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2화. 이제부터 기억하게 해 주자고. (2)
집법사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나약해 빠졌군.’
완전히 와해되어 무너지는 빙궁의 모습을 보니, 통쾌하다기보단 속이 긁히는 느낌이었다.
애초에 빙궁 따위가 교의 상대가 될 것이라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나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광경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한심스러웠다.
‘평화에 젖어 스스로를 채찍질하지 않은 이들은 이리 되어 버리는 건가.’
물론 교의 진정한 적은 북해의 잡것들이 아니라, 저 중원의 버러지들이다. 이들이 이처럼 하찮다 해서 중원의 그 구파일방과 신주오패를 같은 범주로 생각하는 것은 크나큰 착각일 터.
아직은 힘이 부족했다. 아직은.
‘천마재림.’
집법사자는 살짝 주먹을 움켜쥐었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그 짧은 진언에 얼마나 많은 소망이 담겨 있는가?
천마께서 강림하신다면, 저 중원의 비열한 악도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마의 하늘을 열어젖힐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빙정을 회수해야만 했다.
그날.
천마께서 부활하시는 그날이 오면, 비천한 불신자들은 물론이고 신심을 잃어 교도들을 비웃은 배교자들 역시 정화의 불꽃 속에 영원토록 타오를 것이다.
우드드득.
주먹을 움켜쥔 집법사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느려 터진 것들! 서둘러라! 주교께서 우리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계신다!”
“예!”
바로 그때였다.
흠칫.
미묘한 위화감을 느낀 집법사자의 고개가 위쪽으로 획 꺾였다.
‘……뭐지?’
지금 분명…….
몇몇 교도들이 벽을 타고 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게다가 이미 열 명에 가까운 이들이 뚫린 벽을 통해 안으로 진입했다.
그런데 뭐가 문제이기에…….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쪽을 보던 집법사자의 눈이 돌연 커다래졌다.
뻥 뚫린 구멍을 통해 무언가가 구름처럼 피어나는 것이 또렷하게 보인 것이다.
‘……꽃?’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이내 거대한 폭음과 함께 안으로 밀고 들어갔던, 마교도들이 밖으로 튕겨 나왔다.
집법사자의 눈이 의혹으로 가득 찼다.
밖으로 튕겨 나온 이들이 모두가 당한 건 아니다. 확실히 의식을 잃고 추락하는 이들도 있지만, 상대의 공격을 피해 뒤로 몸을 날린 이들이 절반 이상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집법사자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물러선다?’
교는 후퇴를 모른다.
저 저열한 불신자들을 상대하면서 물러선다는 건 천마를 모시는 교도들에게 있어, 어찌 보면 죽음보다도 더한 수치다.
그런데 한둘도 아니고, 네댓이 동시에 뒤로 물러난다고?
‘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다행히 그 의문은 금세 풀렸다.
튕겨 나온 마교도들에 이어 한 무리의 무인들이 일제히 그곳을 박차고 나왔기 때문이다.
집법사자의 눈이 뒤흔들렸다.
“저…….”
선두에서 비조처럼 뛰어오른 이의 검 끝이 달빛을 받아 광채를 내뿜었다. 실로 두 눈에 새겨지는 듯 강렬한 모습이었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일순간 마치 혼을 빼앗긴 것처럼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
검을 한차례 휘두른 그는 그야말로 쏜화살처럼 아래로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검 끝에서 피처럼 붉은 꽃 형태의 검기가 줄기줄기 피어나기 시작했다.
“……매화?”
집법사자의 입이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휘날리는 꽃잎을 휘감은 청명이 아래로 또 아래로 회전하며 강하했다.
벽을 오르던 이들이 대경하여 몸을 띄워 냈지만, 휘날리는 매화는 사정을 봐주지 않고 그들의 육체를 꿰뚫었다.
푸우우우웃!
경동맥이 꿰뚫린 마교도가 폭포처럼 피가 뿜어져 나오는 목을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하지만 그뿐, 추락하는 자신의 몸을 어찌할 순 없었다.
