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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515화 (513/1,567)

515화. 만나서 정말 반갑다. (5)

휘이이이잉!

칼바람이 매섭게 몰아쳤다.

성벽 위를 지키고 있던 빙궁의 위사들은 얼굴을 감싼 털옷을 더욱 단단히 여미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북해에서 나고 자란 그들도 한겨울에 불어 닥치는 칼바람은 견디기 힘들었다. 더구나 올해의 겨울은 유난히 가혹했다.

위사들은 손끝이 얼어붙는 느낌을 이겨 내며 몸을 슬쩍 움츠렸다.

평소에 이렇게나 바람이 불면 적당히 몸을 숙여 가며 어떻게든 체온을 덜 뺏기려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어제 궁주의 목이 떨어지고 새로운 이가 궁주의 자리에 올랐다.

이런 상황에 꾀를 부릴 만큼 담력 큰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습니다.”

“음.”

성벽으로 다가와 보고를 들은 경계조장이 가늘게 뜬 눈으로 앞쪽을 응시했다.

바로 어제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쏟아지는 눈이 그 모든 것을 깨끗하게 덮어 버렸다.

“저…… 조장님.”

“음?”

“저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되다니?”

“……궁주께서 바뀌지 않으셨습니까. 아무래도 과거와는 다를 것 같아서…….”

그 말에 조장은 저도 모르게 슬쩍 뒤쪽을 돌아보았다.

이 춥고 높은 성벽 위까지 누군가가 감시하러 올 일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스레 불안했다.

“변하는 것은 없다.”

그는 다시 앞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여전히 빙궁의 무사고, 그저 궁주께서 바뀌셨을 뿐이다. 여사혼 장로님도, 한이명 총관님도 예전에는 빙궁을 이끄셨던 분들이 아니더냐.”

“그렇긴 합니다만…….”

“우리는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위사들은 못내 불안한 얼굴이었지만, 일단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장은 그들에게 들리지 않게 슬쩍 한숨을 내뱉었다.

‘불안할 만도 하겠지.’

여 장로는 설천상을 따르던 이들의 죄를 묻지 않겠다고 공표했지만, 세상일이란 어찌될지 모르는 것 아니던가?

설천상은 전대 궁주를 시해하고 그 자리에 올랐다. 당연히 지금 궁주가 된 설소백은 그런 설천상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원한이 설천상을 따랐던 궁도들에게 쏟아질지도 모른다.

다들 그 사실을 짐작하고 있기에 가슴 한편에 피어난 불안함을 지우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같은 이들이야 그저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을.”

설천상이 무도한 이였다는 걸 부정할 이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는 설가의 피를 이은 궁주였다. 그런 그에게, 평범한 빙궁도가 대체 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때 한 위사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제가 감히 할 말은 아니지만, 새로운 궁주님이 너무 어리신 것은 아닌지…….”

조장은 차가운 눈으로 말을 꺼낸 이를 바라보았다.

“주둥아리 함부로 놀리지 말거라.”

“…….”

“어쨌든 설가의 피를 이은 적통이시다. 그분이 아니면 누가 궁주가 되겠느냐?”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잡생각 하지 말고, 경계나 똑바로 서라!”

“예!”

눈살을 찌푸린 채 엄히 말했지만 그의 입에서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나왔다.

‘혼란스럽군.’

뭔가 가슴을 콱 틀어막고 있는 느낌이었다. 답답함이 도무지 가실 줄을 몰랐다.

그때, 성벽 위로 다시 강풍이 몰아쳤다.

시리게 몸을 파고드는 한기에 위사들이 다시 몸을 움츠렸다. 이놈의 칼바람은 평생을 맞아도 적응되지 않았다.

얼굴을 때리는 눈발에 고개를 돌렸던 위사 하나가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응?”

눈을 가늘게 뜨며 저 성벽 너머에 펼쳐진 드넓은 평원을 유심히 주시했다.

처음에는 착시인가 했다. 눈보라가 치니 헛것을 봐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착각이 아니라면?

사내가 크게 움찔하며 황급히 외쳤다.

“조, 조장님! 저기 뭔가 있습니다!”

“뭐?”

몸을 옹송그리고 바닥만 쳐다보던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번쩍 들고 안력을 돋웠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디에 뭐가 있다는 건가?”

“저기 뭔가 시커먼 것이…….”

조장이라 불린 이는 사내가 가리키는 곳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음?”

