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3화. 이제부터 기억하게 해 주자고. (3)
집법사자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교도들이 학살당하는 모습이 두 눈에 똑똑히 들어오고 있었다.
이 광경이 더없이 충격적인 이유는, 지금 이 모습이 조금 전 빙궁도들을 학살하던 교도들의 모습과 완전히 겹쳐 보이기 때문이었다.
전쟁은 기세.
기세를 탄 쪽은 제 실력 이상의 힘을 발휘하지만, 잃은 쪽은 실력의 반도 발휘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교도들이 열 배가 넘는 수의 빙궁도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들이 만일 기세를 잃지 않고 침착하게 대항했다면, 이 수만으로 저들을 완전히 무찌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교도들은 상대의 공포심을 자극하여 무너뜨리는 데 더없이 익숙하다. 그렇기에 수의 차이를 그리 간단하게 뒤집을 수 있었다.
그런데…….
카가가각!
선두에 선 이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집법사자의 귀에 섬뜩한 소리가 꽂혀 들었다.
‘대체 저놈은 뭐란 말이냐?’
그 교도들이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기세로 불신자들을 짓눌러야 할 이들이 되레 기세에 밀려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집법사자는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인정했다.
두 눈으로 싸늘한 살기를 흘리며 마치 감정이 없는 마귀처럼 검을 휘두르는 이의 모습은 그조차도 신음하게 만들었으니까.
저 검은 무복을 입은 이는 교의 방식 그대로……. 아니, 교보다 더욱 능수능란하게 상대를 공포로 짓누르며 일방적인 학살을 벌이고 있었다.
집법사자는 슬쩍 시선을 틀었다.
조금 전까지 어떻게든 달아나려 발악하던 빙궁도들이 몸을 움찔움찔하고 있었다. 저 선두에 선 이의 활약을 보며 조금씩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있는 것이었다.
‘안 돼.’
그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저놈의 뒤를 따르는 이들은 이미 용기백배하여 더는 교도들에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저 기세에 빙궁의 잡놈들마저 휩쓸린다면 남은 것은 패배뿐이리라.
“노오오오오오옴!”
콰아아아아아앙!
결국 집법사자가 진각을 내밟았다.
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지며 움푹 패였다. 그 거대한 굉음에 전장의 시선이 일거에 그쪽을 향해 확 쏠렸다.
“……쓸모없는 것들. 물러나라!”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교도들이 그의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서걱!
하지만 몸을 빼는 그 와중에도 한 사람의 마교도가 피를 뿌리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청명의 검이 몸을 돌리며 달아나는 이의 등을 매정하게 꿰뚫어 버린 것이었다.
“이…….”
집법사자가 분노에 살짝 몸을 떨었다.
하지만 청명은 태연한 얼굴로 검을 휘둘러 묻었던 피를 흩뿌렸다.
“……빌어먹을 놈이.”
노기 어린 집법사자의 눈과 무심한 청명의 눈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어느새 싸움은 멈춰 있었다.
뒤로 물러선 마교도들이 집법사자의 뒤에 도열하고, 화산의 제자들이 청명의 뒤에 도열했다.
실로 기묘한 대치였다.
북해의 땅에 그 주인을 자처하는 빙궁의 무사들을 두고, 북해를 터전으로 삼지 않는 두 세력이 대치하고 있었다.
빙궁의 경호대주 송원은 그 광경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대체 우리는 뭐란 말인가?’
허수아비가 따로 없지 않은가.
이곳은 빙궁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빙궁의 무사였다.
하지만 지금 이 빙궁에서 관련도 없는 이들이 승부를 벌이고 있고, 빙궁도들은 그 모습을 그저 멀찍이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그는 전방의 두 집단을 보던 시선을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여사혼과 한이명이 다른 빙궁도들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로 마교와 화산을 응시하고 있었다.
송원은 입술을 짓씹었다.
‘저 어린 중원의 무사들조차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우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 뭘 하고 있단 말인가?’
이 척박한 북해의 땅에서 버텨 낸다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자부심을 안고 살았다. 저 기름진 땅에서 살아가는 중원인들은 절대 그들과 같은 독심을 품지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 저들은 그런 빙궁도들의 믿음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 검으로 증명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으로 고개를 떨구려던 송원의 눈에 불현듯 어떤 광경이 스쳤다.
‘음?’
