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516화 (514/1,567)

516화. 많이 기다렸지? (1)

“저 개 같은 놈들이!”

청명이 창틀을 움켜잡았다. 당장이라도 창밖으로 뛰어내릴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순간 백천과 유이설이 양쪽에서 그의 팔을 붙들어 잡았다.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려 백천을 바라보았다.

“뭐 하는 거야? 안 놔?”

“안 돼.”

백천이 딱 잘라 말했다. 그러자 청명은 황당하단 얼굴로 물었다.

“뭘 안 돼?”

백천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저기로 달려들려고 했던 것 아니냐?”

“내가 등신도 아니고, 설마 그러겠어.”

청명은 창틀을 다시 한번 콱 움켜잡더니 손을 떼며 뒤쪽으로 물러났다.

살짝 입맛을 다시는 모양새가 어째 미련이 좀 남은 모양새였지만, 그래도 평소처럼 억지를 부리지는 않았다.

그 광경을 보던 조걸이 윤종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웬일로 고분고분한데요?”

“그러게. 희한하네.”

평소의 청명이라면 백천과 유이설을 대번에 날려 버리고 당장 창밖으로 뛰어내렸을 텐데 말이다.

그때 창밖을 슬쩍 보던 백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매. 적의 수는?”

“많아야 백. 보이는 건 오십.”

“그렇단 말이지…….”

백천이 파악한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이곳에 있는 빙궁의 무사만 해도 천이 넘는다. 그중 전력이 되지 않는 어중이떠중이들과 지난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이들을 제외한다고 해도 오백은 족히 넘을 것이다.

저들이 아무리 마교라지만, 오백이 오십을 상대하기 어려울 거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일단은 지켜보자. 마교 놈들이 아무리 미쳤다 해도 겨우 오십으로 빙궁을 치러 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 말을 들은 청명은 피식 웃고 말았다. 백천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

“왜 웃느냐?”

“사숙.”

“음?”

“내가 왜 지금 안 튀어 나가는 줄 알아?”

“검이 없어서?”

“…….”

그 말에 놀란 청명이 반사적으로 자신의 허리춤을 더듬었다.

엄머야.

검도 없이 뛰어내릴 뻔했네.

어쨌든…… 그가 저곳으로 곧장 달려가지 않은 이유는 검 때문이 아니었다. 검이야 적당히 빙궁 놈들 걸 뺏어서 쓰면 되니까.

다만.

“지켜봐.”

“……응?”

“저 새끼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아마 사숙이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를 거야.”

“…….”

백천의 표정이 슬쩍 심각하게 굳어졌다.

“안 그래도 생각은 하고 있었어. 무작정 부딪치는 것보다는 그 눈으로 한번 보는 게 낫겠지.”

딸깍.

청명은 쥐고 있던 옥함에서 설빙단을 꺼냈다. 그리고 일말의 주저도 없이 입 안에 던져 넣었다.

“나 지금부터 운기 할 테니까, 내가 여기서 일어나기 전까지는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지 마. 절대로.”

“……지금 운기를 한다고?”

“오래 안 걸려.”

청명의 눈이 살짝 어둡게 가라앉았다.

“대신 똑똑히 봐 둬야 해. 저놈들이 왜 마교인지 말이야.”

말을 끝낸 그는 방 중앙으로 가 가부좌를 틀었다. 눈을 감기 전, 그의 마지막 시선이 설소백에게 가 닿았다.

“너도 잘 봐 둬. 지금 북해에 누가 있는지. 네가 대체 뭘 상대하고 있는 건지 말이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청명의 눈이 감겼다.

운기에 들어간 청명을 보며 화산의 제자들은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벌렸다. 조걸과 윤종은 작게 속삭였다.

“……진짜 운기 하네.”

“담이 큰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아무래도 후자 아니겠습니까, 후자?”

“너는 일단 입조심하는 게 좋겠다, 걸아. 저번 성벽에서 저지른 것도 아직 안 맞지 않았냐.”

“…….”

한편 백천은 그런 청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물론 이곳에 있는 이들을 믿으니 이렇게 운기를 할 수 있는 거겠지만…….

‘지금 당장 영단을 먹고 운기조식을 해 몸을 회복해야 할 만큼 급박하다는 말도 되겠지.’

체감되질 않으니 이해할 수도 없었다.

몰려온 게 마교라고는 하지만 저만한 수로 빙궁을 어찌할 수 있단 건가, 저놈의 생각에는?

그때 당소소가 그를 생각에서 끄집어내었다.

“사숙.”

“……그래.”

백천은 표정을 굳힌 채 몸을 돌렸다.