찬바람에 눈알이 시리도록 한곳을 응시하고 있으니 이내 그의 눈에도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세차게 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시야가 많이 가리기는 했지만, 확실히 설원 위로 지금껏 없었던 시커먼 무언가가 보였다.

‘짐승?’

아니, 이 거리에서도 확연히 보일 정도라면 한두 마리가 뭉쳐 있는 정도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

“어떻게 합니까? 보고합니까?”

“일단은 조금 지켜보세나. 별것 아닐 수도 있는데 벌써 호들갑을 떨 필요는…….”

그때였다.

말을 하던 조장이 돌연 석연찮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저거?’

조금 전까지는 거뭇한 무언가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 이제는 확연히 더 선명해진 것이다. 게다가 크기도 분명 더 커진 느낌이었다.

이 성벽 위와 저기까지의 거리를 감안한다면, 이쪽을 향해 빠르게 접근하고 있다고밖에 판단할 수 없다.

‘보고를…….’

그때 곁에 있던 이들이 대경실색하며 소리쳤다.

“접근합니다!”

“빠, 빠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조장!”

조장이 고개를 획 돌려 성벽 끝에 매달린 종을 바라보았다.

“종을 쳐서 신호를 보내라! 눈보라 때문에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수도 있으니, 자호! 자네는 궁으로 가 수상한 이들이 성벽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알리게! 지금 당장!”

“예!”

자호라 불린 이가 몸을 날려 성벽을 내려갔다.

“다른 조에게도 알리고 경계 태세를 취하라고 해! 어서!”

“예!”

말을 끝낸 조장은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찢어져라 눈을 부릅떴다.

‘버, 벌써?!’

그저 몇 가지 명령을 내렸을 뿐이다.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형상들은 어느새 확연히 눈에 들어올 만큼 접근해 있었다.

‘대체 얼마나 빠르다는 건가?’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조장은 마른침을 삼키며 접근하고 있는 것들을 내려다보았다. 긴장으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사람!’

이제는 확연히 보였다.

착시도, 짐승도 아니었다. 분명 검은 인영들이었다.

시커먼 피풍의로 전신을 감싼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빙궁을 향해 어마어마한 속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저 속도라면 이 성벽에 닿기까지 불과…….

그 순간 달려들던 이들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조장이 다급히 고함을 내질렀다.

“화, 활! 당장 활을 준비해라! 당자아아아앙!”

순식간에 앞까지 당도한 검은 인영들은 지체 없이 성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이를 본 조장은 정신없이 외쳤다.

“쏴! 쏴라! 쏴서 떨어뜨려! 빨리……!”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아니지.”

낯선 목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나지막이 울렸다.

듣는 것만으로도 뭔가 잘못되었단 느낌이 들 만큼 섬뜩한 목소리였다.

조장은 천천히 눈을 돌렸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피가 싸늘하게 식기 시작했다.

‘어, 언제?’

단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는데, 대체 이 성벽 위까지 언제 올라왔단 말인가?

그 순간 더없이 차가운 무언가가 그의 목을 움켜잡았다. 그게 사람의 손이라는 걸 알아챈 순간 심장이 통제를 벗어나 터질 듯 뛰기 시작했다.

기괴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교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불신자에게는 죽음만이 정당하다. 더구나 교도들을 상대로 공격을 한 이들의 마지막은 하나밖에 없지.”

“끄, 끄륵…….”

목을 움켜잡은 손이 점점 그의 목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우득.

뼈 으스러지는 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선명하게 울렸고, 동시에 조장의 목이 완전히 옆으로 꺾였다.

“…….”

축 늘어진 그의 몸뚱이를 보며 궁도들의 얼굴은 북해의 눈처럼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털썩.

대수롭지 않은 것을 던지듯 조장의 목을 놓아 버린 사내는 싸늘한 얼굴로 그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애초부터 나는…….”

사내, 교의 집법사자가 두 눈을 붉게 물들이며 경멸 섞인 어조로 말했다.

“너희 같은 불신자들과 같은 곳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역겨웠다.”

파아아앗!

그 순간 성벽 위로 검은 그림자들이 일제히 솟아올랐다.

“모두 죽여라. 교의 행사를 방해한 이들은 단 하나도 살려 두지 마라.”

“천마재림! 만마앙복!”

검은 악귀들이 일제히 외치며 성벽 위의 빙궁도들을 덮쳤다.

