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1화. 이제부터 기억하게 해 주자고. (1)
“사고!”
청명의 목소리에 유이설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덥석 잡아 청명에게로 날렸다.
팽그르르 회전한 암향매화검이 청명의 손에 안착했다.
턱.
그제야 청명은 맹렬하게 뿜어내던 살기를 수습하고 윤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형.”
“……어?”
“식겁했겠네.”
윤종이 멍한 눈으로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이거…… 걱정해 주는 건가?
“그래. 진짜 죽을 뻔했지……. 정말 고맙…….”
“와 씨, 검이 없는 걸 잠깐 잊었지 뭐야. 나도 순간 당황했다. 뒤늦게 장력이라도 날렸으니 망정이지. 조금만 더 늦었으면 사형 목 싹 날아갔겠어?”
“…….”
뭐, 이 새끼야?
윤종의 전신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방금 지옥문을 열었다 닫았다는 게 새삼스레 실감이 난 것이었다.
“……원시천존이시여.”
“살려 주긴 청명이가 살려 줬는데 천존은 왜 찾으십니까?”
“넌 좀 다물라고, 좀…….”
윤종이 조걸을 힘없이 타박하며 얼굴에 흐른 땀을 닦아 내었다.
이상하지.
상황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고, 그저 청명이 놈만 운기를 마쳤을 뿐이다. 그런데도 일이 끝난 후처럼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아직 안심할 단계가 아니라는 걸 충분히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그건 윤종만의 느낌은 아니었다.
분위기가 확실히 일변했다.
그저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뿐이건만, 맹렬한 파도처럼 몰아치던 마교도들의 공세가 멈춰 버린 것이다.
그들의 시선은 당연히 청명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흐음.”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 청명은 슬쩍 화산 제자들의 상태를 먼저 살폈다. 곳곳에 상처를 입은 그들을 본 청명의 눈이 살짝 가느스름해졌다.
“쯧.”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마교의 무서움을 실감할 수 없다. 조잡한 언어로는 저들의 광기를 정확히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그렇기에 굳이 이런 방법을 택했다.
다만…….
청명의 얼굴에서 일순간 감정이 사라졌다.
스르르릉.
암향매화검이 천천히 뽑혀 나왔다. 새하얀 검신이 번쩍였다.
객관적으론 꽤 멋질 만한 광경이었지만, 지금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의 감정은 섬뜩함 쪽에 가까웠다.
마교도 중 하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지?’
그래 봐야 고작 애송이 하나가 운기를 마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저 애송이 놈을 집중적으로 노린 것은 그가 위협적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저놈이 빙정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모두가 손을 멈추었는가? 심지어 자신들마저도.
정신을 차려 보니 저 역시 어느 순간 손을 넣고 저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유조차 알지 못한 채 말이다.
그는 입술을 달싹이며 평소처럼 진언을 외었다. 공격 시작의 신호였다.
“천마재림 만…….”
파아아아앙!
하지만 그런 마교도의 귓가에 순간 공기를 찢어발기는 파공음이 들려왔다.
‘무슨?’
이상을 알아차린 건 바로 그때였다.
입이 굳어 버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분명 머릿속으로 생각하려던 게 아니라 입 밖으로 내뱉으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입이 열리지 않고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저 머릿속에서 맴도는 것이 전부였다.
‘왜…….’
이내 그의 시야가 급격하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현상에 당황한 그는 급히 손을 움직이려 했지만 감각은 순식간에 멀어져 버렸다.
온 세상이 옆으로 기울어진다.
세상이 마침내 거꾸로 뒤집히고, 시야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몸뚱이가 들어오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이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렇게 의식이 끊어졌다.
툭.
잘린 머리가 바닥으로 맥없이 추락했다.
믿지 못할 광경에 마교도들이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
“뭐…….”
일 검.
단 일 검이었다.
저 어린 도사 놈이 장난처럼 한 번 휘두른 검에, 선두에 있던 이가 저항조차 해 보지 못하고 단숨에 목이 잘린 것이다.
마교도들이 처음으로 술렁이며 경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청명은 조금의 변화도 없는 표정으로 나직하게 말했다.
“계속 헛소리 지껄여 봐.”
당연하게도, 목이 잘린 이는 진언을 욀 수 없었다.
청명은 섬뜩한 눈으로 바닥에 떨어진 마교도의 목을 노려보았다. 감히 그의 앞에서 천마의 진언을 읊다니, 목이 잘린 정도로 끝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었다.