그의 고개가 조금 더 위로 향한다.
빙궁의 성.
뻥 뚫려 버린 구멍을 통해 한 아이가 이쪽을 내려다보는 것이 보였다.
설소백이었다.
이제는 빙궁의 궁주가 된 그가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벽에 우뚝 선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굳게 다문 입술과 단호한 눈매가 송원의 눈에 각인되듯 박혔다.
홀린 듯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송원의 고개가 다시 화산의 제자들에게로 돌아갔다.
‘아직…….’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건 아니다.
송원이 주먹을 꽉 움켜잡으며 그 어린 무사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어떤 대화도 오고 가지 않았다.
두 집단은 그저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북해의 칼바람보다 더한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더러운 불신자 놈들이 감히…….”
집법사자의 입술 새로 섬뜩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교의 행사를 방해한 이들이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모르는 모양이군. 그 목숨이…….”
“뭐래, 병신이. 방해 안 해도 죽일 거면서.”
“…….”
살짝 당황한 집법사자가 입을 닫았다.
조금 전까지 잘 벼린 명검과도 같은 기세를 내뿜던 이가 꺼낸 말이라기엔 너무도 질이 낮고 천박했다.
“여하튼 마교 새끼들은 대가리가 나쁘다니까? 지가 뭐라고 지껄이는지도 몰라요, 으휴. 하여튼 등신 새끼들이야, 전부.”
“…….”
집법사자의 얼굴에서 감정이 모래처럼 빠져나갔다.
지금껏 청명이 상대했던 이들은 대체로 여기쯤에서 잔뜩 노호성을 터트리며 길길이 날뛰었다.
하지만 집법사자는 되레 차가운 분노를 가슴속에서 태우는 듯 무시무시한 눈으로 청명을 노려볼 뿐이었다.
“하나 제안하겠다.”
“음?”
“빙정을 가지고 있는 게 누구냐?”
“난데?”
청명이 태연하게 자신을 가리켰다.
그 뻔뻔한 얼굴을 보며 집법사자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빙정을 내놓아라. 그럼 여기서 물러나겠다. 살려 준다는 약속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너희의 능력이라면 교가 다시 나서기 전에 이 북해를 떠나 중원으로 돌아갈 수는 있겠지.”
“오, 그거 칭찬인가?”
청명이 히죽거리며 물었다. 집법사자는 이를 한차례 악물고 다시 차갑게 말했다.
“……마지막 경고다. 빙정을 놓고 물러가라. 그럼 그 목숨은 부지하게 해 주겠다. 만약 이 제안을 받지 않을 시에는…….”
우드드득.
그의 주먹이 뼈 부러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꽉 쥐어졌다.
“너희는 교가 얼마나 공포스러운 곳인지 몸소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청명은 대놓고 비웃음을 흘렸다.
“하여튼 요즘 새끼들은 정신머리가 없어요.”
뭐?
공포?
야, 이 새끼야 내가 너보다 더 잘 알아.
아오. 이걸 말로 할 수도 없고!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집법사자를 향해 건들건들 말했다.
“뭐, 제안은 나쁘지 않네. 나도 쓸데없이 싸우는 거 안 좋아하고.”
그러자 뒤에 있던 청명 일행의 고개가 일제히 옆으로 살짝 꺾였다. 흡사 헛것을 들은 표정이었다.
지금 저 새끼가 뭐라고 한 거지?
“다 좋은데, 딱 하나 문제가 있네.”
“그게 뭐냐?”
“네 말대로라면, 우리가 빙정을 주면 너희가 순순히 물러나겠다는 거잖아. 그치?”
“그렇다. 위대하신 그분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다.”
마교도에게 천마의 이름을 걸고 하는 약속은 그 육신과 영혼을 불살라서라도 반드시 지켜야만 할 계약과도 같았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청명은 이들의 제안이 결코 상황을 일단 모면하기 위한 게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하나.
“그게 문제야, 그게.”
“……뭐라?”
“누가 너희를 보내 준대?”
내내 건들대던 청명이 갑작스럽게 차가운 눈빛으로 입꼬리를 뒤틀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
그의 두 눈에선 살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내 눈에 띈 이상 너희한테 남은 결과는 하나뿐이야. 화산은 마교 놈들을 살려 보내지 않아.”
그러자 집법사자가 눈을 부릅뜨며 되물었다.