쿠우웅!
쿠우우우웅!
벽을 타고 오르던 이들이 하나둘 땅으로 추락했고, 매화검기를 휘날리던 청명이 그 바로 옆으로 착지했다.
탁.
빙글.
내려서자마자 검을 역수로 잡은 청명이 몸을 살짝 낮추었다. 경련하며 몸을 억지로 일으키는 마교도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없이 서늘했다.
“이 새…….”
콰아아아아아아앙!
“아미타불.”
“…….”
하지만 청명이 뭔가 말을 하기도 전에 허공에서 냅다 백보신권을 날려 버린 혜연이 그의 옆으로 사뿐히 착지했다.
곤죽이 된 마교도를 보는 혜연의 표정은 의기양양했다. 그러다 슬쩍 뚱한 청명의 얼굴을 살핀 그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아니. 잘했어.”
아암, 잘했지.
너무 잘해서 문제지.
그런 둘의 뒤로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착지했다.
모두 다 내려왔음을 확인한 청명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앞으로 박차고 나갔다. 이제 더는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비켜, 새끼들아! 방해된다!”
청명이 버럭 고함을 내지르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던 빙궁도들이 분분히 옆으로 물러났다. 상황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살벌한 기세로 달려오는 저 중원인의 앞을 막아선 안 된다는 것 정도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길이 트이자 검은 무복을 입은 마교도들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피에 젖은 채 연신 같은 말을 중얼대는 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악귀가 따로 없었지만, 청명은 오히려 희열에 부풀어 웃음을 흘렸다.
콰앙!
바닥이 부서지도록 거칠게 경공을 전개한 청명이 단숨에 그들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검을 내지른다. 아니, 내지르려 했다.
하지만 그의 검이 채 뻗어지기도 전에 그의 얼굴 바로 옆으로 튀어나온 검이 쾌속하게 마교도를 찔러 들어갔다.
카캉!
검은 막아 내었지만 힘을 이겨 내진 못한 마교도가 결국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
“어쭈?”
청명보다 먼저 검을 찔렀던 백천은 다시 한번 기합을 터뜨리며 마교도를 집요하게 공격해 들어갔다.
“이 애송이 놈이!”
마교도가 이를 갈며 읊조리자 청명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애송이?
‘뭐, 그 말은 맞는데…….’
파아아아앗!
청명이 휘두른 검이 그를 빠르게 베어 냈다. 가슴부터 배까지 긴 상흔을 입은 마교도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또다시 뒤로 물러났다.
“네가 무시해도 될 애송이는 아니지!”
“타아아앗!”
백천이 허공으로 솟구치며 매화검기를 흩뿌렸다. 붉게 물든 매화는 청명이 가야 할 곳을 선점하고 먼저 상대의 손발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렇지!”
저도 모르게 흥이 난 청명이 낄낄 웃어 대며 앞으로 돌진했다.
“이놈들이!”
두 눈에 핏발을 세운 마교도가 거칠게 손을 휘둘러 왔다. 시커멓게 물든 손에서 뿜어진 검은 장력이 금방이라도 청명의 머리를 터뜨려 버릴 것처럼 파괴적인 모양새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청명은 그쪽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앞쪽의 마교도의 심장에 검을 쑤셔 박았다.
그리고.
카가가가강!
뒤에서 빛살처럼 휘둘러진 검이 자연스레 청명에게로 날아들던 장력을 튕겨 냈다.
부드럽게, 또 날렵하게!
최소한의 힘만으로 장력의 방향을 틀어 버린 유이설은 차게 가라앉은 눈으로 섬전 같은 검기를 내뿜었다.
“큭!”
몸뚱이를 갈라 버릴 듯 날아오는 예리한 검기에, 마교도들이 좌우로 빠르게 몸을 날려 피했다.
하나 그건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쇄애애애액! 쇄애액!
