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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511화 (509/1,567)

511화. 만나서 정말 반갑다. (1)

꿀꺽.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긴장으로 싸늘해진 손끝이 떨리다 못해 저릴 지경이었다. 쿵쿵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는 건 이미 포기했다.

그가 바라는 건 입을 열 때 목소리가 지나치게 떨리지 않는 것뿐이었다.

“주교시여.”

집법사자가 고개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들며 주교의 발치를 바라보았다.

주교의 발과 낡디낡은 의자다리가 보였다.

주교라는 지고한 신분을 지닌 이가 앉기에 한없이 초라한 의자였다.

천마를 배알하지 못한 자신이 감히 안락함을 누릴 수 없다는 경건한 마음이 그대로 배어났다. 평소 저 의자가 그에게 전해 주는 것은 굳건한 신심과 믿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믿음보다는 공포가 더 크게 다가온다. 스스로에게도 저리 가혹한 이에게 실패를 고해야 하는 이의 심정을 누가 이해해 줄 수 있으랴.

“무,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

주교의 발이 살짝 움직였다.

그 미세한 반응에도, 집법사자는 불에 덴 듯 즉시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하옵니다.”

“말해 보거라.”

일견 담담하게 들리지만 그 목소리는 한없이 사람을 짓누르고 들었다. 집법사자는 최대한 차분하게 보고를 올렸다.

“빙궁이 무너졌습니다.”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집법사자는 즉시 보고를 이어 갔다.

“전대 궁주를 따르던 이들이 세력을 규합하여 빙궁으로 쳐들어갔습니다. 설천상의 목이 잘렸고, 과거 축출당했던 빙궁의 장로가 전대 궁주의 자식인 설소백을 내세워 빙궁을 장악했다고 하옵니다. 바로 어제 벌어진 일입니다.”

보고를 끝낸 집법사자가 마른침을 삼켰다.

이번에도 반응이 없었다.

간단한 호응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그 무거운 침묵이 집법사자의 등을 짓눌렀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야 나직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래서…….”

“예! 주교시여.”

“빙정은 어찌되었느냐?”

집법사자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주교의 무심한 눈과 마주하는 순간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왔다.

“비, 빙정은…….”

집법사자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느라 잠깐 말을 멈추었다.

“빙정 광산을 확인해 보았지만, 광산에서는 더 이상 빙정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전에 광산에 들러 그곳에 갇혀 있던 이들을 풀어 준 이가 남은 빙정을 모조리 쓸어 간 것 같습니다.”

“…….”

침묵.

짧은 침묵이 지난 뒤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더냐?”

“……아마도 중원에서 온 이들인 모양입니다.”

“중원?”

“예. 그…… 일전에 북해로 들어왔던…….”

주교의 눈이 어둡고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더러운 중원의 주구들이 끝까지 우리를 방해하는구나.”

스윽.

가볍게 수염을 쓸어내리는 소리가 집법사자의 심장에 비수처럼 틀어박혔다.

하나 돌아온 반응은 그의 생각과는 조금 달랐다.

“설천상 따위에게 이 모든 일을 맡겨 둔 게 실수였다.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스스로 했어야 하는 것을.”

그 말을 끝으로 주교가 몸을 일으켰다.

“그놈들에게 안내해라.”

“주, 주교시여!”

당황한 집법사자가 땅에 머리를 처박았다.

“속하가 무능하여 이 일을 이리 만들었습니다.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반드시 빙정을 회수해 오겠습니다.”

“가당찮구나.”

하지만 돌아온 건 싸늘한 반응이었다.

“백 년을 기다려 온 대계다. 그 일이 틀어질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이곳에서 손가락질만 해 대고 있는다면, 내 무슨 염치로 부활하신 천마를 알현하겠느냐. 앞장서라!”

쿠웅!

집법사자가 다시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몸을 생각하십시오! 백 년의 대계를 잊지 마십시오! 주교께서 이 하찮은 일로 상하신다면 교의 염원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감히 말씀드리나이다. 저희가 어찌하여 이곳까지 찾아들었는지 잊으셔서는 안 됩니다.”

주교가 이를 악물었다.

