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2화. 만나서 정말 반갑다. (2)
실로 무례한 말이었다.
감히 북해빙궁의 장로와 궁주를 앞에 두고 할 말이 아니었다.
여사혼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치밀어 오른 노기가 금방이라도 활화산처럼 터질 것 같았지만, 여사혼은 애써 꾹꾹 누르며 예의를 잃지 않으려 애썼다.
“말씀이 과하시오, 도장!”
“과하다?”
청명이 피식 웃으며 그런 그를 돌아보았다.
“뭐가요?”
“아무리 도장이 북해의 은인이라고는 하나, 감히 그런 식으로 빙궁과 북해를 모욕할 수는 없소! 그 말을 한 이가 도장이 아니었다면 나는 절대 참지 않았을 것이오!”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는 그 목소리에, 청명의 고개가 살짝 삐딱해졌다.
“안 참으면요?”
“…….”
“안 참으면 어쩌시려고?”
서늘하게 식은 눈빛이 여사혼을 뚫어져라 보았다.
청명이 서늘한 눈으로 여사혼을 바라본다.
여사혼은 움찔하며 몸까지 떨어 댔다. 노기를 진정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청명은 그의 반응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설소백을 향해 말했다.
“너도 상황은 알고 있겠지?”
“네?”
“…….”
설소백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본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듯 말간 표정이었다.
청명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허수아비가 따로 없군.”
설소백은 살짝 기가 죽은 듯 움츠러들며 고개를 숙였다. 청명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어깨 움츠리지 마. 네 잘못 아니니까. 잘못은 저 인간들이 저질렀지. 궁주니 뭐니 떠받드는 척하면서 북해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한 마디도 해 주지 않는 저들이 문제지.”
여태 묵묵히 서 있던 한이명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말씀이 너무 심하신 것 같소, 도장.”
“여기 사람들은 창의력이 없네. 할 말이 그것밖에 없어요?”
한이명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숨기려고 한 것이 아니오. 아직 궁주님께서 어리시니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외다. 그걸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그래서.”
하지만 청명은 그의 말허리를 단호히 끊어 버렸다.
“아무것도 모르면 대체 뭘 결정할 수 있죠?”
“…….”
“아니면 그런 건가요? 결정은 댁들이 하고 궁주는 그냥 적당히 고개만 끄덕이면 된다?”
“……이보시오, 도장.”
청명이 피식 웃었다.
“뭐, 좋아요. 그거야 댁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나는 지금 궁주를 배알하러 왔으니 궁주와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그러니 좀 빠져 주시죠.”
“그게 무슨…….”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려 백천을 바라보았다.
“사숙.”
“오냐.”
백천은 담담한 얼굴로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딱히 이렇다 할 설명 없이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뭔지 안다는 듯.
그는 설소백을 향해 깊이 포권 했다.
“화산의 이대제자 백천이 화산을 대표하여 북해빙궁의 궁주를 뵙고자 합니다. 궁주께서는 먼 길 온 객의 청을 마다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 정중한 요청에 당황한 설소백이 저도 모르게 한이명을 돌아보았다. 한이명은 굳어진 얼굴로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이렇게 나오면 상황이 묘해진다.
지금 백천은 분명 화산을 대표하여 빙궁의 궁주를 보고자 한다 말했다.
이 요청을 받아들이면 궁주가 아닌 이들은 궁주와 저들의 대화를 막을 수 없다.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으면 화산을 무시한 것이 되어 버리는군.’
며칠 전이었다면 화산이라는 문파 따위야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현재의 북해에서 어느 누가 감히 화산파를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한이명이 아니라 전대 궁주가 돌아온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락하셔야 합니다.”
한이명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자 설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설소백의 대답이 나왔음에도 백천은 자세를 풀지 않았다. 여전히 포권 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설소백은 영특하게도 자신이 해야 할 것을 알아냈다.
“빙궁의 궁주로서…… 화산 분들을 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제야 백천이 자세를 풀고 허리를 쭉 폈다.
“음.”
“으음.”
한이명과 여사혼이 저도 모르게 슬쩍 앓는 소리를 흘렸다.
당당히 몸을 펴고 올곧은 시선을 던지는 백천에게선 저 청명과는 또 다른 위압과 기백이 느껴졌다.
“궁주께 청합니다.”
“잠깐!”
여사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궁주가 아니라 궁주님이겠지! 호칭을 똑바로 하시오. 그대는 화산의 이대제자에 불과하오.”
빙궁의 장로답게 위엄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백천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저는 지금 이 자리에 화산의 이대제자가 아니라, 화산의 대표로서 서 있습니다. 그러니 과한 예를 보일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체 어느 문파가 이대제자에게 자문을 대표할 권한을 준단 말이오! 더없이 오만한 처사가 아니오?!”
