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4화. 이제부터 기억하게 해 주자고. (4)
카가가가각!
내리친 검과 검게 물든 손이 허공에서 얽혀 들었다.
만년한철로 만든 암향매화검이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이 팽팽하게 휘어졌다. 부들부들 떨리는 검 끝이 지금 얼마나 많은 힘이 실렸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콰득! 콰드드득!
뿜어지는 검기가 집법사자의 손을 말 그대로 깎아 내고 있었다. 가루처럼 으스러진 살점이 흩뿌려졌다.
“놈!”
콰아아아아!
얼굴을 일그러뜨린 집법사자가 반대편 손으로 장력을 뿜어냈다. 검게 물결치던 장력이 와류를 이루며 청명을 향해 날아들었다.
청명의 눈썹이 일순 꿈틀대었다. 이내 검을 잡지 않은 그의 좌수가 쫙 펼쳐졌다.
가볍게 흔들리던 손끝에서 붉은 장력이 쏟아지며, 날아들던 집법사자의 장력과 정면에서 충돌했다.
콰아앙!
그 순간 폭음이 일며, 기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집법사자는 슬쩍 입꼬리를 뒤틀며 비웃음을 흘렸다. 이 정도 공격쯤이야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하지만 그때.
쇄애애애액!
집법사자가 부러져라 목을 황급히 뒤로 꺾었다.
폭발하는 기의 파편들 사이로, 조금 전 청명이 발출한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푸른 장력이 튀어나와 집법사자의 얼굴 바로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쾌, 쾌속…….’
퍼어억!
미처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연이어 발출된 장력이 그의 어깨를 후려쳤다.
“이노오오오옴!”
고통이 어깨부터 번지자 분노한 집법사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검게 물든 손을 폭풍처럼 휘둘렀다.
무시무시한 힘과 속도였다.
말려들기라도 한다면 살점 하나 남기지 못하고 분쇄될 것만 같았다.
하나 청명은 일말의 동요조차 보이지 않았다.
고속으로 회전하는 수레바퀴 같은 장력 사이로 붉은 검기를 두른 검이 매섭게 파고들었다.
탕! 타앙! 탕! 탕!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청명은 집법사자의 손목을 노리며 연이어 검을 찔러 대었다.
여유를 품은 발은 상대와의 거리를 벌렸고, 낮은 자세는 안정적으로 몸을 지탱했다. 어깨는 더할 나위 없이 가볍고, 손에 들린 검은 그만큼 경쾌했다.
화산의 검학이 추구하는 이상과도 같았다.
그리고.
청명의 서늘한 눈은 감정 하나 내비치지 않고 집법사자의 공격을 정확하게 응시하며 꿰뚫었다.
맹렬한 장력의 폭풍우 사이사이로 실낱같은 빈틈을 찾아내어 주저 없이 검을 찔러 넣었다.
카가가가각!
“이……!”
집법사자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었다.
그의 검은 손을 교묘하게 피해 낸 검이 손목을 연이어 찔러 대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기를 둘러 강철보다 단단해진 육체가 마치 진흙처럼 움푹움푹 베이며 핏물이 솟구쳤다.
‘대체 이놈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대체 어떻게 사람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장력의 사이로 이토록 능수능란하게 검을 찔러 댈 수 있단 말인가?
빈틈?
물론 빈틈이야 존재할 것이다. 그의 무학이 완벽할 리는 없으니까.
그 빈틈을 정확하게 찌를 수 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닿는 것만으로도 육신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 남을 장력의 소용돌이 속으로 정확하게 검을 찔러 넣을 수 있는 대담함.
그리고 그 와중에 검 끝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침착성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어디 그뿐인가?
조금 전 이놈은 분명 일시에 두 종의 장력을 거의 동시에 발출했다.
아무리 한 문파의 장법이라 한들 그 운용과 성질은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발출하던 장력을 다른 장력으로 전환해 연이어 발출한다? 이는 집법사자조차 엄두도 내지 못할 신기(神技)였다.
심지어 이놈은 그 와중에도 검을 전개했고, 완벽하게 정교했다.
이놈이 무당의 제자라 양의신공(兩儀神功)을 익혀 마음을 둘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닐진대 이게 어찌 가능하단 말인가?
“크하아앗!”
팔목을 찔러 온 검이 뼈를 긁는 고통에 집법사자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그가 뿜어낸 장력이 청명의 전신을 뒤덮기 시작했다.
스으으읏!
그런데 그 순간, 청명이 가볍게 내민 검이 낭창하게 휘어지더니 이내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장력을 연이어 쳐냈다.
