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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518화 (516/1,567)

518화. 많이 기다렸지? (3)

설소백은 식은땀이 흥건한 손을 소매 안으로 감추었다. 떨림이 가시질 않았다.

아득하기만 했다.

어린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충격적이고, 너무도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마교.’

희게 질린 머릿속에 청명이 했던 말만이 떠올랐다.

- 너도 잘 봐 둬. 지금 북해에 누가 있는지. 네가 대체 뭘 상대하고 있는 건지 말이야.

지금껏 대체 무얼 보고 있었단 말인가?

설천상을 쓰러뜨리고 북해를 되찾았다는 것만으로, 모두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승전보를 울려 버렸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음에도.

설소백은 싸늘해진 손끝으로 얼굴을 훔쳤다.

조금 전 궁주전에서 오고 갔던 대화를 생각하니, 화산의 제자들 앞에서 차마 얼굴을 들 엄두도 나지 않았다.

청명 도장은 빙궁을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했겠는가?

북해의 땅에 저런 마귀들이 숨 쉬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아무런 위기감도 느끼지 못했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이 바로 목 앞에 다가와 있음에도 알아채지 못하는 멍청이처럼 말이다.

“후욱. 후욱…….”

설소백의 숨이 점차 거칠어졌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숨을 내뱉기가 버거워졌다.

그 순간 그의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내려앉았다.

“아…….”

어깨를 통해 파고드는 청량한 기운에 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느새 당소소가 다가와 걱정 어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꼭 보지 않아도 돼요.”

“……아, 아닙니다.”

설소백은 고개를 저으며 작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리고 슬쩍 옆을 향해 곁눈질했다. 운기를 하는 청명의 모습을 가만 본 그는 한층 결연해진 얼굴로 말했다.

“제 눈으로 봐야 합니다. 청명 도장이 그리 말했으니까요.”

그는 몸을 떨면서도 창가로 다가섰다.

저벅.

저벅.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이 아수라장에서, 한 사람의 고요한 발소리가 이토록 크게 울려 퍼진다는 것은.

지금 이 전장에는 달아나는 이들이 울부짖는 비명과 죽어 가는 이들이 내지르는 단말마가 가득했다.

그러니 저 작은 발소리가 들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모두의 눈과 귀에 똑똑히 파고들었다.

마치 산보라도 하는 듯 전장을 가로지른 그는 빙궁과 마교가 맞닿은 곳까지 다가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물러나라.”

“예!”

내내 빙궁도들을 잔악하게 척살하던 마교도들이 일시에 뒤로 물러나며 사내의 뒤에 도열했다.

“…….”

하지만 이 광경을 본 빙궁도들의 얼굴은 더욱 희게 질렸다.

상식적으로는 말도 되지 않는 지시였다.

지금 전장의 승기는 완전히 마교 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이 시점에서 전투를 멈춘다는 건 더없이 멍청한 일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비웃을 수 없었다.

모두 알고 있으니까.

저건 멍청해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저것은 언제든 이곳의 모두를 몰살시켜 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온 명령이다.

그리고…….

‘저 악귀 같은 자들이 고작 말 한마디에…….’

미친 짐승이 무색하게 날뛰던 이들이 고작 말 한마디에 완벽하게 훈련된 병사들처럼 명을 따랐다.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이곳에 있던 이들은 모두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과거 중원을 시산혈해로 만들고, 세상을 지옥으로 몰아넣었던 마교, 그 이름이 가진 의미가 무엇인지 말이다.

달아나던 이들도 걸음을 멈추었고, 죽음 직전까지 몰렸던 이들이 참았던 숨을 토해 내었다.

수많은 이들이 모여 있는 빙궁에 쥐 죽은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은 정적이었다.

선두에 나선 사내, 교의 집법사자가 가만히 빙궁의 궁도들을 바라보았다.

공포에 질려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면면을 확인한 순간, 그의 입가에 뒤틀린 미소가 걸렸다.

“……더러운 불신자 놈들을 눈앞에 두었더니 조금 흥분했군. 주교께 죄를 청해야겠어.”

집법사자는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북해빙궁을 단죄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버러지들 따위는 언제든 쓸어버릴 수 있으므로.

