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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519화 (517/1,567)

519화. 많이 기다렸지? (4)

마교도들의 눈에 지금까지와 사뭇 다른 광기가 끓기 시작했다. 빙궁도들을 향해 달려드는 기세도 조금 전보다 훨씬 맹렬해졌다.

“막아라! 반드시 막아야 한다!”

한이명의 비명에 가까운 고함이 연신 등 뒤에서 터져 나왔지만, 빙궁도들 중 누구도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막는다?

무얼 위해서?

지금 그들에게 다가오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저 앞을 막아선 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같은 꼴을 당했다.

그런데 대체 무얼 위해 목숨을 걸고 저 앞을 막아서야 한단 말인가?

“으아아아아악!”

어떻게든 끌어 올렸던 용기는 앞쪽에서 비명이 울릴 때마다 깎여 나가고 날아가 버렸다.

“히, 히이익!”

“나, 나는,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적과 싸우기 위해 평생 수련해 온 이들이 저마다 겁에 질려 등을 돌렸다.

이건 그들을 탓할 일이 아니었다.

확고하게 자신들을 이끌어 줄 이도, 스스로 용기를 북돋울 목적도, 목숨을 걸고서라도 빙궁을 지켜 내겠다는 애정도 없는 이들에게 빙궁과 상관도 없는 중원인들을 지켜야 하니 저 악귀들과 맞서라 명하는 건 애초부터 무리였다.

한이명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 댔지만, 빙궁의 무사들은 전혀 그의 통제를 따르지 않았다.

“달아난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맞서 싸워라! 궁도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마라!”

실로 공허한 외침이었다. 핏발 선 한이명의 두 눈이 파들파들 떨렸다.

“빌어먹을!”

말로 되는 게 아니라면 직접 움직여야 한다.

“여 장로님! 지금 당장 다른 장로님들을 이끌고 저 마귀들을 막아야 합니다!”

“나, 나는…….”

“장로님!”

그는 여사혼을 향해 불같이 일갈했다.

“정신 차리십시오! 지금 빙궁을 이끌어야 할 사람은 장로님이십니다!”

하지만 그의 말에도 여사혼의 눈동자는 갈피를 잃고 이리저리 흔들리기만 했다.

“무, 무리가 아닌가……. 저들을 어찌 막으라고…….”

“장로님!”

한이명의 날카로운 고함 소리도 그의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그저 창백한 안색으로 계속 중얼거릴 뿐이었다.

“틀렸어……. 이건…….”

애초부터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여사혼은 전대 궁주를 보좌하는 자였고, 이렇다 할 대단한 지도력을 갖춘 이는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대단한 능력을 가진 이였다면 빙정 광산에 몇 년을 그대로 갇혀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그가 평시도 아닌 이런 전시에 공포에 질린 빙궁도들을 이끄는 것은 불가능했다.

“……제기랄.”

능력이 부족한 게 죄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전시에 병력을 이끌어야 하는 자의 능력이 부족한 것은, 더없이 큰 죄다.

‘대체 이 일을 어찌하는가…….’

한이명의 얼굴이 절망으로 암담하게 흐려졌다.

백천은 아래에 펼쳐진 광경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이제 더 이상은 무리로군.’

지금의 빙궁도들로는 마교를 막을 수 없다.

모두가 사기충천하여 최선을 다해 대항한다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병력 수에서 이만큼 차이가 나면 아무리 마교라도 극복하기 쉽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저리 겁을 집어먹고 달아나서는 마교도들에게 생채기조차 내지 못할 것이었다.

아무리 단련된 강군이라고 해도 지휘관이 없으면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지금 빙궁에는 저들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지휘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차라리 설천상이 빙궁의 궁주였다면 이 꼴은 아니었겠지.’

새삼 궁주라는 자리가, 한 문파의 장문인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하는 백천이었다.

검은 먹물 같은 마교도들이 점차 백색의 대지를 물들이고 유린하는 모습이 그의 눈에 똑똑히 박혔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일직선으로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꾸욱.

검을 잡은 백천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바닥을 디딘 발에도 힘을 주며 굳건히 섰다.

“후.”

그리고 짧게 숨을 내쉬었다.

등 뒤로 적을 보내지 않는다. 그 단순한 일을 실천하기가 얼마나 어렵고 힘들지 새삼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지금까지 그 일을 너무도 당연하게 해내던 놈이 있다는 것도.

콰아아아아아앙!

채 달아나지 못한 빙궁도들의 등에 검은 마기(魔氣)를 쏘아 낸 마교도가 광기를 줄줄 흘리며 성을 박차 뛰어올랐다. 아예 창문을 통해 침입할 작정인 모양이었다.