화산의 제자들과 혜연은 모두 창가로 몰려들었다. 성벽 위에 선 검은 인영들이 똑똑히 보였다.

“어디 한번 보자. 마교라는 놈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성벽에 시선을 고정한 그들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 * *

성벽 아래로 몰려들기 시작한 빙궁의 무사들을, 집법사자는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개미 떼가 따로 없군.”

굴을 침범당한 개미가 꾸역꾸역 몰려나오는 것처럼, 빙궁의 무사들이 다급하게 끝도 없이 나오고 있었다.

척 봐도 무시할 수 없을 만한 숫자임에도 집법사자의 얼굴은 처음처럼 초연했다.

‘중원 놈들은?’

딱히 다른 복색을 한 이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빙정의 행방을 놓칠 수도 있으니, 중원 놈들이 보이면 죽이지 말고 생포해라.”

“상처 없이 잡습니까?”

“살아만 있으면 된다.”

“예!”

집법사자가 턱짓하며 장엄한 목소리로 일렀다.

“교의 무서움을 잊어버린 이들에게 보여 주어라. 저들의 평화가 얼마나 거짓된 것이었는지!”

“존명!”

서늘한 대답 소리와 함께 성벽 위를 점하고 있던 마교도들이 일제히 아래로 뛰어내렸다.

집법사자의 입꼬리가 천천히 뒤틀리며 미소를 머금었다.

허겁지겁 성 밖으로 뛰쳐나온 여사혼은 아연실색했다. 성벽에서 일제히 낙하하는 일련의 무리를 본 것이다.

‘마교!’

그는 한눈에 그들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광산에서 노역을 할 때, 마교도들을 몇 번이나 마주쳤었다. 그들은 모두 저들과 같은 복색이었다.

수는 오십? 아니,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정도?

‘겨우 저 정도 수로?’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성벽 위에서 버티며 대화를 시도한다면 그에 응해 줄 용의도 있었다. 하지만 고작 저 정도 인원으로 성벽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명백한 도발이고 빙궁을 무시하는 일이었다.

여사혼은 노기 어린 얼굴로 빙궁도들에게 외쳤다.

“들어라!”

“예!”

“대화는 필요하지 않다! 흙발로 허락 없이 빙궁에 쳐들어온 이들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모조리 생포하라! 반항하는 이는 죽여도 좋다!”

“예!”

빙궁의 무사들이 용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략? 전술?

그런 건 의미가 없다.

수의 차이가 열 배를 넘어서면 그 어떤 전략도 의미를 잃는다. 그저 압도적인 수와 힘으로 찍어 눌러 버리면 그만이다.

더구나 저들이 대놓고 성벽에서 뛰어내려 준 덕분에 적의 수가 많지 않음을 빙궁의 무사들 모두가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지휘하는 이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실로 어리석기 짝이 없군.’

여사혼은 어쩌면 마교라는 이름에 모두가 지나치게 겁먹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전대 궁주 시해 사건이 벌어졌던 날도 워낙 기습적으로 궁을 점령당했기에 속절없이 당한 것이다. 지금처럼 빙궁의 전력을 모두 동원할 수 있었다면 그 결과는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그날의 울분이 다시금 치솟은 여사혼이 버럭 소리쳤다.

“오늘 선대 궁주의 원한을 갚을 것이다! 저 간악한 이들을 무릎 꿇려라!”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지자 새하얀 백의를 입은 빙궁의 무사들이 용기백배해 진군했다.

그 규모의 인원이 동시에 빠르게 돌진하는 모양은 흡사 설산에서 눈사태가 쏟아지는 듯 보였다.

여사혼은 빙궁의 무사들이 이 기세로 일시에 마교도들을 쓸어 버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선두에 선 빙궁의 무사들이 들끓는 혈기에 노호성을 내질렀다. 등 뒤에서 수백이 함께 달리고 있다는 고양감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감히 상상도 못할 정도였다.

빙궁의 무사들은 바닥에 착지한 마교도들을 향해 힘껏 검을 내질렀다. 검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죽어라, 악적!”

“이 간악한 놈들!”

십여 개의 검이 동시에 한 사람의 몸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음?’

선두에 선 이는 보았다.

날아드는 검을 보고도 미동도 하지 않던 마교도가 돌연 입꼬리를 비릿하게 뒤트는 모습을.

촤아아아아아아악!

비단을 날카로운 단도로 찢어 내는 듯한 소리가 바람 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

선두에서 달려들던 사내의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게 뭐…….’

묘한 불쾌함이 밀려들었고, 이는 배 속에서부터 강하게 밀려드는 욕지기로 변했으며 이내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도리가 없는 지옥 같은 고통으로 화해 전신을 태우기 시작했다.

“끄…….”