유이설의 뒤쪽에서 쾌속하게 발출된 당소소의 비도들이 흩어진 그들을 끈질기게 추적했기 때문이다.
“이…….”
“거머리 같은!”
그 순간 청명의 뒤에서 거센 반박이 튀어나왔다.
“거머리는 네놈들이고!”
“쳐라!”
파아아앗!
순식간에 청명의 머리 위를 타넘으며 돌진한 윤종과 조걸이 매화를 흩뿌리며 진영을 무너뜨린 마교도들을 덮쳤다.
일말의 망설임도, 일말의 주저도 없었다.
그들의 두 눈에 남은 건 단호한 결의뿐이었다.
두 사람의 검기가 날카롭게 마교도들의 머리로 강하했다.
그리고.
“아주…….”
청명이 피식 웃으며 벼락처럼 앞으로 뛰쳐나갔다.
“신나셨구먼! 이 양반들!”
파아아아앗!
대기를 찢어발기는 파공음과 함께 청명의 검이 당황한 마교도의 몸을 사선으로 갈랐다.
촤아아아아악!
베인 상처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 피가 청명의 전신을 적셨지만, 청명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아아아아아아악!”
가슴을 베인 마교도가 괴성을 내지르며 청명에게 달려들었다. 심장을 반쯤 베이고도 멈추지 않고 달려드는 그 모습은 섬뜩하다 못해 기괴했다.
누구라도 흠칫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나.
콰득!
청명은 달려드는 마교도의 목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꽂아 넣었다.
“끄륵…….”
서걱! 서걱!
그뿐만이 아니었다. 흑살장의 기운을 잔뜩 품은 손목을 단숨에 베어 내고, 무릎이 잘라 냈다. 그리고 마지막 일 검은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마교도의 목을 단숨에 쳐 날렸다.
패애앵!
잘린 머리가 회전하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한 치도 흔들리지 않는 검 끝.
조금의 주저도 없는 살검(殺劍).
청명의 실력은 평소보다 배는 더 강해진 느낌이었다.
오로지 상대를 죽이기 위한 검을 펼쳐도 될 상대를 만나니, 청명은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처럼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이노오오옴!”
기세에서 밀린 마교도들은 빙궁도들을 상대할 때와는 달리 여유를 잃고 노호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청명은 피에 굶주린 늑대처럼 그들을 덮치고 물어뜯었다.
콰득!
날카로운 도를 잡은 손에 청명의 검이 박혔다. 순식간에 잘려 나간 손가락과 함께 도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서걱!
손목을 잘라 내고도 맹렬히 움직인 검이 어깨를 베었다.
푸욱!
그리고 배를 찔러 상대의 움직임을 잠깐 막은 검이 순식간에 뽑혀 나오며 양쪽 허벅지에 깊은 자상을 새겼다.
양다리와 배까지 당했으니 더 이상 달려드는 건 불가능했다.
“처, 천마재…….”
휘청거리는 마교도의 아래턱에 청명의 무릎이 쑤셔 박혔다.
쾅!
폭음과 함께 너덜너덜해진 몸뚱이가 피를 뿌리며 뒤로 날아갔다.
“다시 지껄여 봐! 그 아가리가 멀쩡하다면!”
청명이 두 눈으로 불을 뿜어내며 가공할 기세로 내달렸다. 백천은 그런 그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반응했다.
“따라붙어!”
“예!”
달려 나가는 백천의 시선에 경악한 눈으로 지켜보는 빙궁도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래. 놀랄 만도 하지. 나도 놀라는 중이니까.’
조금 전 그들이 맞서 싸웠던 마교도와, 지금 화산의 제자들이 상대하는 이들이 다를 리 없다.
하나 지금 화산의 제자들은 싸움에 임하며 어떤 부담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심장을 죄어 오던 음울함도, 몸을 덜덜 떨게 하던 공포도 씻은 듯 사라졌다.
남은 것은 그저 자꾸만 끓어오르는 고양감과 충만한 자신감뿐.
