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6화. 고개 숙이지 마. (1)
서걱!
검이 등뼈를 갈라 내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부들부들 경련하던 마교도가 천천히 눈밭 위로 거꾸러졌다.
“처…… 천마……재림, 만마…….”
그의 진언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마지막 마교도가 절명한 것을 확인한 백천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고 검을 회수하였다.
아무리 상대가 악마와도 같은 마교도라고 해도, 사람을 죽인 것이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물며 스스로를 도사라 칭하는 이라면 아무렇지 않아선 안 된다.
눈을 감고 가볍게 상대의 명복을 빌어 준 그가 막 몸을 돌리려던 그때였다.
푸욱!
“이 더러운 마교도 놈!”
들려오는 거친 목소리에 백천은 깜짝 놀랐다.
빙궁도들이 쓰러진 마교도의 시신에 달려들어 검을 박아 넣고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백천은 눈살을 찌푸리며 무어라 한마디 하려다 이내 고개를 내저어 버렸다.
‘뭐라 말해도 들리지 않겠지.’
마교도들을 모두 쓰러뜨리기까지 수없이 많은 빙궁도들이 희생됐다. 동료의 처참한 죽음을 두 눈으로 본 이들을 말로 설득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저 저들의 분노가 너무 과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
“사숙.”
그때 윤종과 조걸, 유이설, 당소소, 그리고 혜연까지 모두 그를 향해 다가왔다.
이곳저곳에 상처를 입은 그들을 보니 이 전투가 얼마나 지독했는지 새삼 다시 느껴졌다.
선두에 선 윤종이 얼굴에 튄 피를 닦아 내며 입을 열었다.
“쳐들어온 이들은 모두 쓰러뜨린 것 같습니다.”
“음.”
백천은 살짝 고개를 주억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참혹하군.’
눈으로 새하얗게 덮였던 빙궁은 어느새 빙궁도와 마교도들이 흘린 피로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 중 대부분이 빙궁도가 흘린 피라는 걸 생각하면 조금 전 보였던 분노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마교…….”
백천은 살짝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정말 무시무시한 놈들이었다.”
“……동감입니다.”
윤종은 물론이고 평소 웬만해서는 활기를 잃지 않는 조걸조차 대놓고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백천 역시도 아직 떨려 오는 손끝을 진정시키느라 애쓰고 있었다.
마교도들은 화산의 제자들이 이제껏 겪어 온 그 어떤 이들과도 달랐다. 그 끔찍한 악의와 소름 끼치는 광기가 아직 몸을 저릿하게 눌러 오는 것만 같았다.
“……우리가 마교라는 존재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했구나.”
모두가 이번 일로 뼈저리게 실감했다.
어째서 백 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마교라는 이름이 공포와 죽음의 대명사로 전해져 내려오는지를.
“청명이 놈이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윤종의 그 말에 백천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이 분위기를 완전히 반전시키지 않았다면 희생은 끝도 없이 늘어났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북해빙궁의 역사가 오늘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더없이 대단한 일을 해냈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대체 그놈은 어떻게 이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낼 수 있는 거지? 아니, 그보다도 어째서 마교에 대해 그리 잘 알고 있었던 거지?’
청명이 놈에 대해 알 만큼 알고 있다 자부하는 것도 이젠 무색했다. 이번 전투를 겪고 나니, 자신이 무언가를 알고 있기는 했을까 스스로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백천의 시선이 자연히 성 쪽으로 향했다.
그러다 마침 다가오고 있던 한이명, 여사혼과 눈이 마주쳤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다가온 두 사람은 잠깐 우물쭈물하며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쉽사리 입을 열 수 없는 듯했다. 백천은 그런 그들의 반응을 이해했다. 이런 일을 겪었는데 어찌 말이 쉬이 나오겠는가?
조금 머뭇댄 끝에 한이명이 먼저 깊게 포권을 했다.
“귀하……. 아니, 화산파의 도움에 더없이 큰 감사를 드립니다. 북해빙궁이 정말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진심 어린 인사였다.