치미는 노기와 분노를 억누르는 듯, 가슴께를 쓸어내리는 그의 손끝이 미미하게 떨렸다.

“가거라.”

“예!”

“교도들을 이끌고 가 빙정을 회수해 오너라. 저항하는 자는 그 심장을 뜯어내고 피를 뿌려 그 죄를 갚게 하라.”

“명령을 받들겠나이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벌떡 일어선 집법사자가 달려 나갔다.

결의로 가득 찬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주교는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가슴께를 움켜쥔 그의 눈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중원 놈들…….”

중원이라는 말만 들어도 속에서 천불이 치밀어 올랐다.

그날.

교의 하늘을 잃었던, 그날의 기억이 그의 머릿속에 똑똑히 남아 있었다.

전대의 주교가 전쟁 중에 순교하여 주교의 자리를 이어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는 지나치게 어렸다. 그리고 그날의 일은 어린 그가 겪기에 너무도 끔찍했다.

이미 백 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그날의 광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제 곧…….

“꺼지지 않은 교의 겁화가 너희를 태울 것이다.”

그의 눈에 광기가 휘몰아쳤다.

* * *

청명이 뚱한 눈으로 설소백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피식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의자가 사람 잡아먹겠네.”

설소백 역시 조금 어색한 얼굴로 그런 그를 마주 보았다.

궁주가 앉는 커다란 의자는 백곰 모피와 화려한 보석들로 치장되어 더없이 웅장했다. 그러다 보니 거기에 앉은 설소백의 모습은 더욱 어색해 보였다.

아직 홍안의 소년이 앉기에는 너무 과한 의자니까.

‘딱 지금 저 녀석 상황을 보는 것 같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궁주 자리에 앉게 되었고, 이건 사실 설소백에게 있어 딱히 좋은 결과는 아닐 것이다. 적어도 청명의 생각에는 말이다.

“으음.”

설소백의 곁에 선 여사혼이 더없이 기꺼운 표정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부드러움과 조심스러움이 동시에 녹아 있었다.

앞서 그들을 은인이라 부를 때의 여사혼도 예의를 잃지 않았지만, 지금의 그는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공손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기야, 왜 그렇지 않겠는가?

청명은 홀로 적진에 뛰어들어 설천상의 목을 베었고 전쟁을 끝내 버렸다. 물론 그 과정에 있어서 여사혼이 이끄는 이들도 제 몫을 해냈고, 화산의 다른 제자들도 대활약을 했지만, 청명이 없었다면 절대 이만한 희생만으로 승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승리할 수도 없었겠지.’

빙궁도들이 그의 말에 호응하지 않았을 때, 이미 승패는 갈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저 중원의 젊은 무인이 홀로 그 결과를 뒤집어 버린 것이다.

무인으로서도 존중해야 마땅했고, 빙궁도로서는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여사혼은 청명에 대한 존중과 존경을 한껏 담아 말을 건넸다.

“그래, 몸은 좀 괜찮으시오?”

“괜찮아 보이세요? 거 눈이 안 좋으신가?”

“…….”

여사혼의 존경심이 조금 깎여 나갔다.

“……부상이 큰 모양이로군.”

“그런 장로님은 멀쩡해 보이시네요.”

“…….”

여사혼의 존경심이 조금 더 깎여 나갔다.

“말세지, 말세. 먼 데서 온 놈은 칼 맞아 가면서 싸우는데, 어찌된 게 자기 집 되찾겠다고 들이받은 양반들은 하나같이 멀쩡하네? 아이고, 세상에. 뼈마디가 쑤셔서 서 있을 수가 있나.”

“……그…….”

여사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부러 그러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결과적으로 봤을 땐 저 말에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실제로 여사혼은 딱히 다친 곳도 없이 멀쩡하니까.

장력에 맞아 피멍이 든 상처를 들이밀어 볼까 하는 치졸한 생각도 들었지만, 어설프게 입을 열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 같은 느낌이라 조용히 덮어 두었다.

“그…….”

“그리고!”

아직 할 말이 끝나지 않은 듯 청명이 버럭 외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사람들이 말이야, 양심이 있어야지! 대신 싸워 주다가 부상을 입었으면 어디서 의원을 바리바리 데려와 주지는 못할망정 치료도 제 손으로 하라고 이렇게 내버려 두나? 다른 것도 아니고 치료를?”