선두에 청명이 선 것만으로 힘이 넘쳐흐르고, 자신감이 솟구쳤다.
단 한 명의 절대고수가 전장의 판도를 바꾼다.
백천은 그제야 그 말이 왜 나왔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건 직접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었다.
카가가각!
상대를 검째 베고 목을 찌르는 청명의 움직임은 경쾌하다 못해 과격하게 느껴졌다. 저놈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하면 무서울 정도였다.
백천은 따르는 사형제들에게 외쳤다.
“혼자 하게 내버려 두지 마라! 우리는 화산이다!”
“예, 사숙!”
“물론!”
화산의 제자들이 경쟁적으로 돌진했고, 그 뒤에선 웅혼한 혜연의 불호 소리가 울려 퍼졌다.
파아아앗!
상대의 목이 날아가며 청명의 얼굴에 뜨거운 피가 흩뿌려졌다. 입술을 핥은 그는 입꼬리를 뒤틀었다. 번뜩이는 눈에서 살기가 쏟아졌다.
‘이상한 기분이군.’
이 끔찍한 짓거리를 다시 해 대고 있는데, 미묘한 익숙함과 그리움 같은 게 느껴졌다. 코를 찌르는 피와 죽음의 냄새. 몸을 적시는 뜨거운 피와 사방에서 싸늘하게 식어 가는 시체들.
한때 신물 나도록 봤던 광경이다.
당시의 그는 이런 전장을 헤치며 살았다. 죽이고 또 죽이며 앞으로만 나아갔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쿵!
청명이 머릿속의 잡념을 날려 버리며 마교도의 무릎을 걷어찼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상대의 무릎이 거꾸로 꺾이며 자세가 낮아졌다. 딱 목을 날리기 좋게 말이다.
그러니 망설일 이유 따윈 없다.
파아아앗!
일 검에 상대의 베어 버린 그는 목이 없어진 시체를 반으로 갈라 걷어차고는 더운 숨을 토해 냈다.
그래. 그때도…….
그때도 지금과 그리 다를 건 없었지.
다만, 그저…….
청명이 무릎을 살짝 굽혔다. 살기와 광기로 뒤범벅이 된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는 다시금 달려드는 이의 조기(爪氣)를 후려쳐 날렸다. 이어진 벼락같은 쾌검이 상대의 상완과 어깨를 찔러 상체를 완전히 열었다.
상대를 무력화한 청명은 당연하다는 듯 그를 두고 지나치려다 움찔했다.
‘실수……!’
옛 생각이 자꾸 나다 보니 예전의 습관이 나와 버렸다. 이제는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음에도 말이다.
화들짝 놀란 청명이 이를 악물고 몸을 틀며 검을 다시 내지르려 했다.
하지만 그때.
파아앗!
그의 등 뒤에서 새하얀 검이 환영처럼 날아들어 상체가 열린 마교도의 심장에 박혔다.
콰득.
“…….”
청명이 눈을 크게 떴다.
한순간 상대의 심장을 파고든 한철검이 과거 그가 보던 매화검의 환영과 겹쳐졌다.
- 사형!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그리운 목소리에, 청명은 저도 모르게 뒤를 획 돌아보았다.
상대의 심장에 검을 틀어박은 백천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말이다.
“…….”
익숙한 얼굴은 없다.
더없이 그리웠던 얼굴은 아니다.
하나…….
청명이 검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며 말없이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걱정 마라, 멍청한 놈들아.’
너희가 없어도 여기 내 뒤를 받쳐 주는 놈들이 있으니까.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눈가를 살짝 누른 청명은 이내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저 멀리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저 새끼가 대가리다! 죽을 각오로 따라붙어!”
“알았다!”
마침내 집법사자를 포착한 청명이 빛살이 되어 앞으로 나아갔다.
언제고 꽃은 지기 마련.
하나 모질디모진 겨울을 버텨 내면, 매화나무는 다시 새로운 꽃을 피운다.
화산의 매화가 북해에 만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