백천의 시선이 슬쩍 한이명 뒤쪽에 선 여사혼에게로 향했다. 본디 이런 상황에서 이 말을 해야 할 사람은 여사혼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입을 굳게 닫고 시선을 피하는 게 전부였다.
“감사하실 것 없습니다.”
흐트러진 소매를 살짝 당기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백천이 한이명을 향해 가볍게 마주 포권 했다.
“화산의 제자로서, 그리고 협의를 쫓는 무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더없이 당당한 목소리였다. 너무 당당하다 못해 살짝 선을 긋는 듯 차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이명은 백천을 보며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당장 오늘 마교에 대해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만약 이들이 마교가 쳐들어오기 전에 떠났다면?’
아마 한이명은 두 번 다시 뜨는 해를 두 눈으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빙궁 역시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을 것이 분명했다.
밀어내었던 이들에게서 구원받는 심정을 대체 뭐라 표현해야 한단 말인가?
“……그저 죄송할 따름입니다.”
한이명이 연신 고개를 숙이자 여사혼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졌다. 그래도 염치가 있는 사람인지라 차마 입으로는 말할 수 없지만, 한이명이 고개를 숙이는 이 상황이 영 탐탁찮은 눈치였다.
“마교가 이토록 위험한 이들인지 몰랐습니다. 머리로는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부디 우둔한 저를 탓해 주십시오.”
백천은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평소의 그라면 적당히 겸양을 떨며, 마교의 무서움을 알지 못했던 것은 화산 역시 마찬가지라는 둥의 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청명에게 한 짓을 생각하니 그 말이 차마 나오질 않았다.
백천은 그저 나지막이 도호를 외었다.
‘어렵구나.’
도인의 신분임에도 이들에게 치밀었던 화가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다는 건 아직 수양이 부족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냉랭함을 굳이 벗어던지려 하지 않았다.
“빙궁이 큰 무례를 저질렀음에도, 빙궁을 위해 검을 들어 주신 화산의 제자 분들께 대체 어떤 말로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한이명이 말을 들으며 가만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주위를 둘러싼 빙궁의 무인들이 이전과는 다른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계와 두려움이 뒤섞인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던 그들이, 이젠 미묘한 동경과 경외가 어린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이제 와서…….’
백천은 갑갑함을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강호란 결국 힘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곳이란 걸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으로 직면한 현실은 가끔 생각 이상으로 시렸다.
“……일단은 수습부터 하시지요.”
결국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한 그는 그렇게 상황을 정리하려 들었다. 그때 조용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꽂혔다.
“사형.”
“음?”
“저기.”
유이설이 성 쪽을 향해 턱짓했다. 성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청명이 저벅저벅 걸어 나오고 있었다.
“청명…….”
‘청명아, 무사했구나!’ 하고 외치려던 백천은 말을 절반도 채 내뱉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청명이 양손에 무언가를 하나씩 쥐고 질질 끌고 오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
아니, 시신인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청명이 끌고 나오는 것의 정체가 아니라, 그의 표정이었으니까. 백천조차도 그의 얼굴에서 한기를 느낄 만큼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저벅. 저벅.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길 때마다 빙궁의 무사들이 기세에 눌려 황급히 좌우로 길을 터 주었다.
질질질질.
그는 일직선으로 생겨난 길을 따라, 화산의 제자들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양손에 잡고 있던 시신을 여사혼의 발치에 집어 던졌다.
털썩! 털썩!
기겁한 여사혼이 두 눈을 부릅떴다.
“이, 이게 뭔…….”
목이 없는 두 구의 시체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 이들은 빙궁의 장로가 아니오?”
목이 없어서 정확히 알아볼 순 없지만, 복색을 보면 빙궁의 장로임이 분명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저자가 목이 잘린 빙궁 장로의 시신을 끌고 온단 말인가?
여사혼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청명과 시신들을 연신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점차 노기가 차올랐다.
“이게 대체 무슨……!”
그가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이려 했지만, 섬뜩한 살기로 일렁대는 청명의 눈이 그 입을 틀어막았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
“그게 이들의 유언이더군.”
