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4화. 만나서 정말 반갑다. (4)
“아니…….”
백천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물론 이해는 한다. 아, 당연히 이해는 하지, 이해는!
저 설소백의 눈에 청명이 어떻게 보였겠는가?
주변에선 갑자기 궁주가 되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어 대지, 어제까지 아버지인 줄 알았던 사람은 자기가 아버지가 아니라고 하지. 아무리 설소백이 나이답지 않게 성숙하다지만, 도무지 맨정신으로 버텨 낼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전쟁의 한복판으로 끌려오기까지 했으니, 그 과정에서 아이가 겪었을 두려움은 감히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저 미친놈이 다 알아서 해 버렸지.’
백천의 눈에도 청명의 활약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는데, 그 혼란한 전장의 한가운데서 떨었을 아이의 눈에는 어찌 보였겠는가?
거의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神將)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해한다. 이해는 하는데!
“저기…… 설 궁주님.”
백천이 그답지 않게 더듬더듬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그…… 조금 오해가 있는 모양입니다만.”
“예?”
“무공 실력과 인성은 비례하지 않습니다.”
그의 말에 화산의 제자들이 모두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마디씩 열과 성을 다해 거들었다.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어디 상담할 데가 없어서, 저놈에게 상담을 합니까! 차라리 절벽에 대고 소리치는 게 백배 낫지!”
“큰 실수. 돌이키지 못할 실수.”
격하다 못해 절실한 화산 제자들의 반응을 보며 설천상은 눈을 끔뻑였다.
친분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흠을 덮어 주는 역할을 하기 마련인 것을, 어찌 살아왔으면 가장 친하다고 할 수 있는 동문들에게 저런 평가를 받는단 말인가?
“아미타불. 시주, 마구니는 언제나 가까운 곳에서 유혹하기 마련이외다. 올바른 길로 가기 위해서는 그런 미혹에 흔들리지 말아야…….”
“아니, 이 땡중 새끼가?”
청명이 눈을 부라리자 혜연이 찔끔하며 황급히 목을 움츠렸다. 조걸이 윤종의 귀에 대고 크게 속삭였다.
“……저 스님은 왜 검도 없는 놈한테 쫍니까?”
“맞다 보면 그렇게 된다.”
하지만 청명은 사형제들의 말을 모조리 무시한 채 흐뭇하게 웃으며 설소백을 보았다.
“그러니까…….”
그의 미소가 더욱더 짙어졌다.
“훌륭한 궁주가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한테 상의하고 싶다. 이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참다못한 백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잠시만요! 궁주님, 그게…….”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설소백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청명 도장께서 강하기 때문에 상의를 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예?”
살짝 우물쭈물하던 설소백은 몸에 힘을 바짝 주었다.
“청명 도장께는 제게 없는 확고한 주관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도 청명 도장과 같았다면 지금 이리 혼란스럽지는 않았겠지요.”
주관? 주과아아아안?
어, 그렇지. 주관 확실하지.
너무 확실해서 문제지. 너무. 너어어어어무!
“사람들은 저더러 빙궁의 궁주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궁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누구도 말해 주지 않고, 누구도 알려 주지 않습니다.”
아이답지 않게 씁쓸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화산의 제자들은 얼굴을 굳혔다.
하기야.
지금 이 빙궁을 통틀어 가장 혼란스러운 사람을 꼽으라면 역시 설소백일 것이다.
“하여…….”
설소백이 고개를 들고 청명을 바라본다.
“그래서 여쭙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본 사람 중 가장 확고한 사람이 도장이시니까요.”
말갛고 순한 눈이 초롱초롱 빛나며 청명을 응시했다.
때 한 점 묻지 않은 그 눈망울에, 백천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닫고 말았다.
‘빌어먹을, 더 이상 말을 못 하겠어.’
애가 저런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는데 그걸 어떻게 안 된다고 끊어 버릴 수가 있겠는가?
그건 너무 잔인한 짓이다.
백천이 망설이는 와중에 설소백이 다시 한번 또박또박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도장?”
상황이 이러니 자연히 모두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쏠렸다. 일단 지금은 청명의 대답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청명이 천천히 입을 뗐다.
“빙궁의 궁주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 달라고?”
“예!”
그의 입술이 흐뭇하게 미소를 그렸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예?”
설소백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하지만 청명은 더욱 환하게 웃으며 당당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나야 모르지.”
“…….”
“그거 알면 내가 궁주 했지.”
“…….”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화산의 제자들도 모두 흐뭇하게 웃었다.