임무는 오직 하나, 빙정을 회수해 돌아가는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빙궁의 쓰레기들을 상대하느라 시간을 지체하는 것 역시 주교와 위대하신 천마에 대한 불충이 될 터였다.

“들어라.”

그의 입에서 음산하고 섬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위대하신 분의 충실한 종께서 빙정을 원하신다.”

그 말을 들은 모두가 각양각색의 감정을 떠올렸다.

누군가는 어쩌면 이곳에서 죽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고, 누군가는 위대하신 분의 충실한 종이라는 기괴한 표현에 거부감과 공포를 느꼈다.

또 누군가는 빙정이라는 말 자체에 경악했고, 마교의 존재를 알고 있던 이들은 지금껏 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 오던 이들의 진면목에 소름 끼쳐 했다.

혼란이 빙궁 전체를 뒤덮었다.

“그러니 묻겠다.”

집법사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빙정을 가져간 중원 놈들은 어디에 있느냐?”

“…….”

중원?

중원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모두의 얼굴에 기이한 빛이 어렸다.

그럼 그 중원인들을 찾기 위해서 이곳에 왔단 말인가? 빙궁을 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채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집법사자가 싸늘하게 말했다.

“중원 놈들을 내어 놓아라. 그러면 이대로 돌아가겠다. 하나, 중원 놈들을 내어 놓지 않을 시엔…… 오늘 빙궁은 개미 새끼 한 마리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 말에 거의 절반에 가까운 이들이 동시에 한곳을 바라보았다.

가장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여사혼 장로였다.

“…….”

그는 숱한 시선이 꽂히는 걸 느끼며 살짝 몸을 떨었다.

집법사자의 시선 역시 자연히 그에게로 꽂혔다.

“네가 궁주인가?”

“…….”

얼어붙어 말도 하지 못하는 여사혼을 보며 집법사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쥐새끼 같은 놈이로군.’

궁주가 될 자격이 없는 이라는 걸,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물론 설천상 역시 한심한 작자였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근거 없는 패기라도 있었다.

“대답해 보라. 네가 궁주인가.”

“나, 나는 궁주가 아니외다. 나는…….”

마침내 흘러나온 여사혼의 대답에 집법사자의 얼굴이 가볍게 일그러졌다.

“궁주가 아니라고?”

그럼 왜 저놈이 가장 뒤에 서 있는 것인가?

못마땅한 얼굴로 여사혼을 노려보던 집법사자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중원 놈들을 내놓아라. 거부할 생각이라면 각오를 해야겠지.”

여사혼의 숨이 점차 가빠졌다.

수많은 시선이 그에게 꽂혀 있었다. 그 절실한 눈빛들에 담긴 의미를 모를 여사혼이 아니었다.

‘궁주는 어디에 있지?’

순간적으로 수많은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도, 돌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요?”

“말 그대로다.”

“그럼 빙궁에는 다시…….”

“이 쥐새끼 같은 놈이 감히…….”

돌연 집법사자가 노기를 흘리며 이를 드러냈다. 여사혼은 움찔하며 입을 닫았다.

“교는 네깟 놈이 감히 협상을 시도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 주둥아리를 찢어 놓아야 알겠느냐?”

“…….”

“결정해라. 이게 마지막이다.”

여사혼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기 시작했다.

‘대체 뭘 결정하라는 말인가?’

애초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아무리 화산의 사람들이 빙궁의 은인이라고는 하나, 그들을 지키기 위해 빙궁이 완전히 무너지는 꼴을 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니던가?

“그…….”

여사혼이 결국 막 입을 떼려는 찰나였다.

“안 됩니다, 장로님!”

그의 등 뒤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그를 막아 세웠다.

“…….”

여사혼은 땀에 흠뻑 젖은 얼굴로 돌아보았다. 한이명이 굳은 얼굴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성을 잃지 마십시오.”

“하, 한 총관…….”

“이 위기를 벗어난다고 끝이 아닙니다. 저들이 왜 빙정을 가지고 가려 하는지 잊으셨습니까?”

“…….”

“이제는 확연합니다. 절대 저들이 원하는 대로 하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단호하게 말한 한이명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깨닫는 것이 너무 늦었지만.’