여사혼의 얼굴이 분노로 붉으락푸르락했지만 백천은 담담히 답했다.
“화산은 그러합니다.”
“…….”
여사혼은 할 말을 잃고 입을 닫았다.
“화산은 문파를 대표함에 있어, 그 위계로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이는 화산 장문인의 뜻이자 화산의 의지이니, 이를 무시하는 것은 화산을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심지어 화산의 제자들은 그 말이 맞단 걸 증명하듯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여사혼은 입술을 짓씹으며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으음…….”
“…….”
백천의 시선이 설소백에게로 곧게 향했다.
“궁주.”
나직한 부름에, 설소백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겨우 궁주 자리에 오른 어린 그로서는 백천이 은연중에 내뿜는 기세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당연한 일이었다. 백천은 청명과 혜연에게 가려졌을 뿐, 그들만 아니었다면 천하제일 후기지수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이가 심지어 수많은 일을 겪고, 수많은 전투를 겪으며 더욱 단단해졌으니 그 존재감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지금 북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전전대 궁주이자 귀 궁주의 선친을 시해한 설천상은 북해의 땅에 마교를 끌어들였고, 빙궁은 북해를 지배하기 위해 마교와 손을 잡았습니다.”
설소백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아무리 그가 강호를 모르고 살아왔다고는 하나, 마교가 무엇인지 모를 수는 없었다.
“마교는 북해빙궁에게 빙정을 지원받아 천마의 부활을 획책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리고 화산은 북해의 주민들이 실종된 사건 역시 이 일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사라진 일도 말인가요?”
“예.”
천천히 답하는 백천의 눈빛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교도의 발언을 들었던 이들에 따르면, 천마의 부활은 그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건 여사혼 장로 또한 들은 바가 있으니 확인할 수 있으실 겁니다.”
설소백이 슬쩍 여사혼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궁주를 향해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의 눈은 오로지 백천과 그 뒤에 있는 청명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천마가 부활하게 되면 북해는 피에 잠기게 됩니다. 저희 화산은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 궁주의 편에서 설천상의 무리와 싸웠습니다.”
백천이 두 눈에 정광을 담고 설소백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궁주께 요청드립니다. 천하에 닥칠 환란을……. 아니, 그 전에 북해에 닥칠 혈겁을 막기 위해서라도 빙궁을 이끌고 북해에 암약(暗躍)하고 있는 마교의 무리를 몰아내야 합니다. 한시가 급박한 사안입니다.”
백천이 천천히 다시 포권을 취했다.
“부디 영민한 결정을.”
설소백은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한이명과 여사혼을 번갈아 보는 시선이 내내 떨리고 있었다.
애써 외면하던 두 사람은 끝내 설소백의 재촉을 외면하지 못하고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먼저 입을 뗀 건 여사혼이었다.
“궁주께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는 설소백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현재 북해 땅에 간악한 마교 무리가 들어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설소백의 눈이 살짝 커다래졌다.
“그리고 그들이 설천상과 손을 잡고 전대 궁주를 시해했으며, 북해를 수탈한 것 역시 사실입니다.”
“하면 어찌…….”
“하지만!”
여사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금 북해는 그들과 당장 싸울 여력이 없습니다! 그들과 전쟁을 치른다면, 그 모든 피해를 북해 홀로 감당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북해의 주민들을 해치고 있다지 않습니까.”
“궁주!”
여사혼은 전에 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궁주를 보며 말했다.
“냉정하게 판단하셔야 합니다.”
“…….”
“주민들이 겪는 피해는 저 역시 안타깝고 가슴이 아픕니다. 하지만 빙궁이 몰락한다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고통받게 됩니다.”
“하, 하지만…….”
“마교는 북해 홀로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여사혼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궁주실을 울렸다.
“맞서고 싶은 마음은 저도 간절합니다. 하나 현실을 보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대응한다면, 길었던 북해빙궁의 역사가 궁주의 대에서 끝날 수도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시어 중원에서 지원군이 오기 전까지는 자중하셔야 합니다.”
둘의 대화를 듣던 백천의 눈이 슬쩍 가느스름해졌다.
“장로께서는 이미 마교도의 발언을 저희와 함께 들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천마의 부활 말인가?”
“예.”
“죽은 사람이 어찌 다시 살아나는가!”
“…….”
여사혼은 기가 막힌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살짝 누그러진 목소리로 회유하듯 말을 이었다.
“그 황당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북해의 운명을 걸 수는 없네. 자네들이 정녕 마교를 무너뜨리기를 원한다면 중원으로 가 지원을 이끌고 오게나. 그럼 북해 역시 목숨을 걸고 저들과 싸우겠네.”
백천은 빙그레 미소 짓더니 시선을 돌렸다.
