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527화 (525/1,567)

527화. 고개 숙이지 마. (2)

얼음장 같은 시선이 집법사자의 우수(右手)가 있어야 할 빈 공간에 꽂혔다.

살이 거무죽죽하게 죽어 있는 그 어깨를 바라보던 주교의 시선이 그가 들고 있는 상자로 옮겨졌다.

“주교시여.”

집법사자는 단호한 얼굴로 주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중원인들이 가져간 빙정을 회수하라는 명은 지키지 못했으나, 다행히 설천상이 숨겨 둔 빙정을 찾아 회수했습니다.”

주교의 눈썹이 꿈틀했다.

말없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그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교도의 절반을 잃고.”

“…….”

“그 한목숨 겨우 부지해 돌아왔구나.”

“……죄송합니다.”

고개를 조아리는 집법사자를 바라보던 주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집법사자는 고개를 번쩍 들어 주교를 바라보았다.

“예상치 못한 일이 있었음이 분명하거늘, 그럼에도 명을 완수했구나. 너는 더없이 훌륭했다.”

그는 이내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격정에 휩싸인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주교의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빙정을 이리 주거라.”

“…….”

하지만 명이 떨어졌음에도 집법사자는 품 안에 빙정 상자를 품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단호한 눈으로 주교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에 주교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짓이더냐?”

“주교시여.”

집법사자는 천천히 고개를 조아렸다. 더없이 간절한 움직임이었다.

“목숨을 걸고 빙정을 구해 온 이의 작은 청을 부디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

그 청을 알아들은 주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못마땅한 눈으로 한참 집법사자를 노려보던 그는 천천히 입을 뗐다.

“그 어떤 것도 그분의 부활보다 우선시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느냐?”

섬뜩한 살기가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대답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을 시엔 단숨에 목을 쳐 버리겠단 의지가 가득했다.

하나 집법사자는 그 기세를 온몸으로 담담히 받아 냈다.

“그 일은 주교께서 계셔야만 이룰 수 있습니다.”

“…….”

“천마재림 만마앙복. 주교시여, 그 의지를 받들고 이어 온 이들의 작은 청을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못마땅한 눈으로 집법사자를 내려다보던 주교는 결국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리석은 놈 같으니.”

그가 자신의 앞섶을 풀어헤쳤다.

상의를 완전히 탈의한 그의 가슴을 본 슬쩍 올려다본 집법사자는 입술을 짓씹었다.

살짝 푸른빛을 띤, 맑다기보다는 요사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얼음이 왼쪽 가슴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를 온통 뒤덮고 있다.

누구라도 놀랄 수밖에 없는 기이한 광경이었다.

“이리 주거라.”

“예.”

집법사자가 상자 안에서 두 개의 빙정을 꺼내 공손히 내밀었다. 하지만 주교는 그 빙정 중 하나만 집어 가슴에 있는 얼음덩어리에 가져다 대었다.

쩌저저적!

빙정이 얼음을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하얀 얼음이 점점 더 푸른빛을 띠기 시작했다.

“으음.”

고통 때문인지 한기 때문인지 주교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반대로 창백했던 그의 안색은 점차 혈기가 돌기 시작했다.

“되었느냐?”

주교의 물음에 집법사자가 손에 남은 빙정을 움켜쥐었다.

두 눈에 맺힌 아쉬움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쥐고 있던 빙정을 다시 넣은 뒤 공손히 상자를 건네었다.

“여기 있습니다.”

이를 받아 드는 주교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빙정들을 확인한 그의 눈에 격정이 휘몰아쳤다.

‘드디어…….’

그의 손이 상자를 꽉 움켜잡았다.

드디어 부활의 의식을 위한 마지막 조건이 갖춰졌다. 이제 곧 세상은 천마의 부활을 그 두 눈으로 목도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의식을 치르기 위해 달려갈 것 같던 주교는 그 자리에 뿌리라도 내린 듯 서서 집법사자를 바라보았다.

“주교시여.”

집법사자가 창백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천마의 부활은 모든 교도들의 숙원이자, 사명입니다.”

“…….”

“하나 그 어떤 숙원도 주교께서 무사할 때 의미가 있음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불경한 놈 같으니…….”

노기 어린 꾸중에도 집법사자는 되레 빙그레 웃었다.

“천…마……재림. 만마…….”

그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꺾였다.

“부디…… 대계를 이루……시…….”

뚝.

그리고 이내 모든 움직임이 완전히 멈추었다. 숨이 멎어 버린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주교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선천지기까지 모조리 끌어 쓴 몸으로 지금까지 버틴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를 만나 빙정을 전하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진즉에 죽었어야 할 몸을 여기까지 이끌고 온 것이다.

“너는 훌륭했다.”

나지막이 중얼거린 주교는 허공에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러자 좌정한 채 죽은 집법사자의 몸에서 새하얀 불꽃이 피어올랐다. 맹렬히 타오르기 시작한 불은 집법사자의 시신을 빠르게 집어삼켰다.