그그극.
암향매화검 끝이 바닥을 스치듯 가볍게 긁었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경고음처럼 울려 퍼졌다.
“걱정할 것 없어.”
그의 입가가 뒤틀려 올라갔다.
“너희는 절대 저렇게 쉽게 죽지 못할 테니까.”
파아아앗!
바닥을 박찬 청명이 말 그대로 섬전처럼 선두의 마교도에게 달려들었다.
노기와 살기로 뒤범벅된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퍼뜩 정신을 차린 마교도는 그를 향해 양손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뿜어져 나온 기다란 손톱 형태의 조기가 청명의 육체를 금방이라도 난도질해 버릴 것만 같았다.
‘멍청한!’
이건 용기도 뭣도 아니다. 반격을 예상하지 않은 무모한 돌진일 뿐.
적어도 청명을 상대하는 마교도는 그리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크게 틀리지 않은 듯했다. 그의 손톱은 거의 청명의 몸을 갈기갈기 찢을 기세로 코앞까지 도달했으니까.
불쑥.
하지만 그 순간 청명의 암매검이 앞으로 쭉 뻗어졌다.
무심하리만치 단순한 움직임으로 뻗어진 그 검은 맹렬하게 허공을 할퀴는 조기의 틈으로 불쑥 밀고 들어왔다.
마교도의 눈에 희열이 차올랐다.
이놈이 지금껏 상대한 놈들이라면 바로 이 순간 몸을 뒤로 물리며 허점을 노출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교도들에게 검에 찔리는 정도는 피할 이유가 되지 못했다.
몸에 검이 틀어박히는 대가로 상대를 갈기갈기 찢어 낼 수 있다면 상처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죽어…….”
하나 그 순간.
부르르르.
청명의 검 끝이 살짝 떨린다 싶더니 이내 좌우로 크게 요동쳤다.
퉁! 투웅!
마교도의 양손 사이로 파고든 검이 그의 손목을 노리고 들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마교도의 양팔은 좌우로 튕겨 나가고 말았다.
‘엇?’
아무리 손끝에서 강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해도, 팔이 제 위치에 있지 못하면 무용지물.
푸욱!
활짝 열려 버린 마교도의 가슴에 청명의 검이 틀어박혔다.
“큭…….”
가슴 한가운데를 파고드는 매서운 검 날에, 마교도는 두 눈에 살기를 시퍼렇게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죽여 버…….”
하지만 그 말조차도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푸욱! 푸욱! 푸욱!
일말의 틈도 주지 않고 연이어 내질러진 검이 마교도의 가슴을 순식간에 십여 번 이상 뚫었다.
전신이 십수 번 꿰뚫리는 어마어마한 고통에 마교도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콰드드득!
그리고 그 벌린 입으로 암매검이 꽂혔다.
“끄륵…….”
입으로 들어간 검이 목 뒤로 빠져나왔다. 숨이 끊긴 마교도의 육신이 검 끝에 꿰인 채 축 늘어졌다.
청명은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눈으로 절명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파아아앗!
검을 휘둘러 빼낸 후 마교도의 시신을 그대로 걷어차 버렸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마교도의 몸이 거세게 튕겨 나갔다.
이미 죽어 기운으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몸뚱이는 청명의 공격을 버텨내기에 너무도 나약했다.
몸 곳곳이 터지며 피 보라가 퍼졌다. 빠른 속도로 날아드는 동료의 시신을 본 마교도들이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물렸다.
그리고 그건 절대 하지 말았어야 할 실수였다.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친 동료의 육체 바로 뒤에서 청명이 먹이를 덮치는 맹수처럼 솟구친 것이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마교도의 눈앞에,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청명의 눈이 보였다.
흡사 감정을 도려낸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 무심함 뒤로 타오르는 맹렬한 적의와 분노가 서늘하게 온몸을 휘감았다.
심장이 얼어붙은 듯 온몸이 옥죄었다.
파아아앗!
청명의 검이 그런 그의 목을 정확히 노리고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대로 순순히 당할 실력이었다면 마교도들이 공포의 상징으로 군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순간적으로 몸을 뒤로 젖히며 피하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서걱.