“지금 뭐라 했느냐?”
“귀라도 먹었나? 살려 보내지 않겠…….”
“화산?”
그 순간 집법사자의 몸에서 광포한 마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폭풍과도 같은 검은 마기가 그의 전신을 휘감고 돌았다.
콰아아아아아!
어마어마한 힘과 기운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빙궁도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마교도들 역시 두렵기 짝이 없었지만, 저자는 그들에 비해서도 격이 달랐다. 상대조차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화산? 화산이라고?”
“…….”
하지만 정작 그의 앞에 선 청명은 겁을 집어먹기는커녕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쟤 갑자기 왜 저러지?
“그래……. 그렇지. 그 꽃을 피워 내는 검. 그 검을 보고도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채지 못하다니……. 이리 멍청할 데가 있는가!!!”
혼잣말처럼 조용히 시작된 목소리가 마지막에는 거의 절규처럼 터져 나왔다.
“화산! 화사아아아안! 증오스럽고 또 증오스러운 화산 놈들이 잘도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구나! 생각이 바뀌었다. 너희는 절대 이곳에서 살아 돌아가지 못한다. 핏방울 하나, 살점 하나까지 모조리 씹어 삼켜 주겠다!”
그제야 대충 상황을 이해한 청명이 피식 웃었다.
“아아. 그러고 보니까 너희들도 알지? 천마 모가지를 누가 잘랐는지.”
“노오오오오옴!”
집법사자가 아수라처럼 변해 버린 얼굴로 혈광을 뿜었다.
“주교께서도 너희를 보았다면 같은 명을 내리셨을 터! 감히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을 죽어서도 후회하게 해 주겠다!”
“그건 내가 할 말이고, 이 새끼야.”
청명의 검이 집법사자를 똑바로 겨누었다.
“와 봐. 천마랑 똑같이 목 잘라 줄 테니까.”
“크르르.”
짐승 같은 신음을 흘린 집법사자는 양손을 펼쳤다. 그러자 시커먼 마기가 엄청난 기세로 흘러나왔다.
“호오?”
청명은 그 모습을 보며 씨익 웃었다.
‘모조리 등신이 된 건 아니었네.’
빙궁이 약해졌듯, 마교도 예전의 마교가 아니다. 물론 그 흉악함이야 예전과 다를 게 없다지만, 실력은 감히 과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저 집법사자라는 놈은 과거에 그가 상대했던 마교도들과 비슷한 위압감을 흘리고 있었다.
“증오스럽고 또 증오스러운 이들이여. 교의 겁화가 너희의 영혼마저 태울 것이다! 그분께서 부활하실 이 신성한 대지를 너희의 피로 축복하리라!”
집법사자는 청명을 향해 느리게 걷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이 땅을 쩍쩍 파고들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는 마치 소용돌이처럼 전신을 맹렬하게 휘감고 돌았다.
마치 검은 폭풍이 밀려오는 것과 같은 광경이었다.
“아……. 아아…….”
빙궁도들이 하나둘 다리가 풀린 듯 그 자리에 주저앉기 시작했다. 심지어 청명의 뒤에 있던 화산의 제자들과 혜연마저도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하지만.
“근데 이 새끼가 아까부터…….”
청명은 검을 빙글 돌려 단단히 잡더니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위협적인 검은 폭풍을 향해 태연히 나아가는 그의 모습에 모두가 경악하여 입을 벌렸다.
대체 뭘 어쩌…….
그 순간.
파아아앗!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청명이 날린 검기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집법사자를 향해 날아들었다.
마기를 휘감은 채 다가오던 집법사자가 순간적으로 고개를 꺾어 날아드는 검기를 피해 냈다.
스슷.
그럼에도 검기의 끝은 집법사자의 볼을 가르고 지나갔다.
창백하던 뺨에 붉은 선이 생겨나더니 이내 시뻘건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마교도 새끼 주제에 뭐라도 된 양 마음대로 지껄이네.”
청명이 입술을 뒤틀며 씹어뱉듯 말했다.
“깔끔하게 죽여 줄 테니까 저승에 가거든 네 윗대들에게 물어봐.”
내가 누군지 말이야.
비틀린 미소를 짓고 있던 청명의 모습이 훅 사라졌다. 그리고 이내 검은 선이 되어 집법사자를 향해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