잠시간 그 모습을 보던 주교는 몸을 돌려 동혈의 깊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중원의 무리들이 생각 이상으로 강한 모양이로군.’

저 집법사자가 선천지기까지 끌어 쓰고서야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돌아올 수 있었다.

저 빙궁의 오합지졸들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중원.’

주교는 무심결에 자신의 가슴을 뒤덮은 얼음을 움켜잡았다.

그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그 간악한 중원 놈들이…….’

이 상처만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직접 이곳을 벗어나 천마께서 재림하실 신성한 땅을 더럽힌 그 불신자들을 모조리 쳐 죽였을 것을.

교의 모든 것을 앗아 갔던 지독한 전쟁이 남긴 이 상흔은 그를 북해의 가장 차가운 땅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욱신.

상처가 끔찍하게 시려 왔다.

입술을 질끈 깨문 주교의 얼굴엔 어찌할 수 없는 원한과 분노가 파랗게 차올랐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천마의 가슴에 베어 내던 그 악귀 같던 사내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거기서 죽었어야 했다.’

그곳에서 죽지 못했기에, 그 악귀의 검이 천마에게 닿는 꼴을 목도하지 않았던가.

백여 년이 흘렀음에도, 그 광경은 화인처럼 뇌리에 박혀 아직도 그를 생생한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악몽도 이제 끝이다.”

단호한 걸음을 옮긴 주교는 이내 동굴의 가장 깊은 곳에 도달했다. 거대한 공동과 그곳에 걸린 거대한 아수라 형상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빙정을 움켜쥔 주교의 얼굴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이 차올랐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이제 곧 세상은 알게 될 것이다.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 말이다.

* * *

“여기 있습니다! 빙궁에 남은 설빙단을 모조리 다 가져왔습니다.”

“하나씩 먹어. 이거 약효 좋더라. 오, 내 거도 하나 남네?”

“상처에는 이걸 바르시면 됩니다! 빙궁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금창약입니다!”

“오. 이거 향 좋은데? 고급이야, 고급!”

“출발하시기 전까지 제집이라 생각하시고 편히 쉬어 주십시오! 식사도 최상으로 준비하겠습니다.”

“근데 술은 더 없냐?”

백천은 설소백의 말끝마다 추임새를 넣어 대는 청명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청명아.”

“응?”

“……우리 급한 거 아니었냐?”

“급하지.”

“……너는 하나도 안 급해 보이는데?”

“에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지금 내가 얼마나 급한데. 속이 막 타들어 간다니까?”

“그건 독한 술을 물처럼 처마셔 대니까 그런 거지, 이 새끼야!”

백천이 거품을 물고 청명에게 달려들려고 하자 윤종과 조걸이 자연스럽게 그의 양팔을 움켜잡으며 제지했다.

“어휴, 사숙. 거 진정 좀 하십시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고! 어떻게 매번 이러시냐고.”

“그러니까 이러는 거잖아! 그러니까! 나야말로 몇 번을 말하냐!”

“궁주님도 보고 계시잖습니까.”

“끄으으응.”

궁주?

그게 더 문제라고!

백천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설소백을 바라보았다.

어젯밤에 백천이 마교 토벌에 합류하겠다는 의사를 표한 이후, 설소백은 마치 화산의 제자라도 된 양 청명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래. 거기까지는 좋다 치자. 그럴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술 더 없냐니까?”

“지금 가져오고 있습니다!”

“크으. 얘네 술 잘 만드네. 추운 데 사는 애들이라 그런가? 아주 술이 화끈한 게, 입에 쫙쫙…….”

“에라, 썩을 놈아!”

“꾸웨엑!”

듣다 못한 백천이 조걸을 붙잡아 청명에게로 내던졌다. 하지만 청명은 슬쩍 몸을 뒤트는 것으로 간단히 조걸을 피해 냈다.

쿵!

벽에 처박힌 조걸이 주르륵 아래로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청명이 혀를 끌끌 찼다.

“왜 애를 던지고 그래? 잘못했으면 말로 하지. 폭력만 고집하면 못써, 사숙.”

“끅……. 사, 상처가…….”

“진정 좀 하십시오, 사숙. 그러다 상처가 벌어집니다.”

“……술 그만 처먹으라고 인마!”

점점 난장판이 되어 가는 숙소를 보며 설소백은 연신 땀을 삐질삐질 흘려 댔다.

마교를 몰아붙이던 이들과 눈앞의 이들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화산 사람들이 다 이렇지는 않겠지?’

괜스레 부질없는 희망을 품어 보는 설소백이었다.

“아미타불. 백천 시주께서는 조금 진정하십시오.”

“……스님.”

잠자코 있던 혜연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마음이 급한 것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이건 우리만 서두른다 해서 해결되는 일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남은 이들을 재정비해 마교와 싸울 준비를 하는 데만 꼬박 하루는 걸릴 것입니다.”