한이명은 믿을 수 없단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썩어 문드러졌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빙궁의 장로쯤 되는 이들이 마교의 주구가 되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
청명이 씹어뱉듯 말하고는 이를 갈아붙였다.
이들만 아니었다면, 집법사자를 놓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풀어내지 못한 분노가 여사혼과 한이명에게로 쏟아졌다.
“미, 믿을 수 없소!”
여사혼은 말을 더듬으며 몸을 덜덜 떨었다.
“아무리 이들이 설천상의 수하들이었다고는 하지만…… 그, 그래도 당당한 북해빙궁의 장로들이오! 그런 이들이 어찌 마교와 결탁을 한다는 말이오! 뭔가 오해가 있는…….”
“계속 지껄여 봐.”
청명의 눈에 노화가 피어올랐다.
“주둥이를 아주 찢어 줄 테니까, 계속 지껄여 보라고.”
“……이, 이 무슨 무례한…….”
“빙궁의 당당한 장로?”
청명은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들은 듯 차게 비웃었다.
“그래서 그 당당한 빙궁이 뭘 하셨지?”
“…….”
“이 등신 새끼들이…….”
청명이 검을 콱 움켜잡았다. 그 모습에 여사혼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청명의 무위를 보지 못한 이가 여기에 어디 있겠는가?
저 검이 뽑히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너무도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여사혼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지금 확실치도 않은 일로 빙궁을 핍박하겠다는 것이오? 이게 화산의 뜻이오?”
그의 시선은 청명이 아닌 백천에게로 향해 있었다. 청명을 말려 달라는 뜻인 듯했다.
하지만 백천은 그저 차가운 눈으로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이, 이 무슨!”
궁지에 몰린 여사혼이 빙궁도들을 돌아보았다.
“무엇들 하느냐! 지금 외인들이 빙궁의 장로들을 상하게 하고, 억지를 부리고 있음이 보이지 않느냐? 당장 이들을 제압하고…….”
“장로님!”
참다못한 한이명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말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
여사혼은 질린 얼굴로 자꾸 뒤로 물러났다.
청명이 그런 그를 보며 이를 드러냈다.
“아니야. 계속 지껄여 봐.”
“……그, 그럴 리가 없소. 저, 저들이 마교와 결탁했을 리가 없소!”
악을 쓰는 목소리가 필사적이기 짝이 없었다.
설천상이 마교와 손을 잡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거리를 유지하는 ‘거래’에 가까웠다. 그러니 설천상을 축출한 이상 마교와 선을 긋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빙궁의 장로들이 마교도를 감싸다 죽었다는 것은 어떤 말로도 변명이 되지 않았다.
부정해야 한다. 절대 인정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나 깊게 얽혔다가는…….
하지만 그 순간 그의 귓가에 청천벽력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로께서는 물러나십시오.”
입을 쩍 벌린 여사혼이 고개를 획 돌렸다.
빙궁의 궁주, 설소백이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 전쟁에서 너무 많은 충격을 받은 듯 핏기가 가신 얼굴이었지만, 전전대 궁주를 닮은 단단한 입매에선 더할 나위 없는 단호함이 느껴졌다.
“여 장로께서 그리 부정하실 것 없습니다. 제가 이 두 눈으로 보았으니까요.”
“구, 궁주?”
“저들이 마교도를 감싸며 청명 도장을 공격하는 것을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궁주!”
여사혼이 쩌렁쩌렁 고함을 내질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체 무엇을 보았단 말입니까! 궁주께선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진 알고 계신 것입니까!”
그리고 정신없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궁주께서 잘못 보신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 이 혼란한 상황에 충격을 받으시어…….”
“그만하십시오!”
설소백이 입술을 꽉 깨물며 여사혼을 노려보았다.
“장로께서 저를 진정 궁주라 생각하신다면, 이 많은 이들 앞에서 제 눈으로 보고 들은 것을 착각이라 부정하실 수는 없습니다!”
“구, 궁주…….”
설소백의 얼굴은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전에 청명 도장께서 제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빙궁이 이리된 이유는 마교 때문이 아니라 그대들 같은 이들 때문이라고.”
“…….”
