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화. 그 목, 잘라 준다고 했지? (5)
전쟁의 끝은 언제나 허무한 법이다.
그리고 그 전쟁을 수습하는 일은 늘 간단하지 않다. 특히 소수가 다수를 제압한 경우에는 뒤처리에 골머리를 썩을 수밖에 없다.
여사혼은 우선 빙궁도들의 병장기를 빼앗았다.
물론 당연히 그 정도로 저들을 모두 제압했다고 할 수는 없다.
병기가 없다 해서 싸울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장법이나 권법을 익히는 이들에게는 크게 효용이 없는 조치니까.
하지만 여사혼의 입장에서 저들은 어차피 결국엔 한 식구가 될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과하게 몰아붙이기보다는 적당히 보듬어 주는 편이 앞으로의 빙궁을 위해 더 나은 조치일 수 있었다.
빙궁도들 역시 그런 그의 마음을 알기 때문인지, 그게 아니면 설천상이 죽은 이상 더 이상 반항은 의미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인지 딱히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명령에 따랐다.
“뭔가 거짓말 같습니다.”
“음.”
윤종의 말에 백천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다시 몰아친 눈보라는 치열했던 격전의 흔적을 모두 희게 덮어 버렸다. 북해 역시 이 전쟁의 여파가 오래가기를 원치 않는다는 듯이.
“원래는 한 식구였던 사람들이지 않더냐.”
“그렇긴 합니다만.”
“여 장로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니 알아서 잘 수습하겠지. 이 이상은 우리가 신경 쓸 일도 아니고.”
“예.”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들의 목소리에는 딱히 이렇다 할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대화는 하고 있지만, 정신은 다른 데 팔려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시선은 앞에 있는 문 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괜찮을까요?”
“뭐가?”
“부상이 꽤 커 보이던데.”
“세상에 걱정할 놈이 따로 있지. 청명이 놈을 걱정하느냐.”
“그렇긴 합니다만…….”
윤종이 말끝을 흐리며 백천을 보았다.
말은 무덤덤하게 하지만 백천의 얼굴에도 초조한 기색이 가득했다. 딱히 상처를 입지 않은 그들과는 달리 청명은 설천상과 승부를 겨루는 과정에서 몸이 크게 상했다.
백천은 말없이 손으로 자신의 입가를 주물렀다.
‘망할 놈 같으니.’
왜 그래야 했는지는 알고 있다. 머리로는 이해한다.
청명이 무리를 해서라도 단숨에 설천상의 목을 잘라 버리지 못했다면 이 전쟁은 훨씬 더 길어졌을 것이다. 그럼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숱한 피가 이 북해 땅을 적셨을 터.
서로 타협의 여지를 찾을 수 없었던 전쟁이니 누군가가 완전히 패배하기 전에는 결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청명이 놈이 이 전쟁에서 희생될 사람들의 수를 확연히 줄여 놓은 것이다. 그 방법이야 좀…… 많이 과격했지만 말이다.
도인으로서도 한 명의 무인으로서도 칭찬을 해 주어야 할 일이지만, 이상하게 백천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백천이 살짝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때 윤종이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을까요?”
“왜 자꾸 같은 걸 물어보느냐.”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윤종이 살짝 주저하며 문 쪽을 흘끗 보고는 말했다.
“……몸이야 그렇다 치고, 청명이 놈이 평소와는 너무 다르지 않았습니까. 괜히…….”
“…….”
백천이 대답 없이 꽉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달랐다라…….’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그래도 청명이다.”
“…….”
“그거면 된 것 아니더냐.”
윤종은 결국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한구석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똑같아.”
대화를 나누던 둘의 시선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벽에 등을 기대고 선 유이설이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다를 것 없어.”
“……그래.”
백천도 동의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윤종도 청명이 걱정되는 마음에 꺼낸 말이라는 걸 안다. 때문에 백천은 그를 탓하진 않았다.
“다만…… 청명이 놈의 태도는 평소와 조금 다를 수도 있으니 그러려니 하고 이해하거라. 아무래도 그런 전투를 치루고 나면 여파가 있을 테니.”
“예, 사숙.”
“우리가 그놈을…….”
더없이 진중한 눈빛으로 백천이 말을 이으려던 찰나였다.
“아아아아아악!”
문 안에서 더없이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뭐, 뭐야!”
“습격인가?”
화들짝 놀란 화산의 제자들이 기겁을 하며 벌떡 일어섰다. 대번에 문을 박차고 들어가려던 백천을 막은 건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악! 아악! 아프다고! 뭔 놈의 붕대를 그렇게까지 동여매! 상처 다 터지겠네!”