“으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조용하던 성벽 위가 순식간에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집법사자는 그 광경을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다 성벽의 반대편을 향해 걸어갔다.

새하얗고 커다란 빙궁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리석은 놈들.”

얌전히 복종하며 빙정을 바쳤더라면 적어도 위대한 천마께서 부활하시는 그날까진 하찮은 목숨이나마 부지할 수 있었을 것을.

이 은혜를 거부한 이상 빙궁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나.

‘빙정을 가진 건 중원 놈들이겠지.’

집법사자는 자신의 임무를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감히 교를 무시하고 스스로 궁주를 갈아치운 빙궁을 응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빙정을 회수하는 것은 이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중한 일이었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반드시 회수해야 한다.

집법사자의 차게 가라앉은 눈빛이 빙궁을 뚫어져라 보았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섬뜩하리만치 믿음으로 가득 찬 목소리가 눈보라 속에서 퍼져 나갔다.

“누가 쳐들어왔다고?”

여사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아직 적당의 정체는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이…….”

여사혼이 이를 갈아붙이며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설천상 놈의 잔당들인가?”

“그보다는…… 복색을 봤을 땐, 마교 쪽인 것 같습니다.”

“마, 마교?”

생각지도 못한 비보에 여사혼의 얼굴은 삽시간에 푸르게 질렸다.

마교라니.

느닷없이 왜 마교가 쳐들어온다는 말인가?

‘아니. 설령 마교가 빙궁을 노린다고 하더라도, 이리 급작스럽게?’

여사혼은 순간 어찌 대처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저, 적당의 수가 얼마나 되더냐?”

“그, 그게 정확히 알 수는 없었습니다! 곧장 달려온지라…….”

“이런 멍청한!”

여사혼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적이 쳐들어오고 있거늘 그 수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누구인지도 정확히 모른다는 말이더냐! 성벽 위에는 허수아비들만 서 있느냐?”

여사혼이 분기탱천하자 보고하러 달려온 이는 면목이 없단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이를 진정시킨 건 곁에 있던 한이명이었다.

“진정하십시오, 장로님. 우선은 대처가 우선이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 여사혼이 안색을 굳혔다. 그리고 이내 결연한 얼굴로 외쳤다.

“당장 적이 쳐들어왔음을 알리고 빙궁에 있는 모든 병력을 집결시켜라!”

한데 지시를 들은 이는 바로 복명하지 않고 슬쩍 여사혼의 눈치를 살폈다.

“……장로님, 궁주께서는?”

여사혼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이 급박한 상황에 궁주를 찾을 시간이 어디 있단 말이더냐! 궁주께서 명하시지 않으면 적이 네 목을 쳐도 그저 기다리겠단 소리냐!”

“아, 아닙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움찔한 사내가 밖으로 잽싸게 달려 나갔다. 여사혼은 닫힌 문을 보다 탁자를 쾅 내리쳤다.

‘갑자기 이게 무슨…….’

급한 마음에 일단 밖으로 나가려는데, 한이명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장로님.”

“왜 그러는가?”

“……만약 지금 쳐들어온 적당이 정말로 마교의 무리라면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여사혼은 순간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마교.

정말 그놈들이 쳐들어온 거라면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우리가 그놈들이 두려워 전쟁을 피했던 게 아니잖은가! 다만 피해가 커질 것을 우려했을 뿐이네. 정말 놈들이 빙궁을 노린다면 그 대가를 치르게 해 주어야겠지!”

“……예.”

그저 하는 말일 뿐, 여사혼 역시 그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한 총관은 호위를 불러 궁주를 지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여사혼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떼더니 차마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고민하던 그는 잠시 후에야 살짝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화산파의 제자들이 무얼 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게나.”

“그들은 왜…….”

“확인하라면 확인해 보게!”

“……알겠습니다.”

여사혼은 한껏 굳은 얼굴로 방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보던 한이명은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구나.’

설천상만 몰아내면 어떻게든 될 거라 여겼거늘,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다.

‘우선은 적을 막아 내야겠지. 궁주부터 보호하고.’

한이명은 혼란한 머리를 애써 잠재우고 마음을 다잡으며 내궁을 향해 달려갔다.

실로 불행하게도…… 여사혼과 한이명을 포함하여 빙궁의 그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마교를 상대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왜 마교라는 이름이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공포의 대명사로 남아 있는지 말이다.

그걸 알지 못한 것이 그들의 가장 치명적인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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