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화. 만나서 정말 반갑다. (3)
“아니…….”
청명의 눈가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열받는 건 이해한다고. 내가 이해하는데, 지금 상황이 상황이잖아? 그런데 이걸 이렇게 들이받는다고? 어?”
“윤종아.”
“예, 사숙!”
“거기 짐 다 쌌느냐?”
“예. 빠짐없이 모두 쌌습니다.”
그때 조걸이 손을 번쩍 들었다.
“사숙! 이거 빙궁에서 전에 챙겨 준 선물들인데 어떻게 할까요?”
“준 걸 두고 갈 필요는 없지. 모조리 챙겨라.”
“예!”
“…….”
화산의 제자들이 짐을 싸는 모습을, 청명은 그저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조걸이고 윤종이고 할 것 없이, 모두 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짐을 싸는 데만 열중하고 있었다.
‘응?’
왜 백아도 저기 껴 있나?
담비가 짐을 싼다고?
황당함에 입을 쩍 벌리고 있던 청명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더듬더듬 입을 뗐다.
“아, 아니! 그래서 내가 미리 말했잖아! 사람이라는 게 원래…….”
“소소.”
“네, 사고!”
“약재. 가는 길에 쓸 약재 보충.”
“네! 이미 잔뜩 털어 왔어요. 아, 일부러 감초는 안 챙겼어요. 저 양반 입 써서 죽으라고.”
“잘했어.”
아니, 감초를 왜 안 챙…….
아니지.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저기요? 듣고 계십니까?”
여기 사람이 있어요, 이 양반들아!
세상 어디에서도 존재감으로는 뒤져 본 적 없는 청명이었다. 심지어 구걸을 하던 때에도 사람들이 욕을 퍼부을지언정 이렇게 깨끗하게 무시하진 않았다.
“아니, 지금 내 말 좀! 들어 보라고!”
청명이 계속 버럭 소리를 지르며 두 팔을 휘휘 젓자 그제야 백천이 허리를 죽 펴고 시선을 주었다.
“청명아.”
“응?”
“시끄럽다. 짐 싸는 거 도울 거 아니면 저기 가서 조용히 놀고 있어라.”
“…….”
“자꾸 쫑알대지 말고.”
입을 뻐끔대던 청명이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서, 지금 그냥 돌아가겠다고?”
“그래.”
“천마가 부활하는데?”
“그러니까 돌아가야지.”
“응?”
백천이 청명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어차피 이 상황이면 무슨 수를 써도 못 막는다. 괜히 북해에 남아 있다가 불똥 맞느니, 한시라도 빨리 중원에 돌아가는 게 낫다.”
“아니, 이해를 못 한 모양인데, 천마가 부활하기 전에…….”
“이해를 못 한 건 너다.”
백천은 청명의 말허리를 자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단순히 북해의 일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북해가 하지 않으려는 일을 우리가 대신할 필요는 없어.”
청명이 뭔가 반박하려 했지만, 그 순간 지원 사격이 쏟아졌다.
“사람을 호구로 봐도 정도가 있지. 상도의도 없는 새끼들이.”
조걸이 이를 벅벅 갈아붙이며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윤종이 눈을 찌푸리며 그를 타박했다.
“새끼라니. 그래도 타문의 어른들인데 말이 심하구나.”
“그럼 뭐라고 합니까?”
“놈 정도로 하려무나. 그 정도는 천존께서도 이해해 주시겠지.”
“천존이 현신하시면 손에 든 도장(道杖)으로 대가리 냅다 까 버리실 것 같은데요.”
“음. 그러실 수도 있지.”
윤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바삐 움직였다.
간신히 다물어졌던 청명의 입이 다시 쩍 벌어졌다.
얘들이 언제 이렇게 거칠어졌지?
응? 나 때문이라고?
응?
“아, 아니…….”
그때 청명을 빤히 보던 유이설이 조용히 손가락을 들어 제 입술에 가져다 댔다.
“쉿.”
“…….”
“사형. 사고가 닥치시래요.”
“해석 안 해 줘도 알아!”
누굴 등신으로 아나!
“아니, 지금 다들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 진짜 천마가 부활하면 다 망한다니까?”
“그러니까 빨리 토껴야지.”
“…….”
사형.
장문사형.
이거 진짜 뭐가 엿 된 것 같은데요?
- 미친놈이, 지가 저질러 놓고는.
아니! 내가 이렇게까지 될 줄 알았냐고!
사형은 대체 나를 어떻게 감당했수. 와……. 새삼 사람이 반성하게 되네.
“아미타불.”
그때 묵묵히 짐을 챙기며 상황을 지켜보던 혜연이 불호를 외었다.
“시주. 부처께서도 수행을 방해하는 마구니들을 떨쳐 내셨고, 악한 이에게는 벌을 주셨습니다. 무조건 자비를 베푸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혜연마저 이리 정색하고 나오니 청명은 정말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혜연 스님의 말이 맞다.”