“시끄러워요! 가만히 안 있어?”
“아! 아! 팔! 팔, 팔! 아니, 거기 아프다니까! 아파!”
“어디 몸뚱이를 걸레짝으로 만들어 와선 아프고 어쩌고 입을 털어! 확 모가지를 돌려 버릴라!”
“…….”
백천은 과격한 목소리들을 듣다 한숨을 쉬었다.
“……일단 들어가 보자.”
그 말을 신호로 모두 우르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아니! 야! 이게 치료냐? 이게?”
“가만히 있어, 확 마! 정수리에 대침 박히고 싶냐!”
당소소가 붕대로 칭칭 감긴 채 엎드린 청명의 등짝에 올라타 자비 없이 침을 쑤셔 박고 있었다.
거의 고슴도치가 된 청명을 보며 백천은 흐뭇하게 웃었다.
‘변하긴 개뿔이.’
저 새끼가 변하는 걸 기대하느니 북해가 사막이 되기를 기다리는 게 빠르지.
사색이 된 청명은 내내 소리를 질렀다.
“아니, 침! 뭔 침이 사람 손바닥만 하냐고! 아무리 봐도 그거 치료용이 아니잖아, 치료용이!”
“그걸 왜 구분해요?! 쓰기 나름이지!”
“아니라는 소리네!”
온몸을 들썩대는 청명을 보다 못한 백천이 턱짓했다.
“얘들아.”
“예, 사숙!”
“저 새끼 잡아 눌러라!”
“예!”
조걸과 윤종 그리고 유이설이 달려들어 청명을 꽉 잡아 눌렀다. 청명의 저항이 더 거세졌지만 이 셋도 호락호락하게 놓아 주지 않았다.
“이 배신자들아! 내가 이 원한을 잊을 것 같아?!”
“거, 시끄럽다.”
백천이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아니, 몸에 칼이 박혀도 눈 하나 깜빡 안 하는 놈이 왜 침 보고는 이렇게 발광이냐.”
“왜?! 그게 왜 이상해? 사숙 대가리에 대침 하나 박아 줄까? 괜찮은지?”
그때 당소소가 이를 악물고 청명의 등짝을 후려쳤다.
“조용히 하라고! 조용히! 움직이지 마!”
“악! 거기 아프다고! 거기!”
그렇게 한참 날뛰던 청명은 결국 유이설이 머리를 단단히 잡고 콩콩 꿀밤을 때려 대고 나서야 겨우 진정하기 시작했다.
한숨을 푹 내쉰 백천이 당소소에게 넌지시 물었다.
“어떠냐?”
그러자 그녀는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떻긴 뭐가 어때요. 저번이랑 비슷하지. 아니, 이 양반은 왜 싸움박질만 했다 하면 몸뚱이를 이따위로 만들어 오는지 모르겠네? 몸에다 바느질하는 취미가 있으신가?!”
말하다가 또 화가 치밀었는지 당소소가 살벌한 눈으로 청명을 획 노려보았다.
천하의 청명마저 움찔할 만큼 어마어마한 기세였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혜연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온화한 미소를 보이며 거들었다.
“아미타불. 그래도 청명 시주가 무리를 해 준 덕분에 다 좋은…….”
“혜연 스님.”
“네?”
“조용히 하세요.”
“……네.”
혜연이 남의 귀에 들리지도 않게 조용히 불호를 외며 구석으로 찌그러졌다.
꾸욱.
마침내 침을 모두 수거하고 붕대를 마저 묶은 당소소가 눈을 확 찌푸리고는 청명의 등짝에서 내려왔다.
“일단 외상은 다 정리했으니까 조금만 요양하면 괜찮을 거예요. 청명 사형은 빨리 낫는 편이니까.”
“그렇지?”
“그러다 뒈지겠지, 그러다.”
“…….”
살짝 당황한 백천이 어색한 얼굴로 당소소를 만류했다.
“화, 환자니까 너무 구박하지 말자꾸나.”
“환자니까 아직 살아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어요?”
“…….”
백천이 빙그레 웃었다.
‘나는 절대 다치지 말아야지.’
뭔 의원이 적보다 더 무섭냐.
“끄으으응.”
그때 엎어져 있던 청명이 비척대며 몸을 일으켰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몸이 영…….”
“아니, 이 미친놈아! 네 나이가 몇이라고!”
“저 천벌을 받을 놈 같으니!”
“하……. 너희들이 뭘 알겠냐?”