백천이 갑갑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쉰다.

“그건 잘 알지만…….”

마음이 급했다. 아니, 마음이 급하단 말만으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천마의 부활.

그 말이 가지는 무게감을 모를 이가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며칠 전에 들었을 때와 지금은 그 무게감의 차원이 달랐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마교 놈들이 얼마나 강하고, 동시에 제정신이 아닌지를 실감한 순간, 그런 놈들이 신처럼 모시는 천마의 존재가 얼마나 끔찍할지 실감되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둘째로…….

‘그런 놈들이 천마의 이름을 두고 획책하는 일이라면 허황된 일이나 허풍만은 절대 아니겠지.’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다.

처음엔 그게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놈들이 저리 미쳐 날뛰는 걸 보면 반드시 뭔가 길을 찾아낸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어찌 침착할 수 있으며 진정할 수 있겠는가?

“시간을 끌다간 정말 돌이킬 수 없어질지도 모른다! 서둘러야 하는 것 아니냐?”

백천이 자못 심각한 얼굴로 묻자 청명은 입에 물고 있던 술병을 내려놓고 어깨를 으쓱했다.

“서둘러야지.”

“그래!”

“그런데 그건 우리가 정할 일이 아니야.”

“……응?”

청명이 슬쩍 고개를 돌려 설소백을 바라본다.

“집법사자 하나 잡고, 마교도들 몇 물리치는 데도 이만큼의 희생이 필요했어. 그런데 거기에는 주교도 있다며?”

“…….”

“물론 그놈이 제대로 된 주교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마교에서 주교라는 직위는 더없는 의미를 가져. 웬만한 놈은 주교의 이름을 자칭할 수도 없어. 아마…… 괴물이 따로 없겠지.”

화산 제자들의 사이엔 어느새 무거운 정적이 맴돌았다. 모골이 송연해진 그들은 청명을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청명이 지금껏 특정한 이를 저리 높이 평가한 적이 있던가? 세상 대부분의 존재를 아래로 두고 보던 청명이 아닌가?

심지어 소림의 방장도 청명에게 저런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어설프게 준비해서 들이받으면 정말 전멸한다. 그러니까 침착해, 사숙. 정말 위급할수록 냉정해야 해.”

백천의 어깨에서 힘이 서서히 빠졌다.

청명은 피식 웃고는 설소백이 가져온 설빙단을 화산 제자들에게 하나씩 던졌다.

“먹고 운기 해. 눈을 뜨면 다시 싸워야 할 테니까.”

“……알았다.”

급한 마음을 다스린 그들은 청명이 준 설빙단을 입에 넣고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혜연까지 운기에 들어가자 순식간에 방 안이 조용해졌다.

청명은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언제 이렇게 컸는지. 그 작던 병아리들이 이제는 다른 문파를 이끌 만큼 성장했다.

‘이게 그 ‘대견하다’, 뭐 그런 건가?’

뒷머리를 슬쩍 긁적인 청명은 설소백을 보며 말했다.

“너도 좀 자 둬.”

“저는 괜찮습니다.”

“어제부터 한숨도 못 잔 것 알고 있다. 이제 다시 싸워야 하니 고집부리지 말고 얼른 자 둬. 몸을 관리하는 것도 이끄는 자의 덕목이다.”

“……예.”

설소백은 재차 사양하지 않고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몇 번 숨을 내쉬기도 전에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나직이 흘러나오는 설소백의 숨소리를 들으며 청명은 안쓰러운 눈으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선대가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일들 때문에 후인들이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속이 쓰리다 못해 칼로 후벼 파는 느낌이었다.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어.’

설빙단을 먹고 내력은 조금 더 강해졌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과거의 감각과 지금의 육신을 완전히 동화시키진 못하고 있었다.

그 위화감만 없었더라도 집법사자를 놓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더 강해져야 돼.’

조금이라도 더 빨리 본래의 무위를 되찾아야 한다. 그 누구도 다치지 않고,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도록.

‘부활?’

웃기지도 않는 소리.

청명은 주먹을 꽉 움켜쥐며 이를 갈았다.

‘다시는 그런 말을 지껄이지 못하게 제대로 끝장을 내 주지.’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살짝 눈을 감았다.

이 정도 내상을 다스리는 데에는 굳이 운기까지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청명이 천천히 눈을 떴다.

“들어오십시오.”

끼이익.

그의 허락에 문이 열리며 한이명이 굳은 얼굴로 들어왔다.

“출정 준비가 끝났습니다.”

“흐음.”

청명은 대답하기 전에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운기를 마친 화산의 제자들과 혜연이 형형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만연했던 다급함이나 초조함은 없었다. 그저 확고한 의지로 가득 찬 눈빛이었다.

청명은 슬쩍 웃으며 물었다.

“준비는?”

“당연히 끝났다.”

백천의 답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가자! 마교 놈들 대가리를 깨 버려야지.”

입꼬리가 섬뜩하게 말려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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