실로 가공할 속도로 오르는 적을 보며 백천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 갔다.

“시주!”

그때 들려오는 혜연의 목소리에, 백천이 재빨리 옆으로 비켜났다.

슬쩍 눈썹을 꿈틀한 혜연은 곧장 창이 난 벽을 향해 일 권을 날렸다.

콰아아아아아앙!

벽면이 단숨에 터져 나가며 앞쪽이 뻥 뚫렸다. 혜연이 빠르게 그 앞으로 붙어 서선 아래를 향해 권력을 내뿜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

소림칠십이종절예 중 하나인 아라한신권이 그 위용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황금빛의 경기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헛?”

“무슨!”

벽을 빠르게 타고 오르던 마교도들은 그 어마어마한 권력에 일순 당황하여 좌우로 흩어지며 몸을 날렸다.

미처 피하지 못한 이들은 그 위력을 이겨 내지 못하고 아래로 추락했다.

“아미타불!”

혜연의 입에서 웅혼한 불호가 흘러나왔다. 평소와 달리 노기가 서린 목소리였다.

눈앞에서 벌어진 처참한 살육은 자비를 평생의 가르침으로 안고 살아온 혜연조차 분노하게 만들었다.

“악적의 무리들!”

그가 이를 가는 소리가 백천의 귀에도 똑똑히 들릴 정도였다.

우드드득!

혜연은 주먹을 단단히 말아 쥐고 칼날 같은 시선으로 아래를 노려보았다.

쿠우우웅!

그리고 망설임 없이 아래를 향해 주먹을 연이어 내질렀다.

소림의 무승들도 대체 몇 종이나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소림의 수많은 권법. 그중에서도 가장 이름 높은 백보신권(百步神拳)이 펼쳐졌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신권(神拳)의 위력에 마교도들은 두 눈으로 새파란 살기를 내뿜었다.

온몸을 대번에 으스러뜨릴 만한 권력이 마구 쏟아지는데도 마교도들은 움츠리기는커녕 오히려 더 빠른 속도로 벽을 타고 올랐다.

카가가각!

내력이 실린 발이 벽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내력을 발출해 얻은 반동으로 십여 장 이상을 단번에 뛰어올랐다.

“아미타불!”

혜연 역시 지지 않고 노호성을 내지르며 아라한신권을 발출했다.

강력한 아라한신권을 정면으로 맞은 마교도가 피를 뿜으며 아래로 추락했다. 하지만 그 광경을 보며 백천은 오히려 얼굴이 희게 질리고 말았다.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군.’

추락하면서도 오히려 살기 어린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는 마교도들의 모습은, 가슴 한구석을 싸늘하게 식힐 만큼 섬뜩했다.

“시주!”

“압니다! 사매!”

“네!”

백천과 유이설이 혜연의 좌우로 섰다.

빙궁도들을 뚫고 나온 마교도들이 속속들이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혜연 혼자만의 힘으론 더 이상 막을 수가 없었다.

“크하아아아앗!”

벽에 붙어 있던 마교도 하나가 두 눈에서 붉은 안광을 줄줄이 내뿜으며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솟구쳤다.

백천은 얼굴을 굳히며 내력을 있는 대로 실어 검을 찔러 넣었다.

콰득!

검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마교도의 어깨를 파고들어 갔다.

하나 그 순간 마교도의 눈빛이 번뜩였다.

덥석!

그러더니 자신의 어깨를 뚫고 들어온 백천의 검 날을 시커멓게 물든 손으로 곧장 움켜잡았다.

한철검의 날이 보통 날카롭지 않은데도 잡고 늘어지는 데에 조금의 주저도 없었다.

“이……!”

그 모습에 대경실색한 혜연이 마교도의 몸에 십여 권을 후려갈겼다.

흡사 도끼로 장작을 패는 듯한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혜연의 권이 꽂힐 때마다 마교도의 몸은 연신 커다란 경련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럼에도 백천의 검을 잡은 손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입에서 피를 연신 게워 내면서도 오히려 검을 잡아당기기까지 했다.

백천은 입술을 꽉 물었다.

이내 어깨를 꿰뚫은 검이 새파란 검기를 뿜어내었다. 그리고 이내 어깨를 뚫은 검을 위쪽으로 콱 휘두르듯 들어 올렸다.

파아아아앗!

검이 어깨를 가르며 위로 뽑혀 나왔다. 동시에, 검 날을 잡고 있던 검은 손에서 붉은 피가 사방으로 뿜어졌다.

“큭!”