‘그럼 그렇지.’
청명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사람은 반드시 처절한 절망을 한 번씩은 맛보기 마련이다. 여기에 서 있는 모두가 그러했듯 말이다.
하지만 설소백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 제, 제 질문이 조금 어려웠나요? 그럼 도장께서 제 입장이셨다면 어떻게 하셨을지…….”
“내가 너였으면?”
“……예.”
“내가 너였으면 어떻게 했겠냐고?”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청명이 아니라 뒤에 선 혜연과 화산 제자들의 입에서 나왔다.
“아미타불. 초상 여럿 치렀겠지요.”
“여 장로님 나이도 있으신데, 대가리가 남아나셨을지 모르겠네.”
“장로님한테 대가리라니, 이 새끼야! 머리라고 해라, 머리!”
“깨짐. 일단 다 깨짐.”
청명은 잠깐 멍하니 뒤를 바라보다 다시 설소백을 보며 말했다.
“들었어?”
“…….”
“내가 너였으면 빙궁이고 나발이고 다 뒤집어엎었어. 그런데 너는 내가 아니잖아.”
아연실색한 설소백이 슬쩍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하지만 말을 차마 다 잇지 못했다. 청명은 쯧 하고 혀를 찼다.
“꼬맹아.”
“궁주님한테 꼬맹이라니, 인마!”
“꼬맹이보고 꼬맹이라고 하는데 뭐가 어때서?”
청명의 뚱한 대답에 백천이 무어라 더 꾸짖으려 하자 설소백이 얼른 손을 내저었다.
“저,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도…….”
“……사실 궁주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너무 어색해서 좀 겁이 납니다. 차라리 그렇게 불러 주시는 쪽이 저는 더 편해요.”
그러자 설소백을 바라보는 모두의 눈에 안쓰러움이 깃들었다.
“여하튼, 꼬맹아.”
“예.”
“네 가장 큰 문제가 뭔지 알아?”
“……잘 모르겠습니다.”
“우선 남에게 기대고 본다는 거야.”
설소백이 움찔했다.
“생각해 봐. 중원에서 온 도사 놈이 빙궁에 대해 뭘 알겠어? 결국엔 네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이야.”
“…….”
“혼자서 해 나가기 상황에 어떻게든 답을 찾아보겠다고 여기까지 온 건 칭찬해 주마. 하지만 내가 너에게 해 준 조언대로 했다가 실패하면, 그땐 어떻게 할래? 나를 원망할거냐?”
“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원망하지 않는다 해도 마찬가지야. 내가 하나는 확실하게 말해 주지.”
청명이 눈을 바로 뜨고 설소백을 응시했다.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설소백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살짝 서느런 청명의 눈이 일순 머릿속을 꿰뚫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정말 중요한 일일수록 남에게 기대서는 안 돼. 어떻게든 내 손으로 해내야 해. 빙궁이 지금 이 꼴이 난 것도 결국에는 제 것을 스스로 지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곁에 있던 화산의 제자들이 모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그들은 지금 청명이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네가 해야 할 건, 궁주로서의 위엄을 단숨에 찾을 수 있는 방도를 찾는 게 아니야. 지금부터 더 알아 가고, 더 고민하고, 네 목소리를 더 내는 거야.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네가 원하는 걸 할 수 있게 될 거야.”
느긋하게 조곤조곤 말한 청명이 살짝 목소리를 바꾸며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모든 걸 단번에 해결해 주는 비책 같은 건 이 세상에 없어. 상황을 바꾸고 싶다면 내가 달라져야 해. 그게 유일한 비책이다.”
청명이 말을 멈추고도 설소백은 한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너무 급했다는 거군요.”
“그래.”
“……이해했습니다, 도장. 무슨 말씀인지 충분히……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청명이 히죽 웃으며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옆에서 모든 대화를 지켜보던 백천은 저도 모르게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이상하게 친절하단 말야.’
청명이 놈이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나 친절히 설명해 주는 건 처음 보았다.
아이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때였다.
“그리고 하나 더.”
“네.”
“힘들면 하지 마.”
“……예?”
뜬금없는 청명의 말에 설소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너 궁주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어?”
“……아니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습니다.”
“그런데 왜 낑낑대고 있어? 하기 싫으면 때려치워 버리면 되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설소백은 슬쩍 청명의 눈치를 살피더니 시무룩해진 얼굴로 말했다.
“제가 너무 엄살을 부렸나 봅니다.”
“그게 아니고, 인마!”