“궁주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만면에 미소를 띤 백천의 얼굴을 보던 설소백이 슬쩍 한이명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 그에게는 여사혼의 말보다는 한이명의 말이 더 의미 있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잠깐 침묵하던 한이명이 입을 뗐다.
“상황이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그러더니 슬쩍 난처한 얼굴로 백천을 보았다.
“화산파의 제자 분들께서도 빙궁을 너무 몰아붙이진 마십시오. 대화와 논의를 통해 더 좋은 길을 찾아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 백천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저는 궁주께서 어찌 생각하시는지를 물었습니다.”
움찔한 설소백이 몸을 떨었다. 그의 눈빛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저는…….”
우물쭈물하며 여사혼과 한이명의 눈치를 살핀 설소백은 이내 힘없이 말했다.
“……말씀은 잘 이해했지만, 지금 북해에는 그럴 여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화산파 분들께서는 중원으로 가, 저들을 막을 이들을 이끌고 와 주시길 바랍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백천은 의외로 빙긋 웃으며 포권 했다.
“궁주께서 하신 말씀, 잘 이해했습니다. 그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깊게 읍한 뒤 몸을 바로 세운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웃음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여 장로님.”
“……말씀하시게.”
“화산파는 그만 중원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아직 부상이 낫지도 않았건만 벌써…….”
“돌아간다면 여 장로님께서 요청하신 대로 소림에 이 상황을 전달하고 마교를 막을 이들을 모아 보겠습니다.”
그 반가운 말에 여사혼은 기껍다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것 참 감사한 일이네.”
“그럼 보중하십시오.”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인상을 누그러뜨린 그가 얼른 백천을 만류했다.
“뭐가 그리 급하신가. 조금 더 몸을 추스르다 가면 좋을 것을. 그래, 중원으로 간다면 다시 오기까지 얼마나 걸리겠는가?”
“……다시라니요?”
“음?”
의외의 대답에 여사혼이 고개를 갸웃했다.
백천은 그를 보다 그만 피식 웃어 버렸다.
“화산은 다시는 북해 땅을 밟지 않습니다.”
여사혼의 얼굴에 다시 걸렸던 웃음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는 말까지 더듬으며 물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 그대들이 중원의 지원을 이끌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저희가 왜 그래야 합니까?”
“…….”
백천은 더없이 차가운 눈으로 여사혼을 노려보았다.
“제 사질이 다쳤습니다.”
“…….”
“저희와는 하등 상관없는 북해인들을 위해서 피를 흘리고, 부상을 입었습니다. 마교가 천마의 부활을 획책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북해를 버리고 중원으로 돌아가 문파들을 모으고 방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
차가운 분노에 살짝 몸을 떤 백천이 말을 이었다.
“저 미련한 놈은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야 빤하지요. 말은 급해서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북해인들이 죽어 나가는 꼴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놈은 원래 그런 놈입니다. 말과 행동의 온도가 다른.”
노기가 차오른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위압적이었다.
“이 북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제 사질이 협의를 위해 피를 흘리고 싸워 주었건만! 북해빙궁은 스스로 피를 흘리기를 거부했습니다.”
“이보시게, 도장!”
“아마 저놈은 그러고도 싸우려 들지 모릅니다. 저놈은 원래 그런 놈이니까요. 하나.”
당황한 여사혼이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백천은 으르렁대듯 말했다.
“화산 백자 배의 대제자로서, 화산 장문을 대리하는 이로서, 저는 그걸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저놈이 거부한다면 협공을 해 쓰러뜨리는 한이 있어도, 저희는 모두 중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화산은 피의 가치를 모르는 이들을 위해 피를 흘리지 않습니다.”
화산 제자들의 얼굴 역시 일제히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오늘은 날이 늦었으니, 내일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중원에 돌아가서도 저희가 해야 할 도리는 할 터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디 빙궁에 광영이 가득하길 바라겠습니다.”
말을 마친 백천이 몸을 획 돌렸다.
“가자.”
“…….”
청명은 입을 벌린 채 벙긋거렸다. 자기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라는 듯.
하지만 백천은 그런 그를 보고도 굳은 안색을 풀지 않았다.
“따라와라.”
“아니, 사숙…….”
“……나는 지금 네 사숙이지만, 동시에 장문인을 대리하는 자다. 네가 나를 사숙으로서 조금이라도 존중한다면, 그리고 장문인의 권위를 존중한다면, 잔말 말고 따라 나와.”
그제야 청명이 입을 닫았다.
남은 화산의 제자들도 차가운 눈으로 여사혼과 한이명을 일별하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무거운 침묵 속에, 그들이 대전을 빠져나가는 발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이윽고 그들이 모두 대전을 나가 버리자 멍하게 앉아 있던 설소백이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한이명을 돌아보았다.
“아버지…….”
한이명이 깊은 한숨이 대전에 나직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