하지만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 전에 몸을 가로지르는 다섯 개의 붉은 선이 생겨난 것이다.

파아아아아앗!

목, 가슴팍, 배, 허벅지, 발목.

동강 난 육체는 아이가 걷어찬 나무토막들처럼 뒤로 튕겨 나갔다.

회전하는 몸뚱이들에선 맹렬하게 피가 뿜어져 나와 검게 물든 북해의 하늘을 붉게 수놓았다.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힘차게 이어지던 진군이 멈추었다.

앞을 가로막으면 짓밟고 나아갈 듯한 기세로 달려들던 이들이 짜기라도 한 것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조금 전의 광경이 그들의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휘젓고 있었다.

그들 역시 무학을 익혔다. 전장에서 목숨을 잃는 것을 각오하지 않았을 리 없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본 광경은, 무인이고 아니고를 떠나 사람이라면 경악을 금치 못할 광경이었다.

잔인함에도 정도가 있고, 과격함에도 한계가 있다. 있어야 한다.

적어도 상대를 같은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저리 처참한 몰골로 죽일 수는 없는 법이다.

턱! 터억!

조각난 육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팔목에서 잘려 나간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두 눈을 부릅뜬 머리가 눈 쌓인 땅 위에 거꾸로 처박혔다.

“…….”

숨소리조차 거대하게 들릴 만한 정적이 빙궁을 휩쓸었다.

그 적막을 깬 것은 마교도의 손에서 흘러나온 뼈 소리였다.

우드드득.

검은 옷 아래로 늘어뜨려진 마교도의 손이 시커멓게 물들기 시작했다.

스르릉.

날 선 검 끝에서 시커먼 검기가 뿜어져 나왔고, 늘어뜨린 손끝에선 아수라의 발톱 같은 조기(爪氣)가 한 척 넘게 자라났다.

“모두 죽여라.”

명을 받은 마교도들이 양떼를 덮치는 늑대처럼 빙궁의 무사들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붉게 물든 두 눈이 섬뜩한 살기를 줄기줄기 뿜어냈고, 입에서는 괴성에 가까운 진언(眞言)이 연신 노래처럼 흘러나왔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천마재림! 만마앙복!”

콰아아아아앙!

그건 충돌이라기보다, 학살이었다.

악귀의 발톱 같은 조기가 육체를 형편없이 찢어발겼다.

카아아앙!

막을 수 없다.

검을 들어 막으면 검째 몸을 갈라 버리고, 내력을 실어 날린 장력조차 거칠게 찢으며 돌진했다.

분명 정제되지 않은 공격이었다.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정교한 초식도 없다. 상대를 농락하는 화려한 기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휘두르고, 부수고, 깨뜨린다.

하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공격을 누구도 제대로 막지 못했다.

콰아아아앗!

검고 검은 마기를 두른 손으로 막아서는 이의 몸을 유린하고 목을 날리는 모습은, 보고만 있어도 심장이 멎어 버릴 듯 덜컥거렸다.

잘리다 못해 반쯤 으깨져 버린 몸뚱이가 선 채로 부들부들 경련했다.

짓이겨진 몸에선 피가 꿀렁대며 쏟아졌고, 반쯤 부서진 머리는 허공으로 치솟았다.

하나 마교도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아직 채 쓰러지지 못한 육체, 이제는 시신이라 불러야 마땅할 그 몸에 다시 한번 발톱을 쑤셔 박았다.

촤아아아악!

끝내 몸뚱이를 좌우로 찢어 버린 마교도는 그제야 앞으로 전진했다.

광기와 살기로 뒤범벅되어 붉은 광망을 뿜어내는 눈.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연신 광소를 터뜨려 대며 한껏 벌어진 입.

빙궁도들의 피를 뒤집어쓰고 순식간에 검붉게 변한 마교도들은 앞을 막는 모든 것을 말 그대로 분쇄했다. 미처 달아나지 못한 빙궁도들은 회전하는 거대한 톱날에 던져진 것처럼 갈기갈기 찢겼다.

정말이지,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렇게 불러도 과하지 않을 만큼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잠깐 사이에 분위기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흐…….”

입이 절로 힘없이 벌어졌다.

무릎이 휘청대며 꺾이고, 몸은 제멋대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성적으로 생각할 힘 같은 건 잃은 지 오래였다.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 버린 공포 앞에, 빙궁의 무사들은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내어 본 적 없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아니, 비명이라기보단 괴성에 가까웠다. 그 어떤 뜻이나 의미도 담지 못한, 몸이 내지르는 울부짖음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뒤를 마교도들은 끔찍할 만큼 집요하게 쫓았다.

이윽고, 마의 발톱이 순백의 빙궁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