“…….”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북해를 말아먹은 것도 선대의 일이고, 북해를 복구하는 것도 선대가 해야 했을 일이야. 피가 이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네가 저지르지도 않은 일에 대해 책임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거야.”
“…….”
“이건 네가 해야 할 역할이 아니야. 원래 그 책임은 어른들이 져야 옳지. 네가 뭘 했다고 빙궁과 북해의 일을 고민해야 돼?”
“…….”
“네가 하려는 일에는 네가 책임을 지면 돼. 하지만 네가 하고자 하지 않은 일에까지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어.”
설소백의 고개가 천천히 수그러들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인 그를, 누구도 탓하거나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안쓰러운 눈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한동안 어깨를 미미하게 떨어 대던 설소백이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청명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깊이 포권 했다.
“……감사합니다, 도장. 염치없이 답을 얻으러 왔다가 더 큰 답을 얻었습니다.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애새끼가 또 어른인 척하기는.”
청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꼬맹이로 불리고 싶으면 꼬맹이답게 굴어.”
“……정말 그래도 되나요?”
“그것도 제멋대로 못 하면서 궁주는 얼어 죽을. 그러니까 장로고 나발이고 대가리를 깨 버려야 한다니까! 아, 생각할수록 빡치네, 이 새끼들! 그렇게 돌아올 게 아니고 턱주가리를 돌려 버렸어야 하는 건데! 내가 승질이 뻗쳐서, 내가!”
청명이 갑작스레 눈을 까뒤집고 발작하려 들자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화산의 제자들이 재빨리 달려들었다.
“아니, 이건 왜 또 잘 나가다가!”
“진정해라, 청명아! 영감님들 뼈 부러지신다!”
“뭔 애새끼를 며칠 만에 데친 시금치처럼 만들어 놨어! 팔팔 끓는 물에 콱 던져 버릴라!”
팔다리를 잡힌 채로 소리를 지르고 버둥거리는 청명을 보며 설소백은 식은땀을 흘려 대었다.
그때 백천이 나직이 그를 불렀다.
“궁주님.”
“예?”
“저놈이 말이 거칠고 표현이 이상해서 그렇지, 궁주님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니 그것만 알아주십시오.”
“……알고 있습니다, 도장.”
설소백은 살짝 머뭇대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무 잘……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설소백의 눈은 청명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다들 제가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설가의 피를 이었으니까……. 제가 궁주니까.”
“…….”
“그런데 저 도장께서는 그건 제 책임이 아니라고 하시네요.”
천천히 중얼거리던 설소백이 빙그레 웃었다.
“이상합니다. 중원에서 오신 분들이 저를 더 생각해 주시다니.”
“중원과 북해를 나누는 게 이상한 거죠.”
“……예?”
“그저 같은 사람으로서, 어린 나이에 너무 큰 짐을 짊어진 궁주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 말을 하는 주둥이가 좀 문제라 그렇지.”
“…….”
설소백은 살짝 목이 메는 듯 말없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백천은 빙그레 웃었다.
“어쨌든 도움이 되면 좋…….”
그런데 그때였다.
움찔.
말을 하던 백천이 돌연 입을 다물고 고개를 획 돌렸다.
어느새 몸부림을 우뚝 멈춘 청명이 차가운 얼굴로 한곳만 응시하고 있었다.
붙잡고 늘어지던 화산의 제자들도 그 기세에 순간적으로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청명은 제 팔을 잡고 있던 조걸과 윤종을 가볍게 밀어 내고 천천히 창가로 다가갔다.
“뭐, 뭐야?”
“청명아. 왜 그러느냐?”
쏟아지는 질문에 답하는 대신, 청명은 벌컥 창을 열어젖혔다.
눈보라가 안으로 들이닥쳤다. 하지만 그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의 시선이 꽂힌 곳은 눈으로 뒤덮인 성벽. 아니, 그보다 조금 더 먼 곳이었다. 저 성벽 너머.
어둠을 응시하던 청명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찾아갈 것도 없었군.”
백천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설마……?”
“사숙.”
청명은 들끓는 무언가를 억지로 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백천을 향해 말했다.
“준비해. 온다.”
그의 입꼬리가 지독하게 뒤틀려 있었다.
“마교다.”
순간 모두의 얼굴이 희게 굳어졌다.
청명은 뱃속이 뒤틀리며 들끓는 걸 느끼며 작게 중얼거렸다.
“만나서 정말 반갑다, 개자식들아.”
지옥에서 흘러나온 것 같은 섬뜩한 목소리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