아니, 그건 니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할 말이야 얼마든지 많았다. 하지만 여사혼은 그 어떤 것도 꺼내지 못했다. 그에게도 염치라는 것이 있으므로.

“치료를 못 해 줄 것 같으면 꼬불쳐 둔 영단이라도 좀 주고 그래야지! 그게 사람 사는 정이지! 에잉, 북해는 뭐 이리 정도 없고 팍팍하고…….”

“아, 아버지.”

투덜거림이 내내 이어지자 설소백이 살짝 질린 얼굴로 입을 뗐다. 한이명은 재빨리 어린 궁주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한 총관이라 부르셔야 합니다, 궁주님.”

“네, 한 총관님. 혹시 빙궁에 남은 여, 영단이 있나요?”

“……설천상의 처소에서 수습한 게 하나 있기는 합니다.”

“빠, 빨리 하나 드리세요.”

“…….”

“어서요.”

“수하들을 시켜 가져오라 하겠습니다.”

청명은 그제야 배부른 고양이처럼 편안해진 얼굴로 흐뭇하게 웃었다.

“아니, 뭐. 딱히 챙겨 달라는 말은 아니고 그냥 해 본 말이었는데…… 이렇게 나오시니 제가 좀 민망하네요.”

여사혼의 눈가가 경련을 일으켰다.

그냥 해 본 말?

영단 안 주면 곧장 칼 들고 달려들 기세던데?

하지만 그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화산의 제자들이 먼저 선수를 쳤다.

“크으, 우리 청명이 보소. 똘똘하기도 하지.”

“그럼, 그럼. 받을 건 받아야지. 몸 상했는데.”

“똑똑해.”

백천은 황망한 얼굴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되레 뻔뻔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었다.

“…….”

머릿수에서 밀린 백천이 힘없이 고개를 다시 돌렸다.

‘글렀어.’

다 글러 먹었다.

백천의 황망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청명은 태연한 태도로 설소백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때?”

그 뜬금없는 질문에 어린 궁주는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그 자리에 앉은 소감 말야.”

청명이 다시 한번 말해 주고야 알아들은 설소백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경황이 워낙 없어서.”

청명이 피식 웃었다.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뭔가 더 말을 하려던 그는 이내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뭐 그건 됐고. 그래서…….”

그리고 곁에 선 여사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 출발하실 거죠?”

“출발이라니? 무엇을 말인가?”

“몰라서 물으시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청명이 눈빛으로 추궁하자 여사혼이 살짝 머뭇거리다가 그제야 이해한 척 탄성을 흘렸다.

“아아. 그것 말이로군.”

“네, 마교요.”

‘마교’라는 말을 꺼내는 청명의 목소리는 어딘지 음울했다.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는 걸로 아는데, 슬슬 시작해야 하지 않겠어요?”

“으음, 그렇지. 그런데…….”

여사혼의 얼굴에 살짝 곤란한 기색이 스쳤다.

“이보게, 도장. 자네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마교는 그리 만만한 이들이 아닐세.”

“알죠.”

아주 잘 알지. 너무 잘 알아서 문제지.

“그리고 우리는 전쟁을 치르느라 전력을 소모했네. 전력을 다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와 이 상태로 맞선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세.”

“그것도 알죠.”

짧은 청명의 대답에 여사혼은 어색한 얼굴로 슬쩍 입을 뗐다.

“그래서 말인데…… 마침 자네들도 중원인이니 우리가 버티고 있는 동안 중원으로 돌아가 원군을 이끌고 오는 게 어떻겠는가? 그럼 저 마교의 악적들을 좀 더 확실하게 소탕할 수 있지 않겠는가?”

여사혼의 얼굴을 가만 보고 있던 청명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더니 설소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잘 들었어?”

“……예?”

“이게 지금 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씩 싸늘히 식어 갔다.

“북해가 고통받은 이유는 설천상 때문이 아니야. 이따위로 살았기 때문이다. 똑똑히 알아 둬라.”

궁주실에 금방이라도 모든 걸 얼려 버릴 듯한 한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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