그리고 백천은 대화를 시작할 때보다 더욱 단호해졌다. 질끈 동여맨 짐을 구석으로 던져 넣은 그는 차게 말했다.
“본디 우리의 임무는 북해의 상황을 파악하고 그걸 소림에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미 그 임무는 모두 마쳤다. 남은 건 중원의 문파들이 함께 힘을 합쳐 해결해야 할 일이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아니, 그러니까…….”
“중원의 모든 문파다! 네놈이 알아서 해결하는 게 아니라!”
갑자기 터져 나온 우레와 같은 호통에 청명이 움찔했다.
“화산은 이미 과거에 같은 일을 겪었다! 화산의 선조들이 중원을 지키며 산화하지 않으셨다면, 중원이 어찌 되었겠느냐? 하지만 그래서 결국 화산에 남은 것이 무엇이더냐.”
“…….”
“여기서 우리가 죽는다면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화산의 장문제자로서 그 꼴은 죽어도 못 본다!”
백천의 이글거리는 시선은 청명의 몸에 칭칭 감긴 붕대에 꽂혀 있었다.
보기만 해도 참기 힘든 화가 치미는지 이를 득득 갈던 그가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말했다.
“그러니까 너도 개수작 부릴 생각 말고 얌전히 따라와라. 농담 아니다.”
“……개수작은 뭔 개수작…….”
청명이 입을 삐쭉대며 구시렁거리자 백천이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네놈이 할 짓이야 빤하지 않으냐. 어떻게든 상황을 틀어 보려 하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절대 안 넘어간다. 소소야!”
“네!”
“챙겼느냐?”
“네!”
응? 뭘…….
멍하니 소소 쪽으로 시선을 튼 청명이 눈을 커다랗게 부릅떴다.
“그, 그걸 왜 네가 들고 있어?!”
“당가에서 만든 검을 당가의 딸인 내가 드는데, 무슨 문제라도?”
그거 내 거잖아!
당소소의 손에 쥐여진 암향매화검을 본 청명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사매에게 줘라, 소소.”
“네, 사숙.”
당소소가 암향매화검을 유이설에게 넘겼다. 그러자 그녀는 무심한 얼굴로 그걸 받아 허리에 찼다. 그러더니 청명을 경계하는 듯 허리를 뒤로 살짝 뺐다.
백천이 나직이 말했다.
“아무리 네놈이라도 검 없이 우리 전부를 상대하지는 못하겠지.”
“하핫. 사숙이 날 우습게 보는 모양인데!”
“혜연 스님한테 턱주가리 한 대 처맞고 나면 생각이 좀 달라질 텐데?”
그 순간 혜연이 빙그레 웃으며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아미타불.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마다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청명의 뺨이 움찔움찔 떨렸다.
와…….
저 새끼 웃는데 왜 저렇게 살벌하냐?
평소에 적당히 갈굴걸.
“여하튼 여기까지다.”
백천이 단호하게 끊었다.
“장문인께 권한을 일임받은 인솔자로서, 이 이상은 북해의 일에 관여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 너도 그만 마음을 정리해라. 네가 북해인들을 안타까워하는 건 알지만, 결국 선택은 저들이 한 것이다.”
그의 차가운 얼굴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협의를 베푸는 것이 화산의 가르침이지만, 저들이 원치 않는 협의를 강제로 베푸는 것 역시 협이 아니다.”
“맞습니다, 사숙.”
“네, 그래요.”
다른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멍하니 보던 청명은 입을 닫아 버렸다.
사실 그도 알고 있다. 이들의 말이 틀리지 않단 걸 말이다.
하나…….
‘이게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라고.’
천마를 직접 겪어 보지 않았기에 이리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아는 이들은 절대 이렇게 간단하게 발을 뺄 수가 없다.
청명이 막 한마디를 더 하려는 순간.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산 제자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누구십니까.”
조걸이 태연하게 문 쪽으로 향하려 하자, 윤종이 슬쩍 그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그리고 허리에 찬 검을 움켜잡으며 입을 열었다.
“사숙.”
“대비해라. 내가 가마.”
백천이 단호한 걸음으로 다가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가벼운 긴장이 화산의 제자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응?”
하지만 문 앞에 선 이를 본 순간, 모두의 얼굴이 슬쩍 느슨하게 풀렸다.
“자, 잠시…….”
문 앞에 선 홍안의 소년, 설소백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잠시 말씀을 나눌 수 있을는지요?”
청명의 엉덩이가 슬쩍 들썩거리자 백천이 그의 옷자락을 움켜잡아 자리에 억지로 앉혔다.
“설빙단(雪氷團)이라고 들었습니다. 만년설삼을 재료로 만든 빙궁의 영약이라 합니다. 지금 빙궁에도 몇 알 없는 천고의 영약이라고…….”
“하하핫. 뭐 이런 걸 다…….”
“앉으라고, 이 새끼야!”