할 수만 있다면 화산의 제자들에게 달려가 머리라도 처박으며 죄를 청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북해의 땅에 발을 붙이고 살면서도 마교가 어떤 곳인지 알지 못했다. 화산의 제자들이 계속 경고를 했음에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말을 들었어야 했습니다.”

“…….”

“천마가 부활한다면 이 정도로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가 왜 천마로 불렸는지 모르십니까?”

“하, 하나…….”

“지켜야 합니다.”

점점 격앙된 목소리로 외치는 한이명의 눈엔 핏발이 서 있었다.

“그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여사혼은 멍한 눈으로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그, 그러다 모두가 죽으면 다 끝이 아닌가?”

“천마가 부활하면 어차피 모두 죽습니다. 저들이 살려 둘 이유가 없어진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겠습니까?”

“…….”

“마교가 왜 마교인지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잊어선 안 될 것을 잊었고, 손을 잡지 말아야 할 이들과 손을 잡은 대가를 치르는 겁니다.”

물론 그건 근본적으로 설천상의 죄악이었지만, 빙궁을 수습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그들에겐 이 일을 해결해야 할 책임이 생겼다.

그리고 화산의 제자들이 끝없이 경고했던 걸 무시한 데에도 책임이 있지 않은가.

“나, 나는…….”

그것은 실로 본능적이고도, 치명적인 실수였다.

지나치게 혼란에 빠져 이성을 잃은 여사혼이, 저도 모르게 화산의 제자들이 있는 곳을 향해 눈길을 돌려 버린 것이다.

그리고 집법사자는 여사혼의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고개가 여사혼을 따라 돌아갔다.

커다란 성에 난 수백 개의 창들 중 하나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 안에 서 있는 이들이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빙궁의 무사들과는 전혀 다른 복색이었다.

굳이 확인해 볼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눈빛과 표정부터가 달랐다. 눈앞의 이들처럼 겁에 질리기는커녕 노기와 투쟁심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집법사자의 입꼬리가 기이하게 말려 올라갔다.

“저기로군.”

그의 눈빛이 환희와 광기로 희번덕거렸다.

“빙정을 회수해 와라. 빙정을 회수하기 전까지 죽여선 안 된다.”

“회수 후에는 어찌합니까?”

“마음대로 해도 좋다.”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교도들이 검은 빛살처럼 설원 위를 질주했다.

한이명이 희게 질린 얼굴로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막아! 절대 뚫려서는 안 된다!”

백천의 눈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사형.”

“안다.”

유이설의 짧은 부름에 그의 눈빛은 점차 견고해졌다.

“조걸, 윤종!”

“예!”

“청명이 놈을 옆에서 지켜라. 손가락 하나 닿게 해선 안 된다!”

“예!”

윤종과 조걸이 그 즉시 청명에게로 달려가 좌우를 지키며 검을 뽑아 들었다.

“소소!”

“예, 사숙!”

“궁주를 지켜라.”

“네, 걱정 마세요!”

백천은 혜연을 돌아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스님, 저를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아미타불. 믿고 싸우겠습니다.”

혜연이 한 점 불안도 없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믿고 싸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살짝 고개를 숙인 백천이 유이설을 불렀다.

“사매!”

“네.”

스르르릉.

그리고 검을 뽑아 들며 물었다.

“두려우냐?”

“…….”

유이설이 대답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화산의 선조들께서는 저들을 맞아 싸우신 게 아니라, 그 목숨을 걸고 적을 치러 가셨었다. 우리는 그 후손된 이로서…….”

백천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부끄러운 꼴을 보여선 안 되겠지. 저들에게 화산이야말로 마교를 무너뜨린 곳임을 떠올리게 해 줘라!”

“네, 사형!”

유이설이 그녀답지 않게 큰 목소리로 대답하며 검을 틀어쥐었다.

“온다!”

“네!”

빠르게 가까워져 오는 기척을 느끼며 백천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청명의 모습이 보였다.

‘서두를 것 없다.’

운기가 끝날 때까지 반드시 지켜 낼 테니 말이다.

이 목숨을 걸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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