검 면이 장력의 옆을 가볍게 밀어 내니, 장력의 방향이 조금씩 바뀌었다. 그리고 방향이 뒤틀려 버린 장력은 청명의 몸을 말 그대로 종이 한 장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콰아아아앙!
청명의 등 뒤로 내리꽂힌 장력이 땅을 부수며 연이어 폭음을 터뜨렸다. 그 반동으로 불어온 폭풍에 청명의 길게 자라난 머리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깊고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집법사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청명이 장력을 모조리 뒤틀어 버린 것에도 물론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이 모든 과정에서 청명이 단 한 번도 흥분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단 사실이었다.
‘대체 이놈은?’
어찌 저리 침착할 수 있는가?
백여 년을 강호에서 굴러먹은 노강호거나, 수십 년을 전장에서 살아남은 전귀(戰鬼)가 아니고서야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침착성을 이제 겨우 약관이나 되었을 법한 어린놈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죽여야 한다.’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이놈은 언젠가 반드시 교의 크나큰 화가 될 인물이 될 것이 분명했다.
“이제 알겠군……. 네놈이 설천상을 죽였구나.”
집법사자가 눈을 일그러뜨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저 여사혼인가 뭔가 하는 작자와 그 옆의 한 어쩌고 하는 놈의 그릇으로 설천상과 대적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잖아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놈의 존재가 모든 의문에 해답을 던져 주었다.
“너는 여기서 죽는다. 절대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아, 그 새끼?”
집법사자가 살벌한 목소리로 나직이 말하자 청명은 피식 대며 검을 가볍게 휘저었다.
“마교 새끼들이 언제 이렇게 말이 많아졌지? 속 편한 북해 땅에 처박혀서 노닥거리더니 애들이 독기가 많이 빠졌네.”
“……뭐라?”
“아가리로만 떠들지 말고 덤벼라, 좀.”
분노한 집법사자의 눈에 핏발이 서다 못해 툭툭 터지기 시작했다.
“이놈이……!”
한편 뒤쪽에서 지켜보던 화산의 제자들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청명이네.”
“저 와중에도 입을 터는 걸 보면 청명이 놈이 확실합니다.”
“사람 본성 어디 가나.”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들의 입에서 나온 건 안도의 한숨이었다. 내내 긴장하여 뒷모습을 지켜보다 이제야 한시름을 놓은 것이었다.
저 와중에도 저렇게 할 말을 다 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의미니까.
그때 가만히 청명을 지켜보던 윤종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사숙.”
“음?”
“……저 집법사자라는 자는 딱 봐도 설천상보다 배는 강해 보이지 않습니까?”
“겨우 배일 리가 있느냐.”
적어도 몇 배는 더 강해 보인다.
“……한데 청명이 놈은 그때보다 더 여유로워 보입니다. 빙궁에서 준 영약의 효력이 그만큼 뛰어난 겁니까?”
“그럴 리가.”
백천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들 역시 영단의 효험은 충분히 경험해 보았지만, 영단 하나 먹는다고 사람이 이토록 급격하게 강해질 수는 없다. 애초에 영단은 내력을 더해 주는 것이지, 검을 더 강하게 해 주는 방편이 아니니까.
“아미타불.”
의외로 그 대답은 혜연에게서 나왔다.
“우리가 안전하기 때문이외다.”
“응?”
윤종이 뒤를 돌아보자 혜연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설궁주 역시 청명 시주가 천천히 느긋하게 상대하려 했다면 상처 없이 제압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랬다간 빙궁의 장로들과 빙궁도들에게 둘러싸인 우리 중 몇은 죽거나 크게 다쳤겠지요.”
그리고 여사혼이 이끌던 북해인 역시 크게 상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청명 시주는 부상을 입는 한이 있더라도 승부를 빨리 끝내고자 했던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요. 그러니 천천히 상대를 몰아붙이면 되는 겁니다.”
말을 하는 혜연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천변만화하는구나.’
매 순간 최적의 길을 찾고, 가장 완벽한 방법으로 상대를 쓰러뜨린다. 이는 더없이 이상적인 말이지만, 이상적이기에 세상 누구도 그걸 온전히 실천하지 못한다.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수백이지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건 오직 청명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폭급하게 상대를 몰아붙일 수도 있고, 느긋하게 상대를 농락할 수도 있다.
극에 달한 부동심과 소름 돋는 과격함. 더없는 결단력과 실행력을 동시에 갖출 수 있는 이가 누가 있다는 말인가?
‘검이 강한 게 아니야.’