목젖 바로 아래가 한 치 넘게 갈라지는 걸 피하진 못했다.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고통이 느껴진다는 것 자체가 살아 있음의 증거였다. 사신의 낫이 자신을 스치고 지나갔음을 직감한 마교도의 피가 서늘하게 식었다.
하지만.
마교도의 목을 얕게 가른 청명의 검이 허공에서 우뚝 멈추었다.
부르르르.
그 끝이 가볍게 떨린다 싶더니, 이내 피처럼 붉은 매화검기를 줄기줄기 뿜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피어난 매화가 마교도를 향해 폭우처럼 쏟아졌다.
막거나 피할 수도 없는, 피처럼 붉은 꽃잎들이 마교도의 몸을 거칠게 파고들었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몸을 꿰뚫는 소리가 마교도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폭풍을 막을 수 없듯,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꽃잎 역시 막아 낼 수 없다.
검기를 몸으로 다 받아내기도 전에 절명한 마교도가 바닥으로 털썩 쓰러졌다.
“…….”
미처 멈추지 못한 심장이 천천히 움직일 때마다 뚫린 목에서 피가 울컥울컥 솟구쳤다.
뜨거운 피에서 새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주변 공기는 더없이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파아앗!
무심하게 한차례 휘두른 검 끝에서 튄 피가 새하얀 석재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셋.
순식간에 세 명의 마교도가 그 목숨을 잃었다.
악귀처럼 빙궁도들을 학살하고, 화산의 제자들을 순식간에 죽음의 위기까지 몰고 갔던 마교도들이 숨이나 몇 번 쉴 만한 시간 동안 목이 잘리고 전신을 난자당했다.
뚫린 벽을 향해 몰아치는 눈보라보다 더욱 차디찬 공기가 장내를 휩쓸었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하는 그 무겁고 싸늘한 침묵을 뚫고 무심한 청명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금까지 꽤 즐긴 것 같은데.”
청명이 이를 드러내며 입꼬리를 뒤틀었다.
“이제 알겠지? 누가 사냥감인지.”
욱신.
마교도들이 이를 악물었다.
저 어린놈에게서 뿜어져 나온 살기가 피부를 찢어 버릴 것만 같았다.
“왜 겁을 먹지?”
청명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어차피 다 죽을 텐데.”
찰박.
청명은 바닥에 흥건한 피를 밟으며 무심히 걸었다.
혜연과 유이설은 무의식중에 그에게 길을 터 주었다. 그 와중에도 청명의 시선은 오로지 백천의 너머에 있는 마교도들에게 꽂혀 있었다.
백천을 지나친 청명이 마교도들 앞에 섰다. 칼을 틀어쥔 그들에게선 긴장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
백천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방해해서는 안 된다.’
지금의 보잘것없는 실력으로는 청명을 도울 수가…….
“사숙!”
“엇?”
청명의 부름에 백천이 움찔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청명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평소처럼 자연스럽고, 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사고! 사형! 소소!”
“오냐!”
“네, 사형!”
“등 뒤를 받쳐. 한 놈도 놓치지 않는다!”
“알았다!”
“예!”
“뭐 해, 이 땡중아!”
“아, 알겠습니다!”
화산의 제자들이 모두 일사불란하게 청명의 좌우, 뒤로 포진했다.
가만히 그들을 기다린 청명은 살짝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놈들이 머리가 나빠 잊은 모양이니 이제부터 기억하게 해 주자고.”
낄낄대며 잠깐 웃은 그는 힘주어 외쳤다.
“저 개 같은 마교 놈들을 지옥에 처박아 버린 곳이 어디였는지!”
화산 제자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화산.
그 두 글자를 짊어진 화산 제자들의 눈빛은 지금까지와 전혀 달랐다.
천하에 수많은 문파가 있다지만, 저 마교가 두려워해야 할 곳은 오직 하나뿐이다.
지금까진 그저 그들만의 자부심일 수밖에 없었던 화산의 희생.
때로는 원망했고, 때로는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던 그 희생이 지금 이 순간 그들의 등을 한없이 든든하게 받쳐 주고 있었다.
“준비는?”
“완벽하다!”
“그럼…….”
청명이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간다! 모조리 쳐 죽여 버려!”
“우오오오오오!”
선두에 선 청명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돌진했다. 그리고 그의 사형제들이 그에 호응해 한 호흡으로 치고 나갔다.
차디찬 북해의 땅.
마교도들의 어두운 마기 속에서, 화산의 매화가 더없이 붉게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