“이제야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습니다. 적을 앞에 두고도 달아나는 이! 스스로의 치부를 감추기에 급급하여 반성이라고는 없는 이! 당장의 안위를 위해 위기에서 고개를 돌리는 이!”
정적 속에 울려 퍼지는 설소백의 목소리는 울음 같기도, 비명 같기도 했다.
“이게 빙궁의 현실입니까?”
질끈 감긴 한이명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마교가 쳐들어오기 전이었다면 부정하고 반박했을 것이다. 하다못해 변명이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오늘 본 현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어느새 빙궁의 혼을 잊고, 평온에 젖어 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을 버렸다.
설소백이 고개를 돌려 청명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청명 도장.”
“…….”
“저들이 빙정을 얻어 천마의 부활을 획책한다 하셨지요?”
“그래.”
청명의 짧은 대답에 설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빙궁의 궁주로서 북해빙궁을 이끌고 마교를 치고자 합니다.”
그리고 천천히 청명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웅성거림이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구, 궁주!”
“대체 무슨!”
“시끄럽습니다!”
하지만 설소백의 외침 한 번에 주변이 다시금 조용해졌다. 아이답지 않게 서슬 퍼런 얼굴로 모두를 노려본 설소백은 다시 청명을 보며 말했다.
“……하나 빙궁의 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화산의 힘을 빌려주십시오. 빙궁을……. 아니, 북해를 위해서 저들을 반드시 무찔러야 합니다. 저들이 하려는 일이 무엇이건, 이대로라면 북해는 곧 피에 잠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북해를 도와주십시오! 부디!”
그는 금방이라도 바닥에 이마를 찧을 듯 고개를 조아렸다. 아니, 조아리려 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이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
어느새 청명이 그의 목덜미를 움켜잡은 채 대롱대롱 들어 올리고 있었다.
“처, 청명 도장?”
“어른들이 나잇값을 못하니 애가 고생이네.”
설소백을 땅에 잘 내려놓은 청명은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흘끗 바라보았다.
‘지랄 맞네.’
속이 뒤집어졌다.
집법사자를 놓쳤기 때문도, 빙궁의 추태를 보았기 때문도 아니었다.
청자 배와 명자 배를 잃어버린 화산의 어린 제자들이 마교의 침략을 어떤 심정으로 맞이했을지를 두 눈으로 봐 버린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마 그때의 화산도 설소백처럼 간절히 부탁했을 것이다. 믿었던 이들에게, 더없이 신뢰했던 이들에게 말이다. 그 마음 한구석엔 희망도 믿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화산에게, 천하의 누구도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고개 숙이지 마.”
“예?”
청명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네가 이렇게까지 부탁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청명이 고개를 돌려 백천을 바라보았다.
백천은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대다 결국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알았다, 이 빌어먹을 놈아.”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화산의 제자들도 청명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두 눈을 빛냈다.
“솔직히 그냥 두고 가기는 찜찜합니다.”
윤종이 단호하게 말했다.
“도망치는 것 같아서 쪽팔리기도 하고.”
조걸이 피식 웃으며 말을 보태었다.
“처단.”
“사고께서 마교는 반드시 처단해야 할 이들이라고 하세요!”
“……소소야.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아듣는다.”
“아미타불.”
혜연이 불호를 외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 시주라면 당연히 그리 말씀하실 거라 생각했소이다.”
그의 입가엔 미약한 웃음이 어려 있었다. 신뢰로 가득한 두 눈이 청명을 응시했다.
알고 있다.
어찌 보면 어리석고, 멍청한 짓이다. 이 먼 북해 땅에서 마교를 상대하다 죽기라도 한다면 세상 누가 그 죽음을 두고 칭송하겠는가?
이 길로 그냥 떠나 버린다고 해도 누구도 그들을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당장이라도 중원으로 향하는 것이 옳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옳은 일’을 행하려 들지 않았다.
“북해빙궁주의 청을 받아.”
백천이 단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화산, 그리고 소림은 마교 토벌에 참여하겠습니다.”
행동에 있어서 이(理)와 리(利)를 따지지 않고, 마음의 길을 따르는 것.
세상은 그것을 협의(俠義)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