혜연은 살짝 몸을 떨었다.
그가 청명을 따라 화산에 온 이유가 지금 저곳에서 온전히 보였다.
검이 강한 게 아니다.
사람이 강한 것이다.
청명이 그저 그보다 무위만 높은 이였다면 혜연은 스스로를 갈고닦는 길을 선택했지, 굳이 청명을 따를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강함이란 홀로 닦을 수 없는 법.
청명을 지켜보는 혜연의 눈빛이 더없이 진중해졌다.
“아미타불. 청명 시주는 그런 사람이니까요.”
그 순간이었다.
“뭐 해? 야, 자냐? 덤비라고, 등신아. 장력은 뒀다가 네 무덤 파는 데 쓸 거냐? 근데 묻을 시신을 건질 순 있을까?”
“…….”
속 뒤집어지게 이죽거리는 청명을 본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혜연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 묘한 눈빛에, 혜연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아미타불.”
하지만 청명의 도발에도, 집법사자의 눈은 조금 더 신중해졌다.
상대의 얕은 도발쯤이야 흘려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의 검은 그럴 만한 것이 아니었다.
대충 상대할 수 있는 이가 아니다. 저 정교한 검과 굳건한 자세, 말도 안 되는 부동심은 확실히 보통의 수준을 뛰어넘었으니까.
‘설천상 따위가 상대할 이가 아니다.’
겉보기엔 설천상이 배는 더 강하겠지.
그의 내력과 힘은 확실히 저 청명이란 작자보다 우위에 있으니까. 하지만 집법사자가 보기에, 설천상 따위는 청명과 천 번을 싸웠다 해도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을 것이었다.
종이 한 장 차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실낱같은 차이를 좁힐 기회를 끝까지 내주지 않는 것이 저런 검수들이다.
그리고…….
‘저 내력.’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상대의 내력을 짓밟아야 할 마기가 저놈의 내력과 충돌할 때마다 오히려 움찔거리며 밀려났다.
마치 천적을 만난 것처럼 말이다.
처음 겪어 보는 이 기묘한 현상이 집법사자를 더욱 신중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우우우우우우웅.
이내 집법사자의 전신에서 마기가 휘돌았다. 그의 눈에서 붉은 혈광이 줄기줄기 뿜어졌다.
‘팔 하나 정도는 내어 주마.’
대신 그 목숨과 빙정을 받아간다!
“크하아아아아!”
짐승과 같은 괴성을 내지른 그는 광포하게 청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검은 빛살이 백색의 대지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청명의 눈이 살짝 일그러졌다.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진 않다는 건가?’
전법이 바뀌었다.
정교함으로 청명을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알아챈 집법사자가 힘과 속도, 그리고 파괴력으로 청명을 짓밟으려 작정한 것이다.
완벽한 승리를 포기하는 대신 부상을 입더라도 상대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각오가 확연하게 느껴졌다.
“그렇지.”
청명이 이를 드러내며 섬뜩하게 웃었다.
“이래야 마교지!”
가가가가각!
암향매화검이 바닥을 긁어내며 거칠게 울었다.
파아아앗!
청명은 땅을 힘껏 박차며 자신에게로 달려드는 집법사자를 향해 돌진했다.
파르르르!
달려드는 그의 검 끝에서 붉은 매화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내 칠매검(七梅劍) 중 매화벽(梅花壁)의 초식이 몇 번이고 중첩되어 전개되었다.
매화로 만든 그물 같은 벽이 순식간에 십여 차례 겹쳐지며 더없이 단단한 검기의 벽이 태어났다.
하지만.
콰아아아아앙!
집법사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청명이 세운 매화의 벽을 몸으로 들이받았다.
가가가가가각! 가가가가각!
마기를 둘러 강철보다 더 단단해진 육체가 순식간에 엉망진창으로 베여 나갔다. 날로 이루어진 그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그의 전신 피부가 끝도 없이 찢기고 갈라졌다.
하지만 이런 상처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노오오오오오옴!”
전신을 상처로 뒤덮으며 매화의 벽을 뚫고 나온 집법사자는 청명을 향해 권을 쳐 날렸다.
콰아아아아아앙!
검은 폭포가 쏟아지는 것 같은 어마어마한 권력이 청명의 검과 부딪쳤다. 거센 폭음과 함께 청명이 피를 뿌리며 뒤로 튕겨 나갔다.
“놓치지 않는다!”
자신이 흘린 피로 혈인(血人)이 되어 버린 집법사자가 광기로 뒤범벅된 눈을 빛내며 튕겨 나가는 청명을 향해 광속으로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