청명이 방긋방긋 웃으며 영약을 챙기려 들자 백천이 타박하고 유이설이 손등을 찰싹 때리며 막았다.
청명의 얼굴에 억울한 기색이 가득했다.
“아, 왜! 준다는데!”
“시끄럽다!”
버럭 소리를 지른 백천이 설소백을 보며 진중하게 말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주시는 것을 그저 기쁘게 받을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아, 아닙니다. 뭔가를 부탁하기 위해서 가져온 게 아닙니다. 청명 도장께서 영약이 필요하시다기에 가져온 것입니다.”
설소백은 당황한 듯 손을 내저으며 얼른 말했다.
그 모습에, 백천은 저도 모르게 살짝 웃고 말았다.
‘아이답지 않군.’
빙궁의 궁주라는 지고한 위치에 올랐으니 기고만장해질 만도 한데, 설소백은 처음 그들을 만났을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한이명이 훌륭한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훌륭한 교육자임은 분명해 보였다.
“빙궁의 일 때문에 부상까지 입으셨는데, 이것마저 거절하시면 제가 너무 무안합니다. 받아 주세요.”
“하하하. 그럼, 그럼. 내가…….”
“가만히 좀 있으라고, 인마! 걸아, 이 새끼 좀 잡고 있어라.”
“사숙은 언제나 제게 무리한 걸 시키시는군요.”
“시끄럽고.”
“네.”
윤종과 조걸이 양쪽에서 청명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간신히 조금 잠잠해진 청명을 확인하고 백천이 말했다.
“한데 이곳에 어찌 홀로 오셨습니까. 궁주께서는…….”
“그냥 제가 알아서 왔습니다.”
“…….”
“따라붙는 이들이 있었지만, 제가 물렸습니다.”
설소백은 무언가 말을 더 이으려다 잠깐 멈추곤 고개를 푹 숙였다.
“……처음부터 홀로 가겠다고 했는데, 호위들이 제 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여 장로님과 한 총관님의 명이 있다 보니 제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더군요. 청명 도장의 말이 하나 틀린 게 없습니다. 제가 궁주라고 하는데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백천이 조금 안쓰러운 눈으로 설소백을 바라보았다.
‘못 할 짓이지.’
능력에 걸맞지 않은 과한 지위는 반드시 독이 된다. 특히나 여사혼처럼 범 같은 이가 있는 곳에서는 더더욱.
“그러니, 이건 받아 주십시오. 이건 빙궁의 의지가 아니라 제 의지입니다. 저를 위해 피를 흘려 주신 분께 이 정도 보답도 하지 못한다면 제가 너무 초라하니까요.”
“음.”
이쯤 되면 백천도 청명이 영약을 받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청명은 그 말을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꼬맹이가 헛바람이 들어 가지고는.”
“……네?”
“우린 너를 위해 싸운 게 아니야. 착각하지 마.”
듣는 이가 무척 당황해하거나 무안해할 만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설소백은 오히려 옅게 웃었다.
“그럼 북해인들을 대신하여 드리는 거라고 이해해 주십시오.”
“요망한 놈 같으니.”
청명이 그제야 손을 쭉 뻗어 영단을 챙겼다.
“그렇게 말하면 받을 수밖에 없지. 에이, 안 받으려고 하는데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고. 사람 곤란하게, 에이.”
“…….”
새삼 청명이라는 놈이 어떤 놈인지 실감하는 설소백이었다.
“그런데…….”
백천이 설소백을 보며 말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진짜로 이 영단 하나 주겠다고 직접 오시지는 않으셨을 텐데.”
그러자 설소백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을 한 건 백천이었으나 그의 시선은 청명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아니, 지금뿐만 아니라 이곳에 들어온 이후로 그의 시선은 청명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저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설소백이 어렵사리 입을 뗐다.
“저는 어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
“궁주라고는 하지만, 저는 한 번도 제가 이런 지위에 오를 거라 생각해 본 적 없었습니다.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지금부터 어찌 해 나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곁에서 듣던 백천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너무 척척 잘해 나갔다면 그것이 더 이상했으리라.
“그래서 여쭙고자 합니다, 청명 도장님.”
“응?”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한 반응은 여기저기서 즉각적으로 터져 나왔다.
“아니, 그걸 왜 거기다 물으세요?!”
“세상 모든 사람에게 물어도 저 새끼한테 묻는 건 안 됩니다! 진정하십시오, 궁주님!”
“혼나. 안 돼. 혼나.”
“침착하셔야 됩니다! 갈증이 난다 해도 소금물을 마시면 안 됩니다!”
그 격렬한 반응에 설소백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네?”
하나.
그 질문을 받은 청명은 주변에서 뭐라 떠들어 대건 그저 흐뭇하게 웃을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
“……네? 아, 네.”
“크으. 내가 또 그런 상담은 전문이지.”
“아냐! 아니라고, 이 미친놈아!”
빙궁이 정말로 수렁에 빠지기 시작했다는 걸 직감하는 화산의 제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