재촉하진 못했다.

속이 타들어 가더라도 오로지 기다리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주교의 입에서 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원인들이라고 했느냐?”

“예! 그렇습니다! 주교시여.”

“막아라.”

주교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소름끼치는 혈광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섬뜩하리만치 붉은 안광과 무표정한 얼굴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니 지켜보는 이는 심혼이 얼어 버릴 것만 같았다.

“의식은 거의 이루어졌다. 세 시진. 아니, 길어야 두 시진!”

눈을 떼기라도 하면 큰일이 날 것처럼, 앞을 향한 주교의 시선은 단단히 고정되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수라의 형상 아래에는 기이한 문양이 새로이 그려져 있었다.

얼핏 보면 먹으로 그린 것 같았지만, 눈썰미가 좋은 이라면 바로 알아챌 것이었다. 이는 사람의 피로써 그려진 것이라는 걸.

원과 원이 마주해 서로 휘몰아치는 듯 기이하게 뒤틀린 문양의 중간중간에는 빙정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새하얀 한기가 주변에 그려진 문양을 타고 아수라의 형상 뒤로 보이는 검은 그림자를 향해 느릿하게 빨려들어 가고 있었다.

이는 실로 기괴하고…… 더없이 불길한 광경이었다.

그 광경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주교가 씹어뱉듯 말했다.

“모든 것을 걸고 막아 내라. 그 목숨을 바쳐서라도! 만약 저들을 막지 못해 대계가 흐트러진다면 백 년의 기다림이 고스란히 무너질 터. 그런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예!”

“마도의 하늘이 열릴 것이다. 죽음조차 기쁨으로 받아들여라!”

쿵!

마교도가 감복한 얼굴로 바닥에 머리를 짓찧었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그리고 빠르게 몸을 돌려 밖으로 뛰쳐나갔다.

주교는 그 일련의 과정 속에서도 단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의 모든 것이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달려 있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바닥에 엎드려 자신이 내보일 수 있는 모든 공경을 표했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두근.

누군가의 작고 느릿한 심장 소리가 한기로 가득 찬 공동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결코 주교의 심장소리는 아니었다.

“천마시여. 위대하신 천마시여…….”

주교의 두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채 떨어지기도 전에 얼어붙은 물방울들은 주교의 턱 끝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너무도 기나긴 기다림이었습니다. 천마시여. 마의 하늘이시여. 이 하찮은 이의 염원을 받아 이 땅에 재림하시고, 이 죄 많은 이를 벌하여 주십시오.”

두근.

어디선가 들려오는 심장 박동 소리가 조금, 아주 조금 더 빨라졌다.

휘이이이잉!

공동에 불어오는 차디찬 바람이 빙정이 뿜어낸 한기와 뒤섞이며 가장 차가운 곳으로 밀려 들어갔다.

아수라의 형상이 그려진 천이 미친 듯이 펄럭이며 그 뒤쪽의 광경이 살짝 드러났다.

새하얀 백의를 입고 정좌한 이.

천이 모두 걷히지 않아 보이는 건 아랫부분뿐이지만, 백의를 모두 뒤덮을 듯 기다란 검은 머리칼과 무릎 위에 얹어진 창백한 손만은 똑똑히 드러났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주교의 두 눈에서 혈광이 솟구쳤다.

“죄악으로 더럽혀진 불신자들을 벌하시고, 끝까지 천마의 재림을 믿지 못한 배덕자들을 단죄하시옵소서! 천마시여! 세상을 그 발밑에 두실 분이시여!”

그의 절규가 동공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 * *

“여긴가?”

새하얗게 얼어붙은 커다란 연못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못보다는 차라리 호수에 가까운 크기였지만, 지금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 호수의 끝에 있는 커다란 동굴의 입구에서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복색의 무인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교!”

백천이 입술을 짓씹었다.

“꼭 지들 같은 데 처박혀 있네.”

청명이 피식 웃으며 앞으로 한 걸음 나갔다.

“사형들.”

스르르릉.

청명이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느껴져?”

“……뭐가 말이냐?”

백천의 물음에 그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저 동굴 안에서 뭔 일이 벌어지고 있어. 아주 오싹오싹한 게, 제대로 찾아왔네.”

“…….”

백천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동굴 쪽을 살폈다. 하지만 여전히 특별한 무언가가 느껴지진 않았다.

그저 원독에 가까운 독기를 품은 마교도들의 의지만이 똑똑히 전해져 왔을 뿐.

“……심상치 않기는 하네.”

“이전과는 또 다를 거야.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바로 죽는다.”

“알겠다.”

“그럼…….”

청명의 눈에서 새파란 살기가 뿜어졌다.

“가 보자고.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나지막한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몸이 빛살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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