뒤로 튕겨 나간 마교도는 백천을 보며 입가를 뒤틀었다. 그리고 이내 아래로, 또 아래로 추락했다. 추락하면서도 그 얼굴엔 알 수 없는 웃음이 내걸려 있었다.

“…….”

성공적으로 한 놈을 막아 냈음에도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미친놈들.’

눈앞에서 이놈들을 상대해 보니, 빙궁도들이 왜 저리 겁쟁이처럼 줄행랑을 치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다르다.

이놈들은 지금까지 그가 상대한 어떤 이들과도 비교를 불허했다.

강함?

물론 강하다.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혜연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이리 쉽사리 밀어 내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이 진정 무서운 이유는 무위가 아니었다.

목숨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눈앞의 상대를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이들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감이 들었다.

눈에서 흘러나오는 광기가, 그 집요함이, 저 ‘광신(狂信)’이 상대하는 이들을 절로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유롭게 그런 것을 반추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혜원의 권력을 뚫고, 네댓의 마교도가 동시에 위쪽으로 뛰어오른 것이다.

파아아아앗!

유이설이 주저 없이 피워 낸 매화가 마교도들의 전신을 뒤덮었다. 시야를 가득 메운 새하얀 성벽과 순백의 대지. 그 위로 피처럼 붉은 눈이 휘날렸다.

서걱! 서걱!

저들 역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베인 상처에서 붉은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그뿐.

육체가 베이고 찢기고 있는데도 마교도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름 끼치는 진언을 실성한 듯 쉴 새 없이 속삭이며 그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아미타불!”

다급한 불호와 함께 황금빛 불광이 번쩍였다. 합장하고 있던 혜연의 양손이 좌우로 펼쳐지며, 웅혼한 장력이 전방을 휩쓸듯 나아갔다.

콰아아아아앙!

장력에 휘말린 이들이 뒤로 속절없이 튕겨 나갔다. 하지만 이를 피해 낸 이들은 끔찍한 소리를 질러 대며 화산의 제자들을 향해 흑수를 휘둘렀다.

꺄아아아아아아아!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끔찍한 귀곡성(鬼哭聲)이 귀를 찢어 놓을 듯 울렸다.

이윽고, 먹처럼 검은 마기가 벌떼처럼 날아들었다.

“큭!”

대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직감한 세 사람은 뒤쪽으로 빠르게 몸을 물렸다.

그리고.

턱.

터억.

그들이 물러난 자리로 결국 두 명의 마교도가 착지했다.

투두둑.

늘어뜨린 검은 손을 타고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마교도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지혈을 해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건지, 상처에는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화산의 제자들만을 사냥감 바라보듯 뚫어져라 응시했다.

번들거리는 그들의 눈을 보며 백천은 이를 사리물었다.

애초에 올라서지 못하게 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저 자리를 내어 준 이상, 이제 남은 건 목숨을 건 싸움뿐이었다.

그때, 가만히 이쪽을 응시하던 마교도가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빙정은 어디에 있나?”

백천은 피식 웃었다.

“마교 새끼들은 머리가 나쁜 모양이군. 그걸 내가 왜 말해 줄 거라 생각하지?”

“그래……. 그렇겠지.”

피에 젖은 마교도의 손이 순식간에 검붉게 물들었다.

“팔다리가 모두 뜯겨 나가고, 내장이 줄줄이 뽑혀도 같은 답을 할 수 있는지 보겠다.”

마교도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백천을 향해 돌진했다. 두 눈에서 혈광이 뿜어져 나왔다.

하나, 그 순간.

파앗!

오히려 백천이 섬전 같은 속도로 그에게로 달려들어 검을 내리쳤다.

콰아아앙!

한차례의 굉음이 울렸고, 마교도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자신의 손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흑살장을 전개한 그의 손에, 검 날이 반쯤 틀어박혀 있었다.

“큭!”

마교도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직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콰드드득!

백천은 그에 그치지 않고 내력으로 검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마교 놈들은 입으로 싸우는 모양이지만…….”

쾅!

마교도의 가슴을 거세게 걷어찬 백천이 몸을 뒤로 빼내며 검을 정확하게 앞으로 겨눴다.

“화산은 아니야.”

뒤로 밀려난 마교도는 입술을 천천히 핥았다. 손을 본 게 언제냐는 듯 그의 시선은 어느새 백천에게로 살기등등하게 고정되었다.

“너는 가장 끔찍하게 죽는다.”

“해보시든가.”

“크흐.”

어딘지 억눌린 듯한 소리로 웃은 마교도가 다시금 미친 사람처럼 진언을 외며 백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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