청명이 손을 휘휘 젓고는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전신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청명을 보고 있으니 괜히 마음이 무거워지는 화산의 제자들이었다.
“괜찮으냐?”
“이까짓 거 뭐 별거라고.”
“……그런 놈이 침 좀 꽂았다고 그렇게 발악을 하셨어?”
청명이 백천을 노려보며 말했다.
“소소야. 침 하나 줘 봐라.”
“왜요? 역시 좀 모자라지? 사형 정수리에 꽂아 드려?”
“……아냐.”
시무룩해진 청명이 백천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상황은 어때?”
백천이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정리는 생각보다 깔끔하게 되어 가고 있다. 빙궁주를 따르던 이들도 별 저항 없이 여사혼 장로님의 말을 듣더라고. 우리가 보기에는 좀 신기하긴 하더라.”
“여긴 세가나 왕국에 더 가까우니까.”
만약 화산에서 반란이 일어나 누군가가 현종을 쓰러뜨리고 스스로가 장문인임을 주장한다?
‘그 새끼는 그날로 오체분시 되는 거지.’
청명이 나설 것도 없이 윤종과 유이설, 그리고 백천이 아수라로 돌변하여 미쳐 날뛸 게 분명하다.
“여 장로님이 설 소궁주의 궁주 즉위를 서두르고 있어. 빙궁은 궁주가 없으면 안 되는 곳이라고.”
“거 하여튼 참. 애 부담되게.”
청명이 혀를 쯧 하고 찼다.
“그래, 대가리가 있는 쪽이 낫기는 하겠지. 여기라면 특히.”
중원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측면도 있지만, 사람의 삶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굳이 그걸 옳다 그르다 논할 생각은 없었다.
화산의 방식 역시 남들이 보기에는 이해 못 할 일투성이일 테니까.
“최대한 빨리 정리해야 돼. 시간 끌 상황이 아니야.”
나지막하게 말한 청명이 벌떡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갑자기 왜 일어나?”
“여사혼을 만나러 가야겠어.”
“인마! 환자가…….”
“환자고 뭐고.”
백천의 말을 깔끔하게 끊어 버린 청명의 눈이 살짝 차게 빛났다.
“그런 걸 따지고 있을 상황이 아니야. 최대한 빨리 정리를 마치고 저 마교 새끼들 처리해야 돼.”
“……그건 안다만 굳이 네가 갈 필요는 없잖느냐. 우리가 가서 말을 전하마. 여 장로님도 나름 그걸 위해 바삐 움직이는 것 같더구나.”
백천의 염려 섞인 말에 청명이 피식 웃었다.
“사숙.”
“응?”
“사숙은 다 좋은……. 아니, 다 나쁜데 특별히 나쁜 게 하나 있어.”
“뭐, 인마?”
발끈하는 백천을 무시하며 청명이 말을 이었다.
“사람이라는 걸 너무 좋게 본다는 거지.”
“……무슨 의미냐?”
“보면 알게 될 거야.”
그의 입가엔 묘한 냉소가 걸려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이는 뒤를 돌아볼 줄 모르지만, 가진 게 생긴 이들은 계속 돌아보며 주저하기 마련이니까.”
웃으며 하는 말이지만, 이상하게 한기가 느껴졌다.
아니, 심지어는 미세하게 씁쓸함마저 묻어났다.
모두가 그 분위기에 눌려 그를 막아 세우지 못했다. 그저 나가는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걸음을 떼던 청명이 우뚝 멈추었다. 그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아, 그리고.”
“응?”
청명은 말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기다림에 지친 조걸이 막 한마디를 하려던 찰나, 청명의 입에서 조금 낯선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번에 다들 잘했어.”
“…….”
화산의 제자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미련 없이 휘적휘적 사라져 버렸다.
“…….”
조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뭐 하냐?”
“아니. 해가 서쪽에서 떴는지 확인 좀 해 보려고.”
“…….”
“그게 아니면, 소소야. 혹시 쟤 약 잘못 먹였나?”
“약은 안 먹었어요. 잘못됐으면 침을 잘못 찔렀겠지…….”
그때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리고 있던 유이설이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꿀밤이 셌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에.
저 청명의 입에서 칭찬이라는 게 나오다니.
심지어 천하비무대회에서 명문의 제자들 이겼을 때도 타박을 하고, 만인방의 대주를 쓰러뜨렸을 때도 잔소리를 퍼붓던 사람이 청명 아닌가?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오네.”
“그러게 말입니다, 사형.”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백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을 돌렸다.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따라가자.”
“예, 사숙.”
먼저 